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IMF사태와 아시아 금융위기 – 1997년

1997년 태국에서 시작된 아시아 금융위기와 우리나라의 IMF 구제금융 요청에 대해 자료를 수집해 보았다.

 

동아시아 경제가 높은 성장을 계속한 기간은 엔화 가치가 강세를 나타냈던 86~96년의 10년간이었다. 85년 9월 이른바 ‘플라자 합의’에 의해 엔 달러 환율은 달러당 2백40엔대에서 95년 4월에는 80엔대로 3분의 1 수준으로 급락했다. 그동안 일본은 ‘엔고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아시아에 진출했다. 임금 등 생산 코스트가 싼 아시아를 생산거점으로 삼기 위한 전략이었다. 동아시아는 일본기업의 직접투자 바람을 타고 ‘기적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당시 미국은 저금리와 달러 약세의 시기였다(아래 관련 그림 참조). 달러 자금은 수익률 낮은 미국 시장을 박차고 나와 고금리의 동아시아로 몰렸다. 과잉투자와 거품이 발생했다. 이러던 1995년 초 역플라자 합의로 달러가 강세, 엔화가 약세로 바뀌며 자금의 흐름이 역류하기 시작한다. 외국인들이 동아시아에 묻어뒀던 돈을 달러로 바꿔 이탈하는 과정에서 태국 외환위기가 터진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국내 금융기관들은 싸게 빌렸다고 좋아하던 달러 자금의 상환을 독촉받았는데, 달러를 구할 수가 없었다.

1994년의 미국 금리인상 시기(13개월에 걸쳐 약 3% 인상), 1994년 1월 중국의 위안화 절하와 1995년 4월의 역플라자합의로 인한 달러 강세, 엔화 약세가(아래 관련 그림 참조)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이끈 주 요인인 국가경쟁력의 약화와 경상수지 적자의 확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양털깎기’라는 말이 있는데 그 의미는 국제 금융재벌들이 서민들의 이득을 뺏는 상황을 양털깎기에 비유한 말로 쑹훙빙(宋鴻兵)의 ‘화폐전쟁(貨幣戰爭)’에 등장해서 유명해졌다. 그에 따르면 국제 금융재벌들은 시중에 유동성(돈)을 실컷 풀어놓고 경제적 거품을 조장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투기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런 다음 통화량을 갑자기 줄여 경제 불황과 재산 가치의 폭락을 유도하는데 우량 자산의 가격이 정상가의 10의 1, 심지어 100분의 1까지 하락하기를 기다렸다가 갑자기 나서서 말도 안 되는 싼 가격에 사들이는 데 이를 두고 양털깍기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 금융위기가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으니 우리나라만 해도 2010년 가격으로 3천억 달러 이상의 국부유출이 일어났다는 얘기가 있다.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는 소로스를 비롯한 헤지펀드 세력을 ‘악의 축’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옛날에는 영토를 침략하여 약탈을 하였는데 이제는 여러가지의 세련된(?) 방법이 존재하는 것 같다.

 

IMF(미국이 지배 주주)는 한국에 구제금융 210억 달러를 주는 대가(구제금융 조건)로 ‘자본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외국인들이 대기업과 은행 주식을 마음껏 살 수 있도록 ‘외국인 보유 한도’를 폐지하라는 것. 이후 미국 금융기관들은 주가가 바닥까지 추락한 한국 대기업과 은행 주식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IMF 구제금융이 결정되기 직전, 김영삼 정부의 마지막 희망은 일본이었다. 일본 달러를 빌릴 수 있다면, ‘구제금융 조건’을 강제받지 않는다. 몇 년 안에 벌어서 갚기만 하면 된다. 당시 한국의 최고위 경제 관료가 기자에게 술회한 바에 따르면, 일본 대장성(현 재무성)을 직접 방문해 달러화 대출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와 만난 일본 관료는 고개를 저으며 로버트 루빈 당시 미국 재무장관의 서한을 보여줬다. ‘한국에 자금을 지원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미국이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의도적으로 도발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 ‘호기’를 백분 활용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계체계론적으로 미국의 탈냉전 후의 아시아 전략의 일환이라는 대목도 주의깊게 봐야할 듯하다. 한 예로 일본의 동아시아에서의 헤게모니를 미국이 파괴하는 과정이었다는 것도 있다.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한국사회에 확대되어 왔지만 한국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틀로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지난 IMF 위기 이후, 특히 김대중 정권의 출범 이후이다. 이후 한국 사회는 크게 변했다.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ndel)의 가설인 “어느 도시든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고 있는 중이거나 그렇게 된 도시는, 체계의 지진 운동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첫 번째 장소가 되며 그 뒤  그 지진 운동에서 진정으로 치유되는 첫 번째 도시가 된다.”가 앞으로의 동아시아 굴기崛起를 바라는 우리의 위안이 된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997

 

관련있어 보이는 사건들을 간추려 보았다.

– 1994년 1월 중국의 위안화를 50%나 평가절하

– 1994년 미국 금리인상 시기 : 13개월에 걸쳐 약 3% 인상

– 1994년 12월 : 한국 경제기획원 폐지

– 1994년 12월 : 멕시코 금융위기

– 1995년 1월 :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 1995년 1월 : 일본 고베 대지진 -> 엔화 강세로 진행

– 1995년 4월 : 역플라자 합의로 달러 강세와 엔화 약세로 전환

– 1996년 3월 : 중국과 대만의 갈등

– 1996년 12월 : 한국 OECD 가입

– 1997년 2월 : 중국 덩샤오핑 사망

– 1997년 7월 : 홍콩 주권 반환

– 1997년 7월 : 태국 IMF 구제금융

– 1997년 10월 : 인도네시아 IMF 구제금융

– 1997년 12월 : 한국 IMF 구제금융

– 1997년 12월 : 제1회 아세안+3 회의 개최

– 1998년 8월 : 러시아 모라토리엄 선언

– 1999년 1월 : EU의 단일 화폐인 유로가 유통되기 시작

 


하나의 동아시아

–  박번순 / 삼성경제연구소 / 2010.04.21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는 모두 고투자 · 수출 주도형을 기반으로 하는 ‘동아시아 경제 발전 모델(EAEM : East Asia Economic Model)’을 통해 성공했다. 그러나 두 지역은 중요한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등 동남아시아 선발국들은 투자나 수출의 담당자가 자국기업이라기보다는 다국적기업이었던 것이다.

