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불국사 다보탑 – 국보 제20호

※ 황성열의 세계 – 문화재 : http://yellow.kr/nt.jsp

※ 국보 제20호 / 경주 불국사 다보탑 (慶州 佛國寺 多寶塔) / 1962년 12월 20일 지정 / 경북 경주시 불국사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문화재청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29m, 10.75m로 비슷하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현재 1마리의 돌사자가 남아있다.

불국사 대웅전 앞의 유명한 두 탑인 석가탑과 다보탑.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 1채의 대웅전과 2기의 탑)이 기본인 통일신라 가람 배치에 따라 모셔진 탑들이지만 다른 통일신라시대 탑들과 차이가 뚜렷하다. 모양이 비슷한 두 탑을 대웅전 앞에 모시는 것이 당시의 통례인데,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은 형태나 모양 그리고 이름이 확연히 다르다. 왜 이런 탑을 모셨을까. 석가탑의 본래 이름은 ‘석가여래 상주常住 설법탑’, 다보탑은 ‘다보여래 상주常住 증명탑’이다.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누구인가. 석가여래는 현세의 부처님이고, 다보여래는 과거불이다. 왜 이 두 분이 같이 서 있을까. 『법화경』에 그 연유가 나온다.

법화경의 28품 중 제11의 견보탑품(見寶塔品)은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모습을 담았는데, 석가모니의 설법 중에 탑의 생성과 함께 밀교부처인 다보여래가 나타나 가람의 배치에 영향을 준 매우 중요한 경전이다.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대중 앞에서 묘법 연화경을 설設할 때 다보탑(多寶塔)이 석가모니 앞에 나타난 후에 다보여래(多寶如來)가 나타나 석가모니의 설법에 대하여 칭송하면서 보배탑의 자리 중 반을 내어주며 석가모니와 같이 다보탑에서 결가부좌를 하였는데, 이때 석가모니가 신통력으로 대중과 함께 허공에 있게 된다. 이러한 견보탑품에 나타난 이불병좌(二佛竝坐)의 내용은 탑의 존재성과 함께 탑 속에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공존하여 2부분으로 나뉘었다는 사실, 두 여래가 만나서 모든 대중에게 묘법과 함께 신통력을 행했다는 사실 등은 쌍탑식 가람의 구성원리로 알려져 있다.
 

110181403594_1
법화경에 의하면 다보 부처의 화신인 다보탑에는 5,000개 난간에 문 없는 작은 방이 천만 개나 되고 무수한 깃발이 휘날리며 억만 개의 화려한 방울이 달려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4면에선 아름다운 향이 뿜어 나오고 하늘에서 둥근 꽃이 비오듯 뿌려졌다 하니 지극히 화려한 모습이랄 수 있다.

다보탑은 그 어느 탑보다 복잡한 구조지만 거기에 담긴 사상은 아주 단순하다.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힌 네모난 중생이 정진하여 그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면 팔각으로, 다시 원형으로, 이렇게 원만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탑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 수행을 통해 불교의 최고 경지를 상징하는 연화세계(蓮花世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며, 난간에 숨겨진 대나무 기둥은 이 연화세계에 이르려는 꺾이지 않는 힘의 상징이다. 다보탑의 돌사자도 이런 부처의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필요한 상징적 조형물인 것이다.
 

다보탑 자체는 신라의 독창적인 작품은 아니다. 다보탑은 칠보로 장식된 화려하고 장엄한 탑으로 묘사되어 법화신앙이 팽배하던 남북조시대에 중국인들이 건설하기 시작했다. 당나라 고종 건봉(乾封) 2년(667)에 혜상(惠祥)이 지은 ‘홍찬법화경(弘贊法華經)’에서 여러 기의 다보탑 건립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고 최완수는 적었다.

‘동진(東晋) 애제(哀帝) 흥녕(興寧) 2년(364)에 혜력(慧力)이라는 승려가 건강(建康; 현재 남경) 와관사(瓦官寺)에 돌로 다보탑 하나를 만들었다. 송(宋) 문제(文帝) 원가(元嘉) 5년(428) 팽성(彭城) 사람 유불애(劉佛愛)가 건강에 다보사를 짓고 또 다보탑 하나를 지었다.

제(齊) 고제(高帝) 건원(建元) 원년(479)에 예주(豫州)자사(刺史) 호해지(胡諧之)가 종산(鍾山)에 법음사(法音寺)를 지으니 사인(舍人) 서엄조(徐儼助)가 석조 다보탑 하나를 지었다. 당나라 국자좨주 소경(簫璟)은 난릉(蘭陵) 사람인데 양무제의 현손으로 누님이 수양제의 황후가 되었다.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집안 대대로 불법을 깊이 믿었으므로 수양제 대업(大業, 605~616년) 중에 스스로 ‘법화경’을 외우다가 경문(經文)에 의지하여 다보탑을 만들었는데 전단 향나무로 하였다.’

