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에 의하면 16세기 서구에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등장 이후 17세기의 네덜란드, 19세기 영국에 이어 20세기 후반 미국이 세계체제의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네덜란드의 헤게모니 구축에 대해서 조사했고 네덜란드가 패권을 잃는 과정과 각각의 세부적인 중요 사건 또는 항목은 따로 정리하겠다.
네덜란드의 패권은 “17세기의 일반적 위기”로 알려진 유럽의 정치적 · 사회적 격변의 시기에 형성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한 긴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출현한 공화국은 곧 다른 나라들이 모방하려는 찬양받는 사회관계의 모델이 되었고,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자본주의 국가였다.
16세기 전체 시기에 스페인의 힘은 다른 모든 유럽 국가들을 크게 앞질렀다. 그러나 이 힘은 근대 통치체계로의 순탄한 이행을 관리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 대신 해체되는 중세 통치체계로부터 합스부르크 황가와 교황이 무엇인가 건질 만한 것을 건져내는 데 사용되었다. 스페인과 프랑스·영국·스웨덴 왕국 등 유럽의 권력투쟁과 체계의 카오스 상황은 네덜란드 헤게모니를 등장시키고 중세 통치체계를 최종적으로 청산시켰다.
세계체계분석의 설명을 한 층 더 발전시켰다고 평가받는 조반니 아리기는 그의 『장기 20세기』에서 ‘체계적 축적순환’이라는 논리를 통해 새롭게 등장하는 잠재적 헤게모니 국가가 앞선 축적체제와는 다른 새로운 비용 절감이 가능한 축적 모델을 형성하여, 이를 중심으로 세계경제가 재편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세계헤게모니 질서의 토대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첫 세계 헤게모니인 네덜란드는 ‘보호비용’을 내부적으로 통제함으로써 16세기에서 17세기 초에 세계의 상업을 통제하는 독보적 지위에 섰다. 이를 이어 영국이 자본주의의 중심을 ‘생산’으로 이전시키고 이로서 이른바 ‘산업혁명’에 기반하여 ‘생산비용’을 내부화한 자유무역 제국주의이자 영토 제국주의의 헤게모니를 건립함으로써 19세기를 자신의 헤게모니 시대로 이끌었다. 20세기 들어서면 미국이 ‘거래비용’을 내부화한 ‘법인자본주의’라는 근대 기업형태를 건립하고 ‘뉴딜’의 체제를 전지구적으로 확대함으로써 초국적기업에 기반한 ‘탈식민지적’ ‘자유기업’ 세계경제를 건립하여 세계 헤게모니를 계승하였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648
* 관련 글 : 17세기 위기 – 소빙하기(소빙기) 절정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분석
– 이매뉴얼 월러스틴 / 이광근 역 / 당대 / 2005.03.17
…… 그러나 국가가 국제영역에 대한 지배를 실현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 매우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하나는 세계경제를 세계제국으로 전화시키는 방식이며, 또 하나는 이른바 헤게모니를 세계체제에서 달성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 그리고 왜 어떤 국가도 근대 세계체제를 하나의 세계제국으로 변모시키지 못하였는지, 그러나 각기 다른 시기에 몇몇 국가는 헤게모니를 달성하였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제국은 전체 세계체제를 관장하는 단일한 정치적 권위가 존재하는 구조를 뜻한다. 지난 500년 동안 이러한 세계제국을 건설하려는 심각한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첫번째 사례는 16세기 찰스5세의 시도이다(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도 추구되었으나 그 정도는 훨씬 약화되었다). 두번째 사례는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시도였으며, 세번째 사례로는 20세기 중반 히틀러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상 세 가지 시도는 모두 강력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모두 격퇴되었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한편 또 다른 세 종류의 패권은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였지만 헤게모니를 달성하였다. 첫번째 사례는 17세기 중반의 연합주(the United Provinces, 오늘날의 네덜란드)였고, 두번째는 19세기 중반의 대영제국(the United Kingdom)이었다. 그리고 세번째는 20세기 중반의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이었다. 이것을 헤게모니라고 지칭할 수 있는 근거는 일정 기간 동안 이 국가들은 국가간 체제의 게임의 룰을 확립할 수 있었고, (생산 · 상업 · 금융 분야에서) 세계경제를 지배하였으며,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면서도 자신들의 뜻을 정치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었고, 세계를 논할 문화적 언어를 공식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
– 지오바니 아리기, 비벌리 J. 실버 / 최홍주 역 / 모티브북 / 2008.10.17
우리가 유럽의 주권 국가 체계와 관련하여 네덜란드의 패권을 논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한 이 체계의 공식적인 수립으로 귀결된, 장기간에 걸친 투쟁에서 네덜란드인들이 선도적인 역활을 했기 때문이다.
