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은 유럽에서 30년 전쟁(1618~1648)과 80년 전쟁(1568~1648)을 종결한 조약으로, 유럽 국제 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조약은 근대 국가 체제와 국제 관계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이후 유럽 및 세계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648
베스트팔렌 조약은 네덜란드 패권의 정점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스페인에 대항하여 80년 동안 싸워온 네덜란드인들에게 그들의 주권을 최종적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부와 힘의 기반이었던, 경쟁하는 국민 국가들로 구성된 유럽 체계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네덜란드 패권의 사회적 기초는 “17세기의 일반적 위기”로 알려진 체계 전체에 걸친 정치적 · 사회적 격변의 시기에 형성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한 긴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출현한 공화국은 곧 다른 나라들이 모방하려는 찬양받는 사회관계의 모델이 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베스트팔렌 조약의 배경
- 30년 전쟁 종결: 1618~1648년 신성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종교·정치적 갈등을 종식시킨 평화 조약이다. 이 전쟁은 가톨릭 동맹과 개신교 제후 간의 대립에서 시작되었으나, 후기에는 프랑스, 스웨덴, 스페인 등 유럽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 17세기 위기와 네덜란드의 굴기
2. 주요 내용
- 주권 국가 체제 확립: “영주가 종교를 결정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를 확장해 칼뱅파를 공식 인정하고, 각 영지의 종교적 자율성을 강화했다.
- 영토 조정:
-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역을 획득했다.
- 스웨덴은 발트 해 연안의 영토를 확보해 북유럽 강국으로 부상했다.
-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공인되었다.
- 신성 로마 제국의 변화: 제후들의 자치권이 강화되고 황제의 권한이 약화되며, 독일 지역의 분열이 고착화되었다.
- 베스트팔렌 처리에 뒤이은 조약들에서는 30년전쟁 과정에서 건립된 무역장벽을 폐지함으로써 상업의 자유를 복구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항이 삽입되었다. 이어진 협약들에서는 비전투자의 재산과 상업을 보호하는 규칙들이 도입되었다.
3. 세계사적 의의
- 베스트팔렌 조약은 네덜란드 패권의 정점이었다.
- 베스트팔렌 조약은 근대 국제 질서의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즉 중세 통치체계를 청산하고 근대 국가간체계를 수립하게 된다.
- 주권 국가 체제 확립 (근대 국제 질서의 시작): 웨스트팔리아 체제로 불리는 주권 국가 체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국가 간의 평등과 내정 불간섭 원칙이 확립되어, 이후 국제법과 외교 시스템의 토대가 되었다.
- 종교 전쟁의 종식: 종교적 갈등보다 국가 이익을 중심으로 한 세속적 외교가 부상했다. 이는 유럽에서 종교 전쟁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 강대국 간 힘의 균형을 통한 평화 유지 개념이 발전했으며, 이는 이후 빈 체제(1815) 등으로 이어졌다.
- 민족 국가의 탄생: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독립 인정은 민족 자결주의의 초기 사례로 평가된다.
-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네덜란드 패권의 정점으로서 베스트팔렌 조약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공식적인 독립 인정
- 네덜란드는 80년 전쟁(1568~1648) 동안 스페인과 싸웠고, 이미 사실상 독립국처럼 활동하고 있었음.
-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스페인이 네덜란드 공화국(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와 분리됨)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
- 이제 네덜란드는 국제적으로도 완전한 주권국이 됨.
2. 해상과 무역 패권 장악
- 17세기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황금기(Gouden Eeuw)”라고 불릴 만큼 경제, 문화, 과학에서 절정을 이룸.
- 동인도 회사(VOC)와 서인도 회사(WIC)를 통해 동남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서 막대한 무역 이익 창출.
- 세계적인 해양 강국으로서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을 압도하고 무역을 지배.
- 암스테르담이 세계 금융 중심지로 성장.
3. 유럽 내외에서 외교적 영향력 확대
-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네덜란드는 프랑스, 스웨덴 등과 함께 조약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
- 유럽에서 실질적인 강대국 중 하나로 인정받음.
