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황금기 (1950년 ~ 1973년)

조반니 아리기의 『장기 20세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매코믹에 따르면(McCormick), 한국전쟁에서 출발해 베트남전쟁을 종식시킨 1973년 초 파리 평화조약에 이르기까지의 23년은 “세계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수익성 있는 경제성장의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는 다른 누구보다 스티븐 마그린과 줄리엣 쇼가 “자본주의 황금기“라고 부른 시기이다(Magrlin and Schor 1991).

* yellow의 세계사 연대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950

 

※ 관련글

– 베트남전쟁 (1946년 ~ 1975년) – 동아시아 30년 전쟁 : http://yellow.kr/blog/?p=1035

– 미국체제 위기 (1968년 ~ 1973년) : http://yellow.kr/blog/?p=582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마셜 플랜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서유럽을 미국 이미지에 따라 재형성하기 시작하였고, 1950년대와 1960년대 세계무역과 생산 팽창의 “이륙”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러나 1940년대 말 전체에 걸쳐 계속되는 달러 부족 때문에, 유럽에서 미국의 기반을 강화한다는 그 목표 자체는 심각하게 방해받았다. 국제수지의 어려움이 민족들의 시기심을 부추켜, 일반적으로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내의, 그리고 특수하게는 유럽 국가 간 화폐 협력의 진전을 가로막았다(Bullock 1983: 532~41, 659~61, 705~9, 720~3).

유럽 통합과 세계경제 팽창을 위해서는 마셜 플랜이나 다른 원조 계획에 연관된 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으로 세계 유동성을 재순환시켜야 했다. 결국 이런 더욱 포괄적 재순환을 실현시킨 것은 세계역사상 평화시에 가장 대대적으로 무장을 추진하려 한 노력이었다. 그 입안자인 국무부 장관 애치슨과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폴 니츠는 이런 노력이 있어야만 마셜 플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치슨과 니츠는] 유럽 통합도 통화 재동맹도 마셜 플랜 종료 이후 상당한 수출 잉여를 유지하거나 미국-유럽 경제 유대를 지속시키는 데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들이 제안한 새로운 정책 노선-미국과 유럽의 대대적인 재무장-은 미국 경제 정책의 주요 문제에 대해 뛰어난 해결책을 제공했다. 국내 재무장은 수요를 지탱해 주는 새로운 수단을 제공하여, 국내경제가 더 이상 해외 잉여 유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유럽에 대한 군사원조는 마셜 플랜 만료 후 유럽에 대해 계속 원조를 제공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리고 유럽과 미국 군사력을 긴밀하게 통합하면 하나의 경제 지역으로서 유럽이 미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못하도록 막아 줄 것이다.(Block 1977 : 103~4)

이런 새로운 정책 노선이 1950년 초 국가안전보장위원회에 제안되었고, 4월에 트루먼 대통령은 그 입장을 보여 주는 보고서(NSC-68)를 검토하여 원칙적으로 승인하였다. 이 문서는 관련 비용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참모들이 추계한 것은 연 지출 기준으로 1950년 국방부가 처음 요구한 총액의 세 배에 이르렀다.

 

반공주의라는 명목을 내걸더라도, 재정적으로 보수적인 의회에서 어떻게 그런 돈을 타낼 수 있는가는 행정부에게 작지 않은 고민거리였다. 무언가 국제적인 긴급사태가 필요했고, 1949년 11월부터 애치슨 장관은 조만간 1950년에 아시아 주변지역에서 그런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는데, 그 지역은 한국, 베트남, 타이완 중 하나 또는 그 셋 모두였다. 대통령이 NSC-68을 검토한 두 달 후 위기가 발발했다. 애치슨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와서 우리를 구원해 주었다.”(McComick 1989 : 98)

한국전쟁 중, 그리고 그 후의 대대적인 재무장이 전후 세계경제의 유동성 문제를 영구히 해결해 주었다. 외국 정부에 대한 군사원조와 해외에서 미국의 군사비 직접 지출- 둘 다 1950년에서 1958년 사이와 또다시 1964년에서 1973년 사이에 꾸준히 늘어났다 -이 세계경제 팽창에 필요한 모든 유동성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매우 관대한 세계 중앙은행으로 작동하는 미국 정부와 더불어 세계무역과 생산은 전례 없는 속도로 팽창했다(cf. Calleo 1970:86~7 ; Gilpin : 133~4).

