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사건 |
---|---|
1506/09/02 | 중종 반정 |
중종반정(中宗反正)은 1506년 9월 18일(음력 9월 2일) 연산군이 폐위되고 진성대군 이역(李懌)이 옹립된 사건을 말한다.
* 날짜 : 1506/09/02 | |
1506/09/02 | 중종 즉위 |
중종(中宗, 1488년 4월 16일 (음력 3월 5일) ~ 1544년 11월 29일 (음력 11월 15일), 재위: 1506년~1544년)은 조선의 제11대 왕이다.
* 날짜 : 1506/09/02 | |
1510 | 삼포 왜란 |
1510년(중종 5) 부산포(釜山浦) · 내이포(乃而浦) ˙ 염포(鹽浦) 등 삼포(三浦)에서 거주하고 있던 왜인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난.
* 날짜 : 1510 | |
1511 | 포르투갈,말라카 왕국 정복 |
포르투갈의 인도 총독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Afonso de Albuquerque)는 1511년, 19척의 군함과 1400명의 포르투갈 병사를 인솔해 믈라카 정복에 나서, 수 개월의 공방전을 벌인 뒤 마침내 믈라카를 함락했다.
* 날짜 : 1511 | |
1512 | 임신약조 |
1510년 삼포왜란으로 삼포는 폐쇄되었다. 결국 1512년 중종 7년 《임신약조》(壬申約條)를 체결하여 제포만을 개항하고 국교를 다시 재개한다.
* 날짜 : 1512 | |
1513 | 포르투갈,중국 남단에 도착 |
조르쥬 알바레스가 포르투갈인으로 최초로 마르코폴로가 캐세이라 명명한 중국 남단에 도착했으며, 이를 계기로 포르투갈인들과 중국과의 무역이 시작되었다.
* 날짜 : 1513 | |
1519 | 기묘사화 |
기묘사화 (己卯士禍)는 1519년(중종 14) 음력 11월에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김전(金詮), 중종(中宗) 등이 조광조(趙光祖), 김식 등 핵심인물을 몰아내어 죽이고 혹은 귀양보낸 사건이다.
* 날짜 : 1519 | |
1523 | 닝보의 난 |
닝보의 난(寧波の乱)은 1523년(명나라 가정(嘉靖) 2년, 일본 다이에이(大永) 3년)에 명나라 닝보(寧波)에서 일본인 겐도 소세쓰(謙道宗設)가 호소카와 가문의 견명 감합선에 방화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 날짜 : 1523 | |
1526 | 이와미 은광 개발 |
이와미 은광이 개발되었을 시기는 일본 경제의 상업적 발전을 이룬 시기와 겹친다. 이 때문에, 정련가공된 은《조긴》은 기본적으로 통화로써 유통되었다. 16세기 후반부터 마카오를 거점으로 활동을 한 포르투갈과 17세기 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거점으로 활동을 한 네덜란드와의 교역에도 사용되었다. 당시 여기서 산출된 은의 양은 전 세계의 1/3에 달해,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현재 볼리비아 포토시의 세로 리코 은광과 더불어 은 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긴은 칭량화폐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원형이 남아있는 것은 극히 드물다.
* 날짜 : 1526 | |
1529 | 몽골, 명 약탈 |
알탄 칸은 군사적으로 명나라를 지속적으로 위협했다. 1529년, 1530년, 1542년에 명으로의 원정을 단행하여 전리품을 약탈해 돌아왔다. 1550년에는 만리장성을 넘어서 북경을 포위하고 교외에 불을 지르는 경술의 변을 일으켰다.
* 날짜 : 1529 | |
1530 | 몽골, 명 약탈 |
알탄 칸은 군사적으로 명나라를 지속적으로 위협했다. 1529년, 1530년, 1542년에 명으로의 원정을 단행하여 전리품을 약탈해 돌아왔다. 1550년에는 만리장성을 넘어서 북경을 포위하고 교외에 불을 지르는 경술의 변을 일으켰다.
* 날짜 : 1530 | |
1534/08/15 | 예수회 창설 |
예수회(라틴어: Societas Iesu)는 로마 가톨릭의 수도회이다. 1534년 8월 15일에 군인 출신 로마 가톨릭 수사 이냐시오 데 로욜라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 날짜 : 1534/08/15 | |
1542 | 몽골, 명 약탈 |
알탄 칸은 군사적으로 명나라를 지속적으로 위협했다. 1529년, 1530년, 1542년에 명으로의 원정을 단행하여 전리품을 약탈해 돌아왔다. 1550년에는 만리장성을 넘어서 북경을 포위하고 교외에 불을 지르는 경술의 변을 일으켰다.
* 날짜 : 1542 | |
1543 | 포르투갈 일본 내항 |
포르투갈 상선,일본 다네가시마에 기착. 철포와 화약이 전래됨.
* 날짜 : 1543 | |
1543 | 소수서원 설립 |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사적 제55호로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서원이다. 한국 최초의 본격적 서원이며,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1543년(중종 38년)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이 고려의 유학자 안향을 모시고 제사히기 위해 서원을 세웠다. 주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채용해서 유생들에게 독서와 강학의 편의를 주고, 이름을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이라고 하였다. 1544년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補)도 함께 배향하였다.
* 날짜 : 1543 | |
1544 | 사량진왜변 |
1510년 삼포왜란을 계기로 부산포(釜山浦) 등의 삼포를 폐지하였으나, 왜인의 간청으로 1512년에 임신조약을 체결하여 왜인의 활동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였다. 그러나 왜인의 행패가 여전히 계속되던 중, 1544년 왜선 20여 척이 경상남도 통영시 원량면(遠梁面) 진리(鎭里)에 있던 사량진에 침입하여 사람과 말[馬]을 약탈해 갔다. 조정에서는 거듭되는 왜인의 조약위반으로 골치를 앓고 있다가 사량진의 왜변을 계기로 임신조약을 폐기하고 왜인의 조선 왕래를 엄금하였다.