다국적기업들은 현지의 저렴한 생산 요소를 활용하여 대량생산형 조립산업에 진출했는데, 필요한 부품이나 중간재를 현지에서 조달하기보다는 모기업 혹은 모국에서 수입하고 생산된 제품은 미국 등 선진국으로 수출하는 방식으로 기업 운영을 했다. 이와 같은 다국적기업이 주도하는 동남아시아의 경제 발전은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에서 1970년대 시작되었으나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에는 동남아 전역에 꽃을 피워 1990년대 초반까지 동남아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다국적기업이 주도하는 동남아 선발국의 경제 발전은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첫째, 기술 기반이 강화되지 못하면서 부품산업이 발달하지 못했고, 최종 제품은 소득탄력성보다는 가격탄력성이 높은 상품이 되었다. 현지기업, 주로 화교기업은 정부와 유착하여 내수 일부 부문을 독과점화했고 부동산, 금융, 유통 부문에 집중하면서 수출 부문은 다국적기업에 맡겨두었다. 그러나 다국적기업은 현지의 저렴한 인건비를 활용했을 뿐 기술 이전은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동남아는 중소기업이나 부품산업이 발전하지 못해 중간재나 부품을 해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수출이 늘어나고 경제가 성장했으나 무역수지 적자도 증가했다. 또한 환율 변동은 동남아의 중저급 제품 수출 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본 엔화 환율 변동은 동아시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 가치가 급속히 상승하자 일본의 수출 경쟁력은 저하되었고, 다른 동아시아 국가의 경쟁력은 높아졌다. 엔화는 1989년, 1990년에 일시적으로 약세로 전환되었다가 1991년부터 1995년 전반까지 다시 강세를 유지했다. 이 시기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는데, 특히 일본기업의 투자가 파도와 같이 밀려왔던 동남아의 성장은 눈부셨다. 또한 동남아의 통화들은 미국 달러에 강하게 연동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 엔화에 약세를 유지했고, 그 결과 기업들의 경쟁력은 높아졌다. 그러나 1995년 중반부터 엔화가 다시 약세로 전환됨에 따라 미국 달러에 연동된 동남아 통화는 강세가 되어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수출용 상품 생산에 필요한 부품과 중간재를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던 동남아의 무역수지 적자는 대폭 증가했다.

둘째, 중국의 세계 시장 편입으로 중저급품을 생산 수출하던 동남아는 대적할 수 없는 경쟁자를 만나게 되었다. 중국이 본격적인 개방을 하면서 홍콩 및 대만기업이 중국으로 진출했고, 중국의 경공업 제품이 미국 시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중국의 세계 시장 진출은 가장 먼저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동일한 상품을 수출하는 국가에 큰 타격을 주었다. 중국의 노동력은 동남아 국가들보다 더 저렴했고 더욱 풍부했다.

또한 중국 위안화의 환율 변동은 중국 상품의 경쟁력을 높여주었다. 위안화는 1990년 달러당 4.8위안에서 1993년 5.8위안까지 점진적으로 절하되었는데, 중국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994년 1월 8.6위안으로 대규모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이에 비해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의 통화는 여전히 미국 달러에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1990년대 전반의 호황으로 아세안 각국은 철강, 석유화학, 사회간접자본 등에 투자를 확대했고 동아시아 전체에는 공급 과잉 현상이 빚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 시장에서 공급 과잉뿐만 아니라 환율 문제까지 겹치면서 동남아의 교역 조건은 악화되고 수출은 정체되었다.

태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한 때는 1997년 8월이었다. 태국의 통화인 바트화는 미국 달러에 페그되어 있었는데, 무역수지 적자 급증으로 1996년 말부터 평가절하의 압력에 내몰리고 있었다. 정부는 경제 안정을 이유로 페그제(고정환율제) 유지를 위해 환율을 방어했으나, 1997년 7월 마침내 손을 들었고 바트화 가치는 폭락했다.

외한위기의 원인을 단일한 요인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실물 부문에서는 1996년부터 태국의 수출이 정체한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 상품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 태국 제품의 수출은 1996년 제자리걸음을 했다. 즉 외환위기는 일차적으로 1990년대 전반의 고도성장에 따른 총수요를 억제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출이 갑자기 둔화되고 국내외 투자가들이 태국경제를 신뢰하지 않게 되면서 나타났다. 동남아에서 자본 탈출이 확산되면서 곧이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위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외환위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홍콩을 거쳐 한국까지 파급되었으며, 직접 위기를 겪지는 않았지만 대만과 싱가포르 등의 성장률도 급속히 하락했다.

외환위기는 1980년대 중반 이후 고도성장에 익숙해 있던 동남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태국에서 위기가 발발했을 때 미국 및 IMF는 위기를 단순히 거시경제의 불균형 현상이자 동아시아의 지역적인 문제로 인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위기는 동남아를 넘어 동북아로 확산되었고, 동아시아 경제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1997년 12월 아세안은 금융위기를 다루기 위한 비공식 정상회의에 한국, 중국, 일본 3국을 초청했다. 아세안 10개국과 한 · 중 · 일 3국 정상회의가 최초로 열린 것이다. 1999년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3차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는 공동성명(Joint Statement on East Asia Cooperation)을 발표하며 경제, 사회, 정치 등 여러 부문에서 협력을 다짐했고 아세안+3 체제가 등장했다.

 


한국 경제 20년의 재조명

–  권순우,홍순영,장재철,김용기,손민중 외 / 삼성경제연구소 / 2006.10.30

 

단기외채 비중이 높았던 기형적 외채구조가 외환위기를 초래한 외화유동성 부족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면,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로 인해 외채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경제 상황은 근본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의 1/4분기까지도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대외불균형이 확산되는 상황에 있었다. 경상수지 적자가 확대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요인에 기인했다.

첫째, 원화가치의 고평가 상태가 지속되었다. 경상수지 적자가 확대되고 있었음에도 그에 대응해 원화가치는 충분히 절하되지 못했다. 원화가치가 충분히 절하되지 못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해외로부터 대규모 자본이 유입되면서 원화가치의 하락이 억제된 반면, 중국과 일본의 통화가치가 크게 하락한 데 기인한다. 중국은 1994년 1월을 기점으로 달러화에 대한 위안화 가치를 달러당 5.76위안에서 8.63위안으로 33.3% 절하했다. 이후 중국의 대외수출은 큰 폭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엔화도 1995년 한때 달러당 80엔 수준까지 이르렀던 것이 이후 약세를 보이며 1997년 4월에는 130엔 수준까지 상승했다. 결국 중국 위안화는 대폭적으로 평가절하되고, 일본 엔화는 큰 폭의 약세를 보임으로써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외환위기국들의 통화가치는 이들 통화에 대해 오히려 절상되어 아시아권에서의 환율불균형 현상이 발생했다. ……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에도 외환위기국들의 통화가치가 고평가 상태를 지속하고 불균형이 확대되자 이들 국가들에 대한 자본 공급자들은 불안을 느끼고 자금 회수에 나섰다. 결국 환율불균형은 최종적으로 외환위기라는 파국을 맞아 이들 통화가치가 큰 폭으로 떨어지면서 해소되었다.