매코믹에 따르면(McCormick), 한국전쟁에서 출발해 베트남전쟁을 종식시킨 1973년 초 파리 평화조약에 이르기까지의 23년은 “세계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수익성 있는 경제성장의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는 다른 누구보다 스티븐 마그린과 줄리엣 쇼가 “자본주의 황금기“라고 부른 시기이다(Magrlin and Schor 1991).

 

제2차세계대전 재건에 뒤이은 사반세기가 전례 없는 세계경제의 번영과 팽창의 시기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50년에서 1975년 사이 발전도상국에서 개인 소득은 매년 평균 3% 증가했는데, 그 증가속도는 1950년대의 2%에서 점점 빨라져 1960년대에는 3.4%가 되었다. 이런 성장률은 이들 나라에서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고, 선진국들이 산업화 기간에 달성한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 선진국 자체에서 …… GDP와 일인당 GDP는 1820년 이래의 어떤 앞선 시기보다도 거의 두 배 빠르게 증가하였다. 노동생산성은 전보다 두 배 증가했고, 자본 스톡의 성장률 또한 대대적으로 가속되었다. 자본 스톡의 증가는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활력을 가지고 오래 지속된 투자 붐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Glyn et al. 1991 : 41~2)

역사적 기준으로 보자면, 이 시기 자본주의 세계경제 전체의 팽창률이 예외적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일한 자본주의 황금기로 규정할 수 있을 만큼 그 시기가 역사적 자본주의에도 좋았던 시기였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관찰자들이 대발견의 시대 이후 전례 없는 시기라고 생각했던, 에릭 홉스봄이 말하는 “자본의 시대”(1848~1875)보다 이 시기가 더 나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우리가 만일 앤드류 글린과 공저자들이 했듯이, 1950!1975년까지 25년 동안의 연평균 GDP 성장률 또는 그보다 더 포착하기 힘든 실체인 “자본 스톡”의 수치를 뽑아서 이를 1820~1870년의 50년 기간과 비교해 본다면, 아마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수치들은 좁은 의미의 생산을 높게 평가하고 무역을 낮게 평가한다는 점에서 편향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반대 편향의 수치들을 선택해 1950~1975년의 시기와 같은 길이의 시기인 1848~1873년의 시기를 비교해 보면, 두 “황금기”의 성과는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쨌건 본 연구가 채택한 시각에서 보자면, 1950년대와 1960년대는 1850년대와 1860년대처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또 하나의 실물적 팽창 국면이 된다. 즉 이 시기에는 잉여자본이 충분히 거대한 규모로 상품 교역과 생산에 다시 되돌아와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개별 정부 조직 및 기업 조직들 사이에 새로운 협력과 분업의 조건들을 만들어 낸다. 확실히 잉여자본이 상품으로 전환되는 속도, 규모, 범위는 앞선 순환보다 미국 순환에서 더 거대했다. 그럼에도,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실물적 팽창 국면은 하나의 결정적 측면에서 앞선 실물적 팽창들과 유사했는데, 바로 그런 실물적 팽창의 전개 자체가 각 개별 정부 조직 및 기업 조직에 두드러지게 경쟁 압력을 격화시켜, 그 결과 화폐자본이 대규모로 교역과 생산에서 철수하였다는 점이다.

교체가 발생한 것은 결정적 시기인 1968~1973년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이른바 유로달러 또는 유로통화시장의 예치금이 급격히 늘어나, 그 후 20년간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6년의 시기에, 실물적 팽창 국면 전체에 힘을 발휘한 바 있던 주요 국가 통화들과 미국 달러 사이의, 그리고 미국 달러와 금 사이의 고정비율체계가 폐기되고 신축적 환율체계 또는 변동환율체계가 등장하였다. 이렇게 등장한 체계를 어떤이들은 체계로 보지 않고, 앞서 존재하던 체계의 위기 때문에 채택된 형태로 간주한다(예를 들어 Aglietta).

