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 전쟁 – 1991년

냉전이 해체되고 소련이 몰락하고 있을 즈음 일어난 걸프 전쟁(1990년 8월 2일 ~ 1991년 2월 28일, Gulf War)은 사담 후세인이 통치하던 이라크가 쿠웨이트는 과거 이라크의 영토였다며 침략하자,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영국, 이집트, 시리아, 프랑스 등 30여개 나라가 국제 연합의 결의와 미국의 주도 하에 다국적군을 결성해 쿠웨이트를 지원함으로써 벌어진 전쟁이다.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오래 전부터 역사적, 문화적으로 동일한 행정구역상에 속하는 등 많은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지역에서의 석유 자원을 탐낸 영국에 의해 분리되었다. 1961년 쿠웨이트가 영국 보호령에서 독립된 이래 이라크가 쿠웨이트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부터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국경 분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이 전쟁은 장기화되어 휴전하는 1988년까지 8년 동안 전쟁을 지속하게 된다. 이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쿠웨이트는 이라크와 국경분쟁지역에 유전을 설치하게 된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후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유전 설치에 항의하게 되고 이는 쿠웨이트 영토에 대한 침략의 발판이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이라크의 후세인은 자신을 아랍민족주의자, 반제국주의자라고 부르며 쿠웨이트 알 사바 왕가를 제국주의의 하수인이며 아랍민족주의의 배신자라고 규정하고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를 전격적으로 기습, 8월 8일에는 쿠웨이트를 공식적으로 병합했다.

 

마지막 순간에 소련이 중재를 통한 해결을 모색했음에도 이라크군에 대한 대규모의, 그리고 매우 파괴적인 공중 작전이 1991년 1월 15일부터 16일 밤에 개시되었고, 뒤이어 2월 23일부터 24일 밤에는 미군에 의한 지상 작전이 대규모로 전개되었다. 상징적인 이유로 인해 쿠웨이트 시 진입은 아랍연맹군이 맡도록 결정되었고, 이라크군은 2월 27일에 항복을 선언했다.

 

걸프 전쟁은 철저한 하이테크 전쟁으로 현대에 일어났던 어떤 전쟁보다도 가장 일방적인 군사적 승리를 거둔 전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전쟁의 희생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쿠웨이트에 배치되었던 약 55만 명의 이라크군 가운데 최소한 5만~1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15만 명이 부상당했으며, 실종자는 15만 명, 포로는 6만 명에 이르렀다. 반면에 다국적군인 연합군의 사망자 수는 전투중에 사망한 약 130명과 그밖의 사고로 인한 사망자 100명을 합하여 약 230명에 불과했다.

 

그 당시에 촘스키는 걸프전쟁을, 본질적으로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제3세계 민족주의에 대한 미국의 분쇄정책의 일환으로 간주하였다. 촘스키는 또 미국의 제3세계에 대한 개입이 앞으로 더욱 호전적인 성격을 띨 것으로 내다보았는데, 그 이유로 그는 소련 영향력의 감퇴와 더불어 미국이 경제적 쇠퇴로 인한 헤게모니의 약화를 군사력으로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걸프전의 결과로 미국은 중동 지역에서 그들의 패권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991

* 소련의 붕괴 – 1991년 :  http://yellow.kr/blog/?p=725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세계체제 동북아 한반도

–  이수훈 / 아르케 / 2004.02.28

 

