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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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11/27 | 카이로 선언 |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3년 11월 27일 연합국측의 루스벨트·처칠·장제스[蔣介石]가 카이로회담의 결과로 채택한 대일전(對日戰)의 기본목적에 대한 공동 코뮤니케(발표 12월 1일).
* 날짜 : 1943/11/27 | |
1944/07 | 브레턴우즈 협정,IMF·IBRD·BIS창설 |
브레턴우즈 협정,IMF·IBRD·BIS 창설.
* 날짜 : 1944/07 | |
1945/02/04 | 얄타 회담 |
얄타 회담(Yalta Conference)은 1945년 2월 4일~2월 11일 소련 흑해 연안에 있는 얄타(현재는 우크라이나의 영토)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수뇌자들이 모여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이다.
* 날짜 : 1945/02/04 | |
1945/04/12 | 루스벨트 대통령 사망 |
그의 죽음 직후 한때 스탈린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었으나, 대만의 본토에서의 퇴출과 한국 전쟁으로 음모설은 묻혀졌다.
* 날짜 : 1945/04/12 | |
1945/04/12 | 트루먼 미국대통령 |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은 미국의 제34대 부통령(1945년), 제33대 대통령이었다. 이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부통령이 된 지 불과 82일 만에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았고,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쇼와 천황으로 부터 항복을 받았으며,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핵공격 명령을 내린 대통령이다. 해리 트루먼의 S는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이 S로 시작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냥 S라고 붙였다.
* 날짜 : 1945/04/12 ~ 1953/01/20 | |
1945/04/25 | 샌프란시스코 회의 |
국제연합헌장 초안이 4개 분과위원회와 12개 전문 소위원회에 의하여 심의되었고, 국제연합헌장을 채택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와 국제평화문제를 토의하였다.
* 날짜 : 1945/04/25 ~ 1945/06/26 | |
1945/05/07 | 독일 항복 |
나치 독일이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에게 항복하다.
* 날짜 : 1945/05/07 | |
1945/07/16 | 미국,원자폭탄 개발 |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주 앨러머고도 근처 사막 트리니티에서 시험 폭파를 거쳐 같은 해 8월 6일 일본의 히로시마에 우라늄 235 폭탄을 3일 뒤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239 폭탄을 투하한다.
* 날짜 : 1945/07/16 | |
1945/07/26 | 포츠담 선언 |
포츠담 선언(Potsdam Declaration)은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소련이 독일의 포츠담에서 가진 정상 회담을 말한다.
* 날짜 : 1945/07/26 | |
1945/08/06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는 제2차 세계대전이 다 끝나갈 무렵 1945년 미국은 일본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는데, 8월 6일 히로시마 시에 한 개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8월 9일 나가사키 시에 나머지 한 개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라고도 한다.
* 날짜 : 1945/08/06 | |
1945/08/09 | 소련, 대일 선전포고 |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대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빠르게 만주와 한반도로 남진했다.
* 날짜 : 1945/08/09 | |
1945/08/14 | 중소우호동맹조약 |
1945년 8월 14일 모스크바에서 조인된 소련과 중국 국민당정부간의 우호동맹조약.
* 날짜 : 1945/08/14 | |
1945/08/15 | 일본 항복, 8.15광복 |
1945년 8월 15일 36년간의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있었던 한국이 광복을 찾았다.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어 한국이 독립하게 되고, 3년 후인 1948년 같은 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 날짜 : 1945/08/15 | |
1945/08/22 | 소련군, 평양 점령 |
소련군, 평양 점령.
* 날짜 : 1945/08/22 | |
1945/08/29 | 미국, 일본 본토에 진주 |
미국, 일본 본토에 진주.
* 날짜 : 1945/08/29 | |
1945/09/02 | 연합국 일반명령 제1호 공포 |
한반도 38도선 분단, 베트남 16도선 분단의 내용이 들어 있다.
* 날짜 : 1945/09/02 | |
1945/09/02 |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 |
호치민을 수반으로 하는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
* 날짜 : 1945/09/02 | |
1945/09/06 |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약칭 "조선", "인공")은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미군정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1945년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여운형의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선포했다.
* 날짜 : 1945/09/06 | |
1945/09/09 | 미군, 서울 점령 |
미군, 서울 점령.
* 날짜 : 1945/09/09 | |
1945/09/11 | 경의선 철도 운행 중단 |
남북분단으로 서울-신의주간 철도 운행 중단.
* 날짜 : 1945/09/11 | |
1945/09/12 | 영국과 중국, 남북 베트남 점령 |
7500명의 영국군과 15~20만 명의 중국군이 각각 남북 베트남 점령.
* 날짜 : 1945/09/12 | |
1945/09/22 | 프랑스, 사이공 점령 |
프랑스, 사이공 점령
* 날짜 : 1945/09/22 | |
1945/10/10 | 김일성,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1945년 10월 10일 창설됐다. 김일성의 권력 장정이 그동안 수면 하에서 진행됐다면, 분국 창설은 그것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33세의 새파란 김일성이 노련한 정치가 박헌영과의 담판에서 분국 창설이라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는 것 자체가 북한 권력의 향방을 예고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10월 5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는 '서북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위한 예비회의가 열렸지만, 결론없이 대립만 하다 분국 창설의 과제를 10월 8일 밤의 박헌영·김일성 비밀회동으로 떠넘겼다. 결국 분국 창설은 두 사람의 협의로 큰 문제없이 통과됐고 10월 10일 비밀리에 소집된 '서북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 본회의에서 마무리됐다. 책임비서에 김용범, 제2비서에 오기섭과 무정이 선출됐고 김일성은 집행위원에 선출됐다. 비록 책임비서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김일성은 북한 공산당을 완전히 장악하기 일보 직전까지 다가갔다. 김일성이 책임비서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의 저항이 컸고, 소련도 국내 투쟁경험이 적은 김일성을 전면으로 내세우기에는 아직 지명도가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분국이 설치된 지 2개월 만인 12월 18일 마침내 북한 공산당 조직을 장악했다. 이날 열린 북조선 분국 비밀회의에서 책임비서로 선출된 것이다. 이로써 김일성은 명실공히 분국을 장악하게 됐으며 김일성의 분국은 사실상 북조선공산당으로 행세하게 됐다.
* 날짜 : 1945/10/10 | |
1945/10/15 | 이승만,맥아더,하지 회동 |
맥아더는 루스벨트의 국제주의를 이어받은 국무부의 방침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불만을 꿰뚫어본 이승만이 어떤 묘수를 제공해서 맥아더의 환심을 산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 묘수의 실행을 도와주라고 맥아더가 하지를 부른 것 아닐까?
* 날짜 : 1945/10/15 | |
1945/10/16 | 이승만 귀국 |
1945년 10월 4일 뉴욕, 그 간 미국을 주된 활동 무대로 삼아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해온 이승만이 귀국길에 올랐다. 이승만은 하와이와 괌을 거쳐 12일 도쿄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맥아더를 만나 며칠 머문 다음, 미국 군용기를 이용하여 10월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승만의 귀국 경위는 매우 복잡해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 통일이 돼 있지 않지만,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견해는, 미 국무성은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지만, 미 군정청장 존 하지 중장이 그의 귀국을 원했다는 것이다. 그의 귀국은 다른 독립운동지도자보다 이른 것이었다. 이승만이 비교적 연합국 측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날짜 : 1945/10/16 | |
1945/10/24 | UN(국제연합) 탄생 |
UN(국제연합) 탄생.
* 날짜 : 1945/10/24 | |
1945/11/23 |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에서 남녀중학교 학생들이 '공산당 타도'를 결의하고, 반소-반김일성 시위를 벌였다. 사건은 그해 11월 16일 평북 용암포에서 열렸던 기독교사회당의 지방대회에서 평북자치대 용암포 대표가 기념사를 통하여 폐교조치된 수산기술학교의 복구를 요구하고 공산당 용암포 대장 이종흡의 만행 등 공산당의 불법을 규탄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를 지지하는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며 '학원자유'를 부르짖자 소련군과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은 이들을 무력으로 기습, 평안교회의 홍장로를 현장에서 죽이고 학생과 시민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소식이 신의주시에 있는 평북 학생자치대 본부에 전해지자, 격분을 금치 못한 신의주시의 6개 남녀중학생들이 11월 23일 일제히 행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공산당의 무차별 사격으로 피살된 학생이 23명, 중경상자가 700여명이었고, 사건 이후 검거선풍이 불어닥쳐 투옥된 학생과 시민은 무려 2천여명에 달하였다. 이 사건은 광복의 기쁨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만행과 이들과 야합한 북한공산당의 동족탄압행위로 인해 폭발된 것이다. 따라서 신의주학생의거사건을 계기로 반공의식이 고조되어 북한 각지에서는 이러한 반공의거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 날짜 : 1945/11/23 | |
1945/12/16 | 모스크바 3상회의 |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The Moscow Conference of Foreign Ministers) 또는 모스크바 3상회의 또는 모스크바 삼국외상회의(三國外相會議)는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 영국 · 소련의 외무장관 회의이다. 제2차 세계대전 뒤의 일본 점령지구에 대한 관리 문제를 비롯하여 얄타회담에 따른 대한민국의 독립 문제를 거론하였다.
* 날짜 : 1945/12/16 | |
1946/01/02 | 좌익, 신탁통치 찬성 결의 |
1946년 1월 2일 해방된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을 지지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 찬탁으로 돌아섰다. 해방정국은 이때부터 반탁운동의 거센 격랑 속으로 들어갔다.
* 날짜 : 1946/01/02 | |
1946/02 | 중국, 북베트남에서 철수 |
중화민국은 프랑스와 대립하면서까지 독자적인 반공 친중 정부를 세울 역량은 못 되었고 자국 내에서 급속히 성장하던 공산당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영미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함에 따라, 프랑스의 재침략을 수용하면서 프랑스와의 불평등조약을 해소하는 협상을 통해 자국내 이권을 회복한 후 1946년 2월 철수하였다.
* 날짜 : 1946/02 | |
1946/02/04 | 코친차이나자문위원회 |
프랑스는 쩐 반 쟈우를 중심으로 한 남부행정위원회가 1945년 9월 23일 영국, 프랑스군에 의해 사실상 해체된 상황에서 식민시대의 행정당국을 부활시켰으며, 1946년 2월 4일 '코친차이나자문위원회'를 창설함으로써 남부 분리정책을 체계화했다.
* 날짜 : 1946/02/04 | |
1946/02/14 | 우익, 남조선 민주의원 구성 |
1946년 2월 14일 10시 미군정청에서 '남조선 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민주의원) 개원식이 거행됐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은 참석했지만 미군정이 그토록 공을 들였던 여운형은 불참했다. '민주의원'의 대표성 확보를 위해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여운형을 참여시키려 했던 미군정으로서는 당혹스런 일이었다. 여운형은 미군정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결성된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에 취임했다. 개원식이 시작되자 내정된 이승만이 첫 연설을 했다. 이승만은 연설에서 "본 의원은 금후 하지 중장 및 미군정과의 협의에서 한국민을 대표할 것"이라고 말했고, 이어 부의장 김규식이 의원 28명의 서명이 담긴 민주의원 선언문을 낭독하고 이를 하지중장에게 전달했다. '민주의원'은 반탁운동의 회오리속에서 이합집산을 거듭했던 우익측이 1월 23일 김구의 임정과 이승만이 힘을 합치면서 한국인 과도정부의 모체로서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기로 합의하면서부터 결성의 급물살을 탔다. 2월1일 열린 비상국민회의 결성식에서 과도정권 수립을 위해 최고정무위원회를 두기로 결의했다. 최고정무위원 28명은 다시 '민주의원'으로 명칭을 바꿔 이날 개원했다.
* 날짜 : 1946/02/14 | |
1946/02/15 | 좌익,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
1946년 2월 15일 좌익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결성됐다. 의장은 여운형이었다. 민전에는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당, 독립동맹, 전평, 전농, 청년총동맹, 부녀총동맹, 조선문학가동맹 등 좌익계 29개 정당사회단체가 참여했다.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비롯한 全우익 정당사회단체와 중도파 정당들이 연합해 비상국민회의를 구성하자, 반탁세력에 대항하고 합법적 찬탁 지지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 민전 결성의 배경이었다. 좌익의 결집된 의사표명 집단으로 활동하던 민전의 위치가 불확실해진 것은 11월의 남로당 결성 후부터였다. 그럼에도 12월 29일 남산에서 15만 군중이 집결한 가운데 미소공위 속개를 위한 군중대회를 열었는가 하면 1947년 3·1절에는 남산에서 10만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따로 기념식을 갖고 공위 속개를 촉진했다. 하지만 수명을 다해가는 민전은 1948년 5·10총선거와 8월15일의 남한 단독정부수립과 더불어 소멸한다. 1948년 북민전과 합동, 조국전선으로 변모했다.
* 날짜 : 1946/02/15 | |
1946/03/05 | 북한 토지개혁 실시 |
1946년 3월 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공포했다.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노동자와 토지없는 농민에게 무상분배하고, 농민의 지주에 대한 부채를 취소하며 관개시설, 산림 등을 몰수해 국유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 수행을 저해하는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 '토지개혁 실시에 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여 부동산과 농기구 등의 매매, 처분 등을 금지시켰고, 3월 8일에는 '토지개혁에 관한 세칙'을 공포해 3월 말까지 짧은 시간에 정부매수를 완료했다. 이어 토지분배는 '도인민위원회'가 '토지소유권에 관한 증명서'를 교부, 이를 토지대장에 등록하는 식의 절차를 따랐고 6월 20일까지 증명서를 교부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아 토지개혁은 절차상으로는 6월 말에 모든 개혁작업이 끝나는 것으로 했다. 북한은 토지개혁 결과 66만 농가에 1백6만6천ha의 농지를 분배해, 한 농가에 평균 0.15ha(4백50평씩) 돌아갔다고 발표했다.
* 날짜 : 1946/03/05 | |
1946/03/20 |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됐다. 미국측은 아놀드 소장이, 소련측은 스티코프 중장이 대표를 맡았다. 미소공동위는 제2차 대전의 종결 뒤 개최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즉 한반도에 대한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의 실시와 더불어 한국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하여 장차의 독립에 대비케 한다는 내용에 따라 설치됐다. 미소공동위는 4월 17일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한국내 협의대상자가 될 정당과 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는 선언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이 유명한 '코뮤니케 제5호'이다. 그러나 이 선언서에 서명을 하는 것이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 여부를 놓고 미소간에 논란이 벌어져 끝을 맺지 못하자 결국 5월 6일 무기휴회를 선언했다.
* 날짜 : 1946/03/20 ~ 1946/05/06 | |
1946/05/07 | 조선정판사 위폐사건 |
1946년 5월 7일 미군정 수사대가 조선공산당 본부와 공산계 신문을 발행하는 조선정판사가 자리잡고 있는 서울의 한 빌딩을 수색했다. 수사대는 그곳에서 종이, 잉크, 약1천2백만원에 달하는 위조지폐(당시 환율로 약12만달러)를 비롯한 위조지폐 설비를 발견했다. 조사결과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과 기관지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 등이 조선정판사에 있는 지폐 원판을 이용, 선전활동비 등 당의 운영자금을 마련하고 남한 경제를 교란시키기 위해 모두 6차례에 걸쳐 1천2백만원의 지폐를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해 해방일보를 폐간시켰고 조선공산당 간부들을 검거하는 한편 조선공산당본부를 제외한 다른 사무실들을 폐쇄시켰다. 좌익의 반발은 극심했다. 좌익은 이 사건이 좌익을 탄압하기 위한 조작이라고 주장하면서 검찰과 재판부를 협박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위폐사건을 계기로 미군정과 좌익의 실력대결이 본격화되어 좌익세력은 9월파업과 대구폭동 등 비합법 폭력투쟁으로 치달아갔고 마침내 남로당이 창당되었다.
* 날짜 : 1946/05/07 | |
1946/06/01 | 코친차이나임시정부 수립 |
1946년 6월 1일 응우엔 반 틴(Nguyen Van Thinh)를 대포로 하는 코친차이나임시정부를 수립.
* 날짜 : 1946/06/01 | |
1946/06/03 |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 주장 |
1946년 6월 3일 이승만 박사가 전북 정읍에서 행한 한 연설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해방정국에서 가장 국제정세에 밝은 현실주의 정치가 이승만은 이름만 밝히지 않았을 뿐 현실적으로 깊숙이 진전되어 있는 북한의 소비에트 권력체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아무 뚜렷한 전망도 없는 미소공동위나 좌우합작 위에 남한의 정권수립을 무작정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 이른바 '정읍발언'의 배경이다. 이승만의 연설은 미국정부와 국내 중도적 온건파 등을 당황하게 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민족단합을 통한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원했고, 미국은 소련과 합의한 '모스크바 의정서'에 따라 미소협조에 기초해 한반도에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성사시켜 남북을 통틀어 조선임시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진행해 왔기 때문이다. 미소공동위나 좌우합작운동도 이 목적을 위해서였다. 이승만은 미국의 이러한 정책을 맹렬히 공격했다. 소련의 침략적 팽창주의의 본질을 모르는 유화주의자들이 한반도정책을 오도하고 있으며 미국의 구상대로 일을 추진하다가는 결국 남한마저 소련에 의해 공산화될 것이라고 정읍발언에서 경고한 것이다.