* 날짜 : 1544 | |
1544/11/28 | 인종 즉위 |
인종(仁宗, 1515년 3월 10일 (음력 2월 25일) ~ 1545년 8월 7일(음력 7월 1일))은 조선의 제12대 임금(재위 1544년 ~ 1545년)이다.
* 날짜 : 1544/11/28 | |
1545 | 명종 즉위 |
명종(明宗, 1534년 7월 3일 (음력 5월 22일)~ 1567년 8월 2일 (음력 6월 28일))은 조선의 제13대 임금이다.
* 날짜 : 1545 | |
1545 | 을사사화 |
을사사화(乙巳士禍)는 1545년(명종1년) 조선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소윤(小尹)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림(士林)의 화옥(禍獄)으로 소윤이 대윤을 몰아낸 사건이다.
* 날짜 : 1545 | |
1547 | 정미약조 |
1547년(명종 2)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이후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국교를 47년에 다시 허용한 조약.
* 날짜 : 1547 | |
1550 | 명,경술의 변 |
경술의 변은 몽골 알탄칸이 명나라의 북경을 포위한 사건이다.
* 날짜 : 1550 | |
1553 | 명,왜구들이 약탈 |
가정 32년(1553)에 왜구는 절강 연해를 대대적으로 약탈하였으며, 이후 10년 동안 그 범위가 복건, 광동 등지까지 확대되었다. 이에 호종헌(胡宗憲)에게 절강의 군무를 맡겨 서해와 왕직을 평정하고, 다시 척계광(戚繼光)과 유대유(俞大猷)가 적극적으로 평정에 나서 가정 45년(1566)에 비로소 동남 연해의 왜구를 평정하게 되었다.
* 날짜 : 1553 | |
1555 | 을묘왜변 |
을묘왜변(乙卯倭變)은 1555년(조선 명종 10년) 조선 명종 때 일어난 왜구의 습격이다. 왜구들이 전라남도 해남군 달량포를 기습하여 전라남도 영암·강진·진도 일대를 습격하고 10진이 함락되었으나 곧 수습, 토벌되었다. 일설에는 임진왜란의 전조로 간주하기도 한다.
* 날짜 : 1555 | |
1556/01/13 | 산시 대지진 |
산시 대지진(陝西大地震)은 1556년 1월 23일 오전, 중국 산시 성에서 발생한 지진이다. 리히터 규모 8.0~9.0으로 2008년 중국 쓰촨 성 지진과 비슷한 규모이다.
* 날짜 : 1556/01/13 | |
1557 | 포르투갈,마카오를 거점 |
1553년(명나라 가정(嘉靖) 31년), 포르투갈은 현지 관리에게 「짐이 젖어서 육지에서 말리고 싶다」는 구실로 뇌물을 주고 마카오 체류를 인정받았고, 4년 뒤부터는 뇌물을 매년 건네면서 본격적으로 마카오에 눌러앉게 되었다. 1572년부터는 명나라 조정도 매년 500냥의 지대(地代)를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거주권을 인정하였다. 그런데 그 계기는, 포르투갈이 현지 관리에게 뇌물을 주는 자리에 우연히 조정에서 온 관리가 있었으므로, 부정(不正)이 발각되는 것을 두려워한 광둥 성의 관리가 받은 500냥을 부득이 국고에 납입했기 때문인 듯하다. 해적 정벌을 원조한 공적으로 포르투갈인에게 마카오 거주권을 주었다는 설(說)은 18세기에 포르투갈인이 창작한 이야기이다.[2] 처음 정착할 당시 포르투갈인이 도교 사원인 마쭈거(媽祖閣, 아마 사원) 근처에 살았는데, 현지인에게 그곳의 지명을 물으니 현지인은 사원의 이름을 묻는 것으로 착각하여 "마쭈거"라고 알려주었는데, 이를 잘못 알아들어 마카오라고 부른 것이 현재 이름이 되었다.
* 날짜 : 1557 | |
1559 | 임꺽정의 반란 |
임꺽정(林巪正, ? ~ 1562년)은 조선 명종 때의 황해도 지방의 백정 출신 도적이다.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임거정(林巨正), 임거질정(林巨叱正) 등으로도 쓴다.
* 날짜 : 1559 ~ 1562/01 | |
1561 | 히라도 포르투갈 상관 |
1543년 다네가시마 섬에 포르투갈 무역선이 표류한 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포르투갈인(및 일부 에스파냐인)들이 선교와 무역 목적으로 일본을 찾았다. 1555년에는 규슈 히라도에 포르투갈 무역선이 들어왔으며, 1561년에 막부에서 이들과의 무역(남만무역이라 불렀음)을 허가하여 히라도에 포르투갈의 무역대표부인 상관이 들어서게 됐다.
* 날짜 : 1561 | |
1564 | 명,왜구 토벌 |
명 조정에서는 내부의 부패와 무능으로 제대로 왜구를 격퇴시키지 못하다가 결국 1564년에 이르러서야 왜구를 소탕하였다.
* 날짜 : 1564 | |
1567 | 오다 노부나가,천하포무 |
1567년에는 미노(美濃)의 사이토(齋藤)를 멸망시켜 비옥한 노비(濃尾)의 평야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그의 거성이었던 이나바야마(稻葉山)성을 기후(岐阜)성으로 개명하고 천하포무(天下布武, 천하에 무를 퍼트린다.)의 인장을 문서에 사용하여 자신의 무력으로 전국을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과시했다.