…… 미국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이데올로기의 종언’ 명제, 즉 ‘역사종말’론이나 ‘문명충돌’론 등이 형성하는 논의의 흐름은 이전 시대를 냉전에 의한 진영간 적대로 파악하는 한편, 이제 냉전이 종말을 고했으므로 전혀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는 점이 부각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의 사고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거나 현실주의적이고,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대한 승리의식과 더불어 새로운 위협 요인에 대한 경계와 우려도 짙게 배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후쿠야마(F. Fukuyama)와 헌팅턴(S. Huntington)은 미국식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민주주의의 전지구적 승리를 외치는 동시에, 바로 그 세계질서에 이미 균열이 가고 있음을 우려하여그 인식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그와 같은 균열이 표출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1991년 걸프전에 의해 현실화되었다. 해체와 양극화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남북간의 갈등이 급기야 열전으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989년 사태가 없었다면 1991년 걸프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1991년 걸프전은 미국의 일방적 폭격 끝에 매듭이 지어졌지만, 문제의 원인이 해소되지 않았기에 미봉책의 성격이 짙었다. 당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1991년 1월 16일자 연설에서 걸프전을 새로운 세계질서, 즉 정글의 법칙이 아니라 법의 지배로 국제정치를 규정하는 질서 창출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Gurtov, 1999: 13 참조). 그러나 1990년대 세계질서는 그의 비전과 정반대의 궤적을 보이면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많은 분석가들이 지적하고 있다. 즉 새로운 세계 무질서론이나 정글의 법칙 지배가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데 보다 적실성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걸프전 10년 후인 2001년에 ‘9.11 테러’가 발생했다. 무질서와 정글의 법칙을 방치해 세계와 인간공동체가 훼손된 결과가 ‘9.11 사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1989년 이후 미국은 신냉전의 고안을 위해 본격적인 ‘악마 만들기(demonization)’에 나섰다. 소련의 몰락이 갖는 독자적 의미의 하나는 그나마 미국의 노골적 군사력 행사에 제동을 걸어왔던 세력이 사라졌다는 점일 것이다. 파나마의 노리에가 대통령을 시발로 해서 악마는 줄을 이었다. 니카라과의 오르테가, 리비아의 가다피, 이란의 호메이니,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북한의 김정일, 유고의 밀로셰비치 등등 리스트는 길다. 우리로서는 북한이 이 리스트에 포함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일인데, 북한은 미국에게 ‘불량국가(rogue state)’로 낙인찍혀 기존의 봉쇄보다 훨씬 더 가혹한 압박을 받고 있다. 이런 북미관계의 기조는 ‘포용정책’을 내걸었던 클린턴 행정부 아래서도 변하지 않았다. 즉 클린턴 대통령은 사실상 대북포용 정책을 펼쳤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은 남반구의 도전을 상징하는 이들 악마를 제거하기 위해 노골적인 군사적 침공을 서슴지 않았다. 라틴아메리카 지역(파나마, 그라나다, 아이티)를 시발로 해서 1991년 1월 걸프전에서 압권을 이루고 일차적 결말을 본 과정은 미국이 패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군사적 행동도 서슴지 않으며, 언술의 일관성도 전혀 지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1991년 걸프전은 당시 여러 정황으로 보았을 때 외교적 해결이 가능했던 일이었다. 유엔 사무총장이 활발한 외교를 벌이고, 러시아의 막후 절충이 가능해 보였던 것이 당시 국면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후세인이 쿠웨이트로부터의 철군 시한을 넘기기를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이 1월 15일 자정을 기해 대규모 공습을 강행했다. 이라크가 생화학무기를 다량 보유하고 있다거나 스커드 미사일 때문에 전쟁이 만만찮을 것이라는 예측은 모두 허구였다. 그러한 예측은 계획된 과장이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미군이 주축이 된 다국적군의 일방적 공습으로 전쟁은 단기에 이라크의 철저한 패배로 끝났다.

 


거대한 체스판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 김명섭 역 / 삼인 / 2000.04.01

 

…… 서반구는 일반적으로 외부의 영향에서 차단되어 왔기 때문에 미국은 현존하는 다자적 기구에서 손쉽게 중심적 역활을 수행하고 있다. 페르시아만의 특수한 안보 상황은, 특히 1991년 이라크에 대한 응징 조치 이후 경제적으로 핵심적인 지역을 미국의 영향권 안에 묶어 놓고 있다. 심지어 과거 소련의 공간에까지 평화를 위한 협력이라는 형태로 북대서양조약기구와 긴밀한 협력을 추구하려는 다양한 조치가 미국 후원 아래 행해지고 있다.

