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위원회 (삼극위원회, The Trilateral Commission) – 1973년

2015년 4월24일 2박3일 일정으로 서울에서 삼극위원회(三極委員会)가 개막했다. 음모론에 자주 등장하는 이 위원회는 단순 사교적 모임인지 음모론에 나오는 내용이 일정부분 맞는지 모르지만, 1973년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efeller) 전 JP모건체이스 회장이 만들었고, 아시아·태평양, 북미, 유럽 3개 지역의 경제계·학계·관계 인사 390명으로 구성돼 있다. 주요 회원으로는 미국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커트 캠벨 전 동아시아ㆍ태평양 차관보,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등을 비롯해 고바야시 에이조 이토추 그룹 회장, 마키하라 미노루 미쓰비시상사 고문, 리자오싱 전 중국 외교부장 등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회원이고 이번 회의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참석했다고 한다. 국제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파워 엘리트들의 모임인 셈이다.

 

한국에서 연례 회의를 개최하는 것은 2003년 이후 12년 만이다.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렸던 2003년 삼극위원회는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해 연설했다.

 

※ 공식 홈페이지 : http://trilateral.org/

 

※ 2015년 한국인 명단 ( http://trilateral.org/download/file/TC_list_4-15(3).pdf

박태호(Bark Taeho) : 서울대 교수

조석래(Cho Suck-Rai) : 효성

정몽준(Chung Mong-Joon) : 정치인, 현대중공업

함재봉(Hahm Chaibong) : 아산정책연구원 원장

한승주(Han Sung-Joo) : 집행위원

홍석현(Hong Seok-Hyun) : 집행위원, 중앙일보

현홍주(Hyun Hong-Choo) : 김&장법률사무소 고문

정구현(Jung Ku-hyun) : 경제기관단체인, 대학교수

김기환(Kim Kihwan) : 전 골드만삭스 고문

이홍구(Lee Hong-Koo) : 중앙일보 이사회 의장

이재용(Lee Jay Y.) : 삼성전자 부회장

이신화(Lee Shin-wha) : 고려대학교 교수

이숙종(Lee Sook-Jong) : 성균관대 교수

나경원(Na Kyung-Won) : 국회의원

류진(Ryu Jin Roy) : 집행위원, 풍산 회장

사공일(Sakong Il) : 중앙일보 고문

신동빈(Shin Dong-Bin) : 롯데그룹 회장

손지애(Sohn Jie-Ae) : 전 방송기자, 기업인

서광현(Seo Kwanghyeon) : 한국무역정보통신 사장

 

※ 관련 글

– 데이비드 록펠러 : http://yellow.kr/blog/?p=1863

– 미국체제 위기 (1968년 ~ 1973년): http://yellow.kr/blog/?p=582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973

 

 

1

– 삼각위원회 로고

 

다음은 이 위원회에 관한 자료들이다.

 


거대한 체스판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 김명섭 역 / 삼인 / 2000.04.01

 

– 해제 (解題) –

 

1960년 브레진스키는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으로 자리를 옮김으로써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콜럼비아 대학에서 1977년까지 교수로 봉직하는 동안 브레진스키는 수시로 미 국무부의 정책 자문역을 맡았고, 1966년부터 1968년 사이에는 국무부 정책기획국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뉴욕 소재 콜럼비아 대학에서 일하는 동안 브레진스키는 삼각위원회의 책임자가 되면서 인생의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된다.