이는 서로 구분되지만 상호 강제하는 발전들이었다. 한편에서 점점 더 많은 세계 유동성이 어떤 정부도 통제하지 않는 예금으로 축적되자, 정부들은 국내경제의 결핍이나 범람에 대처해 역외시장의 유동성을 끌어 들이거나 배출할 수 있도록 자국 통화와 이자율을 조종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다른 한편 주요 국가 통화들 사이에서 환율이 계속 변동하고 이자율 격차가 지속적으로 변동하자, 통화 거래와 투기를 통해 역외 화폐시장의 자본이 팽창할 수 있는 기회가 증폭되었다.

이렇게 상호 강제하는 발전들의 결과, 1970년대 중반이 되면 역외 화폐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순 화폐 거래의 총량이 이미 세계무역액을 여러 배 초과하였다. 그 후 금융적 팽창은 중단시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세계체제 동북아 한반도

–  이수훈 / 아르케 / 2004.02.28

 

제2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미국이 헤게모니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를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주요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은 전쟁으로 인한 대량파괴는 물론이고, 국가의 정당성위기와 자본가계급의 지배위기에 놓였다. 이는 자본주의체제 자체의 존속이 의문시될 정도의 체계적 위기로 직결되었다. 미국은 이 같은 전후 세계체제적 위기를 해소하고 자유주의적 세계시장과 균형잡힌 국가간체제(interstate system)를 창출하는 데 주도적 역활을 담당했다. 이 위기국면에 발생한 한국전쟁이 이후 안정된 세계체제 구축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은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결과 약 사반세기에 걸쳐 미국의 헤게모니 아래 자본주의는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한반도의 비극을 딛고 세계자본주의가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이다.

……

한국전쟁은 미국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질서-헤게모니 체제-를 구축함에 있어서 그리고 생산과 교역이 번성하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시장을 구축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해준 국제적 사건이었다. 한국전쟁은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간체제의 재편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는데 냉전구조의 공고화와 전 지구적 확산에 기여했다. 냉전구조의 형성은 주요 자본주의국가들 내부에 ‘사회적 기강’, 즉 자본가계급의 노동에 대한 통제 확보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세계적으로 충만했던 혼란의 기운을 잠재우고 사회변혁의 압박에 대처하는 자본과 국가의 통제력을 높이는 기능을 했다.

그 결과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1940년대 말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면전환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950년 중반 한국전쟁 발발부터 베트남 전쟁의 문서상 종결 시점이었던 1973년까지 23년에 걸친 자본주의 세계경제 역사상 가장 지속적인 경제성장기가 도래했다. 여러 연구자들(Hobsbawm, 1994; Magrlin and Schor, 1991)은 이 시기를 ‘자본주의의 황금기‘라 부르기도 했고, 일부 정치경제학자들은 ‘대호황기'(Armstrong et. al., 1991: 김수행 역)라 명명했다. 월러스틴을 위시한 세계체제 분석가들은 이 시기를 미국 헤게모니체제기라 부른다.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  윌리엄 엥달 / 서미석 역 / 길 / 2007.10.25

 

입안자인 조지 마셜 미 국무장관의 이름을 따서 마셜 플랜으로 더 잘 알려진 전후 유럽 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lan)에서 석유의 역활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계획이 1947년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유럽 부흥계획을 받아들인 서유럽 국가들의 가장 큰 단일 지출 항목은 마셜 플랜 자금을 이용한 석유 구입이었는데, 이 석유는 주로 미국계 석유회사들이 공급한 것이었다. 국무부 공식 기록에 따르면 마셜 원조자금 총액의 10% 이상이 미국의 석유를 구매하는 데 쓰였다.