 


미국의 마지막 기회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 김명섭 역 / 삼인 / 2009.02.18

 

사담 후세인은 다르게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아마도 그는 미국과 소련이 다른 사안들에 몰두하고 있을 때 기회를 포착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아마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의 어떤 강압적인 대응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소련의 존재에 여전히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난 30년간, 소련은 중동에서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점점 더 적극적인 역활을 수행해왔다. 소련은 이집트에서 정치적 기반을 약간 잃었지만(특히, 1970년대 말의 카터-사다트 협력 이후), 여전히 이라크와 시리아는 소련의 무기 원조 수혜국으로 남아 있었고, 이라크의 군사 편제와 전술들은 소련 군사 고문들의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소련이 아직도 이라크의 지역적 야망을 비호해줄 것이라는 생각은 일견 합리적인 것으로 보였다.

사담은 또한 미국이 동유럽 문제로 바쁠 뿐 아니라, 베트남 전쟁의 생생한 기억으로 인해 강력하게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음이 분명하다. 또한 사담은 그가 쿠웨이트 침략 의도를 내비추었을 때, 미국은 별로 관심이 없다는 신호를 보낸 것처럼 보였던 미국 대사와의 대화에 의해 오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너무도 잘못된 계산이었다. 그의 치명적인 오류는 새로운 지정학적 현실들에 대한 오해였다. 1989년과 1990년의 사건들 이후, 부시는 세계 최초의 글로벌 리더로 우뚝 서 있었고, 미국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거의 보편적인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런 구도에서, 사담의 행동은 페르시아만에서 미국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입장(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에 관한 석유 이익)에 대한 도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더욱 중요했던 것은-미국의 새로운 세계 지배력과 부시의 새로운 전 지구적 위상에 대한 도전이었다. 쿠웨이트에 대한 이라크의 역사적 주장이 어떤 정당성을 지녔든지, 이러한 침략은 하나의 도전 행위였다. 부시는 미국이 이 도전 행위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현명하게도 그 대응이 국제법과 다른 국가들의 이익을 존중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1991년 초의 개전 결정은 궁극적으로 부시의 특성과 리더십에 대한 하나의 결정적인 테스트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승리의 지정 전략적 결과들은 불확실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담은 패배하고 굴욕을 당했지만 무력한 상태로 남겨지지 않았다. 이 지역의 불안정한 상태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어갔다.

……

이라크의 사막에서 얻은 승리는 이라크나 지역 전체 모두에 전략적으로 이용되지 않았다. 사담의 도전에 대처함에 있어, 부시-대처 듀엣으로 인격화되었던, 밀접하고 매우 두드러졌던 영미 간의 협력은 미국을 영국의 제국적 외투를 걸치고 거의 영국의 교사에 따라 행동하는 열렬한 계승자로 간주하는 견해를 중동에 확산시켰다. 영국의 제국적 지배나 오스만제국 지배로부터의 해방 이후 성취되지 못한 약속들, 상승하는 아랍의 민족주의에 대해 주기적으로 가해졌던 잔인한 탄압 등에 대한 아랍의 오래된 불만에 관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더없이 무지한 상태다. 음모적 관점에 경도된 많은 아랍인들의 눈에 비친 미국은 다우닝가의 영향력 하에 행동하고 있었고,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그만둔 제국적 유산을 답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

사우디아라비아의 신성지역에 미군이 주둔한 것은 종교적 광신자들이 미국을 증오하는 교리를 분명하게 주장하도록 자극했다. 수니 계열의 와하비파들은 다소 색다른 용어, 일찍이 이란의 시아파 지도자들이 미국을 지칭했던 ‘거대 사탄(Great Satan)’이라는 용어에 공명했고, 지금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우디 과격분자(사우디의 한 부유한 가문 출신의)에 의해 교시된 파트와(fatwa)는 미국을 신성한 이슬람 성지에 대한 신성모독자이며 이스라엘의 주된 후원자로 규정했다. 이로써 알 카에다(Al Qaeda)는 세계무대에 등장했던 것이다.