삼각위원회는 1973년 7월 세계 경제의 안정을 추구한다는 목적으로 록펠러 가(家)의 5형제 중 막내였던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efeller)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형 넬슨 록펠러가 대통령 후보 지명 가능성을 지닌 공화당 행정부의 부통령으로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한다면, 동생 데이비드 록펠러는 이미 1960년 45세의 나이로 체이스 맨해턴 은행(Chase Manhattan Bank)의 총재로 임명되어 재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친민주계 성향의 인사였다. 1970년대 초반의 경제 위기 상황에서 체이스 맨해턴의 정점에 서 있던 친민주계 성향의 데이비드 록펠러가 일찍이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제창한 뉴딜(New Deal)적 패러다임에 입각하여 미국 경제 전체의 안정은 물론 세계 경제 전체의 안정을 수호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

처음 데이비드 록펠러가 삼각위원회를 설립한 배경에는 원유를 헐값에 사들인 뒤 이를 상품화하여 폭리를 취하는 이른바 ‘세븐 시스터즈'(Seven Sisters)에 대한 산유국의 점증하는 반감과 연대에 공동 대처하자는 전략적 고려가 깔려 있었다. 비록 록펠러 가의 석유 회사는 원유 파동 와중에서 막대한 단기 이익을 챙길 수 있었지만, 원유 파동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챙긴 것에 대한 사회적 지탄 또한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장기적인 경제 불황이 자본주의 체제 전반에 몰고 올 위험성을 직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개 국가가 개별 자본가들의 상충하는 이해 관계를 초월하여 공존의 기반을 마련해 주는 ‘이상적 총자본가'(Ideal Collective Capitalist)로서 기능하듯이, 각 국가간의 상충하는 이해 관계를 초월하여 공존의 기반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세계적 협력체가 요구되었다.

……

북미(미국, 캐나다)와 서유럽과 일본, 이 세 정점을 묶는 서방 부자 나라의 클럽이자 연구 조직으로 등장한 삼각위원회의 대강을 마련했던 인물이 데이비드 록펠러였다고 한다면, 브레진스키는 삼각위원회의 이론적 지주이자 운영 책임자(Director)로서 역활을 담당했다. …… 흔히 이 삼각위원회에서의 인연으로 브레진스키에 의해 남부의 무명 주지사였던 카터가 동부 엘리트층의 배타적 살롱으로 발탁(co-opt)된 측면이 없지 않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  노암 촘스키 / 강주헌 역 / 시대의창 / 2002.11.18

 

하지만 실질적 권력은 어둠 속에서 정기적으로 은밀히 만나는 사람들이 쥐고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요….

그런 회합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빌데베르크 그룹이나 삼각위원회의 회합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물론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연례 모임인 다보스 경제 포럼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임들은 그저 사교적 모임에 불과합니다. 유치한 수준의 모임이라 할까요? 이런 모임에서는 어떤 중대한 결정도 내려지지 않습니다. 실질적인 결정권자는 다보스에 얼굴을 비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은밀히 따로 만납니다.

 

선생님은 유럽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유럽에는 참여 지식인이 많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많은 진보적 발전이 있었지만, 그 원동력은 지식인이 아니었습니다. 대중의 결집된 힘, 그리고 조직화된 노동계급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960년대에 유럽, 미국, 일본 등 거의 세계 전역에서 대대적인 저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적 의미에서의 자유주의를 표방한 엘리트 집단과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 엘리트 집단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삼각위원회가 탄생했고, 이런 엘리트 집단이 회원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세계주의를 표방하는 자유주의자로 자처했습니다. 요즘에 ‘제3의 길’을 추종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컨대 카터 행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한 사람들은 모두가 삼각위원회 출신이었습니다. 카터 자신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삼각위원회가 창설된 직후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efeller)의 발의로 이 위원회는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중요한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삼각위원회가 개최한 강연을 재수록한 보고서였습니다. 강연자는 프랑스 미셸 크로지에(Michel Crozier), 미국의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일본의 조지 와타누키(Joji Watanuki)였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삼각위원회에 참여한 국가들의 국민이 1960년대에 들면서 공공의 장에 진입하려 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위기’가 닥쳤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얌전하게 있어야 할 대중, 즉 여성과 젊은이와 소수민족을 포함한 전 국민이 정치 토론에 끼어들려 했던 것입니다.