둘째, 교역 조건이 악화되었다. 한국의 수출단가는 1996~1997년에 21.0%가 하락했고 그 영향으로 교역 조건은 11.8% 악화되었다. 수출단가 하락과 교역 조건의 악화 현상은 1990년대 중반 동아시아 경제에서 나타난 투자 경쟁과 관련이 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나타난 과잉투자와 과잉생산은 중국 경제의 부상과 일본 경제의 장기침체가 상당한 원인을 제공했다. 중국은 1990년대 중반부터 적극적인 외자유치와 위안화의 대폭적인 평가절하를 통한 수출확대정책으로 경제성장을 도모했는데 이는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수출시장에 상당한 압박을 주게 되었고, 이후 한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의 추격에 위협을 느끼는 한편, 자립공업화를 추구할 목적으로 아시아 NIES 국가들의 주력 산업인 자동차, 화학, 철강 등의 산업에 집중 투자로 대응했다. 그리고 아시아 역내 산업구조의 최상위에 있던 일본은 경제의 장기불황으로 활력을 잃고 첨단산업 등 지식기반산업으로의 이행이 부진해 기존 전통산업에서 아시아 NIES 국가들과 치열한 경쟁을 계속했다. 아시아 NIES 국가들은 그들대로 시장우위 확보를 위해 전통 주력산업과 반도체산업 등에 대한 투자를 확대함으로써 아시아 역내에 광범위한 과잉투자와 제품 가격 하락 현상을 초래했다. 이 시기는 결국 과거 아시아 역내에 형성되어 있던 안행형(雁行型,Flying Geese Model) 발전구조가 와해되고 산업구조의 동조화 현상이 나타나며 경쟁구조가 첨예화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교역 조건의 악화는 경상수지 적자를 확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 이외에도 기업들의 채산성을 악화시킴으로써 기업수익성을 떨어뜨리고 부실을 확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차입자금으로 대규모 투자를 한 대기업들의 경우 제품 가격 하락으로 수익성이 크게 악화됨으로써 부실화가 급격하게 진전되었다.

 


신자유주의시대의 한국정치

–  손호철 / 푸른숲 / 1999.12.28

 

IMF 위기와 관련한 특이한 사항은, 이 같은 엄청난 사건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90년대 소련과 동구 몰락 이후 한국 사회과학계, 특히 진보학계에서 사라져버린 ‘논쟁문화’ 때문이라는 점에서 씁쓸하고 우려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어쨌든 80년대와 같은 본격적인 논쟁은 사라졌지만 위기의 원인을 조명한 다양한 논문과 책들이 나와 나름대로의 주장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특히 이 다양한 주장들은 나름의 원인 분석 속에 불가피하게 그 각각의 처방을 함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바, 그 주장들은 크게 보아 몇 가지로 나누어진다.

우선 가장 ‘근본주의적’인 입장으로서 자본의 과잉 축적 경향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다. 즉, 한국의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가 있는 한 언제,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는 분석으로서, 자본주의를 극복할 때만 이 같은 위기를 피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 입장은 한국 자본주의의 종속적 재생산구조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 경향이다. 이 경우 처방은 종속적 재생산구조의 탈피가 될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주장이 주로 진보적 학자들에 의해 개진되고 있다면, 세 번째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경우로서,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의 투기 행위 내지 ‘워싱턴 콘센서스’라고 불리는 ‘월스트리트-미 재무성-IMF’ 삼각 복합체의 한국기업과 아시아 경제 죽이기 음모라는 주장이다. 이는 일부 학자들 이외에도 재벌과 재벌 경제연구소가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이 경우 국제 투기자본의 규제가 처방으로 제시된다.

네 번째는 국제사회와 한국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입장으로서, 한국 정치경제체제의 문제점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IMF와 김대중 정부가 취하고 있는 입장으로서, 박정희 모형 내지 국가 주도형 ‘관치경제’, 즉 이의 비효율성이 위기의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시장경제와 이를 이루기 위한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처방으로 제시된다.

마지막으로, 이의 대치점에 있는 주장으로서 신자유주의가 경제 위기의 핵심에 있다는 주장이다. 즉, IMF와 새 정부가 처방으로 제시하는 신자유주의는 한국경제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 말기에 중화학공업화의 과잉 투자가 제2차 오일 쇼크와 중첩되면서 생겨나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처음 도입된 뒤 전두환 · 노태우 정권을 거쳐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 전략으로 집약된 바 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결여가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위기의 원인이라고 반박한다. 또 이 중 일부는 이 같은 주장을 더욱 끌고가, 그 간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때문에 박정희 모형과 동아시아 모형을 제대로 실시하지 않아 위기를 불렸으며, 국가 주도의 동아시아 모형으로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위기의 극복책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다양한 주장들은 본문에서 분석한 추상화 수준을 달리하는 경제 위기의 다차원적인 원인들 중 어느 하나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일면적인 주장보다는 본문의 종합적인 분석이 위기 원인에 대한 더 체계적인 이해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세 가지를 새롭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우선 본문에서는 세계체제적 수준에서 과잉 축적 경향과 이에 따른 엄청난 투기자본의 누적, 그리고 지구화와 WTO체제를 지적한바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구체적인 수준, 즉 사건사적인 측면을 하나 더 추가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월스트리트-미 재무성-IMF의 삼각 복합체에 의한 한국경제 길들이기이다. 물론 음모론에 의해 이들의 음모가 있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뭐한 면이 많다. 하지만 분명 위기 과정에서 이들의 일정한 움직임이 있었고, 이를 별도의 요인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자본의 과잉 축적 경향, 그리고 지구화가 투기자본의 세계시장 공략을 설명하지만, 이와는 달리 왜 하필 한국인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점 등 국내적 요인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으로서, 그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위기 원인을 ‘탈냉전’에서 찾고 있다. 즉 냉전 시기만 해도 소련, 중국과 대치하고 있는 동아시아가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할 정도의 자율적 성장은 허용하지 않으면서 공산주의에 저항할 정도의 강한 경제는 갖는 것이 필요하여 미국이 동아시아의 발전 모형을 허용했으나, 소련 · 동구의 몰락 후에는 그 같은 필요성이 없어져서 동아시아도 미국식 모형으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사실은 동아시아를 놓고 벌어진 미국과 일본의 헤게모니 싸움, 즉 ‘제국주의 간의 모순’의 문제이다. 일본은 아시아 지역에 대한 일본의 헤게모니 구축을 위해, 그리고 미국 투기자본으로부터 아시아 경제를 공동으로 대처하여 지켜내기 위해 한국의 강경식 경제부총리 등의 지원을 받아 IMF에 상응하는 아시아통화기금(AMF) 건립을 추진했는데, 이것이 삼각 복합체(월 스트리트, 미 재무부, IMF)의 심기를 건드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위기를 촉발하게 되었으며, 한국이 위기에 처했을 당시도 일본이 한국에게 구제금융을 주려고 했으나 미국의 압력으로 주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

이처럼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한국사회에 확대되어 왔지만 한국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틀로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지난 IMF 위기 이후, 특히 김대중 정권의 출범 이후이다. 물론 김대중 정권의 경제정책은 아직 그 구체적인 상이 완성된 것이 아니며 DJP 연합이라는, ‘보수 · 수구 연합’이라는 정치적인 정파 연합과는 별개로 경제정책과 관련해서도 보수적 신자유주의자들, 즉 영미형 신자유주의자들과 유럽, 특히 독일의 사회적인 시장경제론을 추종하는 개혁적인 ‘민주적 시장경제론자’들, 즉 상대적으로 개혁적이고 부드러운 독일형 신자유주의자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형 모델은 실패한 모델이고 미국형 모형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언명과 지금까지의 정책이 보여주듯이, 김대중 정권의 기본 성격은 신자유주의, 그것도 영미형 신자유주의, 특히 세계체제적 위상과 관련하여 ‘종속적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IMF 관리체제에 따라 외부로부터 강제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김 대통령 자신을 비롯하여 현정권의 경제철학의 발로이기도 하다.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  지주형 / 책세상 / 2011.11.25