……
네덜란드의 해상 강점은 이베리아인들의 해군력을 약화시키는 뿐 아니라, 발트 해 연안의 공급품에 대한 네덜란드 연방의 독점적 지배를 확립하고 재생산하는 데에도 중요했다. …… 네덜란드의 발트 해 무역 지배가 과다한 유동성의 근원이었고, 과다한 유동성이 유럽의 권력 투쟁에서 네덜란드가 가진 경쟁 우위의 가장 중요한 단일 근원이었다.
네덜란드 무역의 수익성은 두 가지 주요 상황에 의해 결정되었다. 하나는 치열한 유럽의 권력 투쟁 자체였다. 이 싸움이 육상과 해상에서 더 치열해질수록, 다른 사정이 같다면 발트 해 연안에서 공급되는 곡물과 해군 군수품에 대한 수요와 이 공급품에 대한 독점적 지배로 인해 네덜란드인들에게 생기는 이익도 커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합스부르크가(Habsburg家)가 아메리카의 은을 이용하여 유럽에서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무익한 시도에 집착할수록,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적인 네덜란드인들에게 은괴를 쌓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네덜란드 무역의 수익성을 결정했던 다른 주요 요소는 발트 해 무역에서 거둔 큰 이익을 유동성의 형태로 보유하고, 이 유동성을 이용하여 발트 해에서 지속적으로 경쟁자를 제거하고, 암스테르담을 유럽 중심적 세계 경제의 상업 및 금융 중계 중심지로 만드는 네덜란드인들의 성향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의 이 노력이 성공할수록 발트 해 연안의 공급품뿐 아니라, 그들의 적인 스페인인들이 남미와 북미에서 유럽으로 가져오는 은의 공급에 대해서도 지배를 강화했다. 브로델의 말처럼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발트 해 연안, 양쪽에서 부를 쌓았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간과한다면, 한편의 밀과 다른 한편의 아메리카 은괴가 서로 뗄 수 없는 역활을 한 과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암스테르담을 유럽 중심 세계 경제의 상업 및 금융 중계 중심지로 만든 네덜란드의 성공은 과거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 특히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성취를 더 큰 규모로 다른 체계 환경 속에서 재현한 것이었다. 바이얼리트 바버(Violet Barbour)에 따르면, “한 도시가 현대 국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진짜 무역 · 금융의 제국을 쥐고 있었던” 것은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
베스트팔렌 조약은 네덜란드 패권의 정점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스페인에 대항하여 8년 동안 싸워온 네덜란드인들에게 그들의 주권을 최종적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부와 힘의 기반이었던, 경쟁하는 국민 국가들로 구성된 유럽 체계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그러나 베스트팔렌 조약은 국가 간 권력 투쟁의 조건도 변화시켰고, 이를 통해 네덜란드 패권의 한계도 드러냈다.