* 날짜 : 1946/06/03 | |
1946/06/19 | 국립 서울대안 발표와 반대운동 |
1946년 6월 19일 미군정이 국립서울대안(국대안)을 발표했다. 경성대와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등을 통합한다는 내용이었다. 8월 22일 미군정이 일부 학생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국립서울대 신설을 강행하자 좌익 교수와 학생들은 반대투쟁을 결의하며, 산발적인 반대시위를 벌여나갔다. 이들은 국대안이 고등교육기관을 축소시키며, 미국인을 총장 및 행정담당인사로 기용함으로써 운영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각 학교의 고유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들은 투쟁위를 조직하고 반대운동을 본격화했다. 타대학과 동맹휴학에 들어가는 등 사태가 악화되자 미군정은 휴교조처를 취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래도 반대운동이 격화되자 미군정은 이듬해 5월 12일 4,956명을 제적했고 380여명의 교수를 해직했다. 하지만 5월말 미군정이 국대안 수정법령을 발표하면서 분위기가 가라앉자 8월 대부분의 학생을 복학시켜 국대안 반대운동은 1년 만에 일단락됐다.
* 날짜 : 1946/06/19 | |
1946/06 | 중국, 제2차 국공 내전 |
국공 내전(國共内戰, Chinese Civil War)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해방전쟁으로도 불리는데, 1927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에 일어난 내전을 말한다.
* 날짜 : 1946/06 ~ 1949/12/27 | |
1946/09/14 | 호치민, 프랑스와 잠정협약 |
호치민, 프랑스와 '잠정협약' 체결
* 날짜 : 1946/09/14 | |
1946/09/23 | 9월 총파업 |
9월 총파업이란, 미군정기에 1946년 조선공산당에서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일으켰던 사건을 말한다. 1946년 9월 23일 부산지역 철도 노동자의 파업투쟁을 시작으로 9월 24일부터 조선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주도로 각 산업별 노동조합이 연대투쟁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퍼져나아가 10월 1일 우발적으로 발생한 대구 10.1 사건으로 번져 나아갔다.
* 날짜 : 1946/09/23 | |
1946/10/01 | 대구 10·1 사건 |
미군정의 실정과 식량난, 좌익의 극좌주의적 모험이 복합적인 원인으로 작용, 해방공간에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 대구폭동사건이 1946년 10월 1일 발생했다. 이날 전평의 9월 총파업 지시로 전평 경북도평의회는 파업을 알리는 현판을 걸려고 했다. 경찰의 해산으로 이날은 무사히 지나갔으나 다음날 노동자 피살 소문이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대구는 물론 경북 전역이 술렁거렸다. 경북대를 비롯한 학생시위대가 대구경찰서 앞에서 연좌데모를 시작하면서 시위대가 1만여 명으로까지 확대됐다. 다급해진 한 경찰이 방아쇠를 당기자 그것을 신호로 착각한 경찰이 발포를 시작했다. 18명이 현장에서 쓰러지자 피를 본 시위대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가족들을 구타하는 등 시위가 격렬해지자 미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하며 진압에 나섰다. 하지만 시위대는 대구를 벗어나 영천, 의성, 군위, 왜관 등으로 이동하며 무장투쟁을 선도했다. 아비규환이었다.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폭동참가자가 2백30만명, 살해된 사람수가 수천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대구에서 사망한 경찰관만 54명이고, 부상자만 2만여 명에 달했다.
* 날짜 : 1946/10/01 | |
1946/11/23 | 프랑스 함대, 하이퐁 포격 |
프랑스 함대, 하이퐁 포격
* 날짜 : 1946/11/23 | |
1946/11/23 | 남조선 노동당 결성 |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폭동을 두 달 앞둔 1946년 7월 남북 좌익세력간에 새로운 결집 논의가 진행됐다. 북에서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노동당을, 남에서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 좌익 3당이 합당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하자는 움직임이었다. 북로당 결성은 소련 군정 지원 하에 8월 말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남로당 결성은 미군정의 탄압과 3당간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남에서의 3당합당은 박헌영이 비밀리에 평양과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 여운형에게 좌익3당 통합을 요구한 1946년 7월부터 본격화됐다. 결성과정에서 여운형과 백남운 등이 반발했으나 소련 군정과 김일성 등의 압력으로 남로당은 11월 23일∼24일 양일간 결성대회를 갖고 공식출범할 수 있었다.
* 날짜 : 1946/11/23 | |
1946/12/19 | 베트남 전쟁 발발 |
프랑스는 우세한 군사력을 앞세워 베트민 세력의 분산적인 게릴라전을 제압하고 남부와 중부를 장악한 다음, 중국군이 철수하자 신속히 북부 통킹 델타지역에 진입하여 수도 하노이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베트남민주공화국 정부는 서북 산악지대로 퇴각하여 대치하던 중, 1946년 12월 16일 프랑스로부터 20일까지 전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하노이의 치안권을 넘기라는 최후통첩이 내려지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하고 19일 전면 항전을 선언하였다. 이 날이 곧 1975년 4월에야 끝나는 30년 저항전쟁의 공식 개시일이다.
* 날짜 : 1946/12/19 | |
1947/08/15 | 인도의 독립과 내전 |
인도는 1947년 8월 15일 독립을 획득했으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분열은 힌두교도가 대다수인 인도 공화국과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인 파키스탄으로의 분리를 초래했다.
* 날짜 : 1947/08/15 ~ 1948/12 | |
1947/03/01 | 좌우익 3.1절 충돌 |
1947년 3월 1일 오후 3시40분 경, 3·1절 기념식을 각기 따로 치른 좌우익이 시가행진 중 서울 남대문-서울역 간 도로상에서 격렬한 투석전을 벌이며 충돌해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날은 전국 곳곳에서 좌우익이 충돌, 이날 하루에 만 16명의 사망자와 22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 날짜 : 1947/03/01 | |
1947/03/12 | 트루먼 독트린 |
트루먼 독트린(영어: Truman Doctrine)은 1947년 3월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의회에서 선언한 미국 외교정책에 관한 원칙으로서 그 내용은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자유와 독립의 유지에 노력하며, 소수의 정부지배를 거부하는 의사를 가진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하여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 날짜 : 1947/03/12 | |
1947/03/22 | 전평, 남한 전역서 24시간 총파업 |
1947년 3월 22일 전평(全評)이 남한 전역에서 24시간 동시파업을 단행했다. 요구조건은 3·1절 기념대회에서 만행을 저지른 경찰관 처벌, 노동자 권리보장, 박헌영 체포령 취소, 구속된 전평 간부 석방, 노동법령 개정, 좌익계 신문 정간조치 취소 등 6개항이었다. 이 파업으로 노동자 2천여 명이 검거되어 전평의 조직이 사실상 와해됐다. 특히 1946년 9월 총파업으로 조직손실이 큰데다 다시 이번 파업으로 간부들이 대량 검거돼 전평은 최후의 결정타를 맞은 셈이 됐다.
* 날짜 : 1947/03/22 | |
1947/05/21 |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7년 5월 21일 열렸지만 소련의 무리한 요구가 회의를 또 결렬시켰다. 소련이 공위 참가를 위해 등록한 남한측 425개 단체를 118개로 줄일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특히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정당과 회원 1만명 이하의 군소단체는 협의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반탁운동을 '의사표현의 자유'로 간주하며 소련의 제의를 거부했다. 미소공위가 계속해서 공전상태에 빠지자 미국은 1.한반도 문제를 미영소중 4국회의에서 논의할 것 2.남북한에 각각 입법기관을 설치할 것 3.남북 입법기관 대표들이 논의해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 등을 제안했지만 소련은 남북분열을 조장하는 제안이라며 반대해 결국 2차 공위도 10월 18일 5개월 만에 결렬됐다.
* 날짜 : 1947/05/21 ~ 1947/10/18 | |
1947/06/05 | 마셜 플랜 발표 |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이 서유럽 16개 나라에 행한 대외원조계획이다. 정식 명칭은 유럽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이지만,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마셜(G. C. Marshall)이 처음으로 공식 제안하였기에 ‘마셜 플랜’이라고 한다.
* 날짜 : 1947/06/05 | |
1947/11/14 | 유엔, 한국총선거안 가결 |
두 차례의 미소공동위가 결렬되어 全조선통일임시정부수립이 어렵다고 판단한 미국은 1947년 9월 17일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정식 상정했다. 미국은 또 10월 17일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을 설치, 1948년 3월까지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에 자유선거를 실시, 국회와 정부를 수립한 다음 90일 이내에 미소 양국군을 철수한다"는 결의안도 제출했다. 이에 앞서 미국은 8월 25일 유엔감시와 인구에 비례한 남북입법관선거 실시, 통일임시정부 수립, 미-소-영-중 4개국 회의안을 소련에 제의했으나 소련이 거부한 바 있다. 11월 14일 제2차 유엔 정기총회 전체회의는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는 한국의 독립과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안'을 만장일치로 결의, 마침내 한국 총선거안을 가결시켰다.
* 날짜 : 1947/11/14 | |
1948/04/03 | 제주4·3사건 |
제주 4·3 사건(濟州 4·3 事件)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서 규정하고있다.
* 날짜 : 1948/04/03 | |
1948/04/19 | 김구-김규식 방북, 남북협상 실패 |
1948년 4월 19일 백범 김구 선생과 김규식이 북한에서 개최된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석차 북행을 감행했다. 19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연석회의에 이어 27일부터는 '남북요인 15인회담'과 '4김 회담' 등이 계속됐다. 이같은 일련의 회담을 통해 남북지도자들은 외국군대 즉각철수, 全조선정치회의 소집, 남한 단독선거 반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등의 4개항을 결의했다. 김구의 평양방문은 남북분단을 막아보자는 절실한 취지에서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북한정권의 정통성 선전에 이용당한 결과만을 낳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소련이 유엔 한국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고 유엔 소총회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결의하자 자칫하면 남북이 분단될 것을 우려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 요인회담을 제안했었다.
* 날짜 : 1948/04/19 | |
1948/07/17 | 대한민국 헌법 공포 |
대한민국의 헌법이 공포됨. 존 하지, 미군정 폐지 공식 선언.
* 날짜 : 1948/07/17 | |
1948/08/15 | 대한민국 정부 수립 |
1948년 8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이 출범되었다. 이는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새 국가를 표방하였다.
* 날짜 : 1948/08/15 | |
1948/09/09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 날짜 : 1948/09/09 | |
1948/10/19 | 여수·순천 사건 |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줄여서 여순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로당 계열 장교들이 주동하고 2,000여 명의 군인이 전라남도 여수에서 봉기함으로 인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좌·우익세력으로부터 전남동부지역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반란군에 의해 많은 우익 인사들, 경찰, 그리고 민간인들이 학살당했으며 정부 진압군경이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최소 439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하였다.
* 날짜 : 1948/10/19 | |
1948/10/23 | 반민특위 발족 |
일제 치하에서 친일 부역자를 단죄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반민특위가 1948년 10월 23일 10명의 조사위원들이 첫 위원회를 소집함으로써 정식 발족됐다. 1948년 9월 29일 국회에서 통과된 반민족행위 처벌법 제9조에 의한 특별조사위원회 구성 동의안이 발족의 근거였다. 1년에 불과한 짧은 활동기간이었지만 반민특위의 활동은 혁명을 방불케하는 눈부신 것이었다. 한때의 영화와 권세를 상징했던 인물들이 민족정기의 이름 앞에 속속 쇠고랑을 찼다. 1년 동안 반민특위가 처리한 사건은 무려 6백 82건이었다. 그러나 개혁에는 늘 반발이 따랐다. 친일 세력들로부터 반민특위 활동 방해, 암살 위협 등 갖은 수법이 자행됐다. 이들은 반민특위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몰아 붙였다. 공교롭게도 오랜 망명생활로 인해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없어 친일세력과 손을 잡아야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존재가 특위활동의 가장 큰 저해요소였다. 결국 반민특위는 1949년 9월 22일 와해되었다. 반민특위의 좌절된 혁명은 이후 한국현대사를 굴절과 파란으로 점철되게 했다.
* 날짜 : 1948/10/23 | |
1948 | 제1차 중동전쟁 |
제1차 중동전쟁, 이스라엘 독립전쟁.
* 날짜 : 1948 | |
1948/12/26 | 소련군의 북한철수 발표 |
소련군의 북한철수 발표.
* 날짜 : 1948/12/26 | |
1949/01/31 | 베이징이 중국 인민해방군에 함락 |
베이징이 중국 인민해방군에 함락.
* 날짜 : 1949/01/31 | |
1949/04/04 |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성립.
* 날짜 : 1949/04/04 | |
1949/04/23 | 난징이 중국 인민해방군에 함락 |
중국의 수도 난징이 중국 인민해방군에 함락.
* 날짜 : 1949/04/23 | |
1949/05/20 | 국회 프락치 사건 |
1949년 5월 20일 검찰은 이문원, 최태규 등 국회 소장파 의원 6명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아온 증거를 포착해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소장파 의원들은 1948년 10월 13일 '외국군 철수안'을 긴급동의했으며 1948년 12월 하순경에는 제헌국회 개원 이전에 체결한 각종 한미협정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 이들은 국회의원 62명의 연서로 외군군철수촉구 건의안을 유엔한국위원단에 제출했으며 1949년 2월에는 '남북평화통일방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수사가 확대됨에 따라 국회부의장 김약수와 노일환 배중혁 의원 등이 잇따라 잡히는 등 관련 국회의원이 13명으로 늘어났다. 노일환 이문원은 징역 10년, 김약수 박윤원은 징역 8년, 박옥주 김병회 장욱중 황윤호는 징역 6년, 최태규 이구수 서용길 신성균 배중혁 등은 징역 3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들은 1950년 2월 1일 징역3년에서 10년까지 모두 실형선고를 받아 수감 중 한국전쟁을 맞아 북한군에 잡혀갔다.
* 날짜 : 1949/05/20 | |
1949/05/28 | 주한미군 전면철수 발표 |
1949년 5월 28일 미국무성이 주한 미군가운데 군사고문단을 제외한 미군을 6월말까지 모두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철수발표는 유엔총회 결의(1947.11.14)와 소련군의 북한철수 발표(1948.12.26)에 따른 조치였지만 실제는 미국의 對극동정책의 일환에 따라 결정된 일이었다. 미국은 이듬해 1월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이른바 '애치슨선언'을 발표해 정책변화를 기정사실화했고, 4월에 체결된 태평양조약에서도 "아시아 대륙에서 발생한 분쟁에 대해 미국은 군사적 관여를 배제할 것"이라는 항목을 삽입해 이를 뒷받침했다. 1949년 6월 29일 주한미군은 모두 철수했고 1년 후 한반도에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 날짜 : 1949/05/28 | |
1949/06/06 | 경찰, 반민특위 습격 |
1949년 6월 6일 오전 8시 30분쯤 윤기병 당시 중부경찰서장의 지휘로 중부서 및 서울시내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 80여명이 남대문로 2가에 있는 반민특위 청사 앞에 도착, 삼엄한 포위작전에 들어갔다. 이들은 우선 출근길의 특위 조사관들을 연행, 무기를 압수한 뒤 청사에 난입했다. 경찰은 특위 조사관들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하면서 책상 위의 서류를 찢었다. 직원 주소록 경비전화 자동차 4대 등도 압수했다. 반민특위는 일제 치하에서 친일 부역자를 단죄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1948년 10월 23일 발족했다. 반민특위는 출범 초부터 친일세력의 심한 반발에 부딪쳤다. 해방직후 발족된 새 경찰의 50%이상이 일제 경찰 출신들이었고 이들이 반발세력의 중심이었다. 친일파 세력을 집권 기반으로 한 이승만도 반민특위가 눈에 가시였다. 이승만은 노덕술, 최연 등 심복인 경찰간부들이 특위에 체포되자 특위 해체를 추진했다. 이 사건은 그날로 뜨거운 정치문제가 됐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약화돼 결국 석달 후인 1949년 9월 22일 와해됐다.
* 날짜 : 1949/06/06 | |
1949/06/14 | 바오 다이의 베트남국 성립 |
베트남국은 1949년부터 1955년까지 베트남에 존재한 프랑스의 괴뢰국이었으며,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保大帝)를 국가 원수로 내세워 베트남의 정통 국가로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에 대항했다. 그 이유로 바오 다이 정권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결국 응오딘지엠(吳廷琰)이 베트남국을 장악하여,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함과 동시에 소멸하였다.
* 날짜 : 1949/06/14 | |
1949/06/21 | 농지개혁법 공포 |
1949년 6월 21일 남한에서 농지개혁법이 공포됐다. 북한이 1946년 토지개혁을 실시했지만 남한에서는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토지개혁 논의가 본격화됐다. 농민운동의 고양, 북한의 토지개혁에 자극받은 바가 컸다. 당초부터 '무상몰수 무상분배'안, '유상매수 무상분배'안, '유상매수 유상분배'안이 집중 논의됐으나 좌익세력의 약화와 농민운동의 분열-쇠퇴에 따라 '유상분배' 토지개혁안이 거의 확정됐다. 국회는 농림부가 작성해 국회에 제출한 '농지개혁법안'과 국회가 독자적으로 작성한 '농지개혁법안'을 비교검토한 끝에 보상과 상환액은 각각 평년작의 15할 및 12할 5푼, 보상과 상환은 5년으로 하는 '농지개혁법'을 1949년 4월 28일 통과시켰다. 재정상의 이유로 정부가 보상액을 일치시켜줄 것을 국회에 요구했으나 국회는 이를 거부하고 이날 공포했다. 그러나 지주층의 광범위한 소작지 방매행위로 불완전한 농지개혁이 돼버렸다. 그러나 이 농지개혁도 시행에 들어갈 즈음 발발한 6·25로 일시 중단되었고 더구나 관계서류가 없어진 탓에 대상농지가 축소되었다.