……

석유 가격은 1950년대 동안 일상생활에서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석유회사들은 새로운 세계 시장에 달러로 석유를 판매해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자동차 및 그 관련 산업은 미국 경제 최대의 단일 구성 요소가 되었다. 미국은 소련이 핵 공격을 감행할 경우 도시에서 빠져나가려면 자동차 고속도로가 필요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제절한 아이젠하워 국가방위 고속도로법에 의거하여 전국적인 현대 고속도로 인프라에 수십억 달러의 세금을 쏟아 부었다. 에너지 효율이 훨씬 떨어지는 자동차 운송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철도 인프라는 방치되었고 부식하게 내버려두었다. 당시는 디트로이트의 한 자동차 제조 대기업 전직 회장인 월슨 국무장관이 “GM(제너럴모터스)에 좋은 것이 미국에도 좋은 것이다”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던 때였다. 그는 거기다 엑슨과 텍사스석유회사와 다른 석유 메이저들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덧붙였어야 했다. 석유는 경제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상품이 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세계 시장을 가로챔에 따라 빚어진 별로 주목받지 못한 결과는 석유와 결부된 뉴욕 은행 그룹들이 석유업계와 나란히 세계 시장을 지배할 정도로 부상한 사실이다.

……

1950년대 초, 일반 사람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연이은 뉴욕 은행들의 합병으로 은행들이 미국 국내 정책에 이미 발휘해온 막강한 정치적 · 금융적 영향력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1955년 록펠러의 체이스내셔널은행은 맨해튼은행과 브롱크스카운티트러스트와 합병하여 체이스맨해튼은행이 되었다. 또한 체이스은행처럼 스탠더드 석유 그룹의 국제사업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뉴욕내셔널시티은행은 뉴욕퍼스트내셔널은행을 인수하여 퍼스트내셔널시티은행이 되었다가 나중에 시티은행 그룹으로 바뀌었다. 뱅커스트러스트는 퍼블릭 뱅크 앤드 트러스트, 타이틀 개런티 앤드 트러스트와 기타 지역 은행들을 인수하여 또 다른 강력한 그룹으로 탄생한 반면, 케미컬 뱅크 앤드 트러스트는 콘 외환은행과 뉴욕 트러스트를 합병하여 뉴욕의 3위 은행 그룹인 케미컬 뱅크 뉴욕 트러스트로 탄생했고, 스탠더드석유회사와 관련되어 있던 제이피모건사는 같은 기간에 개런티트러스트와 합병하여 업계 5위의 모건개런티트러스트로 출범했다.

국제 석유시장과 정책의 부침에 강력히 순응하는 미국 은행 및 금융파워가 뉴욕의 소수 은행가 집단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이러한 전후 카르텔화의 최종적인 효과는 이후 30년 동안 미국 금융사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와 미국과 세계적인 정책에서 베트남 적자 재정을 제외한 다른 어떤 정책보다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뉴욕 은행들은 전통적으로 국제사업에 주력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제 유례없이 세계 금융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과도하게 막강한 힘을 보유했다. 그들의 힘은 미들랜드은행, 바클레이스은행 등과 같이 대영제국의 옛 런던 은행 그룹들이 가졌던 힘과 유사했다.

……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1950년대 초 전후 시기 뉴욕의 소수 은행들과 기업들과 관련 법률회사들에게로 경제력과 금융력이 집중되고 있는 현상이 내포하는 불길한 의미를 거의 눈치 채지 못했던 반면, 런던 시티의 영국인 동업자들은 그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미국 사회는 이제 기술 및 산업 발전이라는 미국의 전통적인 기반에서 탈피하여 금융과 원자재의 지배와 국제 무역 조건의 통제를 기반으로 한 영국식 ‘비공식 제국’ 노선을 따라 가속적으로 재편돼가고 있었다.

……

1957년 이후 미국의 정책 논쟁은 로어 맨해튼과 월스트리트의 국제은행들이 지배하던 영향력 있는 미국 텔레비전과 신문 매체를 통해 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매클로이와 친구들의 거대 국제은행들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뉴욕에 집중되어 당시 급부상하던 텔레비전 방송망의 장악과 『뉴욕 타임스』 같은 유력한 뉴스 매체에 대한 지배는 이렇게 중대한 전환기에 뉴욕 기득권층이 국가와 시민의 최선의 이익에 역행하는 정책들을 성공적으로 선전하는 데 중요했다. 이러한 기득권층이 자유주의 성향의 동부 기득권 세력과 동일시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