……

부시의 유산은 또 다른 결점이 있었다. 그는 중동에서 기회를 이용하지 못한 채,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 어떤 전략도 남겨놓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핵무기의 확산에 대한 구속이 부서지기 시작하는 것에 대한 늘어가는 증거들에 대응하는 데 있어서도 더딘 모습을 보였다. 장래의 핵 확산국가들은 걸프 전쟁으로부터 어떤 유해한 결론을 도출해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을 억제하거나 자신들의 이웃 국가들을 억제하기 위해서 핵폭탄은 극히 귀중한 자산이라는 결론이 그것이다.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  윌리엄 엥달 / 서미석 역 / 길 / 2007.10.25

 

이라크는 호메이니의 이란과는 달리 값비싼 대가를 치른 전쟁을 끝내자 막대한 왜채 부담을 안게 되었다. 1988년 이라크는 여러 채권국들에게 650억 달러의 빚을 지고 있었다. 이 부채 가운데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고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도 많은 돈을 빌려주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라크 원유로 상환받을 것을 기대했다. 나머지 부채는 대개 프랑스 · 영국 · 미국 은행들에 진 것이었다. 프랑스는 소련에 이어 이라크의 둘째로 큰 무기 공급국이었다.

……

……1990년 여름 쿠웨이트는 배럴당 19달러 정도의 불안한 가격에서 배럴당 13달러 이하로 유가를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다. 이라크를 비롯한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은 이라크와 경제적으로 심각한 압박을 받는 다른 석유수출국기구 산유국에 대한 고의적인 경제 압력을 중단하도록 셰이크 알사바 쿠웨이트 왕과 알리 칼리파 알사바 석유장관을 설득하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러한 호소가 전혀 먹히지 않았다. 7월, 석유 거래업자들은 유가 수준이 곧 배럴당 10달러가 되어 1986년 상황이 재연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이라크는 옛 채무를 갚기는 커녕 굉장히 시급한 식량 수입조차 할 수 없었다.

그에 앞서 2월, 요르단 암만에서 후세인 대통령은 두 나라 정상 외에 이집트와 북예멘이 포함된 아랍협력회의 동료 회원들에게 동유럽에서의 공산질서 붕괴와 유일한 군사 ‘초강대국’ 미국의 명백한 출현이 함축한 전략적 의미는 아랍 세계를 특별히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이 1년 전에 분명히 끝났음에도 걸프 만에 주둔한 미국 군대와 함대가 철수할 조짐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걱정스럽게 지적했다. 그는 “미국은 오히려 주둔을 계속한다는 성명을 여러 차례 발표하고 있다”고 불길한 어조로 지적했다. 후세인은 소련이 내부 문제에 점차 몰두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소련이 자국의 국내 문제에 몰두하고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나 직접적인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미국이 특히 이 시기에 계속 머무르겠다고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면 이는 특별히 주의해야 할 대목이다.”

2월 발언에서 후세인의 결론은 석유가 풍부한 아랍 국가들이 한데 뭉쳐 “세계에서 비할 데 없는 에너지원을 소유하고 있는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우리가 이 요소로부터 이득을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유럽, 일본, 소련과의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미의 고위 기득권 세력들이 새롭고도 극적인 중동 군사작전을 추진하기로 결심을 굳히게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후세인의 이러한 발언이었다. 유가를 둘러싼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1990년 7월 27일 에이프릴 글래스피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가 긴장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바그다드에서 후세인과의 회담을 요청했다. 나중에 바그다드 정부가 공개하고 거의 1년 후 미국 의회가 확인한 이라크 측의 회담 공식 의사록에 따르면 글래스피는 후세인에게 미 정부는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분쟁에 아무런 입장도 표명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1주일이 못 되어 이라크 군대가 쿠웨이트 시티를 점령했다.

……

199년 9월 11일, 부시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렇게 난국인 시기에는 그 창립자들이 구상한 대로 실행하는 유엔 주도의 신세계질서가 등장할 수 있다. 우리는 진기하고도 특별한 순간에 서 있다. 심각하기는 하지만 페르시아 만에서의 이러한 위기는 역사적인 협력 시대로 나아갈 귀중한 기회가 되기도 하다. 오늘날 저 신세계질서는 태동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이제껏 우리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올 것이다.