……
네덜란드 패권의 사회적 기초는 “17세기의 일반적 위기”로 알려진 체계 전체에 걸친 정치적 · 사회적 격변의 시기에 형성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한 긴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출현한 공화국은 곧 다른 나라들이 모방하려는 찬양받는 사회관계의 모델이 되었다. “북부 네덜란드는 르네상스식 궁전을 거부한 첫 번째 유럽 국가였는데,” 르네상스식 궁정은 유럽 전역에 걸쳐 호사스럽게 커져 있었고, 매관매직으로 사치를 더하면서 “사회의 몸 속 깊숙이 …… 증식 빨판을 뻗은” 수많은 기생적 관료조직을 낳았다. 네덜란드 공화국을 모방하려는 노력(즉, 군주국의 특색을 없애고 능률화된 중상주의 국가를 지향)은 19세기 후반, 전 유럽에 걸쳐 서로 다른 정도의 성공을 거두며 경주되었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이처럼 네덜란드 상업체계의 범위가 지역적인 것에서 전지구적인 것으로 팽창한 것은 세 가지 연관된 정책의 결합에 의해 추진되고 지탱되었다. 첫번째 정책은 암스테르담을 유럽과 세계상업의 중심 집산지로 변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네덜란드 자본가계급은 암스테르담에 특정 시기 유럽과 세계상업의 가장 전략적인 공급물이던 물품의 보관과 교환을 집중시킴으로써, 유럽 세계경제의 불균형을 조절하고 그로부터 이윤을 끌어내는 전례 없는 이례적 역량을 발전시켰다.
……
그러나 네덜란드인들이 다른 집산지들 또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직접 교환으로부터 암스테르담으로 상품교역의 흐름을 전환시키려는 시도를 위해 꺼내 든 훨씬 더 중요하지만 덜 가시적인 무기는 유동성에 대한 그들의 우월한 통제력이었다. 이 덕에 그들은 그들의 실질적 또는 잠재적 경쟁자들에 대해 수십 년 동안 입찰 선매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듯 그들만이 계속 증가하는 생산자들의 화폐수요를 활용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현금과 선지급의 대가로 저가에 공급물을 얻을 수 있었다(cf. Braudel 1982: 419~20).
이로부터 우리는 네덜란드 자본가계급이 지역적 상업우위로부터 전 지구적 상업우위로 상승하는 것을 촉진하고 지탱시켜 준 축적전략의 두 번째 구성요소로 나아간다. 이 구성요소는 암스테르담을 세계상업의 핵심적 창고일 뿐 아니라 유럽 세계경제의 중심적 화폐시장과 자본시장으로 변환시킨 정책이었다. 이 측면에서 핵심적인 전략적 변화는 암스테르담에 첫 상시적 주식거래소가 개설된 것이었다.
암스테르담 거래소(Amsterdam Bourse)가 첫번째 주식시장은 아니었다. 다양한 종류의 주식시장이 15세기에 제노바에서, 라이프치히 정기시에서, 그리고 많은 한자동맹의 도시들에서 흥성하였고, 국가 대주(貸株)거래는 그 훨씬 이전에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서 흥정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증거가 지중해가 주식시장의 요람임을 보여 준다. …… 그러나 암스테르담의 새로움은 그 시장의 거래량과 유동성, 그리고 그 명성, 그리고 거래의 투기적 자유였다”(Braudel 1982: 100~1 / 브로델 1996: 132).
……
암스테르담을 세계상업과 세계금융의 중심적 집산지로 변환시키는 것을 추진한 정책을 보완하고 지탱한 제3의 정책이 없었다면, 이런 팽창의 선순환이 실제 거둔 놀라운 성과를 낳는 것은 물론, 이륙은 더더욱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제3의 정책은 거대한 해외 상업 공간에 대한 배타적 무역과 배타적 주권을 행사하도록 네덜란드 정부가 공인한 대규모 합자회사를 설립한 것이었다. 이런 회사는 이윤과 배당을 거두어 들일 것으로 상정되었을 뿐 아니라, 네덜란드 정부를 대신해 전쟁형성과 국가형성 활동도 수행할 것으로 상정된 기업체들이었다.
……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1600년에 특허장을 받았으며, 다른 영국의 회사들은 그보다 훨씬 더 앞섰다. 그러나 1602년 특허장을 받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는 17세기 전체에 걸쳐서 이런 재생의 최대의 성공자였다. 영국이 그것을 모방하는 데 한 세기가 걸렸고, 그것을 지양하는 데는 그 이상이 걸렸을 정도로 그 성공은 대단했다(Braudel 1982: 449~50).
