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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의 자베르’ 최영

작성자
hsy6685
작성일
2017-07-09 14:15
조회
225
[김영수 교수의 ‘조선을 만든 사람들’(16)] ‘고려말의 자베르’ 최영




옳은 길에 온 삶을 바쳤는데, 생의 마지막에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설적이고 비극적인 삶이다. <레 미제라블>의 자베르 경감이 그렇다. 그는 범죄자의 아들로 감옥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법은 밤하늘의 별 같은 것”이란 신념을 가지고 법의 수호신이 되었다. “밤하늘의 별은 조용하지만 흔들리지 않는다. 그 별을 보고 사람들은 좌표를 삼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면 별은 항상 정해진 그 자리에 서 있다.”

확실히 그런 사람이 없으면 사회는 정글일 것이다. 법은 인간다움의 조건이다. 그런데 법은 무엇인가? 자베르는 이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장발장 때문에 자베르는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발밑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고, 다리에서 몸을 던졌다. 역설이란 하나의 가치를 다른 가치로부터 보는 것이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깊은 심연이다. 그 깊이가 비극의 깊이다. 최영(1316~1388)은 어떤 의미에서 고려말의 자베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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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의 가문은 고려왕조와 운명의 궤적을 같이한 가문이다. 그 탄생과 멸망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최영은 동주(東州) 최씨이다. 동주는 강원도 철원(鐵原)의 옛 이름이다. 동주 최 씨의 시조는 최준옹(崔俊邕)이다. 그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운 건국공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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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3년(1354) 6월 최영은 중국의 농민반란군 진압에 참가했다. 당시 중국 대륙은 홍건적의 봉기로 들끓었다. 몽골제국은 아직 쓰러지지 않았지만, 잇단 가뭄과 홍수, 전염병, 그리고 황실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원은 고려에서 병력을 징발했다. 이때 중국 출정군 중에는 뒷날 고려의 여러 전쟁에서 활약한 장군이 많다. 최영을 비롯하여 인당, 정세운, 황상, 이방실, 안우 등이다. 6월에 고려에서 출발한 2000명의 군대는 8월 10일 연경에 모여 강남으로 내려갔다. 목표는 장사성이 이끄는 홍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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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이 1388년 요동을 두고 중국과 일전을 벌일 결심을 한 것은 아마도 이때의 경험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도 족히 상대할 만한 적으로 여겼다.

이후 최영은 두 차례의 홍건적의 난에서 싸우고, 김용의 반란을 제압해 공민왕의 생명을 구했다. 또한 공민왕 13년(1364) 덕흥군이 원나라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을 때, 무너진 군대를 삼엄한 군율로 수습해 겨우 물리쳤다. 국가의 위기가 있는 곳에 최영이 있었다.

최영이 처음 정치적 곤경에 처한 것은 신돈 집권기였다. 공민왕 14년(1365) 5월, 신돈이 집권했다. 그는 즉시 대대적 숙청에 나섰는데, 그 첫 대상이 바로 최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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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은 신돈에게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신돈 독단으로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최영의 명망과 군사적 업적, 정치적 중요성은 확고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국가의 큰 손실이었다. 그렇다면 최영의 제거는 공민왕이 바란 것이다. 왜 최영 같은 충신을 죽이려고 했는가? 공민왕은 충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았다. 조일신은 어떤가? 심지어 김용조차 배신하지 않았는가? 한비자, 마키아벨리 모두 왕은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명예로운 자, 고결한 자, 용기 있는 자는 더 위험하다. 모주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불명예보다 죽음을 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영이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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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은 일정한 크기를 넘어서면 정치적으로 바뀐다. 왕이나 국가에 무력이란 이중적이고 역설적 존재이다. 왕과 국가를 지키는 최후의 방패지만, 그 반대로 자신을 찌르는 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무장은 언젠가 제거될 운명에 처한다. 생존을 위해서는 그때가 오기 전에 물러나거나 아니면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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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은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제거된 뒤 소환되어 찬성사에 임명되었다. 공민왕 23년 최영은 탐라 정벌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원 지배기에 제주도는 원제국의 직할지였다. 원은 제주도를 말 목장으로 만들었다. 공민왕 23년 주원장은 제주 말 2000필을 요구했으나, 탐라의 몽골 목부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최영은 전함 314척, 군사 2만5600명을 통솔하여 탐라 정벌에 나섰다. 1389년 박위의 쓰시마정벌 규모는 전함 100척, 군사 1만 명에 불과했다. 탐라 정벌의 규모는 국가간 전쟁 수준이다. 공민왕이 이처럼 만전을 기한 것은 탐라의 영토 소유권에 대한 위험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민왕은 국제정치와 영토에 관해 동물적 감각이 있었다. 1365년 반원정책 때도 동북면의 쌍성총관부와 압록강 일대 영토를 회복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뒤에 명나라가 반드시 소유권을 주장했을 것이다. 1388년의 요동공벌도 이 때문이었다. 탐라도 그렇다. 마침 명이 탐라의 말을 직접 가져가지 않고 고려에 요구했기 때문에, 고려는 이를 기화로 탐라의 소유권을 명백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최영은 성공적으로 작전을 완료했지만, 그 사이 공민왕은 불귀의 객이 되었다.