순진한 사람이라면 이런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민주주의의 위기가 거론된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각위원회는 당시 상황을 ‘과도한 민주주의excessive democracy’라고 진단하면서, 이런 위기를 극복하려면 ‘절제된 민주주의moderation in democracy’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대중이 온순하고 무관심한 대중으로 돌아갈 때에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을 대표한 강연자 새뮤얼 헌팅턴은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감동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해리 트루먼은 월 스트리트의 은행가와 변호사의 도움만으로도 미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젊은층의 교화’를 책임진 교육기관의 실패를 특히 우려했습니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 교회가 소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육기관이 젊은이들에게 순종의 미덕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형식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이 시작된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대기업에 힘을 실어 주었고, 복지국가의 기본 틀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대대적인 선전 공세가 있었습니다. 물론 삼각위원회가 이런 공격을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삼각위원회의 보고서는 민주주의의 공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불안 요인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두 사건이 시간적으로 우연히 일치했을 뿐입니다.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  노암 촘스키 / 이종인 역 / 시대의 창 / 2005.12.16

 

말이 난 김에 덧붙이자면, 다수의 권력자들이 닉슨을 잡으려고 나선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적들 리스트와 워터게이트 침입보다 더 심오한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1971년 여름의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당시 닉슨 행정부는 그 앞 25년 동안 존속해왔던 국제 경제 체제를 기본적으로 해체했습니다(이른바 “브레튼 우즈” 체제로서 1944년 뉴햄프셔 주의 브레튼 우즈에서 열린 유엔 화폐 · 재정 회의에서 구축된 체제를 말한다). 1971년에 이르러 베트남 전쟁은 다른 선진 공업국들과 비교하여 미국을 경제적으로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타개책의 하나로 닉슨 행정부는 브레튼 우즈 체제를 해체시켰습니다. 2차대전 이후 세계 경제를 조직해온 이 체제 하에서 미국은 세계의 은행 노릇을 했습니다. 이 체제는 미국 달러를 금과 연계된 글로벌 준비 통화로 만들었고, 수입 쿼터 철폐에 대한 조건을 부과했습니다. 그런데 닉슨은 이 체제를 실제로 와해시켰습니다. 금본위제를 철폐했고, 달러의 태환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관세를 올렸습니다. 다른 나라는 감히 이런 조치를 취할 힘이 없었지만 닉슨은 그것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많은 힘있는 적들을 만들어내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다국적기업과 국제은행은 브레튼 우즈 체제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걸 해체해 버리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를 면밀히 연구해보면 닉슨이 그 당시에도 『월 스트리트 저널』 같은 신문에서 공격당하고 있었습니다. 내 생각에 바로 이때부터 힘 가진 사람들이 그를 손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워터게이트는 그 기회를 제공한 거죠.

 


신자유주의시대의 한국정치

–  손호철 / 푸른숲 / 1999.12.28

 

결국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후퇴를 넘어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70년대 중반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극복을 위해 세계 질서의 “초제국주의적 지배 전략”을 지향했던 ‘삼각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가 지적한 ‘민주주의의 과잉’과 ‘통치 가능성의 위기’, 즉 ‘토크빌 효과’를 우려해서 내린 처방을 현실화하여 ‘법과 질서’라는 이름 아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후퇴만큼 급격하지는 않지만)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공격을 해오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정치적으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니, ‘야금야금형 권위주의(creeping authoritariannism)’니 하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를 야기시키는 또 다른 측면은, 신자유주의 그 자체보다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관련이 있다. 즉,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는 “민주적 의사 형성으로부터…… 대다수에게 생사 여탈적 상관성을 가진 결정을 분리”시킴으로써 다수 국민들을 무력한 존재로 만들고, 국제 금융자본들이 주요 결정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

 


세계의 대중매체

–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 2001.06.12

 

한편 1975년은 텔레비전 뉴스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를 기록한 해였다. 그 이전만 해도 저녁 뉴스는 엄청난 이익을 남겼지만 보도 부문을 통틀어선 다큐멘터리 등 수익성이 떨어진 제작물 때문에 아직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5년부터는 보도 부문 전체가 흑자로 들어섰다.