* 날짜 : 1567 | |
1567/08 | 선조 즉위 |
선조(宣祖, 1552년 11월 26일 (음력 11월 11일) ~ 1608년 3월 16일 (음력 2월 1일)는 조선의 제14대 임금(재위 1567년~1608년)이다.
* 날짜 : 1567/08 | |
1570 | 나가사키 포르투갈 상관 |
1555년에는 규슈 히라도에 포르투갈 무역선이 들어왔으며, 1561년에 막부에서 이들과의 무역(남만무역이라 불렀음)을 허가하여 히라도에 포르투갈의 무역대표부인 상관이 들어서게 됐다. 1570년에는 포르투갈의 요청으로 나가사키도 개항하여 같은 식으로 나가사키 포르투갈 상관이 생겼다. 선교활동중이던 예수회는 나가사키 일부를 영지로 얻는 등, 전에 없는 번영을 누렸다. 번영을 누리며 유럽풍 건축물들이 들어섰던 나가사키와 히라도는 한 때 서경(서쪽의 서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 날짜 : 1570 | |
1570 | 이성량, 요동총병 되다 |
조선족 출신 중국 명(明)의 장수로서 요동총병(遼東総兵)으로 랴오둥[遼東]에서 몽고와 여진족(女眞族)의 방위를 총괄하였다. 이여송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 날짜 : 1570 | |
1571 | 명, 알탄 칸과 평화조약 |
1570년 손자인 바간나기가 명에 투항한 것을 계기로 명나라는 1571년 평화조약을 맺었다. 명에 의해 순의왕에 봉해져서 거성을 귀화성이라 부르고 명과 교역했다. 말과 비단 등이 무역의 대상으로, 이후 이로 인해 투메드는 경제적으로 크게 신장된다.
* 날짜 : 1571 | |
1571 | 스페인,필리핀 정복 |
필리핀의 역사에서 스페인 식민지 시대는 스페인이 필리핀을 정복한 1571년부터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이 미국으로 이양된 1898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 날짜 : 1571 | |
1572 | 장거정 재상이 되다 |
장거정 (張居正, 1525년 ~ 1582년) 은 중국 명나라의 정치가이다. 1572년 신종 때 재상이 되어 몽고와의 화평에 성공하였다. 또한 전국적인 호구 조사 및 검지를 실시하여 지주를 누르고, 농민 부담의 균형을 꾀하였다. 명나라 제일의 정치가로 손꼽힌다.
* 날짜 : 1572 | |
1573 | 일본, 무로마치 시대 끝 |
천하포무를 외치며 새로운 질서 형성을 향하는 노부나가와 종래의 쇼군, 막부 중심의 질서의 재건을 향하는 요시아키는 적대하여 1573년에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당하고 막부 조직은 노부나가가 만든 정치기구에 해체, 흡수당했다. 이후에도 요시아키는 세이이타이쇼군에서 해임당하지 않은 정통성을 가지고 각지를 전전하며 다이묘를 회유하여 노부나가 토벌 활동을 벌였으나, 노부나가에 의한 새로운 질서 형성의 기세 앞에서는 무력하여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여 요시아키의 교토 추방 시점으로 무로마치 막부 및 무로마치 시대는 끝을 맞게 된다.
* 날짜 : 1573 | |
1574 | 명, 건주위 토벌 |
누르하치의 외조부로 알려진 왕고는 1574년, 부족의 병력을 이끌고 랴오양과 선양을 공격했다. 明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자신에게 교역을 금지시킨 데 따른 반감을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하지만 3000여명에 불과했던 왕고의 병력은 6만명에 이르는 明의 진압군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왕고는 겨우 탈출해 해서 여진의 하다부(哈達部)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하다부는 왕고를 포박하여 明軍 사령관 이성량(李成梁)에게 넘겼고, 왕고는 다시 베이징으로 압송돼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 날짜 : 1574 | |
1575 | 동서 분당 |
동서 분당(東西分黨)은 조선 선조 8년(1575)에 사림(士林)이 동서(東西)로 분열한 사건이다.
* 날짜 : 1575 | |
1575/05/21 | 일본,나가시노 전투 |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나가시노 합전(長篠の合戦) 포함)은 덴쇼3년 5월 21일(1575년 6월 29일)미카와노쿠니 나가시노 성(현재 아이치 현 신시로 시 나가시노)를 둘러싼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 3만 8000명과 다케다 가쓰요리군 1만 5000명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당시 최신 병기였던 철포를 3000자루를 준비 신(新)전법인 3단 발사를 실행한 오다군에게 당시 최강이라 불렸던 다케다 기마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섬멸되었다는 게 통설이지만, 여러 논점에서 이론(異論)이 존재한다.
* 날짜 : 1575/05/21 | |
1576 | 이순신 무과 급제 |
20세에 방씨와 혼인하고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方震)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면서 무과(武科)를 준비한다. 28살이던 1572년(선조 5) 훈련원(訓鍊院) 별과(別科)에 응시했으나 시험을 보던 중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대고 시험을 계속하였지만 결국 낙방했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32살에 식년시(式年試) 무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훈련원 봉사 실습생으로, 정식 직책이 아니다.)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조선시대 무과 합격자 분석에 의하면 32세 나이가 현대인의 상식과 달리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아니다.