……

이라크에 대한 전면적인 경제제재 조치를 강요하는 것뿐 아니라 쿠웨이트 해방을 위한 무력 사용 권한을 승인받기 위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주요 회원국들과 아랍 국가들, 터키와 다른 국가들을 용의주도하게 매수하고 압력을 넣은 지 몇 달 후 부시는 1991년 1월 29일 연두교서에서 “그러므로 세계는 현재의 페르시아 만 위기를 오랫동안 품어온 신세계질서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

유명하게도 1990년 키신저 어소시에이트의 전 회장인 로런스 이글버거는 베이커 국무장관 아래서 차관을 맡고 있었고, 키신저의 옛 부하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이 시기 부시의 백악관 국가안보 특별보좌관이었으므로 걸프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미국의 대외정책을 형성하는 데 키신저의 견해가 주도적이었음을 확증해준다. 게다가 키신저는 이 시기 언론을 통해 대이라크 전쟁을 촉구하고 있었다. 미국 내에서 반대 목소리는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

 


제국의 꿈

–  게르하르트 비스네프스키 / 박진곤 역 / 달과소 / 2004.05.03

 

부를 저렴한 가격으로 빼앗을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원자재의 강탈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미국의 재계와 정계의 지도급 인사들은 탐욕스런 눈길을 던져왔다. 그것은 카스피 분지와 아랍 지역에 매장되어 있는 자원이다. 미국인들의 눈에 비친 사담 후세인의 범행은 그가 사람을 가두고, 고문하고, 죽였다는데 있지 않다. 미국과 이 폭군과의 첫 관계에서 찾아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사담 후세인의 주요 죄목은 그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석유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도 이와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었다. 미국이 한 동안 탈레반 정권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 9월 이전에는 아프가니스탄을 가로지르는 파이프라인 공사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기진맥진한 미국 경제에 지속적으로 저렴한 에너지를 주입하기 위한 파이프라인은 미국에게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

 

인위적인 성장과 번영을 회생시키는 세 번째 방법은 전쟁이다.아직도 전쟁 후 폐허가 된 나라를 재건하는 일이 전쟁을 주도한 쪽에게 귀찮은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1991년 이라크 전쟁에서 새로운 사실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들은 영국과 미국이 이라크 재건사업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다퉜는지 생생하게 보았다. 속사정은 다음과 같았다. 이라크는 자신의 나라 재건사업을 담당한 승전국에 대해서 마땅한 지불을 할 것이고 지불의 수단은 당연히 석유였다. 재건사업의 수주를 따낸 회사는 미 정부 인사들과 관련이 깊은 미국과 영국의 회사들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라크를 폭격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렇다고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왜냐하면 이 폭격은 미국경제의 재건사업계획서에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TV 화면에서 밤에 초록색 점으로 보이는 폭탄이 바그다드에 떨어져 폭발하는 것을 본 사람은 경제회복을 위한 연합군 프로그램의 직접적인 목격자라고 할 수 있다. 아라크 폭격은 아프가니스탄의 경우보다 훨씬 더 이득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과 달리 이라크는 석유라는 확실한 지불수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의 수를 평균 5만 명으로 계산한다면 전쟁과 재건을 통해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은 반전 시위 참가자 한 명당 백만 달러에 이른다는 계산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반박해보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명확한 논거이다. ‘평화란 그렇게 값 비싼 것이라, 우리(미국의 군산(軍産)복합체와 미국경제)는 결코 그 평화를 향유할 수 없다’ 이는 헬무트 크로이츠가 자신의 저서 『머니 신드롬』에 인용하고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다극화체제 미국 이후 의 세계

–  임승수,김애화,안영민,조예재 / 시대의창 / 2010.03.17

 