* 날짜 : 1949/06/21 | |
1949/06/26 | 김구 피살 |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 날짜 : 1949/06/26 | |
1949/08/29 | 소련,원자폭탄 개발 |
소련,원자폭탄 개발.
* 날짜 : 1949/08/29 | |
1949/10/01 |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
1911년 중국 국민당이 중심이 된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는 동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이 세워졌으나 1949년 국공 내전을 통해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뒤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여 현재도 중국 공산당이 국정을 담당하고 있다.
* 날짜 : 1949/10/01 | |
1949/12/07 | 중화민국, 수도를 타이베이로 |
국부천대(國府遷臺)는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중화민국 정부가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 섬으로 쫓겨나고, 사실상의 수도를 1949년 12월 7일 난징에서 타이베이로 천도한 사건을 말한다.
* 날짜 : 1949/12/07 | |
1949/12/27 | 인도네시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
인도네시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 날짜 : 1949/12/27 | |
1950/01 | 중국과 소련, 북베트남정부 승인 |
중국과 소련, 호찌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 승인
* 날짜 : 1950/01 | |
1950/01/05 | 미국, 중국-대만 문제 불간섭 선언 |
미국, 중국-대만 문제 불간섭 선언
* 날짜 : 1950/01/05 | |
1950/01/12 | 애치슨라인 발표 |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마오 사이의 협상이 한창일 때인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내셔널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대중(對中) 화해 메시지를 던진다. 이는 중국과 소련을 이간시키기 위한 책략이었다. 이 선언에서 미국은 중공혁명의 성공을 ‘아시아 민족주의의 승리’라고 고무하면서, 중국의 신장(新疆) 지역과 만주에 대한 소련의 야심을 폭로한다. 미국은 아시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없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국의 도서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했다.
* 날짜 : 1950/01/12 | |
1950/02/07 | 미국, 남베트남정부 승인 |
미국, 남베트남정부 승인.
* 날짜 : 1950/02/07 | |
1950/02/14 |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
소련과 중국간의 우호 ·동맹 및 상호원조에 관한 조약.
* 날짜 : 1950/02/14 | |
1950/02/20 | 매카시 선풍 |
매카시즘이라는 말은 미국 상원 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1950년 2월 미국 공화당 당원집회에서 "미국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하고 있으며, 자신은 그 명단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반공주의 광풍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지나친 반공주의, 정적의 성격이나 애국심에 대해 비난을 선동하거나 무분별하고 근거없는 고발을 비판하는 말로 쓰인다.
* 날짜 : 1950/02/20 | |
1950/04/06 | 농지개혁 실시 |
1950년 4월 6일 한국 역사상 최초로 농지개혁이 실시됐다. 농지개혁법은 정부수립 후 1949년 2월 5일 이승만 정부가 국회에 법안을 제출했으나, 지주출신 국회의원들의 반대, 그리고 정부와 국회의 의견출동 등으로 2차례에 걸친 법개정 공포의 파란을 겪었다. 이 농지개혁법은 수확물 평년작의 1.5배를 5년간에 걸쳐 지주에게 균분(매년 수확물의 30%씩) 상환함으로써 소작농에게 농지소유권을 넘겨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농지개혁은 시행 시점이 해방후 5년이 지난 뒤여서 그동안 많은 지주들이 소작인에게 사적으로 땅을 팔았을 뿐 아니라 농민들이 광복 직후부터 줄기차게 바라던 무상몰수·무상분배를 거부하고 유상몰수·유상분배를 실시함으로써 농민들에게 큰 부담과 좌절감을 안겨주었으며 농지개혁 착수 2개월여 만에 발발한 한국전쟁과 인플레로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육성하지도 못했고, 지주들을 산업자본가로 키우지도 못했다.
* 날짜 : 1950/04/06 | |
1950/06/25 | 자본주의 황금기 |
매코믹에 따르면(McCormick), 한국전쟁에서 출발해 베트남전쟁을 종식시킨 1973년 초 파리 평화조약에 이르기까지의 23년은 "세계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수익성 있는 경제성장의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는 다른 누구보다 스티븐 마그린과 줄리엣 쇼가 "자본주의 황금기"라고 부른 시기이다.
* 날짜 : 1950/06/25 ~ 1973/01/27 | |
1950/06/25 | 한국전쟁 발발 |
한국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한반도를 지나는 북위 38도선 이북을 점유하고 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이남의 대한민국을 남침함으로써 발발한 전쟁이다. 1953년 7월 27일의 정전 협정으로 말미암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정전 중이지만, 정전 이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국지적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 날짜 : 1950/06/25 | |
1950/06/27 | 미국,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 |
한국에서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대만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하고, 대통령 트루먼은 "대만의 지위와 안전의 회복, 대일 강화조약, UN에 의한 검토 등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 날짜 : 1950/06/27 | |
1950/06/30 | 맥아더-장개석 회담 |
맥아더를 만난 장제스는 3만3000명을 파병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렇듯 한국전쟁은 시작부터 대만과 한 쌍을 이루고 있었다.
* 날짜 : 1950/06/30 | |
1950/07 | 중국, 군사고문단 베트남 파견 |
1950년 4월부터 무기와 탄약 등 각종 군사 장비를 지원하기 시작한데 이어,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6월 30일 마오쩌둥은 윈난 군구 사령관 천경을 중공중앙 대표로 하고 웨이궈칭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고문단에게 출발 명령을 내렸고 7월 초 남부 국경을 넘어 베트남에 도착하였다.
* 날짜 : 1950/07 | |
1950/09/15 | 인천상륙작전 |
남한에서 거의 포위 당한 유엔군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을 시도하며 맹공격을 가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 날짜 : 1950/09/15 | |
1950/10/01 | 한국군, 38선 돌파 북진 |
한국군, 38선 돌파 북진.
* 날짜 : 1950/10/01 | |
1950/10/05 | 중국 정치국 확대회의 |
10월 4일 마오쩌둥(毛澤東)의 호출을 받은 펑더화이(彭德懷)가 시안(西安)에서 베이징에 도착했다. 5일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한국전쟁을 지휘할 사령관에 임명했다. 7일 유엔군이 38선을 넘었다. 8일 마오쩌둥은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 신분으로 ‘중국인민지원군’ 편성에 관한 명령을 하달했다.
* 날짜 : 1950/10/05 | |
1950/10/11 | 중국, 티베트 침공 |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게되면서 중국은 티베트와 타이완을 포함한 중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겠다고 발표한다.1950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은 티베트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티베트의 평화적인 해방이라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 1951년 5월 23일 티베트와 십칠조협의를 체결하여 강제 합병하였다. 이로써 티베트는 최초로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많은 티베트인들이 정치적인 이유 또는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했다.
* 날짜 : 1950/10/11 | |
1950/10/25 | 중국, 한국전쟁 참전 |
패주하는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군이 1950년 10월 14일부터 한국에 참전, 10월 25일 처음으로 국군 2군단과 대규모로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11월 11일 중국 외교부는 중국군의 참전을 공식으로 시인했다.
* 날짜 : 1950/10/25 | |
1950/11/01 | 트루먼 암살미수사건 |
2명의 푸에르토리코 민족주의 행동대원이 워싱턴에서 해리 트루먼대통령을 저격하려했다.
* 날짜 : 1950/11/01 | |
1951/01/04 | 1.4후퇴 |
1950년 12월 하순 38선 일대까지 남하한 중국군과 북한군은 12월 31일 자정을 기해 일제히 38선을 향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동원된 적의 병력은 중국군 17만 명, 북한군 6만 명. 정부는 이에 앞선 12월 24일 '서울시민 피난령'을 발표했고, 12월 말까지 서울 시민 중 약40%가 피난을 했다. 그리고 1951년 1월 4일, 이른바 '1·4후퇴'인 이날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후퇴했고 유엔군도 서울철수를 완료했다. 중국군은 다음날인 1월 5일 서울로 진입했다. 중국군은 1월 7일 수원, 1월 8일 오산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유엔군은 오산∼장호원∼제천∼영월∼삼척선에서 다시 반격전을 시작했다. 1월 15일에 시작된 유엔군 반격작전의 중점은 북쪽으로 진격하기보다는 적병력을 대량 살육하는 이른바 도살작전에 있었다. 유엔군이 반격작전을 시작하자 공산군은 1개월만에 1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 날짜 : 1951/01/04 | |
1951/03/15 | 이란, 석유 국유화 선언 |
이란, 석유 국유화 선언
* 날짜 : 1951/03/15 | |
1951/04/11 | 맥아더 해임 |
맥아더는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겠다"는게 목표였던 반면, 트루먼은 정치가인지라 "제한전쟁"으로써 전쟁은 시작한 곳에서 끝나야 하고, 얼른 전쟁을 종결지어야 정치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런 의견차로 결국 맥아더는 해임되기에 이르렀다.
* 날짜 : 1951/04/11 | |
1951/05/23 | 중국-티베트, 십칠조협의 체결 |
중국-티베트, 십칠조협의 체결.
* 날짜 : 1951/05/23 | |
1951/07/10 | 휴전회담 시작 |
1년 이상 계속되어 오던 한국전쟁이 1951년 6월 27일 마리크 주 유엔 소련대사의 정전회담 제의로 휴정협상에 대한 논의가 공식화됐다. 한국전에 참전한 16개국도 소련의 제의에 동의하자 이틀 뒤인 6월 29일 트루만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의 후임인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에게 휴전교섭을 지시했다. 다음날인 30일 리지웨이는 공산군측에 원산 앞바다의 덴마크 군함에서 휴전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의하자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용군사령관 팽덕회는 7월 1일 회담장소를 개성으로 하자고 수정 제의했다. 이에따라 휴전예비회담이 7월 8일, 본회담이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개최됐다. 회담장소는 약 3개월 뒤인 10월 7일 안전상의 이유로 판문점으로 변경됐다. 이렇게 해서 한국전쟁 발발 1년 15일만에 휴전협상을 시작했으나 남한정부와 국민들의 휴전반대 데모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년17일이 지난 1953년 7월 27일에 협정이 조인됐다.
* 날짜 : 1951/07/10 | |
1951/09/08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San Francisco)은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전쟁기념 공연예술 센터에서 맺어진 일본과 연합국 사이의 평화 조약이다. 대일강화조약(對日講和條約) 이라고도 불린다.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하여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되었다.
* 날짜 : 1951/09/08 | |
1952/01/18 | 이승만, 평화선 선포 |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 이른바 '이승만 라인'을 선포했다. 선언이 선포되자 일본이 가장 강력하게 반대 반응을 보였고 미국, 영국, 자유중국 등 우방국들도 부당한 조치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정부가 '한일 양국의 평화유지에 목적이 있다'고 명분을 밝힘으로써 이때부터 '평화선'이라 불려졌다. 평화선을 선포하게 된 이유는 한일간의 어업 격차가 심하고, 어업자원 및 대륙붕 자원의 보호가 시급하며, 세계 각국이 영해를 확장하는 추세에 맞춘 것이다. 특히 '맥아더 라인'이 철폐됨에 따라 이를 보완하기 위한 목적도 강했다. 평화선은 한반도 주변수역 50∼100해리 범위로 독도를 라인 안쪽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승만 정부는 평화선을 국내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1953년 어업자원보호법을 제정, 이 수역내에서 외국선박의 불법어로 행위를 엄격히 단속했다. 이 법에 의해 일본선박 3백11척이 나포됐고 이중 1백26척 만 송환되었으며 나머지 1백85척은 한국이 압류했다. 평화선은 1965년 6월 한일국교가 정상화된 후 사실상 철폐됐다.
* 날짜 : 1952/01/18 | |
1952/02/15 | 제1차 한일회담 |
일본 침략에 의한 부당한 강점으로 인하여 과거 반세기동안 중단되었던 한일 양국간의 국교재개를 위한 제1차 한일회담이 1952년 2월 15일 일본 도쿄에서 열렸다. 이번 한일회담은 연합군 최고사령부 외교국장 시볼드의 중개로 1951년 10월 21일부터 열린 예비회담을 거쳐 이뤄졌다. 이날부터 한국의 이승만 정부와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내각 사이에 본회담이 시작됐으나 쌍방의 주장이 크게 엇갈려 4월 21일 중단됐다. 일본은 극히 고자세로 "우리가 요구하는 청구권을 일부 받아들이기는 하겠지만 일본이 한국에 두고 간 재산에 대해서도 청구권을 인정하라"고 주장했다. 즉 일본측은 헤이그협약 47개조의 '개인재산은 몰수하지 못한다'는 규정을 들어 한국에 남기고 간 일본인 재산의 반환을 요구한 것이다. 한국측은 이에 대해 미 군정법령 33호에 의해 몰수한 것이기 때문에 법률상 재산반환을 요구할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결국 회담이 결렬됐다.
* 날짜 : 1952/02/15 | |
1952/05/07 |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 |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 중이던 친공포로들이 1952년 5월 7일 수용소 소장인 미국의 도트 준장을 납치했다. 포로들이 이날 아침 도트 준장과의 면담을 요청하자 도트는 포로들을 정문 밖으로 나오게 했다. 포로 대표들은 종전과 다름없는 식량, 피복, 약품 등의 증가를 요청한 다음 포로교환을 위한 심사중지와 휴전감시를 위한 중립국으로 소련을 수락할 것 등을 제의했다. 포로들은 면담이 끝난 후 돌아서는 도트 준장을 사전각본대로 납치해 수용소 내로 끌고 갔다. 이에 유엔군은 1천여명의 전투병력과 상당수의 전차를 거제도에 투입, 무력으로 도트 준장을 구출하려 했으나 포로들이 "유엔군이 무력을 행사하면 도트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포로들의 요구조건을 일부 수락한 후 72시간만에 도트 준장을 구출했다. 도트는 이 사건으로 종신 대령으로 강등됐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사건은 포로수용소에서 포로와 전쟁을 하고 수용소장이 포로가 되는 등 포로사상 전무후무한 일로 역사에 남아 있다.
* 날짜 : 1952/05/07 | |
1952/06/25 |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
부산정치파동으로 정국이 혼란에 처해있던 1952년 6월 25일. 상해임시정부의 행동대 의열단의 한 단원이었던 유시태가 6·25전쟁 기념식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권총으로 저격했으나 탄환이 불발함에 따라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유시태는 현장에서 잡히고 배후인물인 김시현도 잇따라 붙잡혔다. 김시현은 6개월 전인 1951년 12월에도 인천형무소장 최양옥에게 이대통령 저격을 제의한 혐의로 당국의 수사를 받은 바 있다. 김시현과 유시태는 '국가를 살리는 길은 이대통령을 제거하는 길 밖에 없다'고 결론, 거사에 합의했다고 진술했다. 한때 수사당국은 배후인물 김시현이 민주국민당 소속이었음을 이유로 민국당 고위층인 백남훈, 조병옥 등에게도 수사의 손길을 뻗쳐 정가를 더욱 긴장시켰다. 두 사람은 53년 12월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54년 1월 무기형으로 특사 감형되었고 60년 4·19혁명으로 풀려났다.
* 날짜 : 1952/06/25 | |
1952/07/23 | 이집트 나세르의 쿠데타 |
이집트 나세르,쿠데타 성공.
* 날짜 : 1952/07/23 | |
1952/08 | 일본 재무장 |
경찰예비대가 1952년 8월 보안청 산하 경비대(육군)과 보안대(해군)로 분리되면서, 표면상 경찰조직에서 군대 성격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중국의 통일과 한국전쟁과 관련이 있다.
* 날짜 : 1952/08 | |
1952/08/05 | 제2대 대통령선거 |
부산정치파동 등 갖가지 反민주주의적 독재를 자행하며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킨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8월 5일 실시한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 5백23만8천69표를 얻음으로써 유효투표의 74.6%라는 압도적 지지로 재선됐다. 조봉암 후보는 79만여표, 이시영 후보는 76만여표, 신흥우 후보는 21만여표였다. 후보 9명이 난립한 부통령선거에서는 2백94만여표를 얻은 무소속의 함태영 후보가 1백81만여표를 얻은 자유당의 이범석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은 대통령후보에 이승만, 부통령후보에 이범석을 지명하여 선거전에 돌입했으나 선거도중 이승만이 무소속 후보인 함태영을 부통령으로 지지하는 바람에 이범석은 정치적으로 몰락했다. 8월 15일 정·부통령 취임식이 복구도 채 되지 않은 중앙청에서 거행됐다.
* 날짜 : 1952/08/05 | |
1952/10/03 | 영국,원자폭탄 개발 |
영국,원자폭탄 개발.
* 날짜 : 1952/10/03 | |
1952/11/01 | 미국,수소폭탄 개발 |
미국,수소폭탄 개발.
