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00년 전 기후변화 사건(5.9 ka event, 5.9 천년 사건, 기원전 3900년경)은 홀로세 기간 동안 발생한 주요한 기후 변화 중 하나로, 사하라 지역의 급격한 건조화와 관련이 있다. 이 사건은 사하라 사막의 형성과 아프리카 습윤기(African Humid Period, AHP)의 종결을 초래하여, 당시 인간 사회의 생활 방식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하라 지역의 기후 변화:
아프리카 습윤기(AHP):
약 14,800년 전부터 시작된 이 기간 동안 사하라 지역은 현재와 달리 습윤한 기후를 보였으며, 호수와 강이 존재하고 식생이 풍부했다.
5.9 천 년 전 사건(5.9 ka event):
이 시기에 사하라 지역은 급격한 건조화를 겪으며, 기존의 습윤 환경이 사막화로 전환되었다. 이는 몬순 패턴의 변화와 세차운동에 따른 태양 복사량의 변동 등 복합적인 요인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문명에 미친 영향:
사하라의 건조화는 인근 지역의 인간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지역에서의 인구 이동과 농업의 발달, 도시화의 촉진 등과 연관이 있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나일강 유역의 고대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형성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1. 메소포타미아와 수메르 문명
-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농업의 발달과 함께 도시 국가(예: 우르, 우루크)가 형성되었다. 이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주변의 관개 농업 시스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5.9 ka 사건 이후 이 지역의 인구가 밀집하며 초기 문명이 급속히 발전했다.
- 5.9 ka 사건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기후 악화를 초래하며, 우바이드 후기의 농경 사회에서 우루크 초기의 도시 중심 문명으로의 전환을 촉진했다.
2. 사하라와 나일강 문명
- 아프리카 습윤기가 종료되면서 사하라 지역의 초원 환경이 건조화되었고, 사람들은 나일강 유역으로 이동했다.
- 이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형성을 촉진했으며, 나일강의 계절적 범람에 의존한 농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3. 인더스 문명
- 인더스 강 유역에서는 농업과 도시화가 촉진되며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와 같은 도시가 형성되었다.
- 강수량 감소와 기후 변화가 사람들이 강 유역에 모이는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비판적인 시각
모든 연구자들이 5.9 ka 사건이 고대 문명 탄생에 결정적이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음과 같은 제한점이 있다:
- 다양한 지역적 반응: 5.9 ka 사건의 영향은 지역마다 달랐다. 일부 지역에서는 문명이 발달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사회가 붕괴하거나 이동이 발생했다.
- 다른 요인들: 인구 증가, 기술 발달, 문화적 교류 등 다양한 요인이 문명의 발전에 기여했다. 5.9 ka 사건은 이러한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8.2 ka 사건 vs. 5.9 ka 사건
특성 | 8.2 ka 사건 | 5.9 ka 사건 |
---|---|---|
시기 | 약 8,200년 전 | 약 5,900년 전 |
주요 원인 | 북대서양 빙하 호수 방출로 인한 한랭화 | 몬순 약화 및 자연 기후 변화 |
사하라의 상태 | 습윤기 지속, 일시적 건조화 | 아프리카 습윤기의 종료, 사막화 시작 |
영향 지속 기간 | 100~200년 | 수천 년 지속 |
인간 활동의 변화 | 지역적 이주와 농업 영향 제한적 | 대규모 이주, 농업 및 도시화 촉진 |
관련 글
홀로세 기후급변 사건: http://yellow.kr/holoceneRCC.jsp
8200년 전 기후급변 사건: http://yellow.kr/blog/?p=1129
메소포타미아 문명 – 우바이드우루크젬데트 나스르: http://yellow.kr/blog/?p=6973
African humid period
– African humid period – Wikipedia
아프리카 습윤기(AHP)는 약 6,000~5,000년 전에 끝났으며, 일반적으로 5,500년 전을 종료 시점으로 사용합니다. 이 시기 이후 식생이 감소하면서 사하라 지역은 황폐화되었고, 모래로 뒤덮였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바람에 의한 침식이 증가했으며, 사막화된 지역과 보델레 분지(Bodélé Basin)와 같은 말라버린 호수에서 먼지 배출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특히 보델레 분지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큰 먼지 공급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에 호수들이 말라버리고, 습한 기후에서 자라던 식물들이 사라졌으며, 정착 생활을 하던 인류 집단은 더 이동성이 높은 문화로 대체되었습니다. “녹색 사하라”에서 현재의 건조한 사하라로 변화한 이 과도기는 북아프리카에서 홀로세(현세) 동안 발생한 가장 큰 환경 변화로 간주됩니다. 현재 이 지역에서는 거의 강수량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습윤기의 종료뿐만 아니라 그 시작 또한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일종의 “기후 위기”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이 건조화 현상은 아조레스(Azores) 제도, 카나리아(Canary) 제도, 이란 남동부까지 확장되었으며, 카보베르데(Cape Verde) 제도의 상니콜라우(São Nicolau) 섬에서도 기후 변화의 증거가 발견되었습니다.