왜냐하면 네덜란드 공인회사들은 세계를 포괄하는 상업과 고도금융이 암스테르담으로 계속 집중되는 것의 수혜자이자 그 도구였기 때문이다 – 그들이 수혜자였던 것은, 이런 집중화 덕에 그들은 발전단계에 따라 그리고 재운의 변동에 따라, 잉여자본의 처리 또는 획득을 위한 출로나 원천을 포함하여, 자신들의 산출물을 위한 고수익 출로와 자신의 투입물 획득을 위한 저렴한 원천에 대한 특권적 접근권을 허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인회사들은 또한 네덜란드 상업 · 금융망의 전지구적 팽창을 위한 강력한 도구이기도 했으며,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네덜란드인들의 전반적인 축적 전략에서 차지하는 그 역활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 그러나 동인도회사는 시대의 획을 긋는 성공이었고, 그것이 택한 축적 전략 또한 그랬다. 1610~20년경에서 1730~40년경까지 한 세기 이상 동안, 네덜란드 상인계급 상층은 줄곧 유럽 자본주의 엔진의 지도자이자 지배자였다.
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 로버트 B. 마르크스 / 윤영호 역 / 코나투스 / 2007.04.13
이처럼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여러 국가들의 흥망성쇠가 이어졌다. 16세기 후반 스페인은 점차 세력을 잃기 시작했고 포르투갈도 유럽에서 프랑스나 스페인을 상대하거나 아시아의 해상에서 네덜란드에게 도전하기에는 세력이 너무나 미약해졌다. 유럽에서 최초로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모두 공략하기 위해 무역회사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네덜란드는 프랑스와 영국이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던 17세기에 엄청난 부를 축적하며 절정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상비군을 유지할 만큼 충분한 인력을 갖추지 못했던 네덜란드는 결국 유럽에서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동맹을 맺는다. 18세기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두 국가였다.
……
스스로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의 확장을 자처하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가톨릭세력과 극도로 대립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무역과 전쟁은 긴밀하게 연계된 것으로 여겼다. 1614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총독은 이사회가 보내는 편지에 이런 내용을 적었다. “지금까지 경험에 의하면 아시아무역에서는 반드시 병력과 무기를 동원한 보호가 뒤따라야 합니다. …… 따라서 전쟁이 없는 무역은 이루어질 수 없으며 무역이 없는 전쟁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이 전략을 효과적으로 실행하여 포르투갈로부터 말라카를 빼앗았고 자바를 점령하여 사탕수수를 생산할 수 있는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중국의 영토이던 대만에도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했다.
부의 역사
– 권홍우 / 인물과사상사 / 2008.06.09
네덜란드는 운도 좋았다. 15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유럽의 전반적인 물가상승에서 가장 큰 혜택을 입었다. 주요 품목 가운데서도 가격이 가장 많이 오른 곡물을 안정적으로 생산한 덕분이다. 특히 에스파냐의 곡창 지대인 카스티야 지방에서 1506년 대흉작이 발생해 곡물 가격이 한 해 96%씩 뛰던 16세기 초반 네덜란드에는 돈이 밀려들어왔다.
……
16~17세기 황금기를 구가한 네덜란드를 역사상 최고의 부자나라로 꼽는 이유는 무수히 많다. 한창 때 네덜란드는 서구 세계 선박의 절반 이상을 보유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주요 국가 중에서 부자 순위 2위인 나라보다 국민소득이 두 배 이상 높았던 국가도 네덜란드가 유일하다. 산업보다는 금융, 국내보다는 해외투자에 주력한 탓에 정점에서 하강한 17세기 후반 네덜란드의 해외투자는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에 가까운 약 15억 길더에 달했다. 지구촌 곳곳에 자본을 깔았다는 오늘날 미국의 해외 투자는 국내총생산의 절반에 못 미친다.
……
근대 금융의 모든 것도 네덜란드에서 나왔다. 심지어 투기로 인한 대규모 불황까지 네덜란드가 가장 먼저 겪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극찬한 네덜란드의 번영을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 바로 ‘사람’이다.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기에 네덜란드에는 사람이 모여들고 자유의지로 바다를 메웠다.
……
레콘키스타 이후 종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생산과 금융을 담당하는 유대인과 무어인을 내친 스페인과 대조적으로 네덜란드는 종교적 관용을 베푼 덕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유대인이 전혀 차별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술을 지녔거나 지식인인 경우에는 환영까지 받았다.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다.