4. 쇠퇴의 조짐
베스트팔렌 조약 직후 네덜란드는 최고의 번영기를 맞이했지만, 이후 17세기 후반부터 영국과 프랑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 영국과의 경쟁: 1652년~1674년까지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충돌하며 해상 패권이 흔들림.
- 프랑스의 위협: 루이 14세가 네덜란드를 침공(1672년, “재난의 해” Rampjaar).
즉, 베스트팔렌 조약은 네덜란드의 국제적 위상이 정점에 도달한 순간이지만, 이후 쇠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시점으로도 볼 수 있다.
※ 관련 글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원서: 1994)
연합주(the United Provinces, 오늘날의 네덜란드)가 왕국들의 대대적이고 강력한 연합 형성을 주도해 중세 통치체계를 청산하고 근대 국가간체계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헤게모니적이 된 것은 바로 이런 상황 하에서였다. 에스파냐로부터 민족독립을 하기 위한 초기 투쟁과정에서 네덜란드인들은 이미 북서유럽 왕국들에 대해 강력한 지적 · 도덕적 지도력을 수립하였다. 북서유럽 왕국들은 중세 통치체계 붕괴의 주요 수혜자에 속했다. 30년전쟁 시기에 체계의 카오스가 증가하자, “외교의 실타래는 헤이그에서 감겼다 풀렸다 하게 되었고”(Braudel 1984: 203), 범유럽체계를 대대적으로 재조직하자는 네덜란드의 제안은 유럽 통치자들 사이에서 더욱더 많은 지지자를 획득했고, 마침내 에스파냐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렇게 해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과 함께 새로운 세계적 통치 체계가 등장했다.
주권국가를 넘어서는 권위나 조직이라는 관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대신한 것은 모든 국가들이 전세계적 정치체계를 구성한다는 생각, 또는 어쨌건 서유럽 국가들이 단일의 정치체계를 구성한다는 생각이다. 이 새로운 체계는 국제법과 세력균형에 기반하는데, 이 법은 국가들 상위가 아니라 국가들 사이에서 작동하며, 세력은 국가들 상위가 아니라 국가들 사이에서 작동한다. (Gross 1968: 54~5)
베스트팔렌에서 탄생한 세계적 통치체계는 사회적 목적도 지녔다. 통치자들이 상호 배타적 영토에 대한 정부 각각의 절대적 권리를 정당화하면서, 민간인들은 주권체들 사이의 분란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원칙이 수립되었다. 이 원칙이 가장 중요하게 적용된 곳은 상업 영역이었다. 베스트팔렌 처리에 뒤이은 조약들에서는 30년전쟁 과정에서 건립된 무역장벽을 폐지함으로써 상업의 자유를 복구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항이 삽입되었다. 이어진 협약들에서는 비전투자의 재산과 상업을 보호하는 규칙들이 도입되었다. 교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보복을 제한하는 것(Sereni 1943: 43~9)은 북부 이탈리아 도시국가체계에서 전형적이었는데, 이렇듯 이런 제한이 유럽 민족국가체계의 규범과 규칙으로 자리잡았다.
이렇게 해서 주권자들 사이의 전쟁형성이 피지배자들의 일상생활에 끼치는 효과를 최소화하는 국가간체계가 수립되었다.