이 글을 보면 4세기 중반부터 7세기 중반까지 300여 년 동안 중국에서는 다보탑이 끊임없이 조성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현재 중국에서는 기록에 남은 다보탑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으므로 중국 다보탑의 형식이 어떠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운강석굴에서 보이는 다보탑 안에는 항상 지붕과 탑신을 갖춘 일반형의 목조다층탑 양식으로 하층부에 다보불과 석가모니불이 함께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이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불국사 다보탑도 중국에서 건설된 역대 다보탑을 참고한 후 그 틀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가미하여 만들어낸 것으로 추정한다. 불국사 다보탑은 중국식의 누각형 층탑개념에서 벗어나 스투파(stupa) 원형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국의 석탑양식으로 변모시킨 작품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110181403594_2
쌍탑식 가람 배치

※ 네이버 지식백과(한국 미의 재발견 – 탑) : 탑과 금당과의 관계, 가람배치

불국사에서 다보탑을 특별히 대웅전 마당 동쪽에 배치한 것은 다보여래가 동방보정세계의 교주이기 때문이다.
 

110181403594_3
기하학적인 의미는 … (동아사이언스 2010년 7월 28일)
 

110181403594_4
다보탑 상층기단 중앙에는 네모난 돌기둥이 있다. 아래에 주춧돌이 있고 머리 위에 주두를 얹었다. 네 기둥과 가운데 기둥은 오방(五方)을 뜻하는데 오방은 티베트 불교에서 우주의 표상이다.

다보탑의 돌기둥과 기둥머리 위의 주도柱頭 – 문화의 세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신영훈 : http://www.hanok.org/main/about/press_view.html?pageNum=13&pageSize=10&seq=386 )
 

110181403594_5
 

110181403594_6

◎ 다보탑 돌사자 일지
   1904년 : 세키노 다다시 ‘한국건축조사보고’에 “기단 네 모서리에 돌사자 있음”
   1909년 : 세키노 다다시 ‘조선건축과 예술’에 “돌사자 1쌍 없어짐”
   1936년~44년 : “다보탑 돌사자 한 마리 극락전 앞 보존” 기록
   1952, 53년 : 정영호 당시 서울대 사범대생, 역사답사에서 극락전 앞 돌사자 목격
   1962년 : 정영호 당시 문화재 전문위원, 다보탑 한쪽 모서리에서 돌사자 목격
   1963~66년 : 불국사에 의해 돌사자가 기단 중앙부로 이동
   현재 : 다보탑 기단 중앙부
 

문화재청은 ‘돌사자의 위치가 변형됐다면 원래 위치로 옮길 의사가 있는가’라는 질의에는 “돌사자의 원위치 이동은 구체적인 자료가 확보되면 전문가 등의 심층적인 검토를 거쳐 추진하겠다”고 답했다.(http://www.kchnews.kr/15081)

경주박물관에 있는 모조 다보탑에는 네 모서리에 돌사자가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난간 유무有無와 함께 여전히 논란 중이다.
 

110181403594_7
상층부는 8각형이 주를 이룬다. 이는 깨달음을 통하여 부처가 되는 과정을 상징한다.
 

110181403594_8
 

110181403594_9
 


<관련 그림>
 

110181403594_10
< 통도사 영산전 벽화 – 다보탑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21609&cid=1634&categoryId=1634
견보탑품 변상도는 『법화경』 견보탑품에 나오는 다보탑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할 때 갑자기 칠보로 찬란하게 장식된 큰 탑이 땅에서 솟아났는데 그 안에 앉아있던 보정세계(寶淨世界)의 부처인 다보여래가 보탑 속 자리의 반을 석가모니 부처님께 내주자 석가모니가 탑 안으로 들어가 사자좌에 결가부좌했다는 내용을 표현하였다.

 

 

110181403594_11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

고려 시대의 마애불 좌상이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97호로 지정되어 있다.

두 불상을 나란히 조각한 것은 법화경의 사상을 반영한 석가·다보 이불병좌상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이불병좌상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110181403594_12

※ 다보탑의 구조

 

110181403594_13
다보탑의 중심선에 중심을 둔 주요 원의 계열을 그리면, 반지름 사이에 √2의 관계가 성립한단다.

수학 혹은 아름다움의 언어 : 그리스와 신라 건축물에 나타난 비례의 미학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네이버 지식백과(사찰 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 석가탑과 다보탑
불교미술기행 (조병활 / 이가서)
감은사의 사리장엄에 의한 2탑 구성원리에 관한 연구 (김상태 / 한국건축역사학회논문집, 제16권 제2호 통권51호, 2007년 4월)
역사스페셜3 (KBS 역사스페셜 / 효형출판)
불국사 : http://yellow.pe.kr/110054855479
2005-05-07  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불국사(1)

경주 불국사 다보탑 – 국보 제20호

One thought on “경주 불국사 다보탑 – 국보 제20호

  • 2021년 3월 22일 at 4:54 오후
    Permalink

    다보탑 하단부 계단앞에있는 석주 8개 뒷면에 구멍이 뚫려있는데 어떤이유로 뚫었을까요?

    Reply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