* 날짜 : 1952/11/01 | |
1952/12/02 |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 내한 |
1952년 12월 2일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선거운동 기간 중 발표한 자신의 공약사항을 지키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대통령선거 공약으로 "당선되면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겠으며 한국전선을 직접 시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부터 5일까지 4일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전방부대를 두루 시찰했으며 이승만 대통령과도 두 차례나 면담, 한국전쟁의 종결방안 등을 긴밀히 협의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한국방문에는 윌슨 국방장관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밴프리트 주한미군사령관 등이 수행했다. 이한 직전에 기자회견을 갖고 "전쟁을 끝내기 위한 계략도 없고 만병통치약도 없다. 그러나 UN의 위치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할 것이며 또 할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방한은 휴전협상의 지지부진, 전선의 소강상태 등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쟁을 종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 날짜 : 1952/12/02 | |
1953/01/20 |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 |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는 미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미 육군 원수이었고 1953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을 지냈다. 제2차 세계 대전동안에 그는 유럽에서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일했으며, 1944-45년에는 서부전선에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비롯한 프랑스와 독일 지역 공격에 대한 책임을 맡아 공격을 계획하고 감독했다. 1951년에 그는 첫 번째 나토 사령관이 되었다. 애칭은 아이크(Ike)다. 전임인 민주당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당시 발생한 한국 전쟁을 종결시켰다. * 날짜 : 1953/01/20 ~ 1961/01/20 | |
1953/03/05 | 스탈린 사망 |
1953년 3월 1일 스탈린은 공산당 간부인 니키타 흐루쇼프 등 공산당 정치국원 4명과 만찬을 하던 도중에 쓰러졌다. 스탈린은 자신을 암살한거라 염려하여 자신의 비밀별장에 데려다 달라고 명한다. 그리고 별장에 도착한뒤 그는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4일 만인 3월 5일 숨졌다.
* 날짜 : 1953/03/05 | |
1953/06/18 | 이승만,반공 포로 석방 |
중공의 개입으로 부담스러워한 미국은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이에 반대한 이승만은 휴전 협정을 방해할 목적으로 수감된 포로들 중 반공포로들을 대규모로 석방했다.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격분한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할 작전을 계획한다.
* 날짜 : 1953/06/18 | |
1953/07/27 | 한국전쟁 휴전협정 조인 |
6·25가 발발한지 만 3년1개월, 휴전협상개시 2년여 만인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유엔측 대표 해리슨 중장과 북한 대표 남일은 18통의 휴전협정문서에 서명했다. 무기휴회 상태였던 휴전협상이 타결을 볼 수 있었던 것은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자 공산측이 부상병포로 우선교환에 합의해왔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도 휴전협정 후에도 한국을 계속 방위하겠다고 언명하면서 협상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4월 12일 성명을 통해 휴전반대 단독북진을 주장했고 국회도 4월 21일 북진통일을 결의했다. 6월 8일 포로교환협정이 체결되자 9일부터 전국적으로 격렬한 데모가 잇따랐고 이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포로 2만7천명을 석방했다. 6월 22일 이 대통령은 클라크 유엔군사령관과 회담을 갖고 한국정부의 휴전협정 동의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중국군 즉시 철수, 제네바정치회담의 시한설정 등 3개항을 제시했다. 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로버트 특사를 한국으로 보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연내에 체결하다"는 조건을 제시하고 7월 24일 휴전협정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 날짜 : 1953/07/27 | |
1953/08/18 | 이란,백색 혁명 |
백색 혁명은 1953년 미국의 지원으로 민족주의자 모사데그를 축출하고 복귀한 팔레비 국왕이 친미노선을 견지하며 추진한 개혁이다. 1963년부터 토지개혁·여성참정권 부여 등의 근대화 작업에 착수했으나 왕권 안정을 위한 국방비 증액과 인플레이션, 생필품 부족 등에 대한 국민의 불만, 전통적인 이슬람·민족주의 세력의 저항을 불러와, 후일 이란 혁명의 기초가 되었다.
* 날짜 : 1953/08/18 | |
1953/08/20 | 소련,수소폭탄 개발 |
소련,수소폭탄 개발.
* 날짜 : 1953/08/20 | |
1953/10/01 |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워싱턴에서 조인됐다. 한국측에서는 변태영 외무장관이, 미국측에서는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이 서명했다. 조약은 1953년 휴전 성립을 전후해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북한의 재침략에 대비한 한미군사동맹의 체결을 촉구한데서 비롯됐다. 휴전직전인 1953년 6월 로버트 미국 대통령 특사의 내한으로 조약에 대한 외교적 절충이 시작됐고 8월 내한한 덜레스 미국무장관과의 일련의 회담에서 결실을 보게됐다. 8월 8일 변태영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서울에서 가조인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이날 워싱턴에서 정식으로 조인됐고, 1954년 1월 18일 발효됐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미국은 육해공군을 한국영토와 그 부근에 배치, 한국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을 공동으로 방위하게 됐다.
* 날짜 : 1953/10/01 | |
1953/12/19 | 호치민, 토지개혁법 공포 |
호치민, 토지개혁법 공포.
* 날짜 : 1953/12/19 | |
1954/03/13 | 디엔비엔푸 전투 |
디엔비엔푸 전투(1954년 3월 13일)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전투이다.
* 날짜 : 1954/03/13 ~ 1954/05/07 | |
1954/04/26 | 제네바 협정 (1954년) |
제네바 협정(1954년 4월 26일 ~ 7월 21일)은 2가지 임무를 띈 협정이었다. 첫째는 한반도의 통일 문제에 관한 것이었고, 두번째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평화 유지의 가능성에 대한 토의였다.
* 날짜 : 1954/04/26 ~ 1954/07/21 | |
1954/05/29 | 빌더버그 회의 시작 |
빌데르베르크 그룹(Bilderberg Group) 또는 빌더버그 콘퍼런스(Bilderberg Conference) 혹은 빌더버그 클럽(Bilderberg Club)은 미국, 유럽 제국에서 정계, 재계, 왕실 관계자들 약 100-150명이 모여 다양한 국제 정치 경제 문제를 토의하고 비밀리에 정책을 결정하는 모임을 말한다.
* 날짜 : 1954/05/29 | |
1954/06/26 | 지엠, 베트남국의 총리 |
한국의 이승만과 비교되는 지엠이 1954년 6월 귀국하여 미국의 지원으로 베트남국의 총리대신을 지내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정을 선언하였다.
* 날짜 : 1954/06/26 | |
1954/07/01 | 일본, 자위대 발족 |
일본, 자위대 발족.
* 날짜 : 1954/07/01 | |
1954/07/21 | 베트남 다시 분단 |
제네바 회의 최종선언 채택. 베트남, 17도선을 경계로 분단하고 1956년 7월 전국 통일선거를 실시하기로 명시하였지만 미국은 서명하지 않았다.
* 날짜 : 1954/07/21 | |
1954/08 | 중국, 대만해방선언 |
저우언라이(周恩來), 대만은 중국영토의 일부이고 대만해방에 대하여 국제연합등 외국이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선언.
* 날짜 : 1954/08 | |
1954/09/08 | 동남아시아 조약기구 |
동남아시아 조약기구(The 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 SEATO)는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영국, 뉴질랜드, 파키스탄, 필리핀, 태국과 미국 8개국에 의해 1954년 9월 8일 조직된 반공 군사 동맹이다. 미국은 남베트남을 SEATO의 보호구역 아래 두었다.
* 날짜 : 1954/09/08 | |
1954/11/29 | 사사오입 개헌 파동 |
자유당이 제안한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헌법개정안이 1954년 11월 29일 불법적으로 통과됐다.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꾀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의된 개정안은 11월 27일 민의원 표결결과 재적의원 203명 중 202명이 투표에 참가해 가 135표, 부 60표, 기권 7표로, 필요한 개헌정족수에 1표가 미달되어 부결됐지만, 자유당 정권은 2일 후인 이날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사사오입(四捨五入)에 의해 135명이라는 억지주장을 펴며 개헌안 가결을 선포했다. 최순주 부의장은 헌법개정안이 가결되었다고 번복선언한 후 27일의 사회착오에 책임을 진다면 부의장직을 사퇴했다. 사사오입 개헌은 절차상으로도 정족수에 미달한 위헌적인 개헌이었을 뿐 만 아니라, 1인의 종신집권을 보장한 개헌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헌정사상 전대미문의 오점을 남겼다.
* 날짜 : 1954/11/29 | |
1954/12 | 미국-대만 방위조약 |
미국-대만 방위조약 체결
* 날짜 : 1954/12 | |
1955/02 | 미국, 남베트남을 위한 군사원조고문단 작동 |
미국, 남베트남을 위한 군사원조고문단 작동
* 날짜 : 1955/02 | |
1955/05 | 프랑스군, 북베트남 철수 |
프랑스군, 북베트남 철수.
* 날짜 : 1955/05 | |
1955/05/14 | 바르샤바 조약기구 |
바르샤바 조약기구(WTO) 체결.
* 날짜 : 1955/05/14 | |
1955/10/26 | 베트남공화국 성립 |
미국의 지원으로 베트남 공화국(南베트남)의 성립.
* 날짜 : 1955/10/26 | |
1955/11/12 | 독일의 재무장 |
연방군은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Gerhard Johann David von Scharnhorst)의 200번째 생일인 1955년 11월 12일에 정식 창설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의 수정 후(後), 서독은 1955년에 NATO 참가국이 되었으며, 1956년에는 18세부터 45세까지의 모든 남성 국민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했다.
* 날짜 : 1955/11/12 | |
1956/01/30 | 김창룡 육군특무대장 피살 |
백범 김구 선생 암살 배후로 지목돼 온 전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이 1956년 1월 30일 출근길에 부하에게 살해됐다. 김창룡은 1940년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을 토벌해 일본 관동군 헌병대 오장(하사급 분대장)에 오른 후 해방 2년 뒤 조선경비대 사관학교 3기생으로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공산당 타도'를 앞세워 여간첩 김수임 사건, 남로당간부 검거 등 굵직한 수사를 담당했으며, 6·25때는 부역자를 가리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다. 그는 '용공분자 색출'을 이유로 당시 5만명이던 군 병력 중 5천명을 잘라내는 순국작업에도 참여했다. 백범이 저격당한 1949년 6월 26일 암살범 안두희를 특무대 영창으로 이감시켜 쉬게 했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를 15년으로 감형시키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안두희도 1992년 "조선호텔 앞 대륙상사로 위장된 특무대 사무실에서 김창룡을 만나 백범 암살을 지시받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 날짜 : 1956/01/30 | |
1956/02 | 흐루시초프, 스탈린 비판 |
1956년 2월 흐루시초프가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소련 국경 내의 정치박해에 관한 비밀보고를 통해 스탈린을 전면적으로 비난하고 나서자, 당시 국제 공산주의운동에 사상적 혼란을 일어났다. 그리고 모택동의 이에 항의함으로써 중소간 이념전쟁이 시작됩니다.
* 날짜 : 1956/02 | |
1956/04/03 | 프랑스, 인도차이나에서 최고사령부 해체 |
프랑스, 인도차이나에서 최고사령부 해체.
* 날짜 : 1956/04/03 | |
1956/05/15 | 제3대 대통령선거 |
이승만의 3차 집권을 겨냥하고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목표로 한 제3대 대통령선거가 1956년 5월 15일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그러나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됐다. 대통령 후보에는 이승만, 신익희, 조봉암 등 3명이, 부통령에는 이기붕, 장면, 박기출, 이윤영, 백성욱, 이종태 등 8명이 출마했다. 선거 10일전에 신익희 후보가 급서하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한 이승만의 득표수는 전체 유효표 720만표의 70%에 달하는 504만여표였고, 신익희 지지표를 일부 흡수한 조봉암도 선전해 유효표의 30%인 216만여표를 얻었다. 선거 전에 사망했음에도 유권자들이 신익희에게 던진 185만표는 무효처리됐다. 부통령 후보들의 득표결과는 장면이 유효표의 46%인 401만여표를 얻은데 비해 이기붕은 44%인 380만표를 얻어 패배했다. 민주당은 신익희 대통령후보의 급서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기회는 놓쳤지만 자유당이 당력과 권력을 총동원하여 추구한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저지함으로써 자유당의 독주를 막아낼수 있게 됐다.
* 날짜 : 1956/05/15 | |
1956/10/23 | 헝가리 혁명 |
1956년 헝가리 의거는 1956년 10월 23일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시민들의 함성으로 시작됐다.
* 날짜 : 1956/10/23 | |
1956/10/29 |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운하 전쟁) |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운하 전쟁,시나이전쟁. 결과적으로 이 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지역에서의 기득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대신 미국과 소련이 대체 열강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 날짜 : 1956/10/29 ~ 1956/11/29 | |
1957 | 아시아 독감 유행 |
100만 ~ 150만 명이 사망.
* 날짜 : 1957 ~ 1958 | |
1957/07/01 | 유엔군 사령부, 일본서 한국으로 이전 |
미국정부가 1957년 7월 1일자로 일본 동경에 있던 미 극동군사령부를 해체하고 극동군사령부와 함께 있던 유엔군사령부를 서울로 이전했다. 또한 유엔군사령관이 주한 미8군사령관을 겸임토록 했다. 유엔군사령부의 서울 이전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對韓 신 무기배치방침표명(5.22)에 뒤이어 신형 F100제트기단 한국배치(6.27), 미 제1기갑사단 한국이동(8.1) 등으로 구체화된 극동미군사력의 전진배치 정책과 월남전 개입 움직임과 맥을 같이 한 것이었다. 이렇게되자 북한은 7월 28일 판문점 정전위원회에서 휴전협정 군사조항 폐기를 요구했고 유엔군측은 북한의 요구를 거부하는 등 휴전선 일대에 긴장이 고조됐다. 이날 서울 용산 미8군사령부 연병장에서 열린 유엔군사령부 서울이전 및 신임 사령관 취임식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장면 부통령 등 한국의 3부 요인과 한·미 군수뇌부가 모두 참석했다.
* 날짜 : 1957/07/01 | |
1957/08/31 | 말레이시아, 영국에서 독립 |
말레이시아, 영국에서 독립
* 날짜 : 1957/08/31 | |
1957/10/04 | 소련, 스푸트니크1호 발사 |
소련, 사상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1호 발사. 무게 82.2kg, 직경 57cm에 4개의 안테나를 단 세계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러시아말로 길동무)가 이날 발사되었다. 스푸트니크1호가 고도 8백80km의 지구 궤도를 96.2분마다 한바퀴씩 회전하므로써 우주시대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고 우주경쟁의 1단계에서 소련이 우위임을 입증해주었다.
* 날짜 : 1957/10/04 | |
1958 | 중국,대약진 운동 |
대약진 운동(Great Leap Forward)은 공산 혁명 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근대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1958년부터 1961년말-1962년초 까지 마오쩌둥의 주도로 시작된 농공업의 대증산 정책이다.
* 날짜 : 1958 ~ 1962 | |
1958 | 남베트남, 농민투쟁이 무장투쟁으로 발전 |
항프전쟁기에 이미 베트민의 토지개혁을 경험한 남부의 농민대중은 미국과 지엠의 분단 획책과 토지 몰수 및 폭압에 항의하여 다시 일어섰다. 농민투쟁은 통일선거 쟁취를 위한 평화적 정치투쟁으로부터 1958년을 전후하여 자위를 위한 무장투쟁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연결고리가 토지투쟁이다. 미국과 지엠이 지주 위주의 농지개혁을 실시해 항프전쟁기 베트민의 토지개혁을 무효화시키자, 이에 맞선 농민의 토지투쟁은 제네바협정 준수, 민족 재통일, 군사기지 건설 반대 등 정치적 요구와 결합되었으며, 지주와 군경의 무력에 맞서 자위를 위한 부분적 무장투쟁과도 결합되기 시작하였다. 토지투쟁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과 지엠이 정규군을 동원하는 군사작전을 감행하였기 때문에, 농민대중은 전면 항전이냐 모두 죽느냐의 기로에 서게 되는 1958년 전후부터 분산적이긴 했지만 각지에서 자발적인 무장투쟁을 개시하였다.
* 날짜 : 1958 | |
1958/01/13 | 진보당 사건 |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의 모든 간부가 북한 간첩과 내통하고 북한의 통일방안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1958년 1월 13일 구속 기소됐다. 1956년 5·15 선거에 대통령후보로 출마한 조봉암이 비록 2위로 낙선은 했지만,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과 자유당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검찰은 진보당 간부들이 박정호 등 14명의 간첩단과 접선한 혐의가 있을 뿐 아니라, 진보당의 평화통일 주장이 북한의 주장과 같아 그들과 내통한 혐의가 짙다는 이유로 全간부를 검거, 송치했다. 조봉암은 1959년 2월 27일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59년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됐다. 진보당 사건은 막 싹이 트던 혁신정당의 활동을 크게 위축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조봉암은 일제시대 조선공산당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으나, 전향해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했고 대통령선거에도 출마한 거물 정치인이었다.
* 날짜 : 1958/01/13 | |
1958/08/08 | 함석헌 사상계 필화사건 |
서울시경이 1958년 8월 8일 재야인사인 함석헌을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구속했다. 혐의 사실은 월간지 사상계 8월호에 기고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6·25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라는 글 내용 중 일부가 대한민국의 주권을 부인했다는 것이다.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검 조인구 부장검사에 따르면 함씨의 글 중에는 "남한은 북한을 소련과 중국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있는 것은 꼭두각시 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없는 백성이다."하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남북한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우리 주권을 부인한 구절이므로 방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함씨는 구속 10일 후인 8월 18일 서울지검에 구속 송치됐으나 서울지검은 9월 30일 조사결과 국가보안법위반혐의가 없다고 불기소 처분했다.