* 날짜 : 1576 | |
1578 | 나가사키 일부 예수회령 |
1570년에는 포르투갈의 요청으로 나가사키도 개항하여 같은 식으로 나가사키 포르투갈 상관이 생겼다. 선교활동중이던 예수회는 나가사키 일부를 영지로 얻는 등, 전에 없는 번영을 누렸다. 번영을 누리며 유럽풍 건축물들이 들어섰던 나가사키와 히라도는 한 때 서경(서쪽의 서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 날짜 : 1578 | |
1580/11 | 명, 토지 재조사 |
장거정은 토지를 재조사하여, 황실의 내외척이나 지주들이 숨겨놓은 토지를 밝혀냈으며, 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나라의 재정 수입을 늘렸다.
* 날짜 : 1580/11 | |
1581 | 명,일조편법 전국 실시 |
일조편법(一條鞭法)이란 명나라 후기부터 청나라 초기에 실시되었던 세금 제도이다.
* 날짜 : 1581 | |
1582 | 장거정 사망 |
장거정 (張居正, 1525년 ~ 1582년) 은 중국 명나라의 정치가이다. 1572년 신종 때 재상이 되어 몽고와의 화평에 성공하였다. 또한 전국적인 호구 조사 및 검지를 실시하여 지주를 누르고, 농민 부담의 균형을 꾀하였다. 명나라 제일의 정치가로 손꼽힌다.
* 날짜 : 1582 | |
1582 | 몽골 타타르 알탄 칸 사망 |
몽골 타타르족의 추장. 명나라의 북쪽 국경을 자주 침입하였고 명나라와 화의하여 통상허락을 받았다. 라마교를 몽골에 보급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 날짜 : 1582 | |
1582/06/02 | 오다 노부나가 사망 |
역사상 일본의 정치적 중심지인 교토와 그 일대를 장악한 뒤 서부 일본으로 정복 활동을 확장하던 1582년 6월 진군 도중에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 머물던 그는 측근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기습을 받아 어이없이 사망하였다. 혼노지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아케치 미쓰히데가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이유에 대해 수백 년간 많은 설이 제기되어 왔다.
* 날짜 : 1582/06/02 | |
1582/06/27 | 일본, 기요스 회의 |
기요스 회의(清洲会議)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인 덴쇼 10년 (1582년) 음력 6월 27일에 열린 오다 가문의 후계자 문제 및 영지 재분배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였다.
* 날짜 : 1582/06/27 | |
1583 | 이이,육조계 |
이이는 상소문 ‘만언봉사’에서 조선을 이렇게 비유했다. “조선은 기둥을 바꾸면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을 고치면 벽이 무너지는, 어느 대목도 손을 댈 수 없는 집입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율곡은 ‘육조계’에서 한번 더 썼다. “지금 국가의 저축은 1년을 지탱하지 못합니다. 이야말로 진실로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 날짜 : 1583 | |
1583 | 누루하치 조부와 부친 피살 |
아타이는 항복을 거부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고, 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이윽고 明軍은 성안에서 대학살을 자행했는데, 교창가 부자도 그 와중에 적으로 오인되어 피살되었다.
* 날짜 : 1583 | |
1583/01 | 이탕개의 난 |
임진왜란 직전인 1583년(선조 16년) 1월에서 8월까지 최대 3만여 명 규모의 여진족이 함경도 북부를 침입, 삼포왜란과 함께 조선 전기의 가장 큰 전란으로 기록됨.
* 날짜 : 1583/01 ~ 1583/08 | |
1583/04 | 일본,시즈가타케 전투 |
시즈가타케 전투(일본어: 賤ヶ岳の戦い)는 덴쇼(天正) 11년 (1583년), 오미 국 이카군(伊香郡) 시가타케 부근에서 벌어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 간의 전투이다. 오다 세력을 양분한 격렬한 전투로, 히데요시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쌓아 올린 권력과 체제의 계승자가 되었다.
* 날짜 : 1583/04 | |
1583/05 | 누르하치 군사를 일으킴 |
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가 장차 동북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대격변의 첫걸음을 내디딘 해는 1583년이었다. 이 해부터 시작해 1626년 사망할 때까지 누르하치의 일생은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전쟁은 처음에는 여진의 여러 부족을 아우르는 단계에서 출발해 나중에는 직접 명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 날짜 : 1583/05 | |
1584/04 | 일본,고마키·나가쿠테 전투 |
1584년 4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군이 고마키산[小牧山]·나가쿠테[長久手]에서 격돌한 전투.
* 날짜 : 1584/04 | |
1586 | 이에야스,히데요시에 신종 |
덴쇼 14년(1586년) 히데요시는 이미 소에다 요시나리(副田吉成)에게 시집을 가서 유부녀가 된 여동생 아사히(朝日)를 강제로 이혼시킨 뒤 이에야스에 시집 보냈으며, 더욱이 어머니 오만도코로(大政所)를 인질로 이에야스에게 보내 이에야스의 입경을 제촉하였다. 이에야스도 이에 승복해 상경하였고, 히데요시에게 신종을 맹세했다.
* 날짜 : 1586 | |
1587 | 동인,남인과 북인으로 분화 |
남인은 본래 동인에 속해 있었으나, 동인 내부의 서경덕·조식계 인물들과 의견 충돌을 일으키면서 독자적인 당파를 이루었다. 서경덕·조식계 인물들은 북인이 되었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한 시점은 대략 1587년(선조 20)을 전후한 시기이다. 분당의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서인(西人)에 대한 대처 방식과 연관이 있었는데, 남인들은 서인과 동인 가릴 것 없이 피차 고르게 등용하자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에 반해 북인은 서인을 공격적으로 배척했다. 이때 남인의 중심을 이루었던 인물은 유성룡(柳成龍)·우성전(禹性傳)·김성일(金誠一) 등이었으며, 북인은 허봉(許篈)·이발(李潑)·이산해(李山海)·정인홍(鄭仁弘) 등이었다.
