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메르 문명 이전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선사 시대에서 초기 문명으로 이행하는 단계로, 중요한 문화적,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이 시기는 주로 우바이드 시기(Ubaid period), 우루크 시기(Uruk period), 젬데트 나스르 시기(Jemdet Nasr Period) 단계로 구분된다. 이러한 시기들은 수메르 문명이 형성될 기반을 마련했으며, 각각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우바이드 시기 (Ubaid culture, 기원전 5500년경~기원전 3700년경)
우바이드(Ubaid) 시기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초기 단계 중 하나로, 기원전 5500년경부터 기원전 3700년경까지 지속된 시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수메르인들(Sumerians)이 주도한 문화로 보기에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우바이드 문화는 수메르 문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전의 선사 시대 문화로, 수메르인들이 등장하기 이전에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서 존재했던 독특한 문화적, 사회적 체계를 나타낸다.
# 8.2 ka Event의 영향
8.2 ka event, 즉 8200년 전 기후급변 사건(기원전 약 6200년경)과 우바이드 초시기(Ubaid Early Period, 약 기원전 5500년경부터 시작)는 시기적으로 어느 정도 겹치며, 둘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8.2 ka event는 급격한 기후 변화 사건으로, 기온이 약 1~2℃ 하락하고 강수량이 감소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건조한 환경이 조성된 시기이다. 이와 같은 기후 변화는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서남아시아 지역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기후 변화로 인해 기존 농업 시스템이 불안정해지고, 수렵과 채집 중심의 생활에서 농업 중심으로의 전환이 가속화되었다.
- 새로운 농업 기술, 특히 관개 농업을 통한 물 관리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 이로 인해 일부 집단이 비옥한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새로운 정착지를 개척했을 가능성이 높다.
※ 관련글: http://yellow.kr/blog/?p=1129
# 우바이드 문화의 특징
1. 정착 생활: 우바이드인들은 최초로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대규모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초기 농업과 관개 시스템을 통해 농업 생산을 확대했으며, 안정된 공동체를 형성했다.
2. 도자기: 우바이드 도자기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하며, 나중에 등장하는 도자기 양식에 영향을 미쳤다.
3. 건축: 흙벽돌로 지어진 대규모 건물과 사원의 초기 형태가 등장했다. 이는 이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중요한 종교적, 사회적 중심지가 되는 사원의 전신으로 보인다.
4. 사회적 구조: 계층적 사회의 초기 징후가 나타나며, 권력 구조가 점차 복잡해졌다.
# 우루크 시기 (Uruk Period, 기원전 4000~기원전 3100년경)
우루크 시기는 수메르 문명의 초기 형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중요한 시기로 여겨진다. 우루크 시기는 도시화, 문자 발명, 사회적 계층화, 종교적 중심지 형성 등 수메르 문명의 근본적인 특징들이 나타난 시기이다. 이 시기가 수메르 문명의 일부로 간주되는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증거들 때문이다.
1. 문자 발명과 기술적 도약
우루크 시기에 수메르 문명에서 최초로 기록된 문자인 쐐기문자(cuneiform)가 등장한다. 또한 수레, 바퀴, 금속 도구 같은 기술이 발전했다.
- 초기 문자들은 주로 경제적인 거래를 기록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점토판에 새겨졌다.
- 이 문자는 이후 수메르인들이 사용한 언어와 문화적 기록으로 발전한다. 수메르어는 비계통 언어로,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다양한 기록에서 이 언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은 수메르인과 우루크 문화의 연결성을 입증한다.
2. 도시와 사회적 조직
우루크 시기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로 도시(Uruk)가 형성된 시기이다.
- 우루크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로, 중앙집권적 관리 체계와 계층적인 사회 구조를 갖춘 첫 사례로 여겨진다.
- 이러한 도시 구조는 이후 수메르 도시 국가(예: 우르, 라가시, 에리두)로 발전하였으며, 이는 수메르 문명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3. 건축 양식
우루크 시기의 건축물은 수메르 문명의 특징과 강하게 연관됩니다.