* 날짜 : 1958/08/08 | |
1958/08/23 | 제2차 타이완 해협 위기 |
진먼 포격전 혹은 제2차 타이완 해협 위기는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진먼 섬에 주둔하던 중화민국 해군에 대해 중국 인민해방군이 포격을 가한 전투이다.
* 날짜 : 1958/08/23 ~ 1958/10/05 | |
1958/09/26 | 미얀마, 군사쿠데타 성공 |
미얀마(구 버마)의 네 윈 장군, 군사쿠데타로 집권.
* 날짜 : 1958/09/26 | |
1958/10/01 | 미국,NASA 설립 |
미국 항공 우주국(NASA)은 미국의 국가 기관으로서 우주 계획 및 장기적인 일반 항공 연구 등을 실행하고 있다. 1957년 10월 옛 소련의 인류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 성공에 자극을 받은 미국은, 1958년 7월 29일 NASA를 발족시켰다. 산하 시설로 케네디 우주센터, 고다드 우주 비행 센터, 제트 추진 연구소, 존슨 우주 센터, 랭글리 연구 센터, 마셜 우주 비행 센터 등이 있다.
* 날짜 : 1958/10/01 | |
1959/01 | 베트남 노동당, 남베트남에서의 무장투쟁 허용 |
1959년 1월 베트남노동당 15차 중앙위원회는 남부 지도자의 압력과 북부 건설의 자신감에 의거해 남부에서의 정치투쟁과 결합된 무장투쟁을 허용하기로 결정하였다.
* 날짜 : 1959/01 | |
1959/01/01 | 쿠바 혁명 |
쿠바 혁명(1953년 7월 26일 ~ 1959년 1월 1일)은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등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두 차례에 걸친 무장 투쟁을 벌여 1959년 1월 1일 완수한 혁명을 말한다.
* 날짜 : 1959/01/01 | |
1959/03/10 | 1959년 티베트 봉기 |
1959년 티베트 봉기는 1959년 3월 10일 중국공산당의 강압적인 티베트 통치에 반발한 티베트인에 의하여 일어난 반중국, 반공산주의 봉기이다. 봉기가 일어난 날인 3월 10일은 매년 티베트 망명 정부등 티베트 독립 운동 단체들이 티베트 민족 봉기 기념일이라는 이름으로 기념하고 있다.
* 날짜 : 1959/03/10 | |
1959/03/31 | 달라이라마, 인도 망명 |
티베트의 영적, 정치적 지도자가 인도로 망명하다. 중국과 인도의 관계가 급속 악화.
* 날짜 : 1959/03/31 | |
1959/05 | 남베트남과 일본의 전쟁배상 협정 타결 |
남베트남과 일본이 전쟁배상 협정을 타결 짓자, 중국은 일본의 경제적 지원하에 남베트남 정부를 강화하면서 북에 대한 반격에 나설 준비 작업으로 판단하였다.
* 날짜 : 1959/05 | |
1959/09/17 | 사라호 태풍 |
1959년 9월에 발생한 태풍 사라(태풍번호 5914, JTWC 지정 번호 14W, 국제명 SARAH)는 열대저기압 등급 중에서 가장 높은 “카테고리 5급”까지 발달했던 태풍으로, 대한민국 최대 명절인 추석날 한반도를 강타하여 당시 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일본에서는, 미야코 섬 태풍(宮古島台風)으로 불린다.
* 날짜 : 1959/09/17 | |
1960 | OECD 설립 |
경제 협력 개발 기구(經濟協力開發機構, OECD,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는 세계적인 국제기구 중 하나이다. 대부분 정치적으로 대의제, 경제적으로 자유시장 원칙을 받아들인 선진국들이 회원으로 참여한다.
* 날짜 : 1960 | |
1960/01/19 | 미일안보조약 |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Treaty of Mutual Cooperation and Security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Japan)은 일본과 미국 간의 안전 보장을 목적으로 일본에 주일 미군이 주재하는 것 등을 정한 양국 간의 조약이다.
* 날짜 : 1960/01/19 | |
1960/03/15 | 3·15 부정선거 |
제4대 정·부통령 선거일인 1960년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이 대대적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정·부통령 후보에는 자유당에서 이승만과 이기붕, 민주당에서 조병옥과 장면이 출마했지만 선거를 얼마 남기지 않고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서 치료받던 중 급사하는 바람에 자유당의 관권 선거운동이 더욱 노골화됐다.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정부·여당의 야당에 대한 선거운동 방해사건이 연일 계속되었고, 최인규가 하수인이 되어 계획한 대대적인 부정선거 지침이 각급 기관장에게 극비리에 하달되었다. 이러한 음모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 사본을 민주당에 제공함으로써 드러났다. 3·15 부정선거 결과 이승만-이기붕 후보가 각각 88.7%와 79%의 득표로 정·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자유당의 이같은 선거부정은 3·15선거 당일부터 데모를 유발해 유혈사태를 빚었다. 이런 와중에 4월11일 오전 11시20분. 실종 27일 만에 얼굴에 '포탄'이 박힌 김주열군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부정선거 규탄시위는 분노의 소용돌이 속으로 치닫게 됐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4·19혁명과 자유당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으며, 최인규 등 부정선거 원흉들은 혁명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 날짜 : 1960/03/15 | |
1960/04/19 | 4·19혁명 |
4·19 혁명(四一九革命)은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시작한 시위가 이루어낸 혁명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으며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의 일가족은 동반자살하였다. 일본의 민중운동인 안보투쟁에도 영향을 준 혁명이다. 4·19 민주혁명 혹은 4·19 학생운동, 4월 혁명, 미완의 혁명으로도 일컫는다.
* 날짜 : 1960/04/19 | |
1960/06/15 | 내각책임제 개헌, 제2공화국 성립 |
4·19혁명 후 국회를 해산하라는 국민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선개헌 후해산을 결의했다. 1960년 5월 1일 정헌주 의원 외 174명의 의원이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발의했다. 내각책임제는 입헌국가 정부형태의 한 유형으로 입법부와 행정부가 융합되어있는 정부형태를 말한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은 1960년 5월 11일 국회본회의에 상정 돼, 6월 15일에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기명투표를 실시, 찬성 208표, 반대 3표로 제3차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개헌안에는 헌법상의 명목적인 양원제를 실질적으로 채택하는 내용과 국민의 기본권 강화, 대법원장 및 대법관 선출, 경찰 중립, 헌법재판소 설치 등을 골자로 내용 등을 담고 있다. 명실상부한 민주헌법이자 자유헌법이었다.
* 날짜 : 1960/06/15 | |
1960/06/19 |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내한 |
극동순방에 나선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1960년 6월 19일 필리핀, 대만을 거쳐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전쟁이 치열했던 1952년 12월 2일 제33대 미국 대통령 당선자 자격으로 비밀리에 한국을 방문, 전선을 시찰한지 8년 만이었지만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당초 일본을 방문한 후 22일경 방한할 예정이었으나 일본 내 좌익세력의 반대 데모에 방일계획을 취소하고 3일 앞당겨 방한하게 됐다. 이날 공항 환영행사에는 허정 국무총리를 비롯 전 국무위원들과 대법원장, 매카나기 주한미대사 등이 참석했다. 방문 이틀째인 20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열광적인 100만의 환영인파가 몰려 그의 방한을 축하했다. 그는 허정 국무총리와 장면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등과 회담한 후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 정부와 국민의 계속적인 지지의 보증과 한국의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엄숙한 공약을 재확인했다"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2일간의 한국방문을 마치고 20일 밤 8시 한국을 떠나 하와이로 향했다.
* 날짜 : 1960/06/19 | |
1960/07/16 | 중국에 있는 소련 전문가들 철수 발표 |
1960년 6월 사회주의 국가 공산당과 노동당 대표가 거행한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 회의에서, 소련은 다른 당의 대표단과 함께 중국공산당 대표단을 공격했다. 7월 16일 소련 정부는 돌연 중국에 있는 모든 소련 전문가의 철수 결정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또한 쌍방 간의 수백 개의 협정과 계약을 철회하고 양국간의 의견 불일치와 논쟁을 국가적 문제로 확대시켰다. 이후 소련공산당은 신문에 글을 발표하여 중국공산당을 공격했으며, 1962년 12월부터 흐루시초프가 권좌에서 물러난 1964년 10월까지 쌍방은 서로를 공격하는 많은 글을 발표하여 격렬한 논쟁을 전개했다.
* 날짜 : 1960/07/16 | |
1960/12/20 | 베트남민족해방전선 결성 |
남베트남의 반정부 게릴라 정치단체인 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 결성.
* 날짜 : 1960/12/20 | |
1961/01/20 | 케네디 미국대통령 |
존 피츠제럴드 "잭" 케네디(John Fitzgerald "Jack" Kennedy)는 미국의 제 35대 대통령이자, 미국 대통령 중에서 유일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라는 점과 상류사회에서 잉글랜드계에 밀리던 아일랜드계 혈통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반발과 논쟁을 불러온 인물이다. 그는 1961년부터 1963년에 암살당하기까지 겨우 2년 동안 대통령직에 있었지만 미국의 자유주의에 대한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케네디는 1946년부터 1960년까지 미 의회에 있었으며, 196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케네디는 대통령직에 고작 2년밖에 있지 않았지만, 그의 임기 동안에 피그스 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베를린 장벽, 우주 경쟁, 베트남 전쟁 간접 개입, 미국 민권 운동 등 많은 일이 일어났었다. 서투른 명문가 도련님이라는 우려도 받았으나 역사가들은 케네디를 링컨, 루즈벨트, 워싱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 날짜 : 1961/01/20 ~ 1963/11/22 | |
1961/05/16 | 5.16 군사정변 |
5·16 군사정변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소장 박정희를 비롯한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 출신 일부 장교들이 사회의 혼란을 명분으로 제6군단 포병대, 해병대, 제1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해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변이다.
* 날짜 : 1961/05/16 | |
1961/11/11 |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미국 방문 |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1961년 11월 11일 김포공항을 출발, 15일간의 방미 장도에 올랐다. 박의장은 11월 13일 오후 워싱턴공항에 도착, 존슨 부통령과 러스크 국무장관 등 다수의 미국 고위층과 주미한국대사, 교포들의 환영의 받았다. 박 의장과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11월 14일 정오 오찬을 겸한 대담에 이어 오후에 본격 회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박 의장은 8·12성명에서 발표한 대로 1963년 여름까지는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공약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한국이 무력 침공을 받을 경우 상호방위조약에 의한 군사원조를 확약했고, 박의장도 한반도에서 양국의 공동이익이 강화돼야한다고 역설했다. 박 의장은 맥나마라 국방장관을 만나 제트기 등 한국군의 무기현대화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박 의장은 프레스클럽에서 연설과 기자회견을 한 후 맥아더 원수와 벤플리트 장군을 만나고 하와이를 거쳐 11월 25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 날짜 : 1961/11/11 | |
1962/01/13 |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
1962년 1월 13일 사회경제적인 악순환을 시정하고 자립경제를 이룩하기 위해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이 확정·발표됐다. 이 기간동안 자유경제 원칙에 입각하되, 강력한 계획성을 가미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추진키로 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농업 생산력 증대 2. 전력, 석탄 등 에너지 확충 및 사회간접자본 충족 3. 수출증대로 국제수지 개선 4. 유휴자원 활용 5. 기술진흥 등이다. 따라서 정유, 비료, 화학, 전기기계 등의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 졌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에는 일본자본을 포함한 외국자본의 의존도가 60%에 이르렀으며 연평균 8.5%의 경제성장률을 이룩했다. 1인당 GNP는 83달러에서 123달러로 증가했다.
* 날짜 : 1962/01/13 | |
1962/02 | 미국 사이공에 군사원조 사령부 설치 |
남민전 결성과 더불어 남부 인민의 투쟁이 고양되어 1961년 이미 군사쿠데타 미수사건이 발생하는 등 지엠 체제가 극심하게 동요하자 1962년 2월 사이공에 미 군사원조 사령부를 설치하고 전쟁 지원을 강화한 결과 이듬해 말 미군 특수부대와 후방지원부대가 1만 6천 명에 이를 정도였다.
* 날짜 : 1962/02 | |
1962/03/16 | 정치활동정화법 공포 |
5·16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이 1962년 3월 1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의거, 특별법을 제정했다. 일명 '정치활동정화법'이다. 이 특별법은 박 정권이 구 정치인 및 군부 내 반대세력의 정치활동을 막고 자신들의 정치세력을 키우기 위한 초법적인 수단이었다. 이 법에 따라 정치활동이 봉쇄된 사람은 4천3백74명. 여기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쫓겨난 전 군지도자와 군정에 비판적인 언론인을 비롯, 자유당 민주당 등 야당지도자, 전직 고위관리, 부정축재자, 남북학생회담 관련 학생지도부 등이 망라돼 있었다. 이들에게는 6년 간 공직선거 출마나 선거운동 참여, 정치집회 연설 등 일체의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이에 반발한 윤보선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하자, 최고회의는 이를 즉각 받아들여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리에 앉혔다. 정치정화법 제정으로 민간정치인들의 발을 묶어놓은 가운데 군사정권은 민정참여에 대비, 김종필의 중앙정보부 주도아래 비밀리에 창당을 위한 사전조직 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 날짜 : 1962/03/16 | |
1962/06/10 | 2차 화폐 개혁 |
1962년 6월 10일 0시를 기해 통화개혁이 단행됐다. 기존의 '환' 표시를 '원'으로 바꾸는 동시에 단위를 10대1로 인하했다. 또 1인당 5백원 한도로 신권과 교환토록 하고 나머지는 일단 예치하도록 했다. 신고 마감일인 6월 17일까지 전국에서 신고한 구권의 총액은 1천8백73억1천9백환이었다. 이 조치는 5·16군사정변 직후부터 반년만에 두배로 늘어난 통화를 거둬 들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내자를 충당하기 위해 단행한 것이다. '긴급통화조치법'에 의거 단행된 제2차 통화개혁은 타당성이 미약하고 중도에 봉쇄계정 자체가 백지화됨으로서 아무런 성과도 없지 못하고 도리어 유통과정의 경색, 기업가동률의 저하, 생산의 위축 등 악영향만 끼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통화개혁 조치 때 일부 사람들은 이왕 못쓰는 돈 실컷 먹기나 하자며 그동안 비싸서 사먹지 못했던 음식이나 과일을 사먹는 풍경도 볼 수 있었다.
* 날짜 : 1962/06/10 | |
1962/10/10 | 인도-중국 국경 분쟁 |
중인국경분쟁(中印國境紛爭)은 중국과 인도 양국의 국경을 놓고 생긴 분쟁이다. 1962년 10월 10일부터 11월 21일까지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다.
* 날짜 : 1962/10/10 ~ 1962/11/21 | |
1962/10/14 | 쿠바 미사일 위기 |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10월 14일, 미국측의 첩보기 록히드 U-2에 의해 쿠바에서 건설중이던 소련 미사일 기지의 사진과, 건설현장으로 부품을 운반하던 선박의 사진이 촬영되면서 시작된 미국과 구 소련과의 대립을 뜻한다.
* 날짜 : 1962/10/14 ~ 1962/10/28 | |
1963 | 간호사 및 광부 파독 시작 |
간호사 및 광부 파독 시작
* 날짜 : 1963 | |
1963/08/05 |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 |
핵실험 금지 조약의 정식 명칭은 대기권 내, 우주 공간 및 수중에서 핵무기 실험을 금지하는 조약(Treaty of Banning Nuclear Weapons Tests in the Atmosphere in Outer Space and Under Water)이다. 지하를 제외한 모든 핵폭발을 금지함으로써 핵무기 경쟁을 억제하고, 핵폭발에 의한 방사능 강하물의 환경 오염을 방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미국, 소비에트 연방, 영국 3개국이 1963년 8월 5일 모스크바에서 조인하였다.
* 날짜 : 1963/08/05 | |
1963/10/15 | 박정희 대통령 당선, 제3공화국 발족 |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어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이로써 1961년 5월 16일 이래 2년7개월 동안 계속해 온 군사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대통령 취임식에는 미국을 비롯, 자유우방국가에서 온 경축사절 84명과 신·구 정부수뇌와 학생대표들이 참석했다. 특히 이 자리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과 장면, 허정, 송요찬씨 등 전 정부수뇌와 대통령 취임선서에 입회할 국회의원과 대법원 판사 등이 자리를 같이 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국민 앞에 군림하지 않고 겨레의 충복으로 봉사할 것"을 다짐하고 "국민이 자립, 자조하는 정신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참여해 단합해 줄 것"을 호소했다. 박대통령은 취임식이 끝난 후 최두선 국무총리와 전국무위원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 날짜 : 1963/10/15 | |
1963/11/01 | 남베트남 쿠데타 |
미국 케네디 정부의 묵인하에 남베트남 군부 쿠데타, 지엠 살해당함
* 날짜 : 1963/11/01 | |
1963/11/22 | 케네디 대통령 암살 |
케네디 대통령 암살.
* 날짜 : 1963/11/22 | |
1963/11/22 | 존슨 미국대통령 |
린든 베인스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년 8월 27일 ~ 1973년 1월 22일)은 미국의 제 36대 대통령이다. 그의 별명은 LBJ로 알려졌다.