18세기에는 많은 전쟁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를 공인된 공통언어로 사용하는 주요 유럽 국가의 교양 있는 계급들 사이의 소통의 자유와 우애로움이라는 면에서 18세기는 근대사의 가장 “국제적”인 시기였고, 민간인들은 각기 그들의 주권자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라도 드나들면서 자유롭게 서로 사업거래를 할 수 있었다. (Carr 1945: 4)
이렇듯 17세기 초의 체계의 카오스는 새로운 아나키적 질서로 변환되었다. 전시에조차 사적 기업에 정치권역을 가로질러 평화적으로 상업을 조직할 수 있는 상당한 자유가 부여된 것은 전쟁수단과 생계수단에 대한 신뢰성 있는 공급을 얻어 내려는 통치자와 피지배자들의 일반적 이해를 반영할 뿐 아니라, 고삐 풀린 자본축적에 대한 네덜란드 자본가 과두제의 특수한 이해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자본축적의 이해관계를 반영해 정치공간을 재조직한 것은 근대 국가간체계의 탄생뿐 아니라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
1566년 에스파냐 군대가 네덜란드를 점령하기 위해서 – 기본적으로 세금부과를 강제하려고 – 파견되었을 때, 이 이동은 격퇴되었다. 네덜란드 반란자들은 바다로 진출해, 조세 회피의 놀라운 능력뿐 아니라 해적과 사략질을 통해 에스파냐 제국의 재정에 일종의 “전도된” 재정 압박을 가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전시켰다. 80년간 – 즉 30년전쟁이 끝날 때까지 – 에스파냐 제국의 재정은 이렇게 점점 더 엄청나게 고갈되어 갔고, 이는 네덜란드 반란자를 강화시켰고, 종속적이고 경쟁하는 영토주의 조직들 – 특히 프랑스와 잉글랜드 – 에 비해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 에스파냐를 약화시켰다. 그리고 제국의 중심이 약화되자, 새롭게 출현하는 유럽 세력균형이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제도화하기 전까지 전쟁과 폭동은 확산되었다.
……
에스파냐의 영토주의 논리에 대한 네덜란드 자본주의 권력 논리의 승리는 이보다 더 완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 승리의 시점에 승리의 논리의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 승리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제도화하자마자, 영토주의 국가들의 에너지와 자원이 앞선 시기 유럽의 상호 충돌에서 풀려나 네덜란드 상업 및 해군의 우월성에 도전할 수 있도록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앞선 시기 투쟁에서 이베리아의 영토적 우월성을 무력화하기 위해 네덜란드가 효과적으로 이동자본에 대한 우세한 통제력을 동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잉글랜드, 프랑스, 그리고 이베리아 자신도 네덜란드의 상업적 우월성을 침식하기 위해 어느 때 보다도 자유롭게 영토와 노동에 대한 우세한 통제력을 동원하게 되었다.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
– 지오바니 아리기, 비벌리 J. 실버 / 최홍주 역 / 모티브북 / 2008.10.17 (원서: 1999)
따라서 현대 세계 체계의 형성과 팽창은 약 4~5백년 전에 놓인 단선 선로를 따라 진행하는 게 아니라, 정부 주체와 기업 주체로 이루어진 특정한 복합체가 놓은 새로운 선로로 전환시키는 전철기를 통해 진행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마이클 만(Michael Mann)의 표현을 빌자면, 이 주도적 주체들(17세기의 네덜란드 복합체, 19세기의 영국 복합체, 20세기의 미국 복합체)은 모두 “선로 부설 차량”의 역활을 했다. 체계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면서, 그들은 또한 체계를 변화시켰다. 네덜란드의 주도로 새로 출현한 유럽 국가 체계는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영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유럽 중심적 주권 국가 체계는 전 세계로 지배를 확대했다. 그리고 미국이 주도한 체계는 유럽 중심적 성격을 벗고 범위를 넓혔으며 침투를 강화했다.
……
우리가 유럽의 주권 국가 체계와 관련하여 네덜란드의 패권을 논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한 이 체계의 공식적인 수립으로 귀결된, 장기간에 걸친 투쟁에서 네들란드인들이 선도적인 역활을 했기 때문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초국가적인 제국의/교황의 권위의 개념을, 유럽 국가들이 국제법과 세력 균형, 즉 “국가들 위에서가 아니라 사이에서 작용하는 법과, 국가들 위에서가 아니라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에 기반을 둔 단일 정치 체계를 형성한다는 개념으로 대치했다. 국가 간의 전쟁을 막으려는 노력은 없었고 그래서 국가 간의 전쟁은 이전과 다름없이 국가 간의 세력 균형을 복원하는 핵심 수단이었다. 그러나 조약 체결 후 150년 동안, 쓰여 있거나 쓰여 있지 않은 행동의 규칙들은 군주들 사이의 전쟁이 신민들의 국경을 넘는 상업적 거래와 사회적 상호 작용의 자유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데 공헌했다.