- 특히 지구라트(Ziggurat)의 초기 형태가 우루크에서 발견된다. 이는 메소포타미아 종교와 수메르 문명의 상징적 건축물로, 나중에 더 발전된 형태로 이어진다.
- “아누 사원(Anu Ziggurat)”과 “백색 사원(White Temple)”은 당시 우루크에서 지어진 대표적인 종교 건축물이다. 이는 수메르 문명의 종교적 중심지로 간주된다.
4. 경제와 교역
우루크 시기에는 경제적 교역과 관개 농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 이 시기의 기록과 유물은 메소포타미아 남부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예: 엘람, 터키, 심지어 인더스 문명 초기 지역)과의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 이러한 경제적 활동은 수메르 문명 초기의 특징으로 이어진다.
5. 수메르 신화와 문화적 연속성
수메르 문명의 신화와 전통에서 우루크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예를 들어, 서사시 길가메시는 우루크의 전설적인 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 길가메시 서사시는 수메르 문화와 신앙의 상징으로, 우루크와 수메르 문명 간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준다.
6. 고고학적 유물
우루크 시기 유물에서 발견된 도자기, 도장(Seal), 도면 등은 수메르 문화의 기초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 특히 원통형 도장(Cylinder Seal)은 나중 수메르 문명에서도 계속 사용되었으며, 이 도장은 행정 및 사법 체계의 발전을 보여준다.
# 젬데트 나스르 시기(Jemdet Nasr Period, 기원전 약 3100~2900년경)
젬데트 나스르 시기(Jemdet Nasr Period)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사에서 우루크 시기(Uruk Period)와 초기 왕조 시기(Early Dynastic Period) 사이의 짧은 과도기로 구분된다. 이 시기가 독립된 시기로 구분되는 이유는 우루크 시기 말기의 특징과 초기 왕조 시기 초반의 특징을 모두 공유하면서도, 고유한 문화적 · 기술적 발전을 보여주는 과도기적 성격 때문이다.
# 수메르 문명 이전 시기의 중요성
수메르 문명 이전의 메소포타미아는 도시화, 사회 계층화, 기술 발전의 과정을 거치며 문명의 탄생을 준비했다.
이 시기의 주요 발전은 다음과 같다:
- 농업과 관개 기술의 도입.
- 정착지에서 도시로의 이행.
- 계층적 사회 구조와 정치 조직의 형성.
- 종교와 행정 중심지로서 사원의 역할 확대.
- 교역과 기술적 혁신.
이 모든 요소들이 결합되어 초기 왕조 시기의 수메르 문명으로 이어졌으며, 이후 메소포타미아가 고대 세계의 중심지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수메르인, 셈족 등
수메르 문명 이전의 시기, 메소포타미아 남부에는 수메르인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집단들이 정착 생활을 시작했고, 북부와 주변 지역에는 셈족 계열 집단과 기타 다양한 민족들이 존재하며 이 지역에 독특한 문화적 다원성을 제공했다. 수메르 문명의 형성 과정은 이러한 집단 간의 교류와 상호작용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신세계사 1
– 쑨룽지 / 이유진 옮김 / 흐름출판 / 2020.01.20(원서: 2015)
지금으로부터 8200년 전, 지구 전체가 또 한 차례의 전면적인 기온 하강에 직면했다. 비록 영거 드라이아스기만큼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나투프 · 예리코 같은 신석기혁명 선봉 지역의 농경이 한 단계 더 발전하는 것을 좌절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결국 이들 지역은, 대규모 관개를 실시한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 삼각주와 나일강 유역에 점차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
여기에서는 오래된 논의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해보려 한다. 제2장에 따르면, 인류 문명의 최초 돌파 지역은 고대 근동이지만 그 단초를 연 곳은 결코 대하 충적평야가 아니라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을 둘러싼 충적평야와 아라비아사막 북쪽 가장자리의 ‘산측 부메랑 지대’, 특히 이스라엘-요르단고지였다. 이 산측 지대에서 신석기혁명의 발걸음은 이미 선先도시 단계에 도달했다. 하지만 기후가 나날이 건조해지면서 이 지역의 고대인은 결국 농경과 목축 중에서 목축을 발전시켰다. 선도시 단계가 출현한 지 3000년 뒤에야 최초의 도시 문명이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과 나일강 유역에서 탄생했다. 이 지역에서는 농경과 목축 중에서 필연적으로 농경이 중심 지위를 차지했다. 따라서 고대 근동에서는 농경 문명과 유목-방목 지대 간의 상호 영향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환아라비아 유목-방목 복합 지대가 애초에 어떠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후에 이 지대는 셈어족 집단이 활동하는 장소가 되었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문명은 수메르인이 창조했을 것이다. 이를 계승한 것은 바로 이곳을 차지한 셈족으로, 세월이 지나 오늘날의 이라크로 이어졌고 아랍 국가의 일원이 되었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 고대사를 다루면서 만약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충적평야만 언급한다면, 달의 밝은 부분만 볼 수 있을 뿐 그 전모는 볼 도리가 없다.