* 날짜 : 1963/11/22 ~ 1969/01/20 | |
1964 | 영국, 빅터 로스차일드를 소련 간첩 혐의로 조사 |
영국, 빅터 로스차일드를 소련 간첩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결과는 무죄였다.
* 날짜 : 1964 | |
1964/01 | 미국, 북베트남 정찰비행 등 승인 |
미국, 북베트남 정찰비행과 남베트남 특공대의 북부 비밀기습 승인.
* 날짜 : 1964/01 | |
1964/01/30 | 남베트남 응우엔카인 쿠데타 |
남베트남 응우엔카인 쿠데타. 이후 1964년 한 해에만 7회, 1967년까지 총 10회 정권교체
* 날짜 : 1964/01/30 | |
1964/02 | 북한, 3대혁명역량 강화노선 채택 |
1954~64년 사이에는 소련의 평화공존 노선의 영향으로 북한의 대남전략도 그 범위 안에 머물렀다. 그런데 1964년 2월 갑자기 3대 혁명역량 강화노선을 채택하고 1965년 중반부터 대남전략을 폭력투쟁으로 전환한 것은 베트남전쟁의 확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날짜 : 1964/02 | |
1964/06/03 | 6.3 한일협정 반대운동 |
6·3 항쟁 또는 6·3 시위, 한일협상 반대운동은 1964년 6월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상에 반대하여 일으킨 운동이었다. 1964년 6월 3일 박정희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당시 절정에 이른 한일국교정상화회담 반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6월 3일 저녁 8시에 선포한 계엄은 7월 29일 해지되었다.
* 날짜 : 1964/06/03 | |
1964/07 | 미국, 테일러를 사이공 대사로 임명 |
한국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이던 테일러를 주 사이공 대사로 임명하자 중국은 이를 맥아더의 연합군사령관 취임만큼 중대한 사태로 받아들였다. 이에 즉시 베트남, 중국, 라오스 3국 지도자들이 하노이에 모여 미국이 곧 지상군을 파병할 것으로 예견하고 그 대처 방안을 강구하였는데, 중국은 북이 공격받을 경우 필요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였다.
* 날짜 : 1964/07 | |
1964/08/02 | 통킹 만 사건 |
미국은 통킹 만 사건을 명분으로 베트남에 대해 공개적으로 군사 개입을 강화하게 된다. 8월 7일, 미 의회는 사실상 선전포고인 '통킹 만 결의'를 의결하였으며, 1965년 2월부터는 B-52 폭격기를 동원한 북폭에 나섰고, 지상군도 파견되었다.
* 날짜 : 1964/08/02 | |
1964/08/08 | 중국군 남부 국경에 전진 배치 |
8월 7일, 미국 의회는 사실상 선전포고인 '통킹 만 결의'를 의결하였는데, 그 다음날 중국은 즉각 공군과 해군을 남부 국경에 전진 배치하고 호치민에게 대응 조치를 강구하면서 싸울 준비를 하라는 전문을 보낸 다음, 미그 전투기 15대를 하노이에 보내고 베트남군 조종사 훈련을 개시하는 동시에 파병을 위해 필요한 조사단을 베트남에 급파하였다.
* 날짜 : 1964/08/08 | |
1964/08/14 | 인혁당 사건 발표 |
1964년 8월 14일 인혁당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기자회견을 소집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은 전국에 수배 중에 있다."며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남한 내 지하조직 사건이라는 것이 사건발표의 요지였다.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에서 관련자들을 조사하다가 1964년 8월 18일 서울지검에 송치되었다. 사건이 정보부의 손을 떠나 검찰에 넘어간 뒤부터 인혁당 사건은 묘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정보부가 주장한 것처럼 사건이 그렇게 북괴의 지령을 받은 국가보안법 사범이 아니라는 점과 이로 말미암은 검찰내부의 분규 및 관련자들에 대한 고문설 등이 나돌기 시작했다. 공안부 검사들마저 피의자들의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하는 항명 파동을 일으킬 정도로 사건 자체가 조작 혐의가 짙었다. 재판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에 의한 조작사건임이 밝혀져 관련자 대부분이 무죄를 선고를 받고 일단락 됐다.
* 날짜 : 1964/08/14 | |
1964/10/10 | 도쿄 올림픽 |
1964년 하계 올림픽은 1964년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제18회 하계 올림픽이다.
* 날짜 : 1964/10/10 | |
1964/10/13 | 흐루시초프 실각 |
집단지도 체제를 무시한 정책 결정, 농업 정책 실패, 쿠바 위기에서 미국에 대한 양보 등은 많은 반대파를 만들어내었고, 1964년 10월 13일 중앙위원회의 결정으로 실각되었다.
* 날짜 : 1964/10/13 | |
1964/10/16 | 중국,원자폭탄 개발 |
중국,원자폭탄 개발.
* 날짜 : 1964/10/16 | |
1964/11/03 | 1964년 미국 대통령선거 |
민주당 현직 대통령 린든 존슨이 공화당 상원 의원 배리 골드 워트에 압승을 거두고 쉽게 당선되었다.
* 날짜 : 1964/11/03 | |
1964/12/07 | 박정희 대통령 서독 방문 |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 12월 7일 뤼프케 서독 대통령의 초청으로 본에 도착, 서독을 공식방문했다. 방문 이틀째인 8일 박 대통령은 하인강변에 자리잡은 서독대통령의 함머슈미트관저로 뤼프케 대통령을 공식방문하여 약1시간에 걸쳐 한독정상회담을 갖고, 국토통일과 경제협력등 양국공통의 과제를 협의했다. 다음날도 에르하르트 서독수상과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간의 우호증진과 경제협력 등을 다짐하고 12월 15일 귀국했다. 박 대통령의 방독외교는 한국이 서구로 진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치적으로는 두나라의 국토통일과 관련 공동관심을 표명했다는 점에서, 외교적으로는 종래의 대미 일변도에서 탈피해 다원외교와 적극외교로 전환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양국정상을 경제 우위가 통일의 선행조건임을 강조하고 1억5천9백만마르크(3천9백75만달러)를 지원하는데 관한 한독경제협정에 정식조인했다. 이밖에도 한독통상협정, 한독해운협정을 체결했으며 서독측은 서독기업인들의 대한차관단 구성의사를 표명했다.
* 날짜 : 1964/12/07 | |
1965/02/07 | 미국, 북베트남 폭격 재개 |
미국은 1965년 2월부터 다시 북폭을 재개하고 중국이 파병하면 중국 핵시설을 공격하겠다는 보도가 미국 신문에 연일 나오는 가운데, 소련 수상 코시킨도 하노이를 방문해 전투기 등의 지원을 약속하며 중국의 영향력 확장을 견제하려 하였다.
* 날짜 : 1965/02/07 | |
1965/03/08 | 미국해병대 베트남 상륙 |
1965년 3월 미 해병대를 필두루 하는 지상군이 대거 투입되었고, 그 직후 하이난 도(海南島) 상공에서 미· 중 전투기의 교전이 벌여졌다.
* 날짜 : 1965/03/08 | |
1965/06 | 중국군 베트남 파병 |
미국 지상군이 직접 공격해 오지 않는 한 공군과 전투병은 파견하지 않고 공병대를 중심으로 한 후방근무 부대만을 파견하되, 정예병력을 선발함으로써 평시에는 후방지원 업무를 수행하다가 만일 미국 지상군이 북진할 경우 이에 맞서는 전투부대로 전환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중국군은 17도선 이남에는 배치되지 않았으나, 그 북부의 전역에 산개하여 중국군의 존재를 과시함으로써 미국 지상군의 북진은 곧 중국과의 전쟁임을 경고하는 효과를 노렸다.
* 날짜 : 1965/06 | |
1965/06/22 | 한일국교정상화 |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예로부터 한국과 폭넓게 교류해 왔으며, 강제침략과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965년 6월 22일 기본조약, 어업협정, 경제협력협정,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협정, 문화협정 등 5개협정이 이루어지면서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 날짜 : 1965/06/22 | |
1965/08/13 | 베트남 파병안 국회 통과 |
8월 13일 국회는 베트남 파병안을 통과시켰다. 베트남 파병안의 경우 전투사단을 보내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한일협정과는 달리 윤보선, 장준하 등의 반대와 학생운동권의 일부 반대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반대가 없었다.
* 날짜 : 1965/08/13 | |
1965/09/30 | 인도네시아 쿠데타 |
1960년대 중반에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300만명의 공산당원을 포함하여 1천7백만명의 지지자를 갖춘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공산당 조직을 갖게 되었다. 반면에 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국내정치는 신경을 쓰지 못하여, 1960년대 중반 국민경제가 파탄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인플레로 점점 더 국민경제는 최악이 되었고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가던 차에, 1965년 9월 30일 밤중에 여섯명의 반공주의자 장군들이 납치,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공산당과 10년 이상 긴장의 관계를 유지해왔던 군부는 이를 공산당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대대적인 좌익분자 소탕작업에 착수했고, 이 작전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군부의 실력자이자 육군전략 예비군 사령관인 ‘수하르토’ 장군이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는 이 소탕작업에 반대의 입장을 보이다가 ‘9.30’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루머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 이후 직접 관여는 부정되었으나 그의 권위는 날로 실추되어 갔고, 1966년 5월 수하르토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1970년 6월 세상을 떠났다.
* 날짜 : 1965/09/30 | |
1965/10/09 | 청룡부대 베트남 상륙 |
1965년 10월 3일 한국군 전투부대의 선진으로 부산을 출항하여 그 해 10월 9일 베트남의 캄란만에 상륙하였다. 언어와 풍속과 지리에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해병대의 용맹성과 한국전쟁에서 얻은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캄란과 동바틴지역을 회복하였다.
* 날짜 : 1965/10/09 | |
1965/11/14 | 이아 드랑 계곡 전투 |
이아 드랑 계곡 전투(1965년 11월 14일 ~ 19일)는 베트남 전쟁 중에 캄보디아 국경 근처의 베트남 중부 고원 지방 이아 드랑 계곡에서 미군과 북베트남군과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 자체는 미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었는데, 북베트남군을 구축하고 이곳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이후 북베트남군은 물량을 능가하는 미군과 정면으로 충돌을 피하고 주로 게릴라전을 전술로 미군을 괴롭혔다.
* 날짜 : 1965/11/14 ~ 1965/11/19 | |
1966/05/16 | 중국 문화대혁명 |
이 운동은 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인 마오쩌둥의 제창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부르주아 계급의 자본주의 요소가 공산당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중국의 젊은이들이 사상과 행동을 규합해 "혁명 후의 계급 투쟁"을 통해 이런 것들을 제거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홍위병의 움직임으로 구체화되었다.
* 날짜 : 1966/05/16 ~ 1976/09/09 | |
1967/01/19 | 해군 56함 침몰 |
1967년 1월 19일 오후 2시40분쯤 동해 어로저지선 근방에서 명태잡이 어선을 보호 중이던 해군 56함 당포호가 북한 해안포의 집중포격을 받고 격침됐다. 해군 56함은 이날 명태잡이 어선 1백여척이 고성군 수원단 남쪽에서 어로저지선을 넘어가는 것을 남쪽으로 돌아오도록 운항 지도하던 중, 수원단 남쪽 북한 해안포대에서 퍼붓는 2백36발의 포격을 받았다. 56함의 함장인 김승배 중령은 즉각 응사명령을 내렸고, 20여분간 교전 끝에 적의 2탄이 다시 56함 기관실에 명중함에 따라 선체는 정지하고 이어 통신실 포대 등에 8발이 또 명중해 교전한지 1시간여 만에 56함은 침몰했다. 56함에 타고있던 78명 중 32명이 실종되고 46명만 구조됐으나 구조자 중 32명이 중경상을 입고 그중 4명이 병원으로 이송중 사망했다.
* 날짜 : 1967/01/19 | |
1967/04/14 | GATT 국내에서 발효 |
우리나라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가입이 1967년 4월 14일부터 정식으로 발효되어 우리나라가 72번째의 GATT 가입국이 됐다. 이에 따라 재무부는 체코 유고슬라비아 쿠바 등 공산국가를 제외한 68개 가트 가입국과 우리나라와 별도의 무역협정을 맺은 자유중국 태국 필리핀 월남 캄보디아 5개국 등 총73개국에 대해 이날부터 최혜국 대우를 실시하고 가트 가입때 양허한 수입품목에 양허세율을 적용하도록 지시했다. 양허세율이 적용된 대상품목은 모두 60개품목으로 그 중 17개 품목은 14일부터 세율을 인하하고, 41개 품목은 당시의 세율 그대로 두기로 했으며 2개 품목은 세율의 인상한계를 미리 정해놓도록 했다.
* 날짜 : 1967/04/14 | |
1967/05/03 | 제6대 대통령에 박정희 당선 |
박정희 대통령의 4년 치적을 판가름하는 제6대 대통령선거가 1967년 5월 3일 전국7천8백63개 투표소에서 일제히 실시됐다. 선거에서는 박 후보가 5백68만8천6백66표를 얻어 신민당 윤보선 후보의 4백52만6천5백41표 보다 1백16만2천7백31표를 더 많이 획득, 대통령에 당선됐다. 투표율은 83.6%였다. 박 대통령의 재선은 국민들이 조국 근대화로 민족을 중흥시키겠다는 박대통령의 공약에 기대를 걸었고 집권당의 강력한 조직과 막대한 자금력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반면 신민당은 민중계와 신한계가 단합하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다. 이후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공화당이 전국 1백31개 지역구에서 1백3석, 신민당이 27석, 대중당이 1석을 차지했다.
* 날짜 : 1967/05/03 | |
1967/06/05 |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
이스라엘군이 1967년 게릴라 기지가 된 시리아를 공격하였다. 이스라엘군이 승전보를 울리며 전쟁은 점차 확대되었다. 결국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중재로 같은 해 11월 중동분쟁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결의242호를 선언하였다.
* 날짜 : 1967/06/05 ~ 1967/06/09 | |
1967/08/08 | 아세안 설립 |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은 1967년에 설립된 동남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 공동체이다. 매년 11월에 정상회의를 개최한다. 아세안은 현재 거대한 공동체로 거듭 태어나고 있다. 1967년 8월 8일 태국 방콕에서 창설된 아세안은 오는 2015년까지 유럽 연합과 맞먹는 정치·경제 통합체를 지향하고 있다.
* 날짜 : 1967/08/08 | |
1968 | 홍콩 독감 유행 |
75만 ~ 100만 명이 사망.
* 날짜 : 1968 ~ 1969 | |
1968/01 | 미국체제 위기 |
『장기 20세기』에서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는 1968년과 1973년 사이 세 개의 영역에서 미국체제의 위기 발생을 말했다.
* 날짜 : 1968/01 ~ 1973/12 | |
1968/01/05 | 프라하의 봄 |
프라하의 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이 간섭하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기를 일컫는다. 이 시기는 1968년 1월 5일에 슬로바키아의 개혁주의자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집권하면서 시작되었으며, 8월 21일 소비에트 연방과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의 동맹국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개혁을 중단시키면서 막을 내렸다.
* 날짜 : 1968/01/05 ~ 1968/08/21 | |
1968/01/21 | 1.21사태 |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원 31명이 김일성의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휴전선을 넘어 서울에 침투했다. 자하문을 통과하던 중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기관총을 난사하며 도주하자 우리측 군경은 비상경계에 들어가 북한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함으로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현장에서 비상근무 중이던 종로경찰서 최규식 총경이 순직했다. 이날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는 귀순했다. 이 사건은 북한이 대남적화 공작을 위한 유격전 활동을 전개하기에 앞서 시도한 탐색행위로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향토예비군 창설에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 날짜 : 1968/01/21 | |
1968/01/23 |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
1968년 1월 23일 동해안 공해상에서 미 해군 소속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Pueblo)호가 북한군에 의해 나포됐다. 이날 푸에블로호는 동경 127°54′, 북위 39°25′공해상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1시 45분께 무장한 4척의 북한 초계정과 미그기 2대의 위협하에 원산항으로 강제 납치됐다. 배에는 함장을 비롯해 6명의 해군 장교와 수병 75명, 그리고 민간인 2명 등 총83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납치된 푸에블로호는 경화물선을 개조한 해군 정보 수집 보조함으로 중량 906t, 길이 54m, 너비 10m, 시속 12.2노트에 구경 50mm 기관포 2문을 갖춘 비무장 함정이었다. 미 해군 함정이 공해상에서 납치되기는 미 해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번 나포사건은 사건 발생 11개월 만인 1968년 12월 23일 28차례에 걸친 비밀 협상 끝에 푸에블로호 선체와 장비는 북한측에 몰수되고, 82명의 생존 승무원과 시체 1구가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는 것으로 마감됐다.
* 날짜 : 1968/01/23 | |
1968/01/30 | 구정 대공세 |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 또는 테트 공세는 1968년 1월 30일 밤부터 전개 된 베트남 인민군(NVA)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 베트콩)의 대공세이다.
* 날짜 : 1968/01/30 | |
1968/02 |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평화대행진 |
1968년 2월 독일에서 구미 각국 신죄파 지식인들로 구성된 국제베트남회의가 열려 미국의 부당한 개입을 반대하는 다국적 평화행진이 벌어졌고 이는 그 유명한 68운동으로 발전하였다.