……
베스트팔렌 조약은 네덜란드 패권의 정점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스페인에 대항하여 80년 동안 싸워온 네덜란드인들에게 그들의 주권을 최종적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부와 힘의 기반이었던, 경쟁하는 국민 국가들로 구성된 유럽 체계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그러나 베스트팔렌 조약은 국가 간 권력 투쟁의 조건도 변화시켰고, 이를 통해 네덜란드 패권의 한계도 드러냈다.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 후, 곧 네덜란드인들이 영국인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던, 연이은 세 번의 전쟁이 이 변화를 공포했다. 존 브루어(John Brewer)는 “세 차례의 영국-네덜란드 간 전쟁은 모두 네덜란드의 무역과 해운업을 파괴하려는 목적이었다.”고 말한다.
……
제1차와 제2차 영국-네덜란드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이 유럽의 국가 간 권력 투쟁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음을 보여준다. 유럽의 영토 국가들이 그들의 주권을 위협하는 스페인 제국에 맞서 싸우는데 몰두하는 동안, 네덜란드 연방은 돈과 관계를 이용하여 손쉽게 다른 나라들이 지상전의 주 부담을 지게 하고, 스스로는 해전과 유럽 전체의 금융 · 상업 중개자가 되는 데 노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위협이 무력화되고 국가 주권이 공고해지자, 영토 국가들은 유럽 전반에 위기가 한창일 때 네덜란드인들을 부유하고 강력하게 만든 자본의 순환과 무역망을 각기 자국의 영토 안에 합병하려고 했다.
……
…… 네덜란드의 중상주의 체계는 베스트팔렌 조약 후에는 평화를 필요로 했지만, 베스트팔렌 조약 전에는 전쟁을 통해 건설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일단 네덜란드의 중상주의 체계가 영국과 프랑스의 중상주의에 의해 심각하게 와해되자(위트레흐트 조약 때에는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에게 평화는 더 이상 거의 끊이지 않고 전쟁이 일어났던 지난 반세기에 그랬던 것만큼 좋지 않았다.
……
네덜란드는 또한 앞장서서 민간 기업의 안전을 보장하는 국제 관계의 새로운 규칙을 확립했고, 종교적 관용을 국제적 규범으로 만듦으로써 종교에 의한 혁명의 촉진을 약화시켰다. 베스트팔렌 조약(1648)은 민간인은 통치자들 간 싸움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원칙을 수립했고, 뒤이은 협정들은 전시에 일반 시민의 재산과 통상을 보호하는 규칙들을 도입했다.
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 로버트 B. 마르크스 / 윤영호 역 / 코나투스 / 2007.04.13 (원서: 2002)
둘째, 유라시아대륙 전역에 걸쳐 여러 제국들이 꾸준히 성장했다. 16세기의 제국은 가장 보편적인 정치적 단위로서 그 당시 지구상에서 인간이 통제하는 영역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때까지 인간이 토지를 개간하여 식량을 생산하고 인구를 증대하기 위해 개발한 수많은 정치적 · 경제적 체제들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형태가 바로 제국이었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오늘날 우리가 제국이 아닌 국가에서 살고 있는 이유는 아주 진지하게 연구해볼 만한 사항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국가체제가 서구 유럽에서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신세계의 대부분을 장악했던 스페인은 엄청난 자원을 기반으로 제국을 건설하려 했지만 다른 유럽국가들의 거센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 결과 유럽에 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고 새로운 형태의 국제적인 정치질서가 정립되기 시작했다.
셋째, 유럽에서 독립국가체제가 발전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
……
스페인은 프랑스와 벌인 전쟁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신세계에서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었지만 연이은 전쟁으로 막대한 자금을 지출했던 스페인 왕가는 한 차례도 아닌 여러 차례 – 1557년 최초로 파산하고 1560년 두 번째로 파산한 이후 수없이 파산했다 – 에 걸쳐 파산을 선언했다. 1588년 무적함대가 영국함대에 패배한 후 스페인은 유럽 – 30년 전쟁, 1618~1648 – 에서뿐만 아니라 신세계에서도 패전을 거듭했고 결국 유럽의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포기하고 말았다. 새로운 체제가 시작되었지만 스페인은 이제 그 중심에 자리 잡지 못했다. 수많은 역사학자들은 제국의 몰락과 민족국가의 부상이 서구 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평가한다.
