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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제63호 /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鐵原 到彼岸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 1962년 12월 20일 지정 / 강원 출원군 동송읍 도피동길 23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문화재청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강원도 철원군 화개산에 자리잡은 도피안사는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도선대사가 창건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머리에는 육계가 있으나 뚜렷하지 않고 불상의 계란 모양의 단정한 얼굴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높고 안정된 이중 대좌(二重臺座) 위에 앉아 있으며, 불상의 높이는 91cm이다. 불상 뒷면에는 ‘함통6년(8백65년, 신라 경문왕5년) 1천5백명이 함께 연을 맺어 조성했다’ 는 명문(銘文)이 있다.
철불은 금동불이나 석불에 비해 남아있는 것이 드물다. 쉽게 산화되는 데다가 신라말~고려초의 비교적 짧은 기간동안만 유행했기 때문이다. 철불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9세기는 중국에서 선종이 들어오며 불교가 대중화되고 지방호족들이 새 시대를 꿈꾸며 세력을 쌓아가던 시기였다.
도피안사의 철조불상과 사찰 창건설화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통일신라시대에 도선국사가 지금의 대적광전에 봉안된 철조불상을 철원 수정산의 안양사에 모시기 위해 승려들과 함께 불상을 이운하던 중이었다.
당시 철조불상을 실은 암소를 위해 먼 길을 재촉하면서도 안양사를 향한 지름길을 찾던 중, 현재의 도피안사 절터인 철원읍 화지리 암소고개 마루에 도착하게 되었다.
해는 벌써 서산에 걸려 길을 찾지 못하고 승려들과 암소 역시 지쳐 있던 중이라 고갯마루에서 잠시 쉬는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희한하게도 암소 등에 실렸던 불상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국사를 비롯하여 승려들은 몹시 당황하여 철불을 찾아 헤맸으나 불상은 보이지 않고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낙담하여 돌아온 후 한 스님이 지금의 동송읍 관우리의 도피안사 터에 이르렀는데, 그 불상이 이곳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에 도선국사는 이곳에 도피안사를 창건하고 이 절을 800의 비보사찰(裨補寺刹) 중 하나로 삼게 되었다.
비로자나불에 대한 설명은 다음의 글에서…
*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 국보 제26호 : http://yellow.kr/blog/?p=142
철불이 모셔진 대적광전 안에는 후불탱화와 지장탱화·신중탱화 등이 있다.
보존처리를 하기 전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두꺼운 금박을 온 몸에 두르고 있었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등 뒤에는 ’香徒佛銘文幷序(향도불명문병서)’라는 발원문이 주조되어 있다. 대체로 내용은 이렇다. “석가모니불이 열반하신 지 1806년이 지난 신라의 865년에 향도 1500여명이 금석(金石)과 같은 견고한 뜻을 가지고 신라국 한주(漢州)에 있는 철원군 도피안사에 금용(金容, 황금빛 나는 붓다의 모습)을 주조하여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불상의 조성 발원문에서 석가모니불의 열반 시기가 언급되면, 조성의 목적은 거의 말법(末法) 사상과 연관된다. 불교에서는 붓다의 탄생부터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의 시기로 나눈다. 정법 시기는 석가모니불의 탄생부터 500년 혹은 1000년 동안을 말하며, 붓다의 가르침을 잘 따라서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많은 때다. 상법 시기는 정법 시기가 끝난 뒤 1000년간으로, 수행하는 사람은 많으나 깨달음을 이루는 사람은 드문 때다. 그리고 말법 시기는 상법 시기가 끝난 후부터 시작되며, 이 때는 수행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불법이 쇠퇴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말법사상이 매우 유행하였는데, 스스로의 힘으로 깨닫기 어려우므로 아미타불의 도움을 받아서 쉽게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강원도 철원에 있는 도피안사는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기 40여 년 전인 신라 경문왕 5년(865년)에 지은 절이다. 이 절을 통해 당시 혼란한 사회를 계도할 미륵 정토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처럼 철원 지역은 미륵 정토 사상이 유행했던 곳인데, 궁예의 미륵 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높이 4.1m의 화강암 재료로 된 보물 제223호인 삼층석탑과 철조비로자나불이 있는 대적광전
도피안사 철불의 영험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1960년대 후반 무렵 이곳 민통선 안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은 몹시 가난한 이들이어서, 초등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탄피를 주워다 파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그 중 천씨(千氏) 성을 가진 당시 13세의 초등학생이 끼어 있었는데, 이 소년은 늘 탄피를 줍기 위해 오가면서 도피안사 부처님께 절을 하고 다녔다. 그저 배만 고프지 않게 해주십사 빌면서….
그러던 어느 날 그만 부처님께 절을 하다가 졸음이 와서 잠이 들고 말았다. 당시는 군법당인지라 당번 군법사는 소년이 법당에 들어간 뒤 나오지 않아 이상히 여겨 가보니 자고 있기에 깨워서 보내었다.
잠이 덜 깬 소년은 잠결에 일행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탄피를 주우러 다니는 길로 달려가다가 그만 나무등걸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무릎을 털며 일어나려 하는데 무슨 쇠끈이 보여서 그것을 당겨 보니 누런 훈장이 하나 달려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부모와 사람들에게 보였는데 알고보니 엄청난 양의 순금 훈장이었다.
이에 소년의 집은 그것을 처분한 돈으로 땅을 여러 마지기 사서 밥은 굶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천진한 소년의 기원을 도피안사 부처님께서 들어주셨던 것이라 여기고 있다.
비슷한 시기인 858년(헌안왕 2년)에 만들어진 국보 제117호인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비교해 보자.
<관련자료 및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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