네덜란드는 유대인뿐 아니라 청어 잡이 일을 위한 독일인 어부에서 종교전쟁인 프랑스의 위그노전쟁과 독일을 중심으로 벌어진 30년 전쟁을 피하려는 신교도와 가톨릭교도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금과 은이 많아야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믿어 귀금속의 유출을 엄격하게 규제했던 시대에 네덜란드는 금과 은의 자유로운 유통과 유출을 허용한 유일한 국가였다.
……
네덜란드의 일본 진출은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직후부터 시작돼 1609년에는 나가사키 지역의 히라도에 상관(무역사무소)을 개설했다.
……
1641년 데지마로 이전한 네덜란드 상관은 1854년 일본의 개항 직후 폐쇄될 때까지 일본의 대유럽 무역을 독점하며 짭짤한 수익을 거뒀다. 일본과 네덜란드 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본부가 있던 자카르타 사이를 오간 선박 수가 213년 동안 707척에 이르렀다. 일본의 주요 수출품은 은으로 일본산 은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도 언급했듯이 네덜란드를 매개로 인도와 중국은 물론 유럽에도 퍼졌다.
……
바로 이 대목을 살펴보면 뚜렷한 흐름 하나를 읽을 수 있다. 유대인의 방랑과 부의 이동 경로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에스파냐를 떠나 머물렀던 포르투갈 · 네덜란드 · 영국이 하나같이 경제적인 번영을 맛봤다는 사실을 우연으로 보기에는 또 하나의 예가 남아 있다. 미국의 유대인이다. 미국 유대인의 주류는 에스파냐에서 가지가 갈라져 나간 네덜란드나 영국의 유대인과 달리 독일과 러시아, 동유럽의 박해를 피해 19세기 말 대규모 이주한 사람들이어서 이동의 동기와 경로를 동일선상에 놓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박해를 받아 자유롭게 생각하고 믿으며 일하기 위해 이동해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이다.
Statistics on World Population, GDP and Per Capita GDP, 1-2008 AD
– 앵구스 매디슨 / http://www.ggdc.net/MADDISON/oriindex.htm
< 1인당 GDP / 단위: 1990 International Geary-Khamis dollars >
1000년 |
1500년 |
1600년 |
1700년 |
1820년 |
1830년 |
1840년 |
1850년 |
1860년 |
|
프랑스 |
425 |
727 |
841 |
910 |
1135 |
1191 |
1428 |
1597 |
1892 |
영국 |
400 |
714 |
974 |
1250 |
1706 |
1749 |
1990 |
2330 |
2830 |
네덜란드 |
425 |
761 |
1381 |
2130 |
1838 |
2013 |
2283 |
2371 |
2377 |
< GDP / 단위: million 1990 International Geary-Khamis dollars >
1000년 |
1500년 |
1600년 |
1700년 |
1820년 |
1830년 |
1840년 |
1850년 |
1860년 |
|
프랑스 |
2,763 |
10,912 |
15,559 |
19,539 |
35,468 |
39,655 |
49,828 |
58,039 |
70,577 |
영국 |
800 |
2,815 |
6,007 |
10,709 |
36,232 |
42,228 |
53,234 |
63,342 |
81,760 |
네덜란드 |
128 |
723 |
2,072 |
4,047 |
4,288 |
5,300 |
6,588 |
7,345 |
7,887 |
< 인구 >
1000년 |
1500년 |
1600년 |
1700년 |
1820년 |
1830년 |
1840년 |
1850년 |
1860년 |
|
프랑스 |
6,500 |
15,000 |
18,500 |
21,471 |
31,250 |
33,300 |
34,900 |
36,350 |
37,300 |
영국 |
2,000 |
3,942 |
6,170 |
8,565 |
21,239 |
24,139 |
26,745 |
27,181 |
28,888 |
네덜란드 |
300 |
950 |
1,500 |
1,900 |
2,333 |
2,633 |
2,886 |
3,098 |
3,318 |
인류의 문명을 바꾼 역사의 순간들 (전쟁편)
– 류펑 / 김문주 / 시그마북스 / 2009.11.05
전략 요충지를 얻기 위한 전쟁
전략 요충지는 부(富)로 가는 길목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이곳을 장악하는 자는 곧바로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초강대국 미국은 전 세계 전략 시스템 가운데 총 16개의 전략 요충지를 점령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과 같은 강대국의 면모를 뽐낼 수 있는 것이다.