……
이 장에서 다루게 될 유럽국가들의 전쟁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들이 대단히 많았다. 첫째, 사실상 모든 유럽국가들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유럽은 하나의 체계로 연결되었는데, 특히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런 현상은 역사학자 찰스 틸리(Charles Tilly)가 제안한 두 개의 도표(도표3.1)에서 확실히 살펴볼 수 있다. 이 도표 – 두 도표는 각각 시대가 다르다 – 에서 얇은 선은 한 차례의 전쟁을 나타내고 굵은 선은 두 차례 이상의 전쟁을 나타낸다. 1500년대에는 두 개의 하위체제가 있지만 주로 이탈리아에 치중되었고, 1650년대에는 유럽국가들이 모두 전쟁에 개입하여 복잡한 관계를 이루었다.


둘째, 유럽은 전쟁을 통해 수많은 정치적 단위들이 합병되면서 가장 성공적인 형태로 민족국가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는 틸리의 도표에 제시되어 있다. 11세기 유럽은 황제, 왕, 군주, 공작, 칼리프, 술탄과 같은 권력자가 통치하는 수많은 정치적 단위들에 약 3,00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거주했다. 이런 다양한 칭호들은 유럽의 엄청난 정치적 분열을 여실히 드러내는 증거였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는 약 200개에서 300개에 달하는 도시국가들이 난립했다. 약 500년 후인 1500년대에 이르면 유럽은 무려 8,00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약 500개에 달하는 국가나 국가와 유사한 형태의 여러 조직들에 거주했다. 그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전쟁으로 국가의 수가 감소하였고 결국 약 30개국 정도만이 살아 남았다.
……
셋째,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전쟁이 유럽국가들의 내부적인 진화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서 특정한 형태의 국가들만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
요컨대 유럽국가들의 전쟁은 아시아의 물자를 구입하고 남은 은의 잔고를 훨씬 초과하는 막대한 비용을 소모시켰다. 그 결과 항시 동원할 수 있는 해군을 비롯한 군대가 갖춰졌고 세금을 산정하고 징수하는 국가기관이 탄생되었으며 세금을 납부하는 지주들로 구성된 의회가 설립되었다. 이런 의회 – 사실 유럽의 절대군주들은 이 제도를 무시하거나 폐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 는 세금징수, 공채, 국채제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모든 현상은 ‘국가형성’ 과정의 일부였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 이언 모리스 / 최파일 역 / 글항아리 / 2013-05-27 (원서: 2011)
1560년대에 펠리페는 심지어 하느님과 맘몬(성서에 나오는 부와 재물의 신)을 한 편으로 만들었다. 보통은 둔감한 네덜란드 시민들이 프로테스탄티즘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가에 탄압받고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자 결국 제단을 때려 부수고 가톨릭교회를 모독하는 폭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부유한 네덜란드 속령을 칼뱅주의자들의 근거지로 상실하는 상황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고, 따라서 펠리페는 군대를 파견했지만 네덜란드인도 군대를 일으켰다. 펠리페는 전투에서는 계속 이겼지만 전쟁은 이기지 못했다. 네덜란드인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새로운 세금을 내려고 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의 신앙이 위협받자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돈을 쏟아붓고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1580년대가 되자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펠리페가 제국 전체에서 거둬들이는 수입보다 더 많은 비용을 잡아먹었고 패배를 감당할 능력도 승리를 이끌어낼 능력도 없던 그는 이탈리아 금융가들에게 더 막대한 자금을 빌려왔다. 그리고 병사들에게도 채권자들에게도 돈을 내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파산을 선고했다. 그다음 재차 그리고 한 차례 더 파산을 선고했다. 급료를 받지 못한 병사들은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주둔지를 약탈했으며 펠리페의 신용은 땅에 떨어졌다. 에스파냐는 1639년까지(바다에서) 그리고 1643년까지(육지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지 않았지만 1598년 펠리페가 사망했을 때 제국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고 채무는 연간 수입의 열다섯 배에 달했다.