* 날짜 : 1587 | |
1587 | 녹둔도 사건 |
녹둔도 사건(鹿屯島事件)은 1587년에 여진족이 조선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녹둔도를 습격한 사건이다. 녹둔도 전투 또는 녹둔도 참변이라고도 불린다.
* 날짜 : 1587 | |
1587/02 | 정해왜변 |
정해왜변(丁亥倭變)은 1587년 음력 2월 왜구들이 전라도 남해안을 범한 사건이다. 음력 2월 26일 한양에 보고가 접수되어 선조실록에 기록되었다.
* 날짜 : 1587/02 | |
1587/04 | 히데요시, 규슈 평정 |
덴쇼 15년(1587년) 히데요시 스스로 20만 대군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규슈를 공략한다. 이에 시마즈 군은 압도되어 시마즈 가문은 항복했다(규슈 정벌). 이렇게 하여 서일본 전역은 히데요시 세력하에 놓이게 된다.
* 날짜 : 1587/04 | |
1587/07/24 | 일본,예수회 선교사 추방령 |
일본내 거주하는 선교사 40명과 수사 73명에게 출극명령내림. 나가사키의 교회령을 몰수하여 중앙의 직할령으로 변경시킨뒤, 각 곳의 교회를 파괴.
* 날짜 : 1587/07/24 | |
1587/09 | 대마도주, 전쟁 경고 |
대마도주가 첫 번째로 사신을 보낸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4년 반 전인 1587년 9월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 사신을 부산에 머물다가 그대로 돌아가게 하였다.
* 날짜 : 1587/09 | |
1589 | 누루하치,건주여진 통일 |
1589년, 누르하치는 마침내 건주여진 부족 전체를 통일했다.
* 날짜 : 1589 | |
1589 | 종계변무 종결 |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세계(世系)를 시정해 달라고 주청했던 사건의 종결
* 날짜 : 1589 | |
1589/10 | 기축옥사 |
조선 선조 때인 1589년에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의 인물들이 모반의 혐의로 박해를 받은 사건.
* 날짜 : 1589/10 | |
1590 | 예수회 발리냐노,히데요시 예방 |
예수회의 동인도 순찰사인 알렉산드로 발리냐노(동인도 선교 총 책임자로 코엘료 신부를 일본 책임자로 임명한 사람)는 히데요시의 추방령이 어떻게든 무효가 되도록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는 1590년(덴쇼 18년), 귀국한 덴쇼 소년사절단과 함께 인도 총독의 대사 자격으로서 주라쿠 다이에서 히데요시와 회견했다.
* 날짜 : 1590 | |
1590/03 | 조선통신사 일본 방문 |
히데요시는 재차 대마도주를 이용하여 교섭을 청하고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조선을 침략할 뜻을 표시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오랜 논의 끝에 1590년(선조 23년)에 교섭에 대답과 더불어 일본의 실정과 히데요시의 저의를 살피려고 황윤길을 통신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허성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했다.
* 날짜 : 1590/03 ~ 1591/01 | |
1590/04 |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통일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0년 오다와라ㆍ오우슈를 제압하고 일본 전 지역을 통일하였다.
* 날짜 : 1590/04 | |
1591 | 누루하치, 압록강로 확보 |
누르하치는 만력 19년(1591)에 압록강로(鴨綠江路)를 손에 넣었다. 영토를 넓힘으로 해서 백성을 늘림과 동시에 조선과도 교역의 길을 튼 것이다.
* 날짜 : 1591 | |
1591 | 일본,스페인 총독부 위협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기 전에, 먼저 무력으로 류큐 국왕을 위협해서 일본에 칭신납공(稱臣納貢)하게 함과 동시에,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1588년, 1591년, 1593년 등 3차에 걸쳐 사자를 보내어 위협하였다.
* 날짜 : 1591 | |
1591 | 건저문제 |
1591년(선조 24)에 왕세자 책봉문제로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
* 날짜 : 1591 | |
1591/02 | 일본 국서 도착 |
1591년 2월 초순 조정에서는, 명나라로 쳐들어가겠다는 분명한 내용이 적힌 됴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를 받는다.
* 날짜 : 1591/02 | |
1591/02 | 이순신, 전라좌수사 |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1591년 2월 정읍현감에서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하고, 이어 가리포에 실제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수사에 초수하였다.
* 날짜 : 1591/02 | |
1591/06 | 정철 유배 |
3월에 용산촌사로 물러나 명을 기다렸다가 윤 3월에 이르러 '조선의 기강을 흐트렸다'는 혐의로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를 장악한 남인과 북인들의 논핵을 입고 파직당하였다. 6월에 다시 양사가 계를 올려 그를 귀양을 청하자, 함경북도 명천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북인이었던 이산해는 그를 사형에 처할 것을 여러번 건의하였으나 선조가 듣지 않아 실패하였다.
* 날짜 : 1591/06 | |
1591/06 | 명, 일본의 침략의도 인지 |
류큐의 왕은 히데요시의 계획을 처음 알았을 때 바로 명에 그 사실을 알렸다. 또한 중국과 조선의 사료에 의하면, 1591년 6월과 7월에 일본에 잡혀 있던 한 중국인 무역상은 용케도 자기 아랫 사람을 몰래 중국에 보내 10만의 일본군이 다음해 정월에 출발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저장(浙江)에 일본이 침입할 것이라는 첩보를 전하였다. 1591년 이 소식을 듣자마자 만력제는 병부에 해안의 경비를 강화하라고 명하였다.