수메르인이 최초로 기초를 닦은 이들일까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삼각주의 최초 취락인 우바이드는 유프라테스 하구에 자리했는데, 기원전 6500년에 이미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고 농경 단계로 진입한 것은 기원전 5400년이다. 기원전 4000년에 이르러서,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문명 대변인으로서의 우바이드의 지위는 우루크(Uruk)에게 빼앗기고 말았지만 도시로서의 우바이드는 지속되었다. 이 긴 시간 속에서 우바이드에서 진행된, 유토기 신석기시대에서 금석병용 시대로의 발전을 비롯해 바퀴의 발명, 계급 분화의 명료화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우바이드 제1기는 에리두(Eridu, 기원전 5400~기원전 4700)라고도 하는데, 북방 사마라 문화의 흔적을 보여준다. 오늘날 이라크 최남단에 자리한 에리두는 강우량 127밀리리터 선 이남이다. 인류가 처음으로 매우 건조한 토지에서 농경을 하게 되면서 의지한 것은 지하수다. 이들 사마라 농부는 북방의 강력한 집단에 의해 강제로 에리두로 옮겨왔을 것이다. 제2장에서 서술했듯이, 우바이드 제2기(기원전 4800~기원전 4500)에 이미 관개 수로가 출현했다. 사마라와 에리두 간의 교량은 초가마미 유적지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출현한 인공 관개 수로 시스템이 우바이드 제2기에 채택되었다. 우바이드 제2기의 관개 수로는 규모가 매우 방대하며, 대량의 노동력과 중앙집권적인 관리가 필요했다.
우바이드 제3기~제4기(기원전 4500~기원전 4000)에 이르러서는 수백년의 경작 결과, 관개농업의 우세가 이미 두드러졌으며 인구가 급증하고 도시화가 심화되었다. 비록 에리두 주변은 여전히 대형 촌락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말이다. 우바이드 양식(할라프 유적지에 존재)은 북방의 강한 세력이었던 할라프 문화를 대신하여 최종적으로는 페르시아만 아라비아반도 해안 지대부터 지중해 동부 연안에 이르는 무역의 중추가 되었다.