미국에게 필요했던 것은 쿠웨이트의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적과 새로운 전쟁이었다. 소련의 몰락으로 미국 정부는 군비축소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고 무기업체들은 생산량을 대규모로 감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평화라는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전쟁이 필요했고, 전쟁만이 무기업체를 살리는 길이었다. 이라크는 제2의 소련, 바그다드는 제2의 모스크바, 사담 후세인은 제2의 스탈린이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가 이란을 공격하면서 화학무기를 사용했고, 1988년에는 이라크군이 하랍자에서 쿠르드 인을 학살할 때도 화학무기를 사용했다. 물론 이 화학무기는 미국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미국은 옛 친구인 사담 후세인을 화학무기를 이용해 민간인을 살해한 악마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겠다고 했을 때 미국이 눈을 감은 것도 새로운 적의 화려한 등장을 위한 무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라크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를 계속 폭격했고 이라크 인들은 죽어갔다. 미국정부와 무기업체들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무기 재고량은 줄었다. CNN을 비롯한 미국 언론들은 전쟁을 생중계하면서 큰 이익을 볼 수 있었고 학자들은 테러와 테러리즘에 관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이라크의 북부와 남부 지역에는 비행금지구역이 설치되어 이라크 비행기가 움직이는 것을 금지시켰다.

외국과의 무역을 금지시킨 경제봉쇄의 피해도 곳곳에서 나타났다. 교육과 사회복지 수준이 높았던 이라크에서 식량과 의약품이 바닥을 드러냈고, 상하수도를 비롯해 각종 사회기반시설과 복지정책이 작동을 멈췄다. 어린이 사망자가 급증하고 미국과 유엔을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자 유엔은 1995년에 ‘석유-식량 교환 프로그램’을 허가했다. 석유를 팔아서 식량과 의약품을 사오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96년부터 이라크의 석유수출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석유 판매대금의 상당 부분은 전쟁배상금과 유엔 행정비로 쓰였다.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 경제봉쇄를 하고 전쟁을 벌였다는데 미국은 정말 사담 후세인을 없앨 계획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기 시작하던 1991년, 이라크 남부 지역에서 사담 후세인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만약 미국이 사담 후세인의 제거를 원했다면 이 투쟁을 지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 사담 후세인이 민중들의 투쟁을 진압하도록 가만히 놔뒀다. 미국은 아직 이라크를 직접 점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이라크에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는 쪽보다는 독재자가 있는 쪽이 미국에게는 이익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악마의 역활만 충실히 하면 될 뿐 당장에 사라지면 안 됐던 것이다. 미국이 점령준비를 할 때까지만!

미국이 이라크를 폭격하자 사담 후세인 정권은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을 날렸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맞대응을 하자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미국은 이스라엘을 말렸다. 왜냐하면 ‘미국-이라크’ 전쟁에 이스라엘이 개입할 경우 자칫 ‘미국 + 이스라엘 대 아랍’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미국은 이스라엘에게 PLO와 협상에 나서라고 했다.

 


미국은 군산복합체가 지배하는 영구 전쟁국가

– 가레스 포터(Gareth Porter) / 2001년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1640

– 원문 : From Military-Industrial Complex to Permanent War State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1961년 1월 17일 ‘군산복합체’에 대해 연설한 지 50년이 지난 현재 그 위협은 훨씬 더 강력하고 사악한 세력으로 변했다. 군산복합체는 미국을 ‘영구 전쟁국가’로 만들었다.

미 군사주의 세력은 지난 40년 동안 두 번 크게 흔들렸다. 대규모 전쟁을 혐오하는 여론, 대규모 군사비 지출에 대한 반대, 재정적자에 대한 심각한 우려, 외부위협에 대한 인식 변화 등 4가지 요인이 난공불락처럼 보였던 군산복합체에 타격을 준 것이다.

……

아이젠하워는 고별연설에서 ‘잘못된 권력’의 출현에 대해 경고했다. 그것은 군산복합체가 미국의 국가안보 정책을 장악할 위험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아이젠하워가 재임했을 때 이런 상황까지 가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는 그가 군산복합체에 맞섰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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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이 끝나가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군사적 기득권 세력은 힘과 자원의 상당부분을 상실할 처지에 몰렸다. 하지만 그들은 1990년 중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점령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기회를 얻었다. CIA 국장 출신으로 군산복합체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지 H.W.부시(조지 W.부시의 아버지)는 ‘베트남 증후군’을 종식시킬 전쟁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1991년 걸프 전쟁에서 깔끔한 승리로 얻은 인기를 중동을 대상으로 군사력 사용을 넓힐 명분으로 삼았다.