알프스 지역의 피오라 진동(Piora Oscillation) 한랭기는 아프리카 습윤기의 종료 시기와 일치합니다. 약 5,600~5,000년 전 이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기온이 크게 하강하고 강수량 변동이 더욱 불규칙해진 시기로 특징지어집니다. 이러한 기후 변화는 태양 활동의 변화와 지구 공전 궤도의 변화로 인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시기는 “중기 홀로세 전환기(Mid-Holocene Transition)”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기후 변화는 남동부 호주,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일부 지역까지 확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시기부터 소빙하기(신빙하기, Neoglacial)가 시작되었습니다. 에티오피아 남부의 추 바히르 분지(Chew Bahir Basin)에서는 몇 차례의 단기 가뭄이 아프리카 습윤기의 종료를 예고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단기적인 기후 변동은 주요 기후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자주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약 4,000년 전에는 전 지구 열대 지역에서 주요 환경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이 시기의 변화는 고대 문명들의 붕괴, 아프리카·아시아·중동 지역의 심각한 가뭄, 그리고 킬리만자로산과 케냐산 빙하의 후퇴와 같은 현상과 함께 일어났습니다.
Abrupt Climate Changes of Holocene
– WANG Shaowu, GE Quansheng, WANG Fang, WEN Xinyu, HUANG Jianbin
– Chin. Geogra. Sci. 2013 Vol. 23 No. 1 pp. 1–12
– doi: 10.1007/s11769-013-0591-z
……
Table 3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러한 기후 단계(Climate phase)는 6개 있었고, 각각 1.0 kyr 이상 지속되었다. 한랭 사건(cold event)과 기후 단계 전환 사이의 연대기 차이는 약 0.2 kyr로, 이는 허용 가능한 수준이다. 즉, 북대서양의 한랭 사건(North Atlantic cold event)은 종종 기후 단계 전환과 함께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5.9 kyr와 4.2 kyr 사건은 기존의 기후 단계(Climate phase) 전환과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방사성 탄소 연대(14C 연대) 기준으로 보면, Sub-Boreal 단계는 약 2,00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달력 연대로 환산할 경우 이 기간이 조금 더 길어질 가능성도 있다. Atlantic 단계 말기에서 Sub-Boreal 단계로의 전환 과정에서 기후는 습윤 상태에서 건조한 상태로 변화했으며, 이 과정에서 5.9 kyr 사건과 4.2 kyr 사건이라는 두 개의 주요 변화가 발생했다.
중·후기 홀로세(Holocene) 동안, 전반적으로 기후는 점차 건조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5.9 kyr 사건과 4.2 kyr 사건은 초기 홀로세의 주요 사건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예를 들어, 8.1 kyr 사건 동안 기후는 더 차가워지고 건조해졌다가, 이후 다시 따뜻하고 습윤한 상태로 돌아갔다. 반면, 5.9 kyr와 4.2 kyr 사건에서는 매우 건조한 상태로 변했으며, 이전의 따뜻하고 습윤한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따라서, 이 두 사건은 기존에 정의된 기후 단계 전환과는 관련이 없었다. Atlantic 단계의 종료 시점을 5.9 kyr로 조정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지만, 이는 본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기후 단계 전환 과정에서 기후는 습윤 상태에서 건조 상태로, 혹은 건조 상태에서 습윤 상태로 변화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하나의 주요 기후 변화 사건(ACC)이 기후를 차갑고 건조한 상태로 변화시키면서 기후 단계 전환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북대서양의 한랭 사건들은 고립된 국지적 사건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발생한 대규모 기후 변화였던 것으로 보인다.