 

IMF 위기는 개발국가의 유산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사이에서 방황하던 한국이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은 뜻밖에도 CIA가 예측했던 것과 달리 IMF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응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IMF 구제금융은 진실로 ‘트로이의 목마’였다. ‘트로이의 목마’를 만든 건 그리스인들이었지만 성안으로 들여온 것은 트로이인 자신들이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을 IMF 구제금융으로 몰아간 것은 미국인들이었지만 ‘IMF 플러스’ 개혁안을 먼저 제시하고 받아들인 것은 한국인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IMF 구제금융을 받았지만 IMF 개혁을 충실히 따르지 않은 태국, 인도네시아 등과 달리 한국은 IMF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위기 상황과 IMF의 개입이 그간 진행되어왔던 한국 신자유주의 경제관료의 기업 · 금융 · 노동개혁과 금융 자유화 및 지구화 노력에 한시적이나마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했던 것이다. 그 결과 위기 효과와 위기관리 비용이 다시금 사회적으로 배분되고 금융, 기업, 노동 부문에서 신자유주의적인 금융 · 재무 지향적 행위는 보상을 받았다. 반면에 신자유주의에 부합되지 않거나 저항하는 행위는 처벌을 받거나 폭력적으로 제거되었다. 그리고 한국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로 급속한 전환을 이루었다.

……

1998년 중반부터 위기관리의 초점이 외환 및 외채위기에서 금융 및 기업위기로 이동하고 금융부문의 선정상화와 금융 주도적 산업구조조정안이 확정되면서 정부, 은행, 산업 3자 관계가 새롭게 규정되고 한국 경제는 신자유주의적 체제 전환의 결정적 문턱을 넘었다. 중장기적 산업발전의 논리가 약화되고 단기주의적인 금융건전성과 금융적 수익성의 논리가 3자 관계를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

IMF 위기의 충격을 가장 크게 즉각적으로 받은 것은 노동부문이었다. 1998년 초에 개정된 노동법은 대기업의 정리해고 절차를 비교적 명확히 규정하고 금융위기 상황에서의 인력구조조정을 정당화했다. 강력한 노조들의 반발로 대량 정리해고를 실행하는 것이 여전히 쉽지는 않았지만, 이 법 개정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에 크나큰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새로운 노동법에 의지해 정리해고를 하지 않고서도 재벌이 (고용안정에 대한 대가로) 임금삭감, 명예퇴직, 일시해고(무급휴직) 등을 관철해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기업에서의 대규모 인력 감축 및 노동시장과 고용 관행의 전면적 유연화였다.

……

IMF 위기의 극복은 신자유주의적 경제관료 주도의 경제개혁, 외자 유치와 초국적 자본의 유입, 그리고 재벌 주도의 수출 성장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경제관료, 초국적 자본, 재벌의 권력은 자연스럽게 강화되었다. 이들의 권력은 서로 독립된 상태에서 발전된 것이 아니라 서로 매우 밀접한 연관관계 속에서 발전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지배블록을 여기서는 ‘경제관료-재벌-초국적 자본의 과두권력’이라 이름 지으려고 한다. ‘과두권력’이라는 말을 쓴 까닭은 이들이 때로는 서로 갈등하고 불화하면서도 한국의 자본주의 정치경제를 공동으로 통치하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

IMF 위기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사회적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의 고단한 삶은 고용불안, 노동시간 연장과 상습적인 야근, 자기계발과 재테크, 출산율 저하, 자살률 증가, 타인에 대한 신뢰와 삶에 대한 만족도의 저하를 특징으로 한다.

 


글로벌 경제위기와 인간군상기

–  황상무 / 아이택스넷 / 2012.10.24

 

선진국의 사례를 보면 제조업의 성장잠재력이 떨어졌을 때, 이를 대체한 것은 서비스업이었다. 서비스업의 핵심은 금융이다. 그런데 금융에 대해서 우리에게는 트라우마가 있다.

IMF 위기 극복 과정을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가 ‘지는 머니 게임으로 끌려 들어갔다’는 말을 자주 한다. ‘한국의 IMF위기는 기실 엔 캐리 트레이드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이것만 청산하면 됐는데, 월가의 금융자본들이 이를 막은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동아시아 경제, 특히 한국경제에 뜯어 먹을 것이 많아서 그랬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 산업의 새로운 헤게모니 금융업과 이들이 우리 자본시장을 강제로 개방시키려 하는 음모와 공격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 대처해야 했는데 그 체제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비판의 요지는 이렇다. ‘문제의 본질을 보기 보다는 미국과 IMF의 요구를 국내 경제체제 개혁의 계기로 이용했다. 그 결과 급격한 구조조정으로 상당한 개혁을 이루기는 했다. 기업의 이윤은 올라가고, 부채비율은 떨어졌다. 금융기관은 부실을 털어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국은 낯선 머니 게임으로 끌려 들어갔다. 금융분야가 한국경제의 가장 취약한 부문임을 감안할 때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고, 그 결과 지금까지 2010년 가격으로 3천억 달러 이상의 국부유출이 일어났다’는 비판이다.

이런 류의 비판에는 적지 않은 경제학자들이 동조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은 금융에 현혹되지 말고 제조업에나 신경쓰라고 일갈한다.

……

금융에는 문외한이면서 그저 편하게 돈을 버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제조업을 소홀히 하고 금융업에 뛰어들려고 한다면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지만, 한국은 금융 후진국인 만큼 이를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들리는 이 같은 지적은 마치 80년대 우리가 반도체 사업에 진출할 당시를 연상케 한다.

당시 세계의 거의 모든 경제학자와 기업가들은 한국의 시도에 대해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격이라고 했다. 70년대 우리의 중화학 공업 투자 때 역시 같은 논리였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포항제철을 세울 때, 희망적 전망을 해 준 경제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의 능력을 과신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런 비판에 대해 나는 제조업은 제조업대로 열심히 하되, 낙후된 금융분야도 열심히 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다.

 


한국의 보수, 비탈에 서다

– 정두언 / 나비의활주로 / 2011.10.10

 

…… 미국의 신자유주의는월가를 중심으로 한 금융자본이 세계적 차원의 금융규제 철폐를 통해 세계금융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전략이었다. 세계화Globalization는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김영삼정부는 이 세계화의 위험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한국경제의 선진화를 앞당기는 길이라고 오판했다. 김영삼정부 때 이뤄진 OECD 가입, 금융시장 자유화 등은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졸속으로 이루어져 한국의 금융시장을 월가를 비롯한 세계금융자본의 공격에 무방비상태로 노출시켰다.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이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는 등 무분별한 시장개방을 단행한 직후에 이루어졌다. 당시 정부는 한국기업들이 외국에서 차입한 외화차입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금융실태에 대해 무지했고 통제력도 상실한 상태였다. 외환위기는 이렇게 시장자유주의를 맹신하는 김영삼정부의 무지와 무능이 부른 국가적 비극이었다.