 

비극적인 베트남 전쟁 이후 그 전쟁의 이유와 원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책들이 쓰여졌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는, 미국의 방위산업체와 뉴욕 금융계 주요 집단이 미 정부로 하여금 국내의 엇갈린 반응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되는 군사적 합리화를 내세워 전쟁을 부추겼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군비 증강은 그들의 이해관계에다 미국 산업을 대대적으로 방산품 생산으로 전환해 소생시킨다는 정치적으로 그럴듯한 명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미국 경제의 핵심은 점점 더 일종의 군사경제로 변형되고 있었고, 이러한 경제에서는 수백억 달러에 이르는 지출을 정당화하는 데 공산주의자들의 위험에 맞서는 냉전이 이용되었다. 군사 지출은 뉴욕 금융 및 석유 대기업들의 전 세계적 경제 이해관계를 위한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다. 이는 20세기 반공주의라는 허울을 쓴 19세기 대영제국의 또 다른 모방이었다.

 


피게티라는 유령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 프레시안 / 2014.05.30

원본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7545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선언>(흔히 “공산당 선언”으로 번역)은 “유령 하나가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2014년 또 하나의 유령이 전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자본주의사회의 분배문제를 다룬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Belknap Press 펴냄)이 그것이다.

 

사실 주류경제학은 분배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수학적으로 보면 일정한 조건(실은 완전경쟁시장과 1차동차 생산함수라는 대단히 비현실적인 조건)이 만족된다면, 각 생산요소에 돌아가는 분배 몫은 한계생산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아서 보울리는 실제로 이 분배 몫이 일정하다고 주장했고(“보울리의 법칙”), 사이먼 쿠즈네츠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는 분배가 악화되지만 일정 단계가 지나면 개선될 거라고 예언했다(“역U자 가설”).

이에 따라 성장에만 신경 쓰면 그만이고, 섣불리 분배문제를 건드렸다가는 상황만 악화시킬 거라는 주장은 지금도 주류경제학의 신조에 속한다. 이 같은 주장은 케네디 대통령의 “밀물이 오면 모든 배가 떠오른다”는 정치적 구호로 표현됐고 지금도 한국의 성장론자들이 신봉하는 교의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프랑스의 43살짜리 경제학자가 이 모든 주장과 구호를 단숨에 엎어버렸다. 그의 무기는, 어느 누구도 쉽사리 부정할 수 없는 장기 통계, 즉 역사적 사실이다. 그가 초점을 맞춘 수치는 “어떤 시점의 한 나라 순자산(피케티의 “자본”)을 그 해의 국민소득으로 나누면 얼마나 될까?”(β=W/Y, W는 민간순자산, Y는 국민소득)이다.

예컨대 한국의 2014년에 민간이 가지고 있는 부(순자산)를 국민소득으로 표현하면 몇 배나 될까를 표현하는 수치이다. β에 자산수익률을 곱하면 그 해 자산소유자들이 가져간 몫이 될 것이다(α=rβ). 그는 이 회계적 항등식에 “자본주의의 제1 근본법칙”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을 붙였다.

 

1

– <그림1> 유럽의 자본/소득 비율(=β) 추이 (출처 : Piketty, 2014, 26쪽)

 

<그림1>에서 보듯이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β는 19세기 말에 6~7배로 정점을 찍은 뒤 1910년에서 1950년까지 2~3배로 급전직하했다. 두 번의 전쟁과 대공황으로 인한 재분배정책 때문이다. 이 수치는 80년대부터 서서히 상승해서 현재는 4~6배까지 치솟았다. 또한 그는 자산의 수익률(r)은 역사 전 기간에 걸쳐 4~5%라고 계산했다(<그림2>).