거대한 체스판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 김명섭 역 / 삼인 / 2000.04.01 (원서: 1997)
대체로 17세기 중반까지 에스파냐는 유럽의 최강 국가였다. 15세기 말까지 에스파냐는 주요한 해양 제국으로 떠오르면서 세계적 야망을 키우게 된다. 종교는 국가 통일을 위한 이념으로서뿐만 아니라 제국적 선교열의 원천으로서도 기능하였다. 교황의 중재에 의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사이의 식민적 세계 분할은 토르데실랴스(Tordesilla) 조약(1494)과 사라고사(Saragossa) 조약(1529)에 의해 성문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의 도전에 직면하면서 에스파냐는 결코 서유럽은 물론 전체 해양에서 진정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에스파냐의 선발적 지위는 점차 프랑스에 넘어갔다.
부의 역사
– 권홍우 / 인물과사상사 / 2008.06.09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에서 건초더미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두 고관은 인근 가톨릭 공국인 체코로 달려갔다. 결국 사건은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는 체코와 보헤미안 신교도 사이의 싸움으로 번졌다. 여기서 가톨릭이 승리했지만 북쪽에서 스웨덴의 루터교 군대가 나타나 전세를 역전시켰다. 전선이 확대되자 덴마크와 이탈리아 도시국가는 물론 에스파냐 같은 강대국들도 차례로 끼어들고 프랑스까지 참전했다. 전쟁의 최종 결과는 신교도 측의 우세였다.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가 에스파냐를 견제하기 위해 신교도 연합군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영국도 신교도 연합 편을 들었다.
30년 전쟁은 에스파냐의 패배가 확실해진 1648년, ‘모든 군주는 자기 백성의 종교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는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 체결로 끝났다. 누구보다 큰 피해를 입은 곳은 독일 지역의 나라들이었다. 국토의 5분의 4가 황폐해지고 1600만 명이던 인구도 약탈과 학살, 기근과 역병 속에 600만 명으로 줄었다.
……
에스파냐가 장악했던 유럽의 패권이 가톨릭 형제국들을 배반하고 신교도 연합군에 선 프랑스로 넘어갔다. 가장 덕 본 나라는 독립국임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스위스와 네덜란드였다. 특히 네덜란드는 독일의 전쟁터에서 직접 싸우지 않았으나 가톨릭의 최강자인 에스파냐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는 점을 인정받아 도약을 향한 탄탄대로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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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는 1578년 에스파냐에 굴복한 남부의 이탈(이로써 남부의 벨기에와 북부의 네덜란드가 갈라졌다) 뒤에도 생존의 터전인 제방을 터뜨리면서 까지 에스파냐에 저항했다. 마침내 1609년 전황의 우세 속에 휴전조약을 맺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은 자유의지의 소중함을 전파시켜 영국의 명예혁명(1688), 미국 독립전쟁(1775), 프랑스 대혁명(1789) 등 세계 3대 혁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3대 혁명에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더해 세계 4대 혁명으로 분류하는 시각도 있다. 거대한 제국이자 신대륙의 황금을 전비로 무한정 쏟아붓던 에스파냐를 맞아 네덜란드가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렘브란트 같은 대가들이 네덜란드에서 배출된 이유와 동일하다. 자유에 대한 열망과 근면에서 온 경제적 풍요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황금기를 열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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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중반 네덜란드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금융의 발전은 더 눈부셨다. 거대 제국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던 네덜란드는 1568년 중과세에 대한 조세저항이 독립전쟁으로 발전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저지대 지역 가운데 가장 부유하고 주식거래소와 은행이 밀집해 있던 도시인 안트베르펜이 포함된 남부 지역이 1578년 에스파냐에 점령당한 뒤 암스테르담이 새로운 금융 중심지로 각광받으며 전문 인력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관련 그림>

<관련 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Peace_of_Westpha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