 


좌충오돌 한국정치

–  신기남 / 느루 / 2007.06.08

 

올해로 외환위기가 발생한 지 10년째입니다. IMF 구제금융을 받을 때 ‘6.25 이후 최대의 국란’이라고까지 여겨졌습니다. 이후 일명 ’97년 체제’가 형성되었는데 이 체제가 갖는 현상과 문제점은 무엇이었나요?

 

<정승일> 많은 사람들이 1997년 외환금융 위기의 원인으로 박정희 체제를 이야기하지만, 실은 박정희 체제는 1994년 경제기획원 해체, 1996년 OECD 개방을 즈음해서 이미 해체되었습니다. 따라서 박정희 체제는 외환금융 위기의 원인이 아닙니다. 아무튼 ’97년 체제’, 즉 IMF 관리체제 하에서 박정희 체제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죠. 특히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박정희식 금융체제, 즉 관치금융의 해체가 개혁진보진영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주요 요구가 됨에 따라 금융에 대한 국가통제가 완전히 해체되었습니다. 그 결과 민주주의 국가의 경제적 역활 자체가 위축되었죠.

1998년 이후에 진행된 이른바 ‘시장개혁’은 신자유주의의 교리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과 유동화를 제한해온 기존의 은행제도, 기업제도, 자본시장제도, 외환시장제도가 크게 변화했죠. 그 결과 은행은 생산적 투자에 대한 신용 제공보다는 부동산 대출 등 가계대출에 열을 올리고, 기업들은 미래 성장 투자보다는 현금 보유와 금융 재테크에 열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노동시장 유연화의 결과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기업들은 숙련인력을 제대로 양성하지 않고 설비 투자와 R&D 투자 등 장기 투자를 주저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국제경쟁력 강화보다는 약화쪽으로 시장개혁이 진행되어온 겁니다.

 


동아시아 발전과 유교 문화

–  국민호 / 전남대학교출판부 / 2007.08.30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1960~70년대 한국의 산업정책은 한국의 산업발달 및 경제발전에 크게 공헌했고 그 과정은 한국의 생존을 위한 자주국방 문제와 깊게 관련되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IMF 경제위기 이후 지금까지 비판적으로 평가되었던 박정희 시기의 발전국가와 산업정책에 대해 좀 더 긍정적인 평가가 내려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IMF 경제위기와 산업정책과의 관계는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가? 1997년 당시 한국의 경제위기는 강력한 경제 통제력을 가진 국가의 지나친 간섭 때문에 발생한 것인가? 아니면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당시 정부의 무능 때문에 발생한 것인가? 아울러 한국 경제위기의 주요 요인은 국내의 구조적 요인 때문인가? 아니면 세계화에 따른 경제 자유화 과정에서 정부 정책의 실패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지난 1997년 한국의 경제위기는 체제 비판자들에게는 울고 싶던 차에 빰을 쳐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1987년에 이룩한 민주화운동의 결실 이후 과거 박정희로부터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권위주의적 군부 독재정권은 전 사회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군부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은 그 시기에 행해진 모든 정치 및 경제 행위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당연한 결과로 박정희 정권 하에 진행된 경제성장에 대해서도 그 긍정적인 면은 가려진 채 비판점들이 크게 부각되어 강도 높게 비판되었다. 이렇듯 과거 정권의 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있던 상황에서 1997년 말에 한국에서 발생한 경제위기(주로 외환위기)는 모든 비난을 과거 권위주의 정권 탓으로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거 국가의 경제간섭을 통한 경제발전의 대명사로 불리어지던 국가주도의 산업정책과 박정희 정권 아래서 급성정한 재벌 기업들이 가장 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IMF 경제위기 이후에 쓰여진 한국 경제위기에 대한 분석들은 많은 경우에 경제위기의 내적 책임론을 강조하면서 그 책임을 발전국가와 재벌에 돌렸다.

그러나 경제위기 시기로부터 수년이 지난 오늘날 냉정히 되돌아보면 과거 IMF 경제위기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진단과 처방이 얼마나 옳았는가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든다. 또 한국의 경제위기 이후 지난 10년 가까이 한국의 대기업, 특히 재벌개혁은 비판적 학자들의 충고와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다. 재벌개혁은 도리어 거대 재벌의 안정화 및 경쟁력 강화의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오늘날 한국 경제에서 재벌이 차지하는 위치는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하고 견고해졌다.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IMF 경제위기가 발생할 당시 한국에서의 산업정책은 이미 몇 년 전에 종료된 상태였다. 따라서 한국의 IMF 경제위기는 발전국가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 정부의 세계화 경향에 대한 대응 실패와 정책 부재, 그러한 실패의 틈새를 공략한 국제 투기자금 때문이라는 것이 더 옳은 설명일 수 있다. 즉 IMF 경제위기의 주요 요인을 발전국가의 산업정책으로 인한 내적인 문제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외적인 변화, 즉 세계화에 따른 급속한 금융자유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당시 김영삼 정부의 정책 실패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은 진단일 것 같다.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  강만수 / 삼성경제연구소 / 2005.05.06

 

부즈 앨런 앤드 해밍턴 보고서는 1996년 ‘한강의 기적’은 이미 끝났다고 진단했다. 저임금의 중국과 고기술의 일본이라는 호두가위에 낀 호두같이 힘겹게 생존해 나가야 하는 것이 1997년 우리의 운명이었다.

1996년 3년간의 누적적자 규모는 372억 달러이고 외환보유고는 적정보유고 360억 달러에 미달하는 332억 달러에 불과했으며 총외채는 1,634억 달러로 GDP의 31.4%였다. 공공외채가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준이다. 제조업의 경우 부채비율은 301.5%였고 경상이익으로 차입금이자를 겨우 갚는 상태였다.

‘한강의 기적’은 빚더미로 변해버렸다. 중국이 시장경제로 전환하기 시작한 1985년까지 ‘한강의 기적’은 빚더미 위의 기적이라 해도 냉전체제의 도움으로 관리가 가능했다. 1992년 소련의 붕괴로 냉전체제가 완전히 붕괴된 후 우리가 기댈 곳은 없었다.

우리경제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와 같이 여러 번의 외환위기를 맞았다. 냉전체제에 의한 ‘한 · 미 · 일 특수관계’와 ‘월남전 특수’, ‘중동건설 특수’라는 외생변수에 의하여 넘겼을 뿐이다.