……
역사상, 전략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해 발발한 전쟁에는 영국-네덜란드 패권 전쟁 및 영국-스페인 해전 등이 있다. 17세기 말엽,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는 총 세 차례에 걸쳐 패권다툼이 벌어졌으나 결국 쌍방이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전쟁은 어느새 해상권 장악 다툼으로 변모되었고 해상을 장악한 자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상황이 펼쳐졌다.
……
해상을 장악한 영국은 곧바로 전 세계로 식민지를 확장해갔고 이어 명실상부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거듭났다. 이처럼 전략 요충지란 전쟁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에 해당한다.
비즈니스의 탄생
– 조승연 / 더난출판사 / 2008.08.29
한자 도시들의 부와 권력에 결정타를 입힌 것은 동맹에 가입 못해 불만이 많던 네덜란드였다. 한자동맹국 상인들은 무역대국인 네덜란드의 상인들을 견제해왔다. 한자동맹국 상인들은 가입국 내에서는 자유무역을 했지만, 비가입국 상인들이 한자 도시에 들어와 장사하는 것은 철저히 통제했다(가입국 사이의 관세는 없앴지만, 미국이나 아시아에서 들어오는 제품에는 비싼 관세를 매기는 지금 유럽연합의 현 정책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네덜란드는 한자의 무역함대가 장악한 발트해에 자기네 화물선을 보내 무역전쟁에 뛰어든다. 1438년, 발트해의 상권을 두고 네덜란드와 한자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 네덜란드는 한자의 무역함대를 격파한다. 네덜란드는 한자 도시와 비 한자 도시 사이의 법적 장벽을 무시하고, 아예 원산지에서 물건을 들여와 소비자 도시에 직접 판매해 한자를 궁지로 내몬다.
……
역사가들과 경제학자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세계 최초의 현대식 주식회사라고 말한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보다 먼저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다”며 떵떵거리던 영국 경제의 총아 영국 동인도회사보다 총 주식 가치가 10배도 넘는 대형 주식회사였다.
금융투기의 역사
– 에드워드 챈슬러 / 강남규 역 / 국일증권경제연구소 / 2001.06.25
프랑스와 플랑드르의 자본시장은 종교전쟁과 네덜란드의 민중봉기, 이에 따른 기업들의 부도사태 때문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1557년 이후 리옹도 10년 동안의 번영기를 끝으로 쇠퇴했고, 1585년 스페인 군대의 봉쇄로 그동안 번성했던 안트베르펜 증권시장도 폐쇄되었다. 이 봉쇄를 피해 수많은 프로테스탄트와 유대인들이 자본과 선진 금융기법을 갖고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이곳이 일약 유럽의 금융중심지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들의 피난 덕에 네덜란드가 1590년대의 경제적 기적을 이루냈다고 말한다.
17세기 초반 네덜란드 경제는 유럽에서 가장 왕성했고 선진적이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전세계를 아울러, 노르웨이에서 목재를, 서인도제도에서 설탕을, 미국 메릴랜드에서 담배를 수입할 정도였다. 또 영국 웨일스의 제철소나 스웨덴의 영지에 투자했고 제정 러시아 황제 차르의 농산물 수출 독점권을 갖게 되었으며, 스페인이 소유하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에 노예를 공급하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기존의 은행이나 복식부기 · 환어음 · 주식회사 등과 같은 금융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중요 시스템들을 상업경제의 튼튼한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최초로 정부인가를 받은 주식회사인 유나이티드 동인도회사(United East India Company)가 1602년에 설립되었고, 이로부터 19년이 흐른 뒤인 1621년에는 서인도회사(West India Company)가 아메리카 대륙과의 교역을 위해 설립되었다.