우연치곤 재미있는 우연이었다. 바로 이 해에 데이비드 록펠러 등 미국 재벌들이 중심이 되어 73년에 출범시킨 ‘삼각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보고서를 발간해 미국 사회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 책의 저자들 중 한 명인 극우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턴은 베트남전쟁을 입안한 베트남전쟁의 브레인 중 한 명이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이 책이 내놓은 주장을 음미할 필요가 있겠다.

헌팅턴은 언론이 “국가 권력의 가장 현저한 새로운 원천”이 되었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는 ‘민주주의적 불안’을 파급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언론이 ‘민주적 수요’와 ‘사회 질서’ 사이에 불균형을 야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헌팅턴은 또 언론이 정부 정책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이므로 정부와 언론 사이의 균형을 복원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언론이라곤 했지만, 헌팅턴이 주로 겨냥한 건 바로 TV 뉴스였다. 1969년에 나온 애그뉴의 TV 비판과 비슷했다. 헌팅턴은 갈등과 폭력에 초점을 맞추는 텔레비전 뉴스가 정부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주범이라고 지목했다. 그는 국민이 정보 원천으로서 텔레비전 뉴스에 더욱 의존하게됨에 따라 ‘낮은 정치적 효율성, 사회적 불신, 냉소주의, 그리고 약한 정당 충실도’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의 정치가 알 스미드의 유명한 발언인  “민주주의의 악덕에 대한 유일한 치료책은 더욱 많은 민주주의다”는 명제를 반박하면서, 그런 처방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텔레비전에 대해서도 정부의 권위를 살리는 쪽으로 강력한 통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  윌리엄 엥달 / 서미석 역 / 길 / 2007.10.25

 

1975년 도쿄 회의에 소개된 이후 카터는 자유주의 성향의 『뉴욕 타임스』 같은 기성 언론으로부터 이례적으로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는데, 『뉴욕 타임스』는 그를 미국 ‘새로운 남부’의 정력적인 옹호자로 홍보했다. 1976년 11월 선거 부정 혐의가 제기되었음에도 카터는 대통령이 되었다.

카터는 삼각위원회 구성원들이었던 특별보좌관들을 하도 많이 데려와 그의 대통령직이 ‘삼각 대통령직’이라 불릴 정도였다. 카터 자신처럼 은밀한 삼각위원회 조직의 고위 구성원이었던 월터 먼데일 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 특별보좌관,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 마이클 블루멘탈 재무장관,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 앤드루 영 유엔대사, 국무부 고위관리 리처드 쿠퍼와 워런 크리스토퍼는 모두 배타적인 삼각위원회의 일원이었다.

……

1970년대의 제1차 오일 쇼크와 이라크 침공 이후의 사건들 사이의 대비는 정말 극적이다. 스웨덴의 살트셰바덴에서 결정된 1973년 빌데르베르크 정책은 북해, 알래스카, 비(非)석유수출국기구 지역에서 새로 발견한 유전들이 이익을 낼 만큼 유가를 충분히 끌어올릴 수 있었다. 제1차 오일 쇼크로 달러화 체제를 위한 시간을 어느 정도 벌 수 있었던 셈이다.

1970년대에 빌데르베르크와 삼각위원회 같은 막강한 집단들은 제1차 오일 쇼크가 유럽, 일본,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에 미치는 영향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의 신흥 국가들의 열망에 국제통화기금 체제를 강요하고 경제개발 및 자급자족을 위한 민족주의 운동을 분쇄함으로써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화폐전쟁1

–  쑹홍빙 / 차혜정 역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07.28

 

국제 금융재벌들은 일련의 핵심 조직 기구인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와 미국 외교협회(CFR)를 설립했는데, 훗날 이들 두 핵심 기구는 두 개의 새로운 산하 기구를 파생시켰다. 경제 분야는 빌더버그 클럽(Bilderberg Club)이 거시 방침을 관장하고, 정치 쪽은 삼각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가 담당했다.