……

네 번의 외환위기가 있었지만 자기자본을 충실히 하고 뼈를 깎는 구조조정의 노력보다 냉전체제의 산물인 한 · 미 · 일 특수관계, 월남전 특수, 중동건설 특수라는 외생변수에 의존하여 위기를 넘김으로써 위기불감증에 걸리게 되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3년 동안 372억 달러에 가까운 경상수지 적자가 늘어나는데도 원화를 절상하는 방향착오에 의해 위기는 가속되었다. 1997년에 와서야 금융감독 체제를 개편하고 ‘부실채권정리기금’을 조성하여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떨어진 대외신인도를 높이려는 노력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동남아에 몰아닥친 외환위기를 자력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IMF긴급자금지원’이라는 타력에 의하여 위기를 넘겼다. 구조조정을 위한 개혁조치들은 IMF의 자금지원이 있은 후에 IMF경제프로그램에 의하여 입법화되었다.

 


지연문명

– 르우안웨이 / 최형록,김혜준 역 / 심산 / 2011.05.10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가 발생한 후 동아시아 각국은 이 거대한 곤경에 직면해 힘을 합쳐 협력하고 상호 긴밀히 공조했다. 이는 동아시아 통합이라는 거대한 추세 및 중국 · 일본 · 한국 · 동남아시아가 지연 일체성에 기반을 둔 상호 의존 관계에 있다는 것을 더욱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 1997년 이전 중국과 미국 및 일본을 포함한 몇십 개의 환태평양 국가로 구성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고, 더욱이 서양인이 주도하는 국제통화기금(IMF) 또한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국제기구였다. 하지만 APEC은 북미와 남미 및 오세아니아를 포함해 너무 많은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조직이 지나치게 방대하고 복잡했다. 지나치게 많은 국가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모두를 만족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들 사이의 대립도 심각해져 통일된 의지를 형성하여 갑자기 발생한 아시아 금융 위기에 대처할 열의와 역량도 보여주질 못했다. 가장 일찍 금융 위기의 타격을 입은 아시아는 내부의 여러 대립과 핵심 국가의 결핍으로 인해 위기를 완화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도출해내지 못했다. 미국과 기타 서양 국가들은 이 위기에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고,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기대한 것처럼 아시아의 현실에 부합하는 문제 해결 방안을 내놓지 않았다. 처음에 동남아시아와 기타 아시아 국가들은 IMF에 큰 기대를 걸면서, 금융 위기 해결을 진지하게 돠와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서양인이 주도하는 이 국제기구의 언행은 오히려 “시야의 편협함과 정치적인 무지”를 드러냈고, 이로 인해 아시아 국가들은 대단히 실망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태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국은 위안화 절하를 하지 않기로 정중하게 승낙했고 일본은 아시아통화기금을 건립하여 위기를 해결할 것을 건의했다. 중국은 자국의 재력이 탄탄하지 않고, 자국의 금융 또한 충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구하기 위해 많은 자금을 투자했다. 예를 들면 태국에 투자한 금액만 10억 달러였다. 일본도 탄탄한 재력으로 거액의 자금을 투자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과 IMF는 구체적인 구제 방안도 내놓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일본이 제기한 아시아통화기금 설립 건의 또한 부결시켰다. 이러한 여러 상황들로 말미암아 동아시아 각국은 먼 친척은 가까운 이웃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제1차 아세안 + 3 회의가 1997년 7월 금융 위기가 발생한 수개월 후인 그해 12월에 열렸다. 바로 이는 APEC이 교착 국면에 빠진 후에 발생한 일이다. 이는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도 아니었지만, 또한 결코 순전히 우연의 일치만도 아니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1985년 G7의 플라자 회의에서 일본에 강제된 미국 달러에 대한 엔화의 상대적 평가절상은 미국 달러에 투자한 일본 자본에 엄청난 손실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의식하지 못한 것이지만, 이는 또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심층적으로 그리고 광범하게 뿌리를 뻗어 나가는 일본 자본의 힘을 강화시켰다. 아래의 도표가 보여 주듯이, 일본의 해외 직접투자가 새로운 고조를 경험하고 지역적 산업 팽창의 제2 라운드가 시작된 것은 바로 1985년 이후였다.

아리기

– 도표 : 동아시아 흐름의 공간, 20세기 말 / 출처 : Ozawa(1993:143)

 

일본 자본이 이 방향을 향해서 더 나아갈수록, 일본 자본은 미국의 보호력과 구매력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졌다. 앞서 지적했듯이, 전반적으로 정체 상태에 있고 점점 더 침체되는 세계경제 속에서 동아시아 시장은 가장 역동적인 팽창 지대가 되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일본 자본의 초민족적 팽창이 더욱 자국 가까이로 방향 전환됨에 따라 등장한 새로운 두 번의 지역적 산업 팽창 라운드는 냉전 시대의 오래된 적들을 상호의존적인 두텁고 넓은 상업망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 이 지역의 보호비용은 크게 줄어들었고, 그에 상응해 세계의 새로운 작업장으로서 동아시아의 경쟁우위는 증가했다.

이런 떠오르는 동아시아 축적체제가 구(미국)체제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의 최종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직 말하기에 너무 이르다.

……

한편에서, 미국은 세계적 규모에서 폭력의 정당한 사용을 거의 독점-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1987년 이후 강화된 거의 독점 상태-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금융적 부채가 거대하기 때문에, 미국은 세계 유동성을 통제하는 조직들의 용인이 있을 때에만 계속 그럴 수 있을 뿐이다. 다른 한편에서, 일본과 동아시아 자본주의 군도의 더 작은 “섬들”은 세계 유동성을 거의 독점- 이 또한 동독 통합 이후 서독의 금융력의 쇠잔과 더불어 1987년 이후 거의 독점 상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군사적 방어능력이 엄청나게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세계적 규모에서 폭력의 정당한 사용을 통제하는 조직들의 용인이 있을 때에만 계속 그러한 거의 독점적 상태를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

서구의 전통적 권력 중심지들이 어떤 수단을 가지고 이런 통제권을 획득하고 유지할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물론 그들은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발전 경로를 따라서 그런 잉여자본에 대한 통제권을 재확립하려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의 마지막 기회

–  Z. 브레진스키 / 김명섭 역 / 삼인 / 2009.02.18

 

중국이 전 지구적인 상호 의존에 점점 더 연루되어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이득이었지만, 클린턴의 임기 중 다른 두 가지 사태 전개는 세계 문제에 있어 대서양 공동체의 장기적인 역활에 잠재적으로 더욱 근심거리를 가져다주었다. 그중에 하나는 아시아의 금융 위기였고, 다른 하나는 초국가적 규범의 적용 범위를 두고 증대하는 유럽과 미국 간의 균열이었다.

일본의 심화된 금융 침체에 의해 시작되었고, 대규모의 부동산 및 금융 투기(태국의 외환 보유고에 대한 미국 외환 딜러들의 공격을 포함한)에 의해 촉발되었던, 1997년 동남아시아의 심각한 금융 위기는 빠른 속도로 대만과 남한으로 퍼져나갔다. 미국은 처음에 더디게 반응했지만, 1998년 초 미국의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Robert Rubin)은 수습 노력을 기울였고, 이것은 뒤늦은 안정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금융 위기가 대부분 미국의 탓이라는 합의된 의견이 아시아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이 위기의 책임을 미국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IMF의 정책에 물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조심스럽지만 건설적이었던 중국의 행동(위안화에 대한 평가절하를 하지 않은 결정을 포함한)과 더불어, 중국과(또는) 일본의 주도하에 미국과 유럽연합의 금융에 덜 의존적인 형태의 지역 협력에 관한 동아시아인들의 증대하는 관심을 고무시켰다.