1609년에는 유럽 최초의 중앙은행인 네덜란드의 비셀방크(Wissel-bank)가 16세기 이탈리아 제노바의 카사 산 죠르지오(Casa San Giorgio) 은행을 모방해 설립되었다. 비셀방크는 무이자 예금을 수취했으며, 보유한 금 한도 내에서만 은행권을 발행하였다. 대출업무는 하지 않았지만, 네덜란드 상인들은 이 은행을 통해 세계무대에서 통일된 결제수단으로서 자금결제를 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 정부도 채권과 복권을 발행하여 대중들의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7세기 초반까지 유럽대륙의 대규모 자본이 네덜란드로 흘러들어와 연금에서부터 환어음 · 대출채권, 도시국가의 채권까지 다양한 금융자산에 투자되었다. 암스테르담은 단순히 금융중심지가 아니라 그 자체가 유럽의 금융자본이었던 것이다.
유대인의 역사 2
– 폴 존슨 / 김한성 역 / 살림 / 2005.03.30
재정을 비인격화하고 경제적인 과정을 합리화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지닌 무의식적이고 집단적인 본능이다. 유대인 소유의 자산들은 중세와 근대 초기만 해도 항상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는데, 특히 지중해 지역에서 그랬다. 스페인 해군과 몰타(Malta)의 기사단은 유대인들의 선박들과 물품들을 일종의 전리품으로 여겼기에 유대인들은 해양 보험을 비롯한 국제적으로 처리되는 문서에서 허위로 기독교인의 이름을 사용해야 했으며, 이는 비인격적인 방식 속에서 점차 발전되어 갔다. 신용장이 발전되면서 유대인들은 비인격적인 자금회전에 대한 또 하나의 방식으로 무기명 채권이라는 것을 개발해냈다. 왜냐하면 이들의 재산은 항상 위협 아래에 있었고 언제든 이주를 강요당할 수 있었기에 환어음이든 무기명 수표 같은 비인격적인 유가증권의 출현은 그들에게 상당한 축복으로 다가왔다.
이에 유대인들은 이들을 다듬고 보편화하는 데에 누구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지폐를 발행하고 증권거래소를 세울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지닌 영국 은행(1694년)과 같은 중앙은행이 출현하는 데에 막대한 도움을 주었다.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설치에도 앞장섰으며 거기서 엄청난 양의 서인도회사와 동인도회사 주식을 보유하여 거대한 규모의 무역을 안전하게 운영한 최초의 주인공이 되었다. 1690년대에 런던에서도 동일한 유형의 변화가 왔다. 암스테르담 유대인이었던(비록 명목상으로는 프로테스탄트였으나) 요셉 드 라 베가(Joseph de la Vega)는 1688년에 주식거래사업 최초의 계정을 개설하였고, 이로써 유대인들은 영국에서 최초의 전문적인 주식거래자이자 중개인이 되었다. 1697년에 런던 주식거래소에서 일하던 1백 명의 중개인 가운데 20명은 유대인이거나 외국인이었다. 유대인들은 1792년에 뉴욕 증권거래소를 만드는 데에도 일조하게 된다.
<관련 그림>
– 네덜란드 제국을 보여주는 anachronous map으로 연두색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영역, 녹색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영역이고 주황색은 무역 거점을 나타낸다.
– 1580년 유럽의 스페인 제국 영토
– 17세기 중반의 네덜란드 무역로
–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조선소(1750년)
– 1700년경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무역 영역
– 인도의 네덜란드 및 기타 유럽인들의 정착지
– 브로델의 장기순환 (출처 : http://luxun.greenbee.co.kr/blog/503)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위키백과 : 네덜란드 독립 전쟁
위키백과 : Economic history of the Netherlands (1500–1815)
https://en.wikipedia.org/wiki/Dutch_Golden_Age
네이버 지식백과(네덜란드사) : 17세기의 경제
2015-12-01 <위안화 기축통화> 스페인→네덜란드→영국→미국…통화패권의 역사
2015-09-20 통합대국 위해 제7 공화국을 열자
2015-09-18 15~17세기 중국의 정화, 유럽의 푸거, 아메리카의 포카혼타스의 역사가 보여주는 세계의 거대한 판도 변화
안녕하세요. 네덜란드 17세기 경제(무역/금융)에 대해 조사하다가 이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수업 발표를 위해 자료를 조사하는 중인데, 참고해도 될까요?
Pingback: 알람브라 칙령 – 1492년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령 – 옐로우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