오늘날 여러 책에서는 대부분 ‘우바이드’를 문화기文化期로 칭하고 ‘에리두’를 도시 이름으로 칭하는데, 여기서도 이를 따르기로 한다. 에리두인이 수메르인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문헌에 나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에리두에 가장 먼저 문명을 가져온 왕은 아다파(Adapa)로, 그는 해상의 딜문(오늘날 페르시아만의 바레인)에서 왔다. 또 어떤 신화에서는 아다파가 영생을 획득할 기회를 놓쳤다고 하는데, 이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담의 원형인 듯하다. 수메르학의 태두 레오나드 울리(Leonard Woolley, 1880~1960)는 수메르인이 바다에서 왔으며,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원주민은 셈족으로 바로 아카드인이라고 본다. 최근의 관점에 따르면 에리두는 세 가지 생태 시스템이 한데 모인 곳으로, 세 시스템은 모두 사막에서 담수를 얻었다. 첫째는 북방 사마라에서 비롯된 노동 밀집형 관개농업으로, 수로를 만들고 벽돌집에 거주한 것이 특징이다. 둘째는 오늘날 페르시아만 아라비아 연안 지대의 어렵 문화다. 갈대집에 거주했던 이들은 아마도 수메르인일 것이다. 셋째는 장막에서 거주하며 산양과 면양을 기르던 셈족 목축민으로, 환아라비아 유목-방목 복합 지대의 쐐기를 박은 이들이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문명의 신화에 따르면, 우루크 여신 이난나(Inanna)는 에리두의 주신 엔키(Enki)에게 가서 문명을 빌린다. 엔키는 이난나에게 문명을 빌려준 뒤 후회하면서 되받으려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이 이야기는 에리두가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문명의 대변인 지위를 우루크에게 양도했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우루크는 아람(Aram)어에서 에레크(Erech)로 발음되는데, 아랍어에서는 이라크다. 우루크는 금석병용 시대부터 초기 청동기시대까지(기원전 4500~기원전 3100) 존재했다. 이 도시는 최초에 두 개의 우바이드 소小취락이 병합해 이루어졌다. 가장 아래층인 우루크 제18~제14층은 우루크기期가 아닌 우바이드기에 속한다. 우루크 ‘에안나(Eanna)’ 신역神域의 제4a층에서는 최초의 설형문자 점토판이 출토되었는데, 아마도 인류 최초의 문자일 것이다. 에안나는 여신 이난나를 경배하기 위한 신전군이다. 이보다 더 오래된 것은 거대한 지구라트(ziggurat)인 아누(Anu) 지구라트로, 천신 아누에게 바쳐진 것이다. 지구라트 위에는 ‘하얀 신전’이라는 웅장한 신전이 안치되어 있다.
우루크의 중요성은 다음 몇 가지 예에서 알 수 있다. 아누는 수메르 시기에 신족神族의 아버지였는데, 이난나는 비록 그의 딸이지만 천후天后의 지위를 지녔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서사시 《길가메시》의 주인공 길가메시는 전설 속의 우루크왕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우루크기가 이미 수메르 문명이었음을 직접적으로 증명해줄 수는 없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충적평야의 초기 청동기시대는 젬데트 나스르(Jemdet Nasr)기(기원전 3100~기원전 2900)로 규정된다. 이 간략한 시기는 우루크 문화가 지방화된 것으로, 선先왕조 시대에서 왕조 시대로의 과도기로 규정된다. 시공간적으로 모두 과도 단계였던 것이다. 젬데트 나스르기는 나름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독자적인 토기 양식을 지닌 이 문화는 우루크 에안나 신역의 설형문자를 추상적 방향으로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훗날 쐐기 형태로 잘 알려진 문자를 만들었다. 이 설형문자는 아직 해독되지 않았지만 수메르 문자일 가능성이 우루크 문자일 가능성보다 훨씬 크다.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 헤르만파르칭거 / 나유신 역 / 글항아리 / 2020-03-20 (원서: 2016)
이러한 새로운 변화는 도래하는 시대인 기원전 5500년에서 기원전 3800년 사이의 우바이드 시기에 더욱 발달된 모습을 보여준다. 토기는 계속해서 여러 색으로 칠해졌고, 무늬가 눈에 띄게 감소하긴 했지만 여전히 여러 모양으로 장식되었다. 토기들은 회전할 수 있는 작업대를 이용해 제작되었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돌림판(물레)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기술 발전을 통해 토기 제작 과정은 크게 가속화될 수 있었고 더 표준화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주요한 대규모 거주지인 에리두, 우르, 텔 엘 우바이드에서는 새로운 건물 형태가 등장했다. 중앙에 넓은 공간을 가진 건물이 그것이다. 중앙 공간은 이 가옥의 중심 기능을 하며 여기에서부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방들로 가는 통로가 나 있다.