 


21세기 자본

–  토마 피케티 / 장경덕 역 / 글항아리 / 2014.09.12

 

자본통제는 또 다른 문제다. 1980년대 이후 부유한 국가들의 정부는 대부분 자산의 소유권에 관한 정보의 국제적인 통제나 공유 없이, 완전하고 절대적인 자본이동의 자유화를 옹호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국제기구들은 최신의 경제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같은 정책들을 장려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러한 움직임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의해 추진되었으며, 소련의 몰락, 자본주의와 자율적인 시장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특징지을 수 있는 특별한 역사적 순간의 사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8년의 금융위기 이후, 이런 접근 방법이 과연 현명한 것인지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향후 수십 년간, 부유한 국가들은 점점 더 자본을 통제하려 들 것이다. 신흥국들은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로 이런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이 위기는 국제사회가 인도네시아, 브라질, 러시아 같은 나라들에 처방한 ‘충격 요법’ 정책들이 언제나 현명한 조언은 아니며 그들 스스로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는 확신을 주었다. 또한 그 위기는 일부 국가가 외환 보유액을 과도하게 축적하도록 부추기기도 했다. 이런 정책이 세계 경제 불안에 대한 최선의 대응은 아닐 수도 있지만, 단일 국가들이 주권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경제적 충격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한다는 면에서는 장점도 있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  노암 촘스키, 베로니카 자라쇼비치, 드니 로베르 / 시대의창 / 2002.11.18

 

결국 모든 면에서 우리 경제는 자유경쟁체제의 껍데기만 흉내내고 있다는 뜻입니까?

금융 부분을 제외한다면 그렇습니다. 실제로 금융시장은 완전히 개방되었습니다. 어떤 규제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경제만이 아니라 사람까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금융위기가 반복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997년 아시아의 금융위기도 시장의 규제장치가 마비된 결과였습니다. 일반적인 관측에 따르면, 금융의 탈규제화 때문에 고도 성장과 공평한 분배로 정의되는 50년대와 60년대의 황금시대가 끝나고 대다수 국민의 실질임금의 정체나 하락, 노동시간의 증가, 사회보장제도의 악화, 민주주의의 쇠퇴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가 금융시장의 탈규제화와 거의 동시에 닥친 것이 사실입니다.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단순한 시간적 일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반면에 생산체제는 금융체제만큼 탈규제화되지 않았습니다. 비교 자체가 어리석은 짓일 정도입니다. 게다가 공공분야는 여전히 국가의 주도 하에 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말해 볼까요? 고전경제학파의 자유무역론은 다국적 기업의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새로운 무역 협정으로 다국적 기업은 자국민과 동등한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제너럴 모터스가 멕시코에 공장을 세우면 멕시코 기업과 똑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하지만 멕시코 시민이 미국에 가서 미국 시민과 똑같은 대우를 받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요컨대 사람은 현지 국민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할 수 없지만, 유기적 존재인 기업은 그런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고전경제학파의 자유무역론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애덤 스미스가 다시 살아나 이런 작태를 본다면 아마도 무덤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을 것입니다.

 

IMF는 이런 경제환경에서 어떤 역활을 하고 있습니까? IMF도 세계 경제를 이런 상황으로 몰아간 주역의 하나가 아닐까요?

물론입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역활을 해낸 주역입니다. 한 나라가 파산 상태에 빠지면 IMF가 재정 지원에 나섭니다. 그런데 IMF가 인도네시아에 돈을 보냈다고 했을 때 그 돈이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투자자와 대금업자, 쉽게 말해서 은행에게 돈이 넘어갑니다… 어중간한 반半 자본주의 체계에서는 투자의 위험도가 클수록 수익도 비례해서 커집니다. 이 둘은 언제나 한 쌍입니다. 요컨대 지갑을 두툼하게 하려면 위험한 분야에 투자해야 합니다.

하지만 위험한 곳에는 최소한의 돈을 투자하는 것이 원칙 아닙니까? 그런데 IMF는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언젠가부터 투자자들은 인도네시아나 태국처럼 위험한 나라들에 서슴없이 투자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와 같습니다. 문제가 생기는 즉시 해당국의 공공자금이 투여되니까요. 이 때문에 경제학자들이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라 칭하는 현상이 심화될 뿐입니다. 이런 체제는 결코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

 

회계 분산이 더 큰 문제인 듯합니다. 요즘 들어 회계 분산을 위한 거점들이 확산되고 있는 듯합니다 ….

그런데 그런 거점들이 지리적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1999년 11월 의회가 중국과의 통상을 승인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만약 모든 것이 미국의 의도대로 진행된다면 미국은 중국의 금융시장까지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중국의 은행들과 투자금융회사들이 모두 미국계 금융기관들에 종속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미국의 목표이자 목적입니다. 미국이 한국에게 시장을 개방하라고 압력을 가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한국의 금융시장은 완전히 미국의 지배 하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은행들이 연이어 파산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이제 미국계 금융기관들이 한국의 은행들을 떡 주무르듯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습니다.

 


중국은 신자유주의에 함몰하지 않았다

– [프레시안 books] 자본주의 이후 <3> 조반니 아리기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첫 번째

 

훙호펑의 책 <중국 자본주의를 바꾸다>에서 앨빈 소는 중국이 개혁-개방 초기에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따르다가 2000년을 전후해서 국가발전주의로 방향을 돌렸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아리기는 중국이 신자유주의 노선에 따른 일이 없었다고 본다. 시장 개방, 무역 자유화, 외자 유치 등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워싱턴 컨센서스의 방향으로 움직이기는 했지만 맹목적으로 따라간 것이 아니라 자국 이익에 부합하는 범위에서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고 있었던 것이며, 1997년 동아시아(동남아시아 포함)를 휩쓴 경제위기에 큰 타격을 받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한국의 경험으로 볼 때 1990년대의 국제자본은 칼자루를 쥔 입장이었다. 워싱턴 컨센서스를 서둘러 따르지 않고 있던 한국은 국제자본의 철수로 디폴트 상황에 몰려 IMF의 칼질을 당해야 했다. 자본을 계속 유치하려면 신자유주의 노선을 충실하게 따라야 했다. 중국이 자기 필요대로 완급을 조절하면서도 자본을 유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 첫 번째 의문이다.
이 의문에 대한 아리기의 대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화교 자본의 역할이고 하나는 중국 시장의 엄청난 덩치다.

 


경제독법

–  곽수종 / 원앤원북스 / 2009.09.01

 

한국경제가 3저 호황을 누리던 때 밖에서는 일본과 독일을 상대로 한 미국의 ‘폭탄 돌리기’가 시작되었다. ‘제1차 플라자 합의’의 요구가 그것이다. 이미 1 · 2차 오일쇼크를 통해 세계경제의 불균형이 어느 정도 조정되었으나 충분치 못했다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균형조절이 필요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출범한 GATT의 다자간 자유무역주의는 서독과 일본이라는 신흥선진국을 탄생시킨다. 한쪽이 뜨면 다른 한쪽이 반드시 지게 마련이므로 미국 제조업은 독일과 일본의 부상으로 직·간접적인 구조조정의 압력에 직면하게 된다.