* 날짜 : 1968/02 | |
1968/03/16 | 밀라이 학살 |
밀라이 학살은 베트남 전쟁 중인 1968년 3월 16일 남베트남 밀라이에서 발생한 미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대량 학살사건이다. 이는 구정공세에 대한 반격작전 도중에 발생한 것이었다.
* 날짜 : 1968/03/16 | |
1968/03/31 | 존슨, 북폭 제한 및 평화협상 선언 |
존슨, 북폭 제한 및 평화협상 선언.
* 날짜 : 1968/03/31 | |
1968/04/01 | 향토예비군 창설 |
1968년 무장간첩침투사건과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을 계기로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1968년 4월 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됐다. 3월 1일부터 전격적으로 추진한 예비군편성은 제1예비역과 제1보충역, 18세 이상의 남녀 지원자 등 모두 2백여만명으로 구성했다. 향토예비군의 임무는 1.국가비상사태하에서 현역군부대의 역활 2.무장공비 침투지역에서의 무장공비 소멸 3.경찰력만으로 진압할 수 없는 무장소요 진압 등이다.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예비군이나 직장예비군으로 편성하며 향토예비군에 관한 사항은 국방부 장관이 관장한다. 이렇게 조직된 예비군은 7월 29일 전남 허사도에 무장간첩 2명이 나타났을 때 처음으로 출동해 군경의 합동작전을 도왔다. 본격적인 예비군의 작전활동은 11월 3일 울진 삼척지구에 침투한 공비 1백여명을 소탕하는 작전에서 39일동안 연 10만명이 출동해 큰 전과를 올렸다.
* 날짜 : 1968/04/01 | |
1968/04/04 | 킹목사 암살 |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되어가는 시기인 1968년 4월 4일 테네시 주 멤피스의 한 모텔 발코니에서 극우파 백인 제임스 얼 레이의 총에 맞아 암살되었다. 미국에서는 그를 기려 그의 생일(1월 15일)에 가까운 매년 1월 세 번째 월요일을 마틴 루서 킹 주니어의 날로 정하고 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 날짜 : 1968/04/04 | |
1968/05 | 프랑스 5월 혁명 |
5월 혁명(五月 革命) 또는 68 혁명, 또는 프랑스 5월 혁명은 프랑스 드골 정부의 실정과 사회의 모순으로 인한 저항운동과 총파업투쟁을 뜻한다. 당시 대부분의 운동가들은 좌파였지만, 현재 좌파 정치단체나 노동조합은 이 운동과 거리가 있다. 이 혁명은 교육체계와 사회문화라는 측면에서 "구시대"를 뒤바꿀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즉,68혁명 또는 5월혁명은 현재 가치와 질서에 저항한 사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 날짜 : 1968/05 | |
1968/05 | 파리평화협상 시작 |
베트남전쟁의 파리평화협상 시작
* 날짜 : 1968/05 | |
1968/06/06 |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 암살 |
1968년 3월 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후보가 되어 출마성명을 하고, 6월 5일 캘리포니아주(州) 예비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직후 요르단계(系)의 이민자에게 저격당하여 다음날 아침에 죽었다.
* 날짜 : 1968/06/06 | |
1968/11/02 |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
1968년 11월 2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예하의 124군 부대 소속의 무장공비가 경북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했다. 이는 지난 1.21 청와대기습사태의 실패를 만회하고 남한에서 반정부 민중봉기를 일으킬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10월 30일에서 11월 2일에 이르는 사흘 사이에 8개조로 나누어져 야음을 타고 경상북도 울진군 고포해안에 상륙, 울진·삼척·봉화·명주·정선 등지로 침투했다. 군복·신사복·노동복 등 갖가지 옷차림에 기관단총과 수류탄을 지닌 무장공비들은 주민들을 집합시킨 다음 북한책자를 나누어 주면서 북한 발전상을 선전하는 한편, 정치사상교육을 시키면서 '인민유격대'에 가입할 것을 강요했다. 이들의 만행으로 평창군 산간마을에서는 10세의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절규하다가 처참한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공비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결사적인 신고에 힘입어 상황을 파악한 당국은 11월 3일 오후 2시30분을 기하여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부지역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대간첩 대책본부의 지휘 아래 군과 향토예비군을 출동시켜 소탕작전을 벌인 결과 11월 16일까지 3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였으며, 연말까지는 대부분을 소탕했다.
* 날짜 : 1968/11/02 | |
1968/11 | 중국 베트남에서 철군 시작 |
중국은 중ㆍ소 대립이 절정에 달한 1968년 11월부터 철군을 시작하였고, 이듬해 중ㆍ소 대립이 국경 충돌로 발전하자 소련을 제1의 적으로 간주하던 중국은 베트남전에서 손을 떼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힌 미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선회하였다. 중국의 철군은 1968년~69년 문화대혁명의 파괴적 폐단이 절정에 달했을 뿐더러 마오의 정적 제거 목표가 달성되었다는 국내정치적 요인도 고려된 것이었다.
* 날짜 : 1968/11 | |
1968/11/05 | 1968년 미국 대통령선거 |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과 민주당 후보 휴버트 험프리의 11월 대통령선거에서 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건 닉슨이 당선되었고 그는 중국과 소련에게 베트남 지원 중단을 요청하면서 파리 평화협상에 적극 나섰다.
* 날짜 : 1968/11/05 | |
1969/01/20 | 닉슨 미국대통령 |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Richard Milhous Nixon, 1913년 1월 9일 ~ 1994년 4월 22일)은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이다.
* 날짜 : 1969/01/20 ~ 1974/08/09 | |
1969/01/20 |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 |
1969년 닉슨 행정부가 출범하자 대통령 안보 보좌관으로 합류했다. 1973년에는 윌리엄 P. 로저스 국무 장관이 사임하자 56대 국무 장관이 되었으며, 포드 행정부때 까지 그 직을 맡았다.
* 날짜 : 1969/01/20 | |
1969/03/02 | 중소 국경분쟁 |
1969년 3월 2일, 우수리 강의 전바오 섬(珍寶島, 러시아 명: 다만스키 섬)에서 중국과 소련 사이에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 군사 충돌은 같은 해 9월까지 계속됐다. 이는 영토 문제 뿐만 아니라 스탈린 사후 심화되었던 중·소의 대립을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했다.
* 날짜 : 1969/03/02 | |
1969/03/16 | 명주·삼척 무장공비 출현 |
1969년 3월 16일 새벽 1시경 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읍 어선통제 경찰초소에 무장 공비 수명이 나타나 경비중이던 강관수 순경을 죽이고 달아났다. 이 무장공비들은 주문진 수상검문소에 근무중인 강 순경과 이웅재 순경에게 "우리는 인민유격대다."라고 소리치고 반항하는 강순경 등을 비롯해 8군데를 찔러 숨지게 했다. 또 6월 8일 새벽 1시50분경 삼척군 북평읍북쪽 1.2km지점에서 무장간첩선이 발견돼 집중사격 끝에 침몰됐으며 같은 날 새벽2시 반경 아군 해안경비부대서 2백m 떨어진 해안에서 괴선박 1척이 적발 격침됐다. 이 교전에서 아군의 피해는 없었으나 괴선박이 82mm무반동포를 발사, 민간인 이대진씨 일가족 5명이 사망했다.
* 날짜 : 1969/03/16 | |
1969/04/28 | 드골,대통령직 사임 |
드골,대통령직 사임.
* 날짜 : 1969/04/28 | |
1969/07/08 | 베트남에서 미군 철수 시작 |
1969년 7월부터 베트남에서 미군 철수 시작하여 1973년 3월 29일 철군을 완료하였다.
* 날짜 : 1969/07/08 | |
1969/07/25 | 닉슨 독트린 발표 |
1969년 닉슨 대통령은 괌에서 키신저가 써준 닉슨 독트린, 이른바 ‘괌 독트린’이라는 것을 거창하게 발표했다. 이 노선은 한국 안보의 한국화(Koreanization), 즉 주한미군 감축으로 이어졌고 닉슨은 미군 1개 사단을 철수시켰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에 이를 갈며 이른바 자주국방 노선을 추진했다.
* 날짜 : 1969/07/25 | |
1969/09/01 | 카다피, 쿠데타 집권 |
육군 대위 카다피는 1969년 9월 1일 동료 장교들과 함께 수도 트리폴리를 공격하면서 기습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했다. 당시 해외 순방 차 터키에 체류 중이던 국왕 이드리스 1세는 객지에서 그대로 퇴위당해 터키로 망명했고, 국가의 중추기관도 유혈사태 없이 간단히 제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무혈 쿠테타'로 사실상 정권을 잡은 카다피는 쿠데타 직후 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그 해 11월에 잠정헌법을 공포한 이후 신생 리비아 공화국의 최고정치기구인 혁명지도평의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쿠데타 이후 리비아는 왕조가 교체되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 날짜 : 1969/09/01 | |
1969/09/02 | 호치민 사망 |
1969년 9월 2일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 사망하였다. 호찌민은 유언으로 당의 단결과 전쟁 후 국토 재건을 당부하였다.
* 날짜 : 1969/09/02 | |
1969/09/14 | 3선 개헌 |
공화당이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50분경 야당이 농성중인 국회 본회의장을 피해 국회 제3별관 특별회의실에서 제6차 본회의를 소집, 3선개헌안을 전격적으로 변칙 통과시켰다. 개헌안 표결은 공화당 소속의원을 비롯한 개헌안 발의 서명자 1백18명 전원과 무소속의 김용태의원 등 3명과 정우회의 양찬우 의원 등 모두 1백22명이 참석, 참석의원 전원이 가표를 던져 개헌통과선 1백14표를 넘었다. 이에따라 이효상 의장은 개헌안을 가결했음을 선포했다. 공화당의 3선개헌안은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를 연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개헌안을 처리하는 절차법안인 국민투표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함에 따라 10월 17일 개헌찬반을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 총유권자 1천5백4만8천9백25명 중 77.1%가 투표를 했고 이중 65.1%가 찬성, 개헌을 확정했다.
* 날짜 : 1969/09/14 | |
1969/10/15 | 미국, 대규모 반전 시위 |
그 중 가장 큰 것은, 1969년 10월 15일을 '베트남 반전의 날'로 정하여, 워싱턴을 중심으로 미국 각지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베트남반전통일행동이다. 이 반전운동은 그해 11월, 12월에도 계속되었으며, 1971년 6월에도 일어났다.
* 날짜 : 1969/10/15 | |
1970 | 새마을 운동 시작 |
새마을 운동(새마을運動)은 1970년 초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대한민국 농촌의 현대화를 위해 시작되어 범국가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운동이다.
* 날짜 : 1970 | |
1970/03/18 | 캄보디아, 친미 쿠데타 |
1970년 3월 18일의 아침, 시아누크 국왕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에 방문 도중, 하원이 갑자기 소집되어 국가원수로서의 시아누크의 하야를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주동자이던 론 놀 장군은 비상시 권력이 주어져 수상이 되어, 10월에 크메르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 날짜 : 1970/03/18 | |
1970/07/07 | 경부고속도로 개통 |
번영의 대동맥이며 민족 중흥의 이정표인 경부고속도로가 1970년 7월 7일 개통됐다. 총길이 428km에 걸쳐 4차선 아스팔트가 깔리면서, 서울∼부산 천리길이 4시간 거리로 줄어들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도 고속도로시대에 진입했다. 기업들은 운송기간이 단축될 것이라 좋아했고, 농어민들은 생필품을 값싸게 살수 있다고 반겼다.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한 것이 1967년 11월. 1968년 2월 착공 이후 2년 5개월만에 완공된 초스피드 건설이었다. 당시 공사비가 총 4백29억원으로 1km당 1억원이 소요된 절약형 건설이기도 했다. 또 공사에 동원된 연인원은 8백50여만명에 달했으며 쌓아올린 흙이 트럭 1천6백만대분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식에서 "가장 싼값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예술작품"이라고 자랑할 수 있었던 공사였다.
* 날짜 : 1970/07/07 | |
1970/08/06 |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1971년 겨울부터 무기 국산화에 착수하였다.
* 날짜 : 1970/08/06 | |
1970/08/12 | 모스크바 조약 |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와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상호 무력 사용을 포기한다는 모스크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브란트의동방정책이 첫 성과를 거두었으며 유럽에 해빙(데탕트)이 시작됨.
* 날짜 : 1970/08/12 | |
1970/11/13 | 전태일 분신 자살 |
전태일(全泰壹, 1948년 8월 26일 대구 (당시 대구부 남산정) 출생 ~ 1970년 11월 13일)은 대한민국의 노동자, 노동운동가이다. 1960년대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 분신 자결하였다. 헌신적으로 노동자 인권운동을 펼쳤기에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1]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진보 진영에서는 전태일을 부를 때 흔히 ‘열사’나 ‘동지’[2]호칭을 붙인다.
* 날짜 : 1970/11/13 | |
1971/04/27 | 대통령선거 박정희 당선 |
1971년 4월 27일 실시한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6백34만2천8백28표를 획득,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얻은 5백39만5천9백표보다 94만6천9백28표를 앞질러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초 7명의 후보가 난립했으나 통사당의 김철 후보와 민중당 성보경 후보가 중도 사퇴, 5명이 경쟁했다. 이번 선거는 사실상 민주공화당과 신민당의 각축전이었다. 선거때 박 후보는 공화당이 주도한 경제성장의 비전을 제시했고, 김 후보는 박대통령의 영구집권 기도를 규탄하고 향토예비군제를 폐지하겠다고 공약해 상당한 반응을 얻었으나 조직의 열세로 득표와 연결짓지 못했다. 또 5월 25일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총 2백4석 중 민주공화당이 전국구 의원 27명을 포함해 1백13명, 신민당은 전국구 의원 24명을 포함 89명이 당선돼 양당체제로 돌입했다.
* 날짜 : 1971/04/27 | |
1971/08/15 | 닉슨,금 태환 정지 선언 |
1944년에 만들어진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는 미국의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했지만 금태환(금 1온스 – 35달러)을 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금본위제의 전통을 유지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닉슨 쇼크(Nixon shock)’라 불리는 1971년 8월 15일에 발표한 달러와 금의 교환 정지로 금본위제는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 날짜 : 1971/08/15 | |
1971/10/25 | 중국 유엔 가입 |
중국 유엔 가입
* 날짜 : 1971/10/25 | |
1971/12/04 | 한국군 베트남에서 철수 시작 |
주월 한국군 제1단계 철수 시작(제2해병 여단).
* 날짜 : 1971/12/04 | |
1971/12/06 | 박정희 대통령,국가비상사태 선언 |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중국의 유엔가입을 계기로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남침준비에 광분하는 북한의 행동을 주시한 결과, 한국의 안보가 위태로운 시점에 처했다는 것이 선포이유였다.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긴급국무회의와 국가안전보장회의 연석회의에서는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고, 안보상 취약점이 될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으며, 언론은 무책임한 안보논의를 삼가고, 모든 국민은 안보상 실무수행에 자진실시하고, 안보위주의 새가치관을 확립할 것을 의결했다. 이에따라 공화당은 비상사태 선언에 법적 근거를 부여하기 위해 12월 21일 긴급 당무회의와 의원총회를 개최, 비상사태하에서 대통령에게 광범위한 비상권한을 부여하는 전문 12조와 부칙으로 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안'을 마련해 12월 27일 국회에 제출, 가결했다.
* 날짜 : 1971/12/06 | |
1971/12/16 | 방글라데시 독립 |
인도의 지원 속에 결국 1971년 12월 16일 파키스탄 군대는 항복하고 벵골 국가라는 뜻의 방글라데시가 탄생하였다.
* 날짜 : 1971/12/16 | |
1971/12/18 | 스미스소니언 협정 |
1971년 12월 워싱턴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개최된 10개국 재무장관회의에서 합의된 국제통화조정협정.
* 날짜 : 1971/12/18 | |
1972/02/21 | 미국-중국,정상회담 |
미국의 닉슨과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의 정상회담은 양국의 관계정상화를 위해 대화한 것으로, 주변 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 날짜 : 1972/02/21 | |
1972/05/15 | 미국, 오키나와 반환 |
오키나와 반환은 1972년 5월 15일 오키나와 현의 영유권이 미국으로부터 일본에 돌아간 일을 일컫는다.
* 날짜 : 1972/05/15 | |
1972/05/26 | SALT I 조인 |
전략 무기 제한 협상(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 SALT)은 1969년부터 1979년까지 열렸던 미국과 소련의 회담이다. 제1차회담은 69년에 시작되어 72년 5월 26일 미국 닉슨대통령의 소련방문 때 2가지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 날짜 : 1972/05/26 | |
1972/07/04 | 7.4 남북공동성명 |
남북한의 긴장완화를 위한 7·4 남북공동성명이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발표됐다. 미국과 중국의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종래의 대미의존적인 안보정책에서 탈피하고자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한 결과였다. 성명이 나오기까지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평양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이 각기 상대방을 방문(서울방문시에는 박성철 제2부수상이 대신 방문)해 회담을 진행했다. 그 내용은 1.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적 해결 2. 돌발적 군사사고 방지, 상호간의 신속한 업무처리를 위한 서울과 평양간의 상설 직통전화 가설 3. 남북적십자회담에 대한 적극 협조 4.상대방에 대한 중상비방, 무장도발 포기 5. 남북간 다방면의 교류 6.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등이다.