이 조직의 설립 목적은 극소수의 영미 엘리트가 통치하는 세계정부와 최종의 통일된 세계화폐 발행 체계를 수립하고 모든 지구인에게 ‘세계의 세금’을 징수하는, 이른바 ‘신세계 질서’의 수립이었다.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삼각위원회의 핵심 인물이자 데이비드 록펠러의 브레인이었다. 록펠러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두뇌를 모아 미래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이 아이디어는 1972년 초에 처음으로 제기되었으며, 1972년 빌더버그 연례회의에서 집단적으로 광범위한 토론을 거쳐 수용되었다.

브레진스키는 1970년 유명한 『두 시대 사이(Between Two Ages)』를 발표하고 새로운 국제 화폐 체계와 세계정부의 수립을 호소했다. 이 책은 삼각위원회의 ‘성경’으로 일컬어진다. 록펠러재단과 포드재단은 기꺼이 지갑을 열어 삼각위원회의 운영을 위한 재정을 지원했다.

삼각위원회의 주요 회원은 모두 북아메리카 및 서유럽과 일본의 은행가, 대기업 사주와 저명한 정계 인사들이었다. 뉴욕, 파리, 도쿄에 세 개의 본부를 각각 설치했으며 이 세 지역에서 회장을 각각 맡았다. 뉴욕 본부의 회장은 당연히 데이비드 록펠러가 맡았고, 브레진스키는 이 본부의 일상 업무 집행을 담당했다.

브레진스키는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당시 조지아의 주지사 카터를 삼각위원회 회원으로 추천했다. 카터는 데이비드 록펠러가 친히 지명해서 파격적으로 삼각위원회에 가입했다. 이 일은 그로부터 5년 후 카터가 백악관의 계단을 오르는 중요한 첫걸음이자, 그와 브레진스키의 남다른 인연을 맺어준 시발점이 되었다.

젊은 시절의 클린턴 또한 은사 퀴글리의 지도로 삼각위원회와 외교협회의 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대통령을 향한 꿈을 끝내 현실로 만들었다.

삼각위원회는 빌더버그 클럽과 함께 미국 외교협회의 주변기구로서 최고의 기밀과 가장 중요한 결정 사항은 런던과 월가의 극소수에 의해 정해진다. 삼각위원회와 빌더버그 클럽의 주요 역활은 ‘의견 일치’와 ‘조율’이다.

삼각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세계정부’와 ‘세계화폐’라는 거창한 개념을 널리 홍보해 궁극적으로 런던-월가가 축이 되어 통제하는 ‘신세계 질서’를 위한 길을 닦는 것이다.

1975년 삼각위원회가 일본 도쿄에서 열렸고 『세계무역과 금융의 구조조정 개요』라는 보고서를 통해 “긴밀한 트라이앵글(미국,유럽,일본)이 협력해 평화 유지, 세계경제 관리, 경제 발전, 세계의 빈곤국 감소에 힘써 하나의 세계라는 시스템을 향해 평화롭게 갈 기회를 만든다.”라고 천명했다.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 http://terms.naver.com/entry.nhn?cid=98&docId=269297&mobile&categoryId=107

위키백과 : http://en.wikipedia.org/wiki/Trilateral_Commission

위키백과 : 록펠러 재단

2015-04-30  세계 움직이는 엘리트 조직 ‘삼극위원회’ 알고보니…

2014-07-25  240조 달러 쥐락펴락 … 세계 움직이는 그림자 권력

삼각위원회 (삼극위원회, The Trilateral Commission) – 1973년

One thought on “삼각위원회 (삼극위원회, The Trilateral Commission) – 1973년

  • 2016년 5월 5일 at 4:4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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