……
Table 3 Climate phases in northern Europe during Holocene
No. | Climate phase | 14C year (kyr) | Calendar year (kyr)* | North Atlantic cold event (kyr)* |
---|---|---|---|---|
1 | Pre-boreal | 10.0–9.5 | 11.5–10.7 | 11.1 |
2 | Boreal | 9.5–8.5 | 10.7–9.5 | 10.3 |
3 | Older Atlantic | 8.5–7.5 | 9.5–8.4 | 9.4 |
4 | Atlantic | 7.5–4.5 | 8.4–5.1 | 8.1, 5.9 |
5 | Sub-boreal | 4.5–2.5 | 5.1–2.6 | 4.2 |
6 | Sub-Atlantic | 2.5–0.0 | 2.6–0.0 | 2.8, 1.4, 0.4 |
Notes: Referencing to Deevey and Flint (1957); * means that data in columns are new additions in this paper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 이언 모리스 / 최파일 역 / 글항아리 / 2013-05-27 (원서: 2011년)
…… 기원전 4500년 이후에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따라 과거와 비교할 만한 변화가 분명히 일어났겠지만 기원전 3800년 이후 나타난 변화만이 고고학자들에게 뚜렷하게 가시화된다.
마을이 대체 왜 점점 더 커지고 복잡해졌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농부들이 최초로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한 기원전 6000년에 지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전궤도와 불안정한 자전궤도 가운데에서 가장 따뜻하고 습한 지점에 도달했지만 기원전 3800년이 되면 세계는 다시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메소포타미아 농부들에게 좋은 소식이라고 짐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틀렸다. 서늘한 여름은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비를 머금은 몬순(인도양에서 남아시아 전역으로 부는 계절풍)이 약해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비가 불규칙적으로 이전보다 드문드문 내리면서 메소포타미아는 오늘날 우리가 CNN 뉴스에 보는 대로 바짝 마른 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여러 요인이 상호작용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봄철 비가 감소하자 작물이 생장하는 기간이 짧아졌고, 이는 다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매년 여름 범람하기 전에 작물이 여문다는 것을 의미했다. 2000년에 걸쳐 메소포타미아 농부들이 고생스럽게 구축한 시스템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기후변화는 메소포타미아인에게 어려운 선택을 강요했다. 모래가 경작지를 잠식해오는 가운데 그들은 현실을 외면한 채 지금껏 해오던 대로 할수도 있었지만 수수방관의 대가는 기근과 굶주림, 어쩌면 아사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몬순에 덜 의존하는 지역으로 이주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농부들이 잘 가꾼 땅을 포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측면구릉지대-그들이 갈 데가 확실한 곳-는 이미 마을로 차고 넘쳤다. 2006년 시리아 북동부 텔 브라크에서 고고학자들은 아무래도 학살의 희생자로 추정되는 젊은이들이 안장된 기원전 3800년 무렵의 거대한 무덤 두 기를 발굴했다. 인구가 밀집되고 폭력적인 측면구릉지대로 이주하는 것은 그리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충분한 수의 메소포타미아인이 그곳을 뜨거나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면 이 새로운 핵심부는 붕괴했으리라. 그러나 세 번째 대안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마을을 버릴 수도 있었지만 메소포타미아에 머무르면서 몇몇 대도시로 모여들었다. 얼핏 보기에는 이해가 안 되는 선택 같다. 수확량이 떨어지고 있는데 더 좁은 공간으로 사람을 몰아넣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메소포타미아인은 더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일한다면 더 큰 관개시설을 운영할 수 있을 테고, 작물이 익는 시기까지 홍수로 불어난 물을 더 많이 저장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들은 땅에서 구리를 파내는 더 많은 광부, 장신구와 무기, 도구를 만드는 더 많은 대장장이, 이러한 상품을 주변으로 나르는 더 많은 상인을 먹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인은 대단히 성공을 거두어서 기원전 3000년이 되자 청동(구리와 약간의 주석 합금)은 석기 무기와 대부분의 석기 도구를 대체했고 전사와 일꾼들의 효율성을 급격히 증가시켰다.