* 날짜 : 1972/07/04 | |
1972/08/03 | 긴급재정명령 |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8월 3일 자정을 기해 헌법 73조에 의한 긴급재정명령(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이른바 '8·3경제조치' 8개항을 발동했다. 긴급명령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기업은 2일 현재 보유하고 있는 모든 사채(私債)를 정부에 신고해야 하며 사채는 3일자로 월리 1.35% 3년거치 5년분할 상환의 새로운 채권채무 관계로 조정되거나 또는 출자로 전환되어야 한다. 2. 금융기관은 2천억원의 특별금융채권을 발행, 이 자금으로 기업의 단기고리대출금의 일부를 연리 8% 3년거치 5년 상환의 장기저리 대출금으로 대환(貸煥)한다 3. 일체의 어음교환을 금지한다 등의 내용이다. 이 긴급명령은 박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수개월전부터 관련 장관들이 검토, 시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조처는 한마디로 기업을 사채를 포함한 채무의 중압에서 해방시킴으로써 기업재무구조를 건전히 해 궁극적으로 경제의 안정성을 돕자는 혁명적인 조처로 평가됐다.
* 날짜 : 1972/08/03 | |
1972/09/29 | 중일국교 수립 |
일본 수상, 다나카 중국 방문하고 중일국교 수립.
* 날짜 : 1972/09/29 | |
1972/10/17 | 10월 유신 |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포한 것이다. 이후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 비상국무회의 설치 등의 비상조치를 취한 후 자신의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후속 조치들을 속속 단행했다. 10월 27일에는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했고, 11월 21일에는 반대 발언이 완전히 봉쇄된 가운데 국민투표를 치러 투표율 91.9%에 91.5% 찬성으로 개헌안을 확정시켰다. 박 대통령은 12월 23일 확정된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에 단독 출마,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다. 박 대통령이 비상수단으로 체제개편을 단행한 것은 3선개헌에 이어 또다시 개헌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 71년 대통령선거에서 고전했다는 점, 남북대회 재개로 명분이 생겼다는 점 등 제반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 날짜 : 1972/10/17 | |
1972/11/07 | 1972년 미국 대통령선거 |
닉슨은 총선 득표율에서 23.2%차로 승리를 거두며, 대통령 선거 역사 중 4번째로 큰 차이로 압승했다.
* 날짜 : 1972/11/07 | |
1972/12/18 | 하노이와 하이퐁 대규모 폭격 |
닉슨은 남베트남에게 여전히 지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고 북베트남으로 부터 유리한 협정 조건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1972년 12월 18일부터 29일까지 하노이와 하이퐁를 폭격하는 라인베커 II 작전을 실행하였다. 무차별 폭격 작전에 사용된 폭탄은 총 12만 톤으로 히로시마 원자 폭탄의 5배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이중 4만 톤이 하노이 시내에 집중되었다. 이 폭격으로 북베트남의 경제와 공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같은 시기 닉슨은 남베트남의 티에우를 압박하여 남북 양자간의 평화 유지와 미군 철수를 골자로 하는 협정 조건을 승인하도록 하였다.
* 날짜 : 1972/12/18 ~ 1972/12/29 | |
1972/12/23 | 첫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로 박정희 당선 |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실시한 대통령선거에서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2천3백59명 대의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유신헌법과 국민회의법 규정에 따라 토론없이 무기명 방식으로 투표해 찬성 2천3백57표 무효 2표의 압도적 지지로 박정희 대통령을 선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24일 당선소감에서 "국력배양을 가속화하며 안정과 번영 그리고 평화의 기틀을 더욱 공고히 다져나가 민족의 염원인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발표하고 결의문을 채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2월 27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한편 이날 실시된 대통령선거는 72년 11월 21일 국민투표로 확정된 유신헌법에 따라 치러졌다.
* 날짜 : 1972/12/23 | |
1973 | 제1차 석유 파동 |
제1차 석유 파동(~1974).
* 날짜 : 1973 ~ 1974/12 | |
1973/01/27 | 베트남 전쟁 휴전 |
1973년 1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그해 봄에 사이공 정부의 외국 지원군들이 철수했다.
* 날짜 : 1973/01/27 | |
1973/02/12 | 달러화 10% 평가절하 |
미국은 달러의 10% 평가절하를 발표하여 1971년 12월에 합의된 스미스소니언 체제가 붕괴됨.
* 날짜 : 1973/02/12 | |
1973/06/23 | 박정희 대통령 6.23선언 |
조국의 평화통일 및 개방선린외교를 표방한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성명 이른바 '6.23선언'이 1973년 6월 23일 발표됐다. 이 성명은 1970년 8월 15일 한국정부의 '평화통일구상선언' 발표에 북한이 1971년 8월 12일 남북적십자회담 제의로 응답함으로써 시작된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의 경험을 토대로 통일 여건을 보다 실질적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통일외교의 의지를 담고 있다. 7개항으로 구성된 선언은 1. 조국평화통일을 위한 노력 2. 남북한 상호 내정불간섭 3. 남북해화 성실 인내 노력 계속 4.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 불반대 5.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불반대 6. 상호평등원칙 아래 모든 국가와 문호개방 7. 우방과 기존관계를 공고히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선언의 의의를 크게 두가지로 압축해보면 첫째 세계사적으로는 세계평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한다는 점과 민족사적으로 '선평화 후통일' 여건 마련의 현실적인 방향을 천명했다는 점이다.
* 날짜 : 1973/06/23 | |
1973/07 | 삼각위원회 설립 |
1973년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efeller) 전 JP모건체이스 회장이 만들었고, 아시아·태평양, 북미, 유럽 3개 지역의 경제계·학계·관계 인사 390명으로 구성돼 있다.
* 날짜 : 1973/07 | |
1973/07/03 | 포항제철 준공 |
1973년 7월 3일 포항제철 준공식이 있었다. 1970년 4월에 기공하여 3년 3개월 만에 완공된 것이다. 선진국 전문가들이 불가능이라고 한 마당에 연산 1백3만 톤 생산능력의 제철 공장 건설은 당시 한국 형편으로는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 날짜 : 1973/07/03 | |
1973/08/08 | 김대중 납치 사건 |
김대중 납치 사건(金大中拉致事件)은 일본으로 망명 중이던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대중이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일본 도쿄 도의 호텔 그랜드팰리스 2210호실 부근에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누군가의 섭렵 요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8월 13일에 서울의 자택 앞에서 발견된 사건이다.
* 날짜 : 1973/08/08 | |
1973/09/11 | 피노체트,칠레 쿠데타 |
아우구스토 호세 라몬 피노체트 우가르테는 1973년부터 1990년까지 칠레의 대통령을 지낸 칠레의 정치인, 군인이다. 그의 정권 하에서 신자유주의에 근거한 광범위한 경제 개혁이 시행되었으나, 좌파 정당,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 인사,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 당시 공직역임자 등에 대한 탄압 정책이 벌여져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 날짜 : 1973/09/11 | |
1973/10/06 | 제4차 중동전쟁 |
욤키푸르 전쟁, 라마단 전쟁 또는 10월 전쟁 또는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1973년 10월 6일 부터 10월 26일까지 일어났던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군(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됨)간의 전쟁이다. 제4차 중동 전쟁이라고도 한다. 전쟁은 욤 키푸르(유대교의 속죄일) 때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이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을 기습하여 시작되었다. 이 곳은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에 점령된 지역이다.
* 날짜 : 1973/10/06 ~ 1973/10/26 | |
1974/04/03 | 민청학련 사건 |
박정희 대통령이 1974년 4월 3일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결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는 확증을 포착했다"고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집단행동을 일체 금지시켰다. 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을 도화선으로 반독재-반유신체제 운동이 본격화되자 이에 앞장 선 대학생-지식인-종교인 등의 활동을 무마시킬 필요에서였다. 악명 높았던 중앙정보부는 1024명의 위반자를 조사해 이 중 180명을 군법에 회부, 구속기소했다. 구속된 180명은 비상군법회의에서 인혁당계 23명 중 8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민청학련 주모자급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나머지 피고인들도 최고 20년에서 집행유예까지 선고받았다. 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의 암살과 더불어 유신체제가 종언을 고한 뒤 이 사건으로 처벌받았던 사람들은 복권됐다.
* 날짜 : 1974/04/03 | |
1974/05/18 | 인도,원자폭탄 개발 |
인도,원자폭탄 개발.
* 날짜 : 1974/05/18 | |
1974/08/09 | 워터게이트 사건 |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은 1972년부터 1974년까지 2년동안 미국에서 일어난 각종 일련의 사건들을 지칭하는 말로서, 미국의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민주당을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권력 남용으로 말미암은 정치 스캔들이었다.
* 날짜 : 1974/08/09 | |
1974/08/09 | 포드 미국대통령 |
제럴드 루돌프 포드 주니어(Gerald Rudolph Ford, Jr. 1913년 7월 14일 ~ 2006년 12월 26일)는 미국의 제38대 대통령이다. 그는 선거에 의해 대통령이나 부통령으로 선출된 적이 없이 대통령직을 수행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1973년 스피로 애그뉴가 부통령을 사임함에 따라 리처드 닉슨에 의해 지명되었고 미국 하원에 의해 승인되었다. 그리고 리처드 닉슨이 1974년 8월 9일 사임함에 따라서 대통령직을 승계하였으며, 밀러드 필모어, 앤드루 존슨, 체스터 A. 아서에 이어 4번째로 선거를 통하지 않고 승계한 대통령이 되었다.
* 날짜 : 1974/08/09 ~ 1977/01/20 | |
1974/08/15 | 육영수 저격 사건 |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이 청중석 뒤쪽에서 뛰어나와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총탄은 빗나가 박대통령 대신 육영수 여사의 머리에 명중, 육여사는 절명했고 합창단의 한 여학생이 유탄에 맞아 숨졌다. 현장에서 체포된 문세광은 재일 조총련계 한국교포 2세로서 74년 5월 북한의 대일공작선인 만경봉호에서 대통령을 저격하라는 지령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범인이 사용한 권총이 일본 경찰서에서 훔쳤다는 점, 범인이 소지한 여권이 위조여권이었다는 점, 일본인이 공범으로 끼어있다는 사실 등으로 인해 한때 한일관계가 불편해지기도 했다.
* 날짜 : 1974/08/15 | |
1974/08/15 | 지하철 1호선 개통 |
서울지하철 1호선이 1974년 8월 15일 개통됐다. 이날 오전 11시 청량리 지하철역에서 개통식을 갖고 첫 열차 108호가 청량리-서울역간의 역사적인 첫 운행을 시작하면서 한국에서의 지하철시대가 개막됐다. 서울에 고속대량수송수단인 자하철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후반부터였다. 71년 4월 12일에 착공, 3년4개월만에 완공된 서울 지하철은 내자 2백36억원과 외자 94억원 등 총3백30억이 소요됐다. 지하15m를 달리는 지하철은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서울역-청량리 간 7.8km를 18분에 주파했다. 이로써 우리는 일본, 중국에 이어 아시아에서 3번째로 지하철을 보유한 나라가 됐다.
* 날짜 : 1974/08/15 | |
1974/11/15 | 제1땅굴 발견 |
1974년 11월 15일 오전 7시50분쯤 군사분계선 남측을 정례적으로 순찰하던 민경대원들이 지표의 공기구멍에서 증기가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 "온천이 나오는가 보다"고 농담을 하고 지나려는 것을 선임하사인 구정섭 중사가 월남전의 동굴작전에서 얻은 체험으로 이상이 있음을 직감 굴토작업을 시작했다. 대원들의 굴토작업이 시작되자 북한초소에서 약3분간 3백여발의 기관총 사격을 가해왔으며 간헐적으로 1시간 15분동안 교전이 벌어졌다. 발견된 땅굴은 북한이 우리측 남방한계선을 향해 1천여m이상이나 폭 1m 높이 1.2m의 견고한 것으로, 첫 조사를 했을때 굴속에는 먹다 남은 밥과 국이 있었으며 터널 곳곳에서 폭발물들이 발견됐다. 땅굴이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 발견됨으로써 북한의 음흉한 남침야욕은 만천하에 폭로됐고, 제2, 3땅굴을 발견하는 기폭제가 됐다.
* 날짜 : 1974/11/15 | |
1975/01/06 | 프억렁 함락 |
1974년 12월 13일 북베트남군은 푸옥렁 성에 있는 14번 통로를 공격하였다. 1975년 1월 6일 성도(省都)인 푸옥빈이 함락되었다. 푸옥빈이 함락된 뒤에도 미국의 지원이 없자 남베트남의 지배층은 혼란에 빠졌다.
* 날짜 : 1975/01/06 | |
1975/01/22 | 유신헌법 재신임 |
박정희 대통령이 1975년 1월 22일 야당과 일부 재야세력의 헌법논쟁에 따른 정국의 혼란을 예방하고 국론통일을 위해 유신헌법과 유신체제 유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 더불어 특별회담을 통해 이번 국민투표는 현행 헌법에 대한 찬반 뿐 아니라 대통령에 대한 신임(信任) 여부를 결정하는 것으로 국민이 원할 경우 즉각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임을 밝혔다. 음력설 다음날인 2월 12일 유신체제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총유권자 1천6백78만 8천8백39명 중 1천3백40만4천2백45명이 투표해 이 중 73.1%인 9백80만2백6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박 대통령은 유신체제가 국민들의 호응을 얻은 것으로 판단, 3월 15일 긴급조치 1호와 4호로 구속한 1백48명에 대해 구속집행 정지처분을 내려 전국 8개 교도소에서 가석방했다.
* 날짜 : 1975/01/22 | |
1975/03/10 | 북베트남 총공세 |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의 정계가 소용돌이쳐서, 다시 베트남에 개입하지 못할 것을 확신한 북베트남은 무력통일을 결심했다.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북베트남군이 중부에서 총공세를 감행했다.
* 날짜 : 1975/03/10 | |
1975/03/30 | 다낭 함락 |
남베트남 제2도시인 다낭이 함락되었다. 이로써 베트남 중부는 북베트남의 것이 되었다.
* 날짜 : 1975/03/30 | |
1975/04/17 |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가 장악 |
이웃 나라 베트남에서는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베트남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이후, 크메르 루주가 수도 프놈펜에 입성하였고, 1976년 1월에 캄보디아 민주헌법을 공포하여, 국명을 민주 캄푸챠로 개칭했다.
* 날짜 : 1975/04/17 | |
1975/04/30 | 사이공 함락 |
사이공 함락(-陷落)은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인민공화국에게 베트남 공화국의 수도인 사이공이 함락된 사건이다.
* 날짜 : 1975/04/30 | |
1975/05/13 | 긴급조치 9호 선포 |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긴급조치 9호' 일명 긴급조치 9호를 1975년 5월 13일 선포했다. 4월 17일 크메르가 공산 게릴라에 항복하고, 4월 30일 월남도 공산화되어 총력안보와 국민총화를 굳히기 위해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고 밝혔다. 헌법 비방이나 반대, 유언비어 유포, 허가없는 학생시위-집회 금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9호는 긴급조치 1호에서 7호까지의 내용을 거의 포괄하고 있다. 긴급조치 9호가 시행됨으로써 한국사회는 전시상태나 다름없는 비상체제로 진입하게 됐다. 반정부활동을 언론이 보도하거나 전파하는 일까지 금지하고, 위반자는 영장없이 체포-구금할 수 있고, 이 조치를 비방하는 행위 역시 1년 이상의 징역형에 10년 이상의 자격정지가 부과됐다. 9호는 박대통령이 시해된 79년 10월26일까지 만 4년 6개월동안 유신정권의 안전판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 날짜 : 1975/05/13 | |
1975/12/01 |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 건국 선포 |
1975년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군에게 항복하자 라오스 국왕이 퇴위하고 수바나 푸마 총리도 사임해서 라오스도 사실상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1975년 12월 1일 긴급소집된 인민대표민족회의는 라오스 왕국을 폐지하고 라오스 인민 민주 공화국 건국을 선포했으며 수파누봉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30년 내전에 마침표를 찍음과 동시에 평화가 찾아온다.
* 날짜 : 1975/12/01 | |
1976/01 | 킹스턴 체제 |
1976년 1월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에서 개최된 IMF 잠정위원회에서 합의된 새로운 국제통화면에서의 협력체제.
* 날짜 : 1976/01 | |
1976/07/02 | 베트남 통일 |
1976년 7월 2일 남북 베트남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일되었다.
* 날짜 : 1976/07/02 | |
1976/08/18 | 판문점 도끼 사건 |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 유엔군측 초소 부근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에게 도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8.18 도끼만행사건'이다. 사건은 이날 오전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명이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모두 11명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유엔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리고 있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고 있던 중 발생했다. 가지치기를 지켜보던 북한군이 "나뭇가지를 치지말라"며 생트집을 잡았으나 미군이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자 갑자기 수십 명의 북한 병사들이 트럭을 타고 달려와 도끼, 몽둥이 등을 휘두르며 폭행을 시작,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하고 나머지 9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물러갔다. 사건 발생 후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로까지 발전했으나 북한의 김일성이 사과문을 유엔군측에 전달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
* 날짜 : 1976/08/18 | |
1976/09/09 | 마오쩌둥 사망 |
모택동(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 또는 마오쩌둥(毛澤東)은 중국의 정치인, 군인, 교육자, 혁명가, 사상가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정치가이자 초대 국가 주석이며, 공산주의자이다. 그는 이른바 '모택동주의'를 창시한 사상가로 족적을 남겼으며 시인이나 서예가로도 유명하다.
* 날짜 : 1976/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