* 날짜 : 1591/06 | |
1591/08 | 히데요시 아들 사망 |
덴쇼 19년(1591년) 후계자로 지명했던 쓰루마쓰가 병사하자, 조카 히데쓰구를 양자로 맞이해 관백직을 양도했다. 그리고, 히데요시 자신은 태합(太閤)으로 불렸다.
* 날짜 : 1591/08 | |
1591/10 | 명에 일본 침략의도 알림 |
1591년 8월, 저장 지방에서 보고를 받은 요동도사(遼東都司)는 조선에 자문을 보냈다. 두 달 후 조선은 사신을 베이징에 보내, 일본이 명을 치려 한다고 보고하였다.
* 날짜 : 1591/10 | |
1591/11 | 이성량 파면 |
이성량은 랴오둥[遼東]의 방위를 책임지며 이 지역의 안정에 기여했지만 점차 교만해지면서 군비(軍費)를 유용(流用)하는 등의 전횡(專橫)을 저질렀다. 그는 이 지역의 교역과 상권에 개입해 막대한 부(富)를 쌓았으며 매우 사치스럽게 생활했다. 명(明) 조정(朝廷)은 1591년(萬曆 19년) 이성량을 요동총병의 직위에서 파면했지만, 그는 영원백(寧遠伯)이라는 작위(爵位)을 지니고 랴오둥[遼東] 지역에서 계속해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 날짜 : 1591/11 | |
1592/02 | 명, 보바이 반란 |
1592년 2월, 간쑤성(甘肅省) 닝샤(寧夏)에서 몽고출신의 장군 보바이(발배)가 오르도스의 몽고세력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요동의 최강부대를 멀리서 동원하여 가까스로 진압할 수 있었으며 이때 활약했던 장군이 이여송이었다.
* 날짜 : 1592/02 ~ 1592/11 | |
1592/03 | 일본 나고야성 완공 |
나고야성(지금의 일본 사가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일본 측의 전진기지로 축성된 성이다.
* 날짜 : 1592/03 | |
1592/04/13 | 임진왜란 발발 |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가 포함된 제1군이 병력 1만 8700명과 병선 700척을 이끌고 부산 영도에 상륙한다.
* 날짜 : 1592/04/13 | |
1592/04/14 | 부산진성 함락 |
전투는 오전 5시~7시에 첫 전투가 벌어졌다. 부산진성을 지키는 장수 부산진 첨사 정발은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웠으며, 오전 10시~12에 2차 전투 끝에 4시간 만에 부산진성은 함락되었다.
* 날짜 : 1592/04/14 | |
1592/04/15 | 동래성 함락 |
동래성 전투(東萊城戰鬪)는 1592년 5월 25일(음력 4월 15일) 부산진 전투에 이어 일어난 임진왜란 두 번째 전투로 동래 부사 송상현이 2시간을 버티며 왜군을 끝까지 막아냈으나 결국 전사하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 날짜 : 1592/04/15 | |
1592/04/17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은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과 동래성을 무너뜨린 일본군이 사기가 떨어진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의 관군들을 무찌르고 개전 10일 만에 경상도를, 개전 14일 만에 충청도를 함락시킨 전투이다.
* 날짜 : 1592/04/17 ~ 1592/04/28 | |
1592/04/25 | 상주 전투 패배 |
상주 전투(尙州戰鬪)는 임진왜란 초기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군사를 모아 왜군과 싸웠으나 패배한 전투로 이후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도 완전히 패배해 조선군은 괴멸되었다.
* 날짜 : 1592/04/25 | |
1592/04/28 | 신립,탄금대 전투 패배 |
충주 탄금대 전투(忠州彈琴臺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전멸한 전투이다.
* 날짜 : 1592/04/28 | |
1592/04/29 | 광해군 세자로 책봉 |
광해군 세자로 책봉
* 날짜 : 1592/04/29 | |
1592/04/30 | 선조 피난 |
일본군이 북진하자 선조는 1592년 4월 30일에 한양을 버리고 달아나, 6월에 의주에 도착했다.
* 날짜 : 1592/04/30 | |
1592/05/03 | 한양 함락 |
조정에서는 도원수 김명원에게 도성을 수비하라고 시켰으나 결국 1592년 5월 3일(음력), 도성은 손쉽게 함락되었다.
* 날짜 : 1592/05/03 | |
1592/05/07 | 옥포 해전 승리 |
옥포 해전(玉浦海戰)은 1592년(선조 25)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경남 거제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룬 전승신화의 첫 승전이다.
* 날짜 : 1592/05/07 | |
1592/05/16 | 신각,해유령 전투 승리 |
임진왜란 당시 경기도 양주 해유령에서 왜적을 상대로 벌인 전투.
* 날짜 : 1592/05/16 | |
1592/05/17 | 임진강 전투 패배 |
도원수 김명원을 임진강 전투에서 격파하고서 군을 나눠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함경도로, 각각 한반도 북부까지 진격하였다.
* 날짜 : 1592/05/17 | |
1592/05/24 | 정암진 전투 승리 |
정암진 전투(鼎巖津戰鬪)는 1592년 음력 5월 24일 최초로 의병이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로 이 승리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고 곽재우(郭再祐)의 의병을 중심으로 의병들이 규합되었다.
* 날짜 : 1592/05/24 | |
1592/05/29 | 사천 해전 승리 |
사천 해전(泗川海戰)은 1592년 음력 5월 29일(양력 7월 8일)에 사천에서 왜수군 13척을 전멸시킨 해전으로, 이순신은 여기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 투입했다.