그러나 그러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했다. 해답은 중앙집권화였다. 기원전 3300년이 되자 사람들은 작은 점토판에 자신들의 활동을 매우 정교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고고학자는 이를 상징문자(비록 극소수의 서기 엘리트만이 읽을 줄 알았겠지만)라고 부른다. 그러한 고도로 복잡한 활동을 뒷받침할 수 없는 작은 마을들은 벽에 부딪힌 반면 우루크 같은 곳은 아마도 2만 명이 거주하는 진정한 도시로 탈바꿈했다.
메소포타미아인은 관리와 회의, 보고서를 발명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괴롭히는 골칫거리이자 인류의 원대한 위업에 관한 서사에 도통 어울리지 않는 소재들이다. 그러나 다음 몇 장에서 분명해지듯이, 그것들은 종종 사회발전의 가장 중요한 동인이었다. 조직은 측면구릉지대와 황허 강 유역을 따라 있는 마을을 도시와 국가, 제국으로 변모시켰다. 조직의 실패는 몰락을 가져왔다. 관리자들은 우리의 이야기에서 영웅이자 악당들이다.
기후의 문화사
– 볼프강 베링어 / 안병옥 , 이은선 역 / 공감 / 2010-09-10 (원서: 2007년)
간빙기에 있었던 고온다습한 기후최적기는 지구상의 대표적인 건조 지대들에도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을 적용한 연구에 따르면, 이렇듯 유리한 기후조건은 이집트 왕조 초기까지 지속되었다. 기원전 5000년경에 시작된 사하라지역의 건조화는, 적어도 지역단위에서는 기후변화가 매우 분명한 형태로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많은 학자들의 견해는 북아프리카에서의 거주가능지역 축소와 기원전 5000~4500년경 나일강 계곡에 갑자기 나타났던 농경취락 사이에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일강 범람지에서 시작된 농업은 보다 많은 인구의 거주를 가능케 했으며, 이는 고대 이집트문화가 걸었던 역사의 본질이기도 하다.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 브라이언 페이건 / 남경태 역 / 예지 / 2013-06-18 (원서: 2004년)
이후 수천 년 동안은 생활이 편했다. 모두들 물을 쉽게 구할 수있는 강이나 천연 저수지가 있는 근처에서 작고 분산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사람들은 농사와 더불어 물고기도 잡았고, 별 어려움 없이 농토에 물을 댈 수 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3800년경 기후가 갑자기 건조해졌다. 실은 1천 년 전부터 서남아시아와 지중해 동부 지역에 있었던 추세였다. 지구 표면의 일사량이 세계적으로 줄어들었는데, 이 현상은 서남아시아에서 멀리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나무의 나이테와 호수의 바닥 표층을 방사성탄소 연대측정한 결과로 증명된다. 이는 태양에 대한 지구의 각도가 변화되어 지표면에 와 닿는 복사 에너지의 양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서남아시아 몬순의 여름 강우량이 줄었고 경로도 동쪽으로 이동했다. 비는 양도 줄었을 뿐 아니라 시기도 늦게 내리기 시작해 빨리 그쳤다. 여름의 범람은 수확이 끝난 뒤에 발생했으므로 농사에 사용할 물의 양이 줄었다. 아나톨리아 고원에 내리는 비와 눈의 양이 현격하게 줄어든 탓에 범람의 규모도 예전보다 훨씬 작아졌다.