 

 

2

– <그림2> 세계수준의 수익률(r)과 경제성장률(g) 추이 (출처 : Piketty, 2014, 354쪽)

 

이렇게 그림을 그려 놓으니까 간단해 보이지만 선진국에서도 90년대 들어 발표하기 시작한 “국민대차대조표”(한국은 지난 5월 14일 최초로 잠정적인 대차대조표를 발표했다)가 없는 상태에서 이런 통계를 만든다는 것은 말 그대로 지난한 일이다. 더구나 프랑스나 영국의 경우에는 1700년대부터 과거의 문헌을 뒤져서 이 수치를 추적해 냈다. 또한 세금자료를 이용해서 1% 단위로(심지어 0.1% 단위로) 각 계층이 얼마나 자산과 소득을 차지하는가를 추적했으니 당분가 어느 누구도 이 수치 자체에 대해서는 논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림1>은 글머리에 제시한 주류경제학의 정설들을 뒤엎는 데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기실 1945년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의 30년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예외적인 기간이라는 것이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의 황금기“, 프랑스의 “영광의 30년”, 독일의 “라인의 기적”에 해당한다. “보울리의 법칙”이나 “역U자 가설”은 모두 이 짧은 기간에 해당하는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한계생산력설”에 대한 계량 연구도 이 시기의 안정적인 분배를 반영할 뿐이다. 1910년대부터 두 번의 세계전쟁, 대공황 이후 최고 한계세율이 90%가 넘는 재분배정책 등(피케티는 이를 자본주의의 내재적 성향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외부 쇼크”라고 부른다)이 이런 예외적 시기를 만들었을 뿐이다. 피케티의 이 얘기를 뒤집으면 우리나라의 진보 쪽이 그리는 “복지국가”를 이루려면 그만한 “외부 쇼크”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양동휴 교수의 경제사 산책] 자본주의의 황금기(1950~73년)

–  한국경제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5&aid=0000896336

 

가까운 과거의 대호황을 돌아보자.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戰間期)와 1970,80년대 장기침체 사이의 1950,60년대는 ‘자본주의의 황금기’였다.
미국에서 1871∼1996년에 총요소생산성(TFP,노동생산성과 자본생산성의 기하평균) 증가율은 저속-고속-저속의 초장기 파동을 보인다.
다른 나라의 ‘따라잡기’로 이 추세는 세계적으로 확산된다.
물론 자본주의 황금기에 TFP 증가율이 월등하게 컸다.
이는 무엇보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소위 ‘2차 산업혁명’ 기간에 이루어진 4대 혁신 기술의 군집효과가 시차를 두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효과가 정점에 도달하고 경제전체에 전파된 것이 ‘황금기’이며 이후 수확체감에 따라 생산성 증가율이 점차 낮아졌다.
4대 발명군집이란 전기(전기조명,전기모터,가전제품,냉방장치),내연기관(자동차,항공기와 이에 따른 교외형성,고속도로,슈퍼마켓),석유와 ‘분자재배열’ 공정(석유화학,합성수지,의약품),오락·통신·정보혁신(전신,전화,라디오,영화,TV,음반,신문잡지) 등이다.
실내배관,공공인프라(상하수도,오물처리)를 다섯 번째 발명군집으로 추가할 수 있다.
이들 기술혁신은 20세기 이후 인류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기술혁신의 효과가 왜 늦게 나타나는가? 일반목적기술(GPT)의 잠재력이 실현되기 위해 체제전환을 위한 구조조정과 적응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GPT란 특정 신제품이나 이를 만드는 신공정이 아니라 경제의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개량이 가능해 널리 응용할 수 있다.
이 잠재력이 발휘되는 과정에서 지연과 불연속이 있을 수 있다.
구조조정과 적응에 시간과 비용이 드는 만큼 초기에는 오히려 산출,생산성,고용이 하락해 ‘장기파동’을 보인다.

 


1955 버거와 자본주의 황금기

–  http://goham20.com/3152

 

……

2차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제1차 오일쇼크가 발생한 1973년까지 자본주의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지 않은 미국과 아메리카대륙 국가뿐만 아니라 2차대전으로 폐허가 된 서유럽과 일본에서, 철의 장막에 둘러쌓인 소련과 동유럽에서, 식민지에서 독립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경이적으로 성장했다. 1950년부터 1973년까지 1인당 실질 GDP는 매년 미국에서 2.45%, 서유럽에서 4.08%, 구소련에서 3.36%, 일본에서는 무려 8.05%씩 증가했다.