미국 제조업의 성장 한계를 나타내는 물적 증거로는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들 수 있다. 미국경상수지 적자 규모가 크게 증가했던 시기는 크게 1950년대 중반 이후, 1970년대 초반, 그리고 1980년대 초반 2차 오일쇼크 기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 가운데 1950년대와 1970년대 쇼크는 금리인상정책을 통해 거의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초반에 발생한 오일쇼크, 즉 공급측면의 비용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과 미국경상수지 적자 확대로 글로벌 환율정책을 통해 새로운 해결을 시도하게 되는데, 제1차 플라자 합의가 그것이다.

 

독일과 일본의 수출 주도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제조업 중흥이 원유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상승과 미국의 경상수지적자를 주기적으로 발생 시키는 원인으로 지적된 것이다. 1985년 이루어진 제1차 플라자 합의는 미국이 산업구조를 금융산업 중심으로 재편하는 데 소요된 경비, 즉 경상수지 적자의 공동부담을 요구한 것이다. 제1차 플라자 합의가 바로 독일과 일본에 이러한 자국의 구조조정 비용을 공유하자는 것이며, 이에 독일과 일본은 ‘죄수의 딜레마’의 해법처럼 모두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독일과 일본의 합의에 의해 제1차 플라자 합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자, 한국 및 동남아 국가들에게 예상치 못했던 기회가 오게 된다. 당시 3저 호황이 그것이다. 이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소위 네 마리 용이라고 불리던 한국 · 홍콩 · 싱가포르 · 대만의 경제성장 주요 배경이기도 하다. 또한 독일과 일본은 마침내 ‘탈냉전’의 난기류 속에 통일과 부동산 버블붕괴에 의한 장기침체를 맞게 되고, 멋모르고 앞만 보고 나가던 아시아 신흥개도국들은 1998년 그동안 말로만 듣던 외환위기의 막강한 파괴력을 몸소 경험하게 된다.

 

1985년 제1차 플라자 합의로 일거에 경상수지 적자문제를 일소한 미국은 명실상부한 세계경제의 1인자로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취하게 된다. 실리라 함은 냉전시대에 세계경찰국가로서 지불했던 비용을 탕감받고, 부채에 대한 부담 없이 IT산업을 근간으로 하는 금융산업의 급속한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1990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페레스트로이카 · 글라스노스트로 인한 동독과 소련연방의 해체는 1917년 볼세비키 혁명 이후 지속해오던 이데올로기적 대립구도를 완전히 붕괴시켜버린다. 미국은 탈냉전으로 나타날 수 있는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 또는 ‘공백’ 현상을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에 대한 연합군의 응징, 즉 ‘사막 태풍(desert storm)’으로 잠재운다.

 


외환위기 징비록

–  정덕구 / 삼성경제연구소 / 2008.06.10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의 독특한 아시아적 가치를 토대로 제조업을 중심으로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일본은 공동체를 중시하면서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시장 경제모델을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일본식 경제모델은 일본 기업의 특징인 ‘종신고용제’를 통해 잘 설명된다. 일본 기업들은 정리해고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경제 전반에 “같이 먹고살고, 죽게 되면 함께 죽는” 가치체계가 구축돼있다. 일본의 이 같은 경제모델은 국내에서 끝나지 않고 국제 관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엔 블럭’이라 불리는 일본의 ‘대 아시아 정책’의 이면에는 공동체의식이 도사리고 있다는 얘기다. 일부 학자들이 일본의 ‘대 아시아 정책’을 일컬어 ‘신 대동아공영권’이라고까지 몰아붙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은 우선 전통적인 우방인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일본식 경제모델에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일본은 1997년에 IMF에 비견되는 AMF를 창설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미국의 강력한 견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일본은 AMF 구상을 가시화시키기 위해 1997년 10월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소위 ‘마닐라 프레임워크(Frame Work)’라는 모임을 주도한다. 일본은 1997년 태국에서 발발한 동남아시아 외환위기를 계기로 AMF 창설 필요성을 설파했다. 예컨대 세계를 무대로 하는 IMF의 활동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아시아권에서는 별도의 통화기금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당시 우리나라도 일본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의 AMF 구상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이 AMF를 통해 엔 블럭을 형성하고, 이를 발판으로 아시아에서 경제적인 맹주 역활을 맡으려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국의 판단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일본은 침체의 늪에 빠져 있는 자국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 AMF를 통해 아시아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으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한국 경제가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가자 국내 일각에서는 미국이, 특히 월스트리트에서 한국을 길들이기 위해 한국의 외환위기를 조장했다는 주장, 요컨대 ‘미국의 음모설’을 제기했다.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럴듯하다고 해서 모두다 사실은 아니다. 미국은 한국의 외환위기를 자국의 이해에 맞도록 이용하기는 했지만 한국의 외환위기를 일부러 일으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관련 그림>

 

1

– 1985년부터 달러가 약세로… 1995년부터 달러는 강세로

 

 

달러인덱스와역사적이벤트

– 달러 인덱스와 주요 역사적 이벤트

 

 

2

– 미국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 / 1993년~1994년은 금리 인상기이다.

 

 

3

– 당시 중국 위안화와 일본 엔화의 약세. 1994년 1월 중국의 위안화 절하는 1994년 4월 미국 금리 인상과 더불어 멕시코의 외환 위기는 물론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이끈 발판을 제공했다는 분석이 있다.

 

 

4

–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국가

 

 

5

– 한국 종합주가지수가 1994년 11월에 고점을 찍고 IMF 사태까지 하락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아시아 금융위기

위키백과 :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

2015-10-29  비전문가, 금융정책에서 손 떼야

2015-05-29  급격한 자본유출입…금융시장 충격 우려

2015-04-10  “중국은 신자유주의에 함몰하지 않았다

2015-02-27  중국은 보았다 1997년의 한국을

한국 IMF사태와 아시아 금융위기 – 1997년

3 thoughts on “한국 IMF사태와 아시아 금융위기 –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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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년 12월 20일 at 10: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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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약달러추구 엔화강세
    경쟁력약화 자구책 엔화 해외진출.
    저금리 달러유동성 아시아 침투.
    달러회수 유동성고갈 위기발생
    자산붕괴 자산침탈
    로컬통제력 확보

    현재 그리고 미래-
    유럽크레쉬플랜
    미국금융혼란 달러약세 저금리 풍부한 유동성 해외진출
    부채위기감 자본이동 자산상승
    세제개혁 금리인상 자본유입 강달러
    유럽 3국 일본 등 부채 적자 위기전염
    자본유입 가속 초강달러
    주변부붕괴 내부분열 코어붕괴
    대붕괴 대침체
    글로벌 통제력 확보
    뉴시스템 뉴퓨덜 빅브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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