점점 더 분화되어가는 건물 형태는 사회적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숭배 의식을 위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중앙 건물과 공동 건물은 사원이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할라프 시기에 최초로 나타난 것으로 확인된 주거지 간의 서열은 우바이드 문화 시대에 더욱 강화된다. 테페 가브라, 에리두, 또는 우르에는 중심에 사원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대형 건물이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 지역들이 그 근방에서 중심이 되는 곳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유프라테스강 하류에 위치한 에리두는 물의 신 엔키를 숭배하는 지역이었고, 바빌론의 영웅 서사시에서는 에리두가 지구의 최초 도시라고 일컬어진다. 이 지역의 두터운 주거지 지층에서는 기원전 5000년대에 지어진 웅대한 건축물이 발굴되면서 이러한 전승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가 되고 있다.
위계화 경향은 점점 강화되어 더 이상 하나의 주거지나 주거 단위에만 해당되는 현상이 아니게 되었다. 위계화는 전체 지역을 새롭고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재조직했다. 바로 여기서 엘리트가 지도하면서 지역 전체에 위력을 발휘하는 정치 조직체의 시초를 엿볼 수 있다. 우바이드 시대에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페르시아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통일된 문화가 처음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잘 조직된 범지역 무역망이 존재했다. 이 무역망에는 메소포타미아 우바이드 문화의 중심지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남쪽으로는 우바이드 토기가 항로를 따라 바레인과 카타르까지 진출했고, 동쪽으로는 이란의 고원 지대, 북쪽으로는 아나톨리아 동부에 위치한 유푸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상원에까지 다다랐다. 우바이드 문화가 인구 이동은 전혀 없이 무역 교류를 통해서만 메소포타미아 지역 너머로까지 확산되었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이에 더해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문화 발전은 사실상 우바이드 시대부터 파악할 수 있다는 점 또한 덧붙여야겠다. 그 이상의 더 오래된 주거 지대의 흔적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실어다 놓은 수 미터의 침전물에 의해 퇴적층으로 뒤덮여버렸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문명의 발달은 기원전 6000년대 하수나 문화 및 사마라 문화와 더불어 시작되어 기원전 5000년대 전반기 할라프 문화에서 심화되었고, 기원전 3000년 초반까지의 우바이드 문화에서 새로운 차원에 도달했다. 이후 이 문명은 수준 높은 문화적 특징을 드러냈던 우루크 시대에서 정점을 찍는다. 우루크 시기에는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사람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던 매우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진다. 고속으로 회전할 수 있는 돌림판(물레)의 발견으로 표준화된 토기를 최초로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규모는 거의 토기 산업이라 할 만했다. 이렇게 토기는 대량 생산품이 되었다. 우루크 시대 용기는 단색으로 거의 장식이 없었다. 이런 사실은 당시 토기의 의미가 변했음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기원전 3000년대에는 기후가 더 건조해졌고 점점 확대되던 도시 중심지에서 인구가 증가했다. 이런 상황이 농업을 집중화하고 수확을 증대시킬 방안을 강구하게 만들었다. 이는 대규모로 조직된 관개 수로 건설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우바이드 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주거지 서열화는 이 시기에 더욱 강화되었다.