공민왕대까지 최영의 의미는 주로 군사적인 것이었다. 그는 국가 운영에서 단순한 무장 이상의 의미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우왕대에는 국가를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이인임의 보조적 의미로 제한시켰다. 명료한 국가 운영의 비전과 좌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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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대 이인임의 정치에서 최대 성공작은 최영이다. 두 사람의 정치 성향만 보면, 최영은 이인임을 처형해야 했다. 그런데 이인임은 완전히 반대 유형의 인물을 최고의 정치적 자산으로 만들었다. 최영의 가치는 지윤과 양백연, 유모 장씨와의 권력투쟁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런데 최영은 왜 이인임과 동거할 수밖에 없었는가? 고려정치에서 새로운 대안이 명료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런 와중에 개인적 카리스마에 의해 무너지는 고려사회를 가까스로 지탱하던 공민왕이 죽자 일종의 진공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인임은 고려 후기의 관습적 대안을 대표하고 있었다.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익숙한 것이 자연스럽게 공백을 채운 것이다. 공민왕과 똑같이 새로운 정치적 비전을 발견하지 못한 최영으로서는 이인임 외에 다른 대안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새롭게 성장하고 있던 신진 유신들은 이러한 역사의 역류에 반발했으나 그들의 이념과 힘은 아직 미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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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년 최영은 우왕의 제의를 받아들여 이성계와 함께 무진정변을 일으켰다. 임견미, 염흥방 등 권신들이 모두 제거되었다. 전국에 흩어져 전민을 점탈하던 권신들의 노비들 수천 명이 처형되었다. 무진정변의 규모는 고려말의 정변 중 가장 큰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의미는 대단히 제약적이었다. 최영의 사후 조치를 볼 때, 그는 이 사건을 조반의 옥사와 관계된 임견미와 염흥방 일족의 위법·월권행위에 국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인임 일파까지 철저하게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국가적 위기의 진정한 원인인 권신정치의 철저한 척결을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이성계는 더 소극적이었다. 운도 따르지 않았다. 개혁은 짧은 시간에 중단되었다. 대명관계가 결정적으로 악화하였기 때문이다. 군사적 충돌로 더 이상의 개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결과적이지만 무진정변은 고려가 스스로를 개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1388년 고려의 북방영토를 둘러싸고 고려와 명이 군사적 대결로 치달았다. 최영은 요동공벌을 결정했다. 이에 반대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다. 모든 정치적 책임은 최영에게 전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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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의 숱한 전란을 통해 수많은 전쟁 영웅이 탄생했다. 마지막으로 그 시대를 움켜쥔 것은 이성계이다. 최영이 이성계와 달랐던 점은 그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야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어떠한 권력도 사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전공조차 다투지 않았다. 그는 부하 이름조차 잘 기억하지 못했다. 병사들을 사인화(私人化)시키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목숨을 대가로 지위와 명예를 얻고자 했던 그의 평범한 부하들에게 최영은 몰인정하고 매력 없는 지휘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치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인간이자, 고려왕조가 배출한 최고의 공적 정신이었다. 이성계는 그와 달랐다. 이성계는 추종자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지급했으며, 또는 보상을 통해 추종자들을 자신의 주위에 결집시켰던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 역시 이성계의 “은혜에 감격하여 힘을 다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태종실록>) 이성계는 이처럼 세심한 배려를 베푸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지만, 왕조의 안전에는 위험한 인물이다.




※ 발췌 :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7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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