* 날짜 : 1592/05/29 | |
1592/06/05 | 용인 전투 패배 |
용인 전투(龍仁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1592년 7월 13일(음력 6월 5일) 경기도 용인에서 이광과 윤선각 등이 이끄는 5만 명의 남도근왕군(南道勤王軍)이 겨우 1600명의 일본군에게 크게 패한 전투이다.
* 날짜 : 1592/06/05 | |
1592/06/14 | 평양 함락 |
평양성(平壤城) 함락. 선조 의주(義州)로 피난.
* 날짜 : 1592/06/14 | |
1592/07 | 명군, 조선에 들어오다 |
일본군이 평양에 입성한 직후인 7월. 명의 원군이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요동도사(遼東都司) 소속의 부총병(副總兵)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3000명의 병력이었다.
* 날짜 : 1592/07 | |
1592/07/08 | 이치 전투 승리 |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 8일 권율(權慄)·황진(黃進) 등이 금산(錦山) 서평의 이치(梨峙 : 배재)에서 왜군과 싸운 전투. 이 전투는 일본군의 전주 침입을 막기 위한 웅치전투(熊峙戰鬪) 및 금산전투와 거의 동시에 벌어졌는데, 웅치와 금산전투에서 아군이 비록 패하였지만, 이 전투에서는 끝내 왜군을 격파함으로써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 날짜 : 1592/07/08 | |
1592/07/08 | 한산도 대첩 |
한산도 전투(閑山島 戰鬪) 또는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은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 날짜 : 1592/07/08 | |
1592/07/10 | 제1차 금산 전투 패배 |
금산 전투(錦山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음력 7월 9일~음력 7월 10일, 음력 8월 18일에 걸쳐 금산에서 의병과 관군들이 싸운 전투로 의병들의 대표적인 혈전으로 꼽힌다.
* 날짜 : 1592/07/10 | |
1592/07/17 | 평양 전투 패배 |
조승훈의 명군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이 지키던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참패했다. 2만명이 넘었던 고니시의 병력에 비해 턱도 없이 모자란 전력으로 무모한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조승훈은 병력 대부분을 잃고 압록강을 건너 도주했다. 그는 명 조정에 ‘조선이 명군에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무리하게 진격을 종용한 것이 패인’이라고 보고했다. 명 조정은 조승훈의 패전 소식에 경악했다. 일본군의 전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그들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건너오는 상황을 우려했다.
* 날짜 : 1592/07/17 | |
1592/07/17 | 한극함,해정창전투 패배 |
임진왜란 때인 1592년 7월에 함경북도병마절도사 한극함(韓克諴)이 일본장수 가토(加藤淸正)의 군사와 해정창에서 싸운 전투. 장소(藏所)의 싸움이라고도 한다.
* 날짜 : 1592/07/17 | |
1592/07/23 | 임해군·순화군 포로 |
1592년 7월 23일,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 주민들을 비롯한 순왜 국경인 · 국세필 등에게 포박되어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졌다.
* 날짜 : 1592/07/23 | |
1592/08/18 | 제2차 금산 전투 패배 |
금산 전투(錦山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음력 7월 9일~음력 7월 10일, 음력 8월 18일에 걸쳐 금산에서 의병과 관군들이 싸운 전투로 의병들의 대표적인 혈전으로 꼽힌다.
* 날짜 : 1592/08/18 | |
1592/09/01 | 평양성 휴전 협상 |
명 조정은 조승훈의 패전 소식에 경악했다. 일본군의 전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그들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건너오는 상황을 우려했다. 명의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응급 조처를 취했다. 일본인들과 도자기 무역을 했던 경험이 있는 심유경(沈惟敬)을 조선으로 보냈다. 일본군을 평양에 묶어두라는 것이었다. 심유경이 가진 것은 세치 혀뿐이었다. 평양성으로 들어간 심유경은 능수능란하게 유세(遊說)하여 고니시를 구워 삶았다.9월1일부터 50일을 기한으로 휴전이 이루어졌다. 당시 평양성의 일본군이 처한 상황도 열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 날짜 : 1592/09/01 | |
1592/09/01 | 부산포 해전 승리 |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釜山浦 海戰)은 1592년 9월 1일, 부산포에 정박한 일본군 함대를 기습하여 대파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였고, 일본군은 100여 척의 함선을 잃었다. 이 전투 후 일본군은 더 이상 적극적인 해상 작전에 나서지 않았다.
* 날짜 : 1592/09/01 | |
1592/09 | 누르하치, 조선에 원병 파견 제의 |
'宣祖實錄'을 보면, 윤두수(尹斗壽)가 누르하치의 군대가 들어오는 순간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明의 국력이 약하기 때문에 심유경이 누르하치를 끌어들여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획책한다고 비판하고,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했다.
* 날짜 : 1592/09 | |
1592/09/16 | 북관대첩 |
북관대첩(北關大捷)은 1592년~1593년 함경도에서 의병장 정문부가 경성과 길주 등지에서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와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과 여진족들을 모두 무찌르고 함경도를 탈환한 전투이다.
* 날짜 : 1592/09/16 ~ 1593/01/28 | |
1592/10/06 | 진주대첩 |
제1차 진주성 공방전은 진주대첩으로서 한산대첩과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삼대 대첩 중 하나로서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좌절하게 한 전략상 중요한 승리였다.
* 날짜 : 1592/10/06 | |
1592/12 | 명, 이여송 조선 파병 |
1차 원병에 실패한 명나라는 화전양론의 의논끝에 파병으로 기울어져, 간쑤성(甘肅省) 영하(寧下)에서 반란을 평정하고 복귀한 이여송(李如松)을 다시 동정제독(東征提督)으로 삼아 2차 원병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 해 12월에 이여송은 4만 3000여의 군사를 거느리고 부총병 양원(楊元)을 좌협대장(左協大將), 부총병 이여백(李如栢 : 이여송의 아우)을 중협대장(中協大將),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왔다.