발전이 계속됨에 따라 방어 시설을 갖춘 잘 계획된 도시들이 형성되었다. 이들 도시는 행정, 무역, 지배의 중심지였으며, 분업화된 직업 군인도 존재했다. 지도층과 지배 엘리트의 공고화라는 특징도 나타난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은 메소포타미아 도시들 중심지에 위치한 건축에도 반영되고 있다. 집회용 대형 건물, 웅대한 사원, 장식이 인상적인 궁전이 지어졌다. 또한 롬 흙으로 다진 땅 위에 세워진 건축물에는 메소포타미아 지구라트(층층으로 쌓여 있는 신전 탑)의 고전적 형태가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인류의 가장 오래된 도시로 간주되는 주거지가 처음 나타난 것은 우루크 시대였다.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도시적 삶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는 전례 없는 인구 증가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 시기는 제도화된 성직자 계급과 지배 엘리트층이라는 새로운 형태가 처음 형성된 때이다. 다시 말해, 종교 우위의 왕권이 이 시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지배층은 더 이상 식량 생산이라는 지속적인 노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점이 바로 우루크 시기가 그 전 시대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노동 분업은 상시화되었고 이로 인한 사회 분화는 도시 계획 형태 속에서 드러난다. 즉, 관공서 건물이 있는 공적 중심지와 거주 구역 및 수공업 지역이 분화되게 된 것이다. 우루크 시대의 도시들은 각기 일정한 기능을 가지며 그 지역의 중심지 역활을 했다. 또한 이 도시들을 중심으로 원거리 무역이 조직되었다. 카라반의 무역로는 그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멀리 있는 지역까지 뻗어나갔고,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지중해까지 진출했다. 이런 모든 변화는 새로운 행정 수단의 도입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점토 도장 및 원통 도장에서 시작한 행정 관리 수단은 결국 기원전 3000년대 후반 문자의 발명으로까지 이어졌다. 숭배 의식과 종교는 점차 서로 독립된 영역으로 나뉘었고 예술은 높은 수준의 회화와 대형 조각상으로 우바이드 시대에는 달성하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이런 발전의 싹이 처음 튼 곳이 우루크였다. 하지만 이 도시에 비견될 만한 다른 중심지도 존재했다. 티그리스강 유역의 테페 가브라, 게지라 평원의 텔 브라크, 유프라테스강 중류의 하부바 카비라, 아나톨리아 남부의 하지네비가 그런 곳이다. 우루크 시대 후기에 이르면 메소포타미아와 인근 지역은 고등 문명을 향한 문턱을 확실하게 넘어서게 된다.
블랙 아테나
– 마틴 버낼 / 오흥식 역 / 소나무 / 2006-01-10 (원서: 1987)
기원전 7000~5000년경에 사하라에 오랜 건조기가 이어지면서 서부와 동부, 그리고 수단에서 이집트 나일 계곡으로 이동이 일어났다. 소수 의견이지만, 아라비아 사바나에서 남부 메소포타미아로 유사한 이주가 있었다는 주장에 나 역시 동의한다. 대다수 학자는 이 지역에 처음 거주한 사람이 수메르인 혹은 원元수메르인이며, 기원전 3000~2000년에 이르면 사막에서 셈족이 침입했다고 믿는다. 나는 기원전 6000~5000년에 셈어가 소위 우바이드 토기와 함께 아시리아와 시리아 지역(대략 오늘날 셈어를 사용하는 서남아시아)에 퍼져나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수메르인이 북동쪽에서 메소포타미아에 도착한 것은 기원전 4000~3000년 초라고 본다. 우루크에서 발굴한 기원전 3000년경의 초기 원문을 통해 셈어와 수메르어를 함께 쓰는 관습이 이미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소위 ‘문명’이 처음 결집했다는 점에는 거의 이론이 없다. 문자를 제외한 다른 문명의 요소(도시, 관개 농업, 금속 가공, 석조 건축, 수레바퀴와 토기 물레)는 그 이전이나 다른 곳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문자가 덧붙여지면서 거대한 경제적 · 정치적 축적이 이루어짐에 따라 문명이 태동할 수 있었다.
……
문명은 기원전 4000~3000년에 메소포타미아로부터 거대한 속도로 퍼져 나갔다. 메소포타미아가 설형 문자를 체계화하기 전에 이미 동부 지중해의 여러 지역과 인도에서 문자에 대한 관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상형 문자는 기원전 4000~3000년의 3/4분기에 이르러 나일 계곡에서 발전했다. 그리고 증거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히타이트 상형 문자가 형성된 시기는 질서정연한 설형 문자를 갖춘 어엿한 수메르-셈족 문화가 기원전 3000~2000년 초반 시리아에 나타나기 전이었을 것이다. 또한 레반트 · 키프로스 · 아나톨리아 음절 문자의 원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관련 그림>
<참고 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Ubaid_period
https://en.wikipedia.org/wiki/Uruk_period
https://en.wikipedia.org/wiki/Jemdet_Nasr_period
https://en.wikipedia.org/wiki/8.2-kiloyear_ev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