기후는 점점 불안정해졌다. 가뭄이 남부 촌락들을 덮쳤다. 변덕스러운 강의 수로와 끊임없이 달라지는 풍경 속에서 소규모 거주지들은 반복되는 환경의 충격에 유린당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강우량에 상당히 의존해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관개시설에 의존해야 했다. 잉여 식량은 없어졌고 오히려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굶주린 주민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의 운명은 현재 모진 햇볕에 말라붙고 갈라진 농토를 관개하는 데 달려 있었다. 고고학적 조사는 그 무렵 많은 사람들이 촌락을 버리고 떠났음을 말해준다.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 정처 없이 헤매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은 기근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이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고대 이집트 농부들은 기원전 2100년 가뭄으로 나일 강이 말라버렸을 때 먹을 것을 찾아 농토를 등지고 떠났다. 19세기 후반 인도에서도 몬순이 불지 않자 수천 명의 촌락 주민들이 유랑 생활을 하고, 펀자브가 거대한 납골당으로 변한 적이 있었다. 우바이드의 재앙은 그런 규모가 아니었으나 짧아진 우기의 장기적인 효과는 여러 세대에 걸쳐 메소포타미아 남부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일부 생존자들은 운이 좋았다. 그들은 넓고 건조한 초원 부근에 터를 잡은 덕분에 소, 염소, 양을 키울 수 있었다. 그중 일부는 아예 전업 목축으로 전환하고 가축들과 함께 항구적인 이동 생활을 택했다. 또 다른 일부는 가뭄의 피해를 덜 본 동쪽 고지대로 이주해 관개 농경 대신 소량의 물을 이용하는 농경으로 버텼다. 그런가 하면 그냥 그 자리에 눌러앉아 관개 농경과 고전적인 안전망을 이용한 생존 전략을 병합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사냥감이 줄어든 상황에서도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고 식용 식물을 채집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안전망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한곳에서 정주생활을 하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둔 성공의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많은 강우량과 관개시설로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환경의 부양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수백 년 동안 메소포타미아 농부들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인근의 평원까지 이어진 대형 급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받았다. 급수로는 마치 자라는 나무처럼 큰 줄기에서 많은 작은 가지들로 분화되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주요 수로를 강과 연결하는 지점이었다. 이 지점을 잘 선택해야만 물의 양을 통제할 수 있었다. 특히 강우량이 해마다 큰 폭으로 떨어진다든가 범람 수위가 낮아지는 기후 여건에서는 아주 중대한 일이었다. 태양 복사열이 적어지자 많은 인구가 모여 살고 대규모 정착지가 처음으로 형성된 곳이 특별히 중요한 지역으로 떠올랐다.
기원전 3500년경 가뭄이 격화되었을 무렵 우루크는 단지 규모만 큰 도시가 아니었다. 자체의 관개시설을 갖춘 위성 촌락들이 사방으로 10km나 뻗어 있었다. 이 작은 촌락들은 도시에 식량과 물자를 제공하면서도 각자의 생존은 서로에게 의존했다. 도기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촌락이 있는가 하면 야금술이나 고기잡이에 능한 촌락도 있었다. 촌락들은 각자 자체 생산물을 우루크의 시장으로 가져왔다. 그러자 누구나 자기 물건을 남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으므로 점차 방어가 중요해졌다. 동시에 지주들은 이모작을 시작했다. 그들은 농사에 쟁기와 동물의 힘을 이용하고, 휴한기를 줄이고, 수로에 노동력을 투입했다.
이제는 1년 내내 관개가 필요했다.
블랙 아테나
– 마틴 버낼 / 오흥식 역 / 소나무 / 2006-01-10 (원서: 1987년)
기원전 7000~5000년경에 사하라에 오랜 건조기가 이어지면서 서부와 동부, 그리고 수단에서 이집트 나일 계곡으로 이동이 일어났다. 소수 의견이지만, 아라비아 사바나에서 남부 메소포타미아로 유사한 이주가 있었다는 주장에 나 역시 동의한다. 대다수 학자는 이 지역에 처음 거주한 사람이 수메르인 혹은 원元수메르인이며, 기원전 3000~2000년에 이르면 사막에서 셈족이 침입했다고 믿는다. 나는 기원전 6000~5000년에 셈어가 소위 우바이드 토기와 함께 아시리아와 시리아 지역(대략 오늘날 셈어를 사용하는 서남아시아)에 퍼져나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수메르인이 북동쪽에서 메소포타미아에 도착한 것은 기원전 4000~3000년 초라고 본다. 우루크에서 발굴한 기원전 3000년경의 초기 원문을 통해 셈어와 수메르어를 함께 쓰는 관습이 이미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련 그림>
<관련 자료>
African humid period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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