당시 딕 체니 국방장관은 향후 10년을 대비해 작성한 1992년 군사전략에서 “우리는 우리의 핵심 이익이 새롭게 위협받는다면, 사막의 방패와 사막의 폭풍 작전에서처럼 중동과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결정적인 행동을 할 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시 정부는 걸프 지역의 사우디 등 아랍 정권들에 압력을 넣어 미 공군 기지를 장기적으로 제공하도록 했고, 이후 8년에 걸쳐 미 공군은 이라크 대부분 지역 상공에 ‘비행금지 구역’을 설정한 뒤 연간 8000회의 편대 출격을 했다. 미국은 아들 조지 W.부시 훨씬 이전부터 이라크와 사실상 전쟁 상태였던 것이다.

 


하늘의 지배자 스텔스

–  양욱 / 플래닛미디어 / 2007.05.18

 

미국의 국방예산에서 전술기(TACAIR) 예산, 즉 전투기와 공격기의 개발 및 생산에 들어가는 예산은 지난 20여 년간 평균 18% 정도를 차지했다. 그러던 것이 레이건 행정부 말에 가서는 군비증강방침에 따라 국방예산의 무려 25%까지 늘어났다.

이렇게 엄청난 예산을 갖고 제 각각의 획득사업을 벌이던 미국의 각군이 이들 사업과 관련하여 맞은 최대의 위기는 다름 아닌 1989년의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의 구소련의 해체였다.

냉전체제가 붕괴되면서 국방소요는 예전과 달리 급격히 줄어들었다. 미군은 1991년 걸프전을 거치면서 냉전시절 비축해 놓았던 각종 재고품들을 털어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고도 남은 무기들은 저렴하게 판매하거나 폐기하면서 21세기를 위한 재무장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무기체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전투기에서도 새로운 기술과 개념을 적용한 기체가 필요하게 되었다.

 


변환의 세계정치

–  하영선, 남궁곤 / 을유문화사 / 2007.08.15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내 자본주의 세력은 사유재산의 보호, 자유경쟁, 자유무역을 석유의 공급과 수용에 적용하려 노력했다. 이런 노력은 당시 압도적 자본과 우수기술을 보유하던 미국계 정유회사로 하여금 주요 유전과 정유 관련 시설을 차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미국계 석유산업에 고유가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내 수요감소를 초래하여 궁극적으로 손해를 가져오기 때문에 저유가는 미국계 석유산업과 미국의 국익에 부합했다.

1973년 산유국의 가격담합으로 발생한 1차 석유파동은 자유경쟁과 자원확보를 결합한 세계석유질서에 혼란을 초래하였다. 미국은 산유국을 직접 점령하는 방안까지 고려했지만 수반되는 막대한 비용과 목적달성의 어려움 때문에 산유국을 제재하기보다는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1979년 이란혁명과 이란-이라크전쟁의 여파로 2차 석유파동이 있었지만, 세계석유시장은 1980년대까지 대체적으로 안정을 유지했다.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사건은 패권국인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석유질서를 위협했다. 세계석유시장의 안정을 통하여 가장 큰 이익을 얻는 미국은 1991년 1차 걸프전쟁에서 가장 많은 전비와 병력을 동원했고 석유수입국으로부터 병력과 전쟁비용을 일부 조달했다. 한국은 1차 걸프전쟁에 직접적인 병력을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군수물품 수송에 필요한 항공기와 선박, 전쟁비용 일부를 제공했다.

 


<관련 그림>

 

 

1

사막의 폭풍 작전 전개도

 

2

 

– 걸프 전쟁 당시 어느 국가에서 얼마나 많이 다국적 연합군을 파병했는 지를 보여주는 지도로 미국이 가장 많음을 알 수 있다.

 

 

 

3

4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걸프 전쟁

위키백과 : 걸프 전쟁의 다국적 연합군

위키백과 : 알카에다

네이버 지식백과 : 이라크-쿠웨이트 국경분쟁

네이버 지식백과 : 걸프전쟁(페르시아만 전쟁)

2015-02-06  인류 생존인가 미국 패권인가…USA 군사주의가 문제다

 

걸프 전쟁 –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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