자본주의 황금기의 경제성장은 그 이전, 그 이후의 시기와 비교할 때 더욱 뚜렷히 드러난다. 내연기관의 등장과 전기, 화학, 철강 기술의 발전으로 2차 산업혁명이 발생한 1870년대부터 1차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13년까지 전 세계는 연 평균 1%대의 꾸준한 경제성장을 기록한다.

반면 1차대전 종전부터 2차대전 이 끝나는 1945년까지의 기간엔 오히려 그 전 시대보다 경제가 더디게 성장한다. 1913년 까지의 경제성장이 영국의 안정적인 경제적, 군사적 패권과 통화, 상품, 노동이 자유롭게 거래되는 자유시장 덕분에 가능했다면 양차대전 사이의 낮은 경제성장은 패권국가의 부재와 경쟁적인 보호무역주의가 불러온 결과였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세계경제는 다시 한 번 위기에 직면했다. 선진국 정부는 강력한 물가상승률 억제정책을 사용했지만 세계경제는 자본주의 황금기에 비례해 꾸준한 하강을 기록하고 있다. 1973년부터 1998년까지 서유럽과 미국의 1인당 실질 GDP 증가율은 각각 1.78%, 1.99%로 낮아졌고 구소련은 경제적 붕괴로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자본주의 황금기의 경제성장은 노동소득의 높은 분배와 맞물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계층을 중산층으로 편입시켰다. 중산층이 획기적으로 증가하면서 이제 중산층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시대가 찾아왔다. 이 시기 약 60%의 미국인들이 중산층(중위 소득)으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대공황이 시작되기 직전인 1929년의 31%에 비해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중산층의 증가는 곧 소비의 증가로 이어졌다. 1960년대가 끝날 때 쯤엔 87%의 가구가 TV를 소유했고 자동차와 식기세척기를 소유한 가구도 75%에 이르렀다.

중산층의 소비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새로운 엔터테이먼트 산업도 발전했다. 1955년 레이 크룩이 맥도날드 형제로부터 맥도날드의 사업권을 사들여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한 바로 그 해 캘리포니아에선 디즈니랜드가 문을 열었다. 다양한 소비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중심에 세계화, 미국화의 상징인 맥도날드가 있다.

 


좌우파 사전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두 개의 시선)

–  김기원, 최현 외 / 위즈덤하우스 / 2010.08.16

 

제국주의 전쟁과 대공황 등으로 표출된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을 최소화하고 소련 사회주의의 영향력 확산을 막기 위해 2차대전 이후 미국 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도 국가가 ‘완전고용’과 ‘사회복지’를 책임지는 케인스식 복지국가 모델이 자리를 잡았다. 복지국가 모델은 자본주의 황금기(1950~1960년대)의 높은 경제성장과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표어로 대표되던 사회복지 정책으로 번영을 누렸으나 1970년대 두 차례에 걸친 석유 파동과 장기 불황으로 파국을 맞았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 자본주의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복지국가 모델을 폐기하고 신자유주의 노선을 표방한 정치 세력인 대처(1979년)와 레이건(1981년)이 각각 영국과 미국에서 집권하면서 신자유주의는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신자유주의는 중남미 등 제3세계로 수출되어 극우적 형태를 띠었다. 민간 정부인 아옌데 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하고 집권한 칠레의 피노체트 정부는 분명히 독재정권이지만 개방과 자유화 경제정책 때문에 신자유주의 정부라고도 불린다.

 


<관련 그림>

 

 

3

– 1950년대 미국 중산층의 풍요로운 이미지 ⓒenvisioningtheamericandream.com/

 

1

– 미국 다우지수는 이 기간에 대세 상승을 했다.

 

4

– 미국의 실업률

 

 

5

– (영국 국가부채 / GDP) 비율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Post–World War II economic expansion

네이버 지식백과(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 급격한 산업화가 사회를 바꾸다

http://m.tongilnews.com/articleView.html?idxno=89255&menu=2

 

자본주의 황금기 (1950년 ~ 1973년)

One thought on “자본주의 황금기 (1950년 ~ 1973년)

  • 2017년 3월 14일 at 12: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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