* 날짜 : 1592/12 | |
1593/01/09 | 평양성 탈환 |
이 평양성 탈환은 이제까지 후퇴만 계속하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주요 계기가 된 전투였으며, 관서지방이 왜군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날짜 : 1593/01/09 | |
1593/01/27 | 벽제관 전투 |
벽제관 전투(碧蹄館 戰鬪)는 1593년 2월 27일(음력 1월 27일) 임진왜란 중 벽제관(현재의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에서 일어난 명(明)과 일본의 싸움이다.
* 날짜 : 1593/01/27 | |
1593/02/12 | 행주 대첩 |
행주대첩(幸州大捷)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을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 크게 이긴 전투)으로 불리고,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불리며,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 날짜 : 1593/02/12 | |
1593/04 | 한양 수복 |
한양 수복
* 날짜 : 1593/04 | |
1593/04 | 일본군 남하 |
명나라는 심유경을 한양의 일본군 본진에 다시 보내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고 일본군도 보급 문제로 말미암은 전황 불리, 명군의 진주, 악역(惡疫)이 유행한 탓에 화의에 응하여 1593년(선조 26년) 음력 4월에 전군을 남하시켜 서생포에서 웅천(雄川 : 지금의 창원)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 진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 날짜 : 1593/04 | |
1593/05 | 명-일 강화회담 |
명-일 강화회담
* 날짜 : 1593/05 ~ 1593/06 | |
1593/06 | 누르하치, 해서연합군을 물리치다 |
1593년(만력 21년) 누르하치가 이끄는 만주군은 해서여진을 중심으로 한 아홉 부족 연합군과 격돌하여 완승을 거뒀다. 이때부터 여진의 여러 부족이 누르하치를 따르게 되고, 명나라는 누르하치에게 엄호장군이라는 관직을 하사했다. 또한 이성량은 2년 전에 부패로 인해 탄핵되어 경질당했다. 이 시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에 대응하느라 명나라가 정신이 없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명나라의 관심을 덜 끌 수 있었다.
* 날짜 : 1593/06 | |
1593/06/29 | 진주성 함락 |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7월 20일(음력 6월 22일)부터 같은 달 27일(음력 6월 29일)까지 진주성에서 3천여 명의 조선군과 6만여 명의 민간인 그리고 10만여 명의 일본군과의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진주목사 서예원을 비롯하여, 김천일, 최경회 등 대부분의 지도부가 남강에 투신하거나 전사를 하였다.
* 날짜 : 1593/06/29 | |
1593/07 | 임해군·순화군 송환 |
몇 차례의 포로협상 끝에 임해군·순화군 송환.
* 날짜 : 1593/07 | |
1593/08 | 명·일본 휴전협상 |
1593년 음력 8월 명나라는 일본군과 휴전협상을 제의했다. 양국은 3년에 걸쳐 지루하게 휴전하는 협상하는 과정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 날짜 : 1593/08 ~ 1596/09 | |
1593/08 | 명·일본, 조선에서 철군 시작 |
명나라 군대는 화의가 본격적으로 논의되던 1593년 8월부터 유정(劉綎)의 사천출신 부대만 남기고 이여송李如松을 필두로 철군하기 시작했다. 일본도 대부분의 병력을 귀국시켰다.
* 날짜 : 1593/08 | |
1593/08 | 훈련도감 설치 |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고 유성룡(柳成龍)을 도제조로 임명함.
* 날짜 : 1593/08 | |
1593/08/29 | 도요토미 히데요리 탄생 |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그의 측실 차차(茶々, 요도도노淀殿)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으로 아명은 히로이마루(拾丸)이다.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를 비롯한 도쿠가와 세력과의 알력 끝에 1615년 오사카 여름의 진(大坂夏の陣) 때 오사카 성(大坂城)이 함락되자 생모 요도도노와 함께 자살했다.
* 날짜 : 1593/08/29 | |
1593/08/01 |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
음력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하였다.
* 날짜 : 1593/08/01 | |
1594 | 대기근 발생 |
임진왜란 중에 발생한 계갑대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은 중강개시를 열어 명의 곡물을 유입했다.
* 날짜 : 1594 | |
1594/04 | 사명대사,기요마사와 회담 |
일본군의 기세가 한풀 꺾인 1594년, 심유경이 주도한 화의 교섭이 결렬된 가운데 조선 조정은 사명대사 유정을 서생포에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에게 보내어 독자적인 교섭을 시도한다. 기요마사는 히데요시가 내건 화의 조건을 제시했고 유정이 이를 거부하면서 화의는 무산되었다.
* 날짜 : 1594/04 | |
1594/12 | 일본 사신과 명나라 황제의 회담 |
나이토 조안 일행과 명나라 황제의 회담.
* 날짜 : 1594/12 | |
1595/07 | 누르하치, 조선과 교섭 재개 요청 |
임진왜란 이후 3년 가까이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누르하치는 1595년 여름에 조선과의 직접 교섭을 추진함으로써 명의 금법(禁法)을 무시하려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 날짜 : 1595/07 | |
1596 | 명, 광세의 해 |
명(明)나라 신종(神宗) 때 세정(稅政)의 문란으로 야기된 사회적 혼란.
* 날짜 : 1596 | |
1596/01 | 신충일,허투알라 보고서 |
조선은 남부주부(南部主簿) 신충일(申忠一)이란 인물을 허투알라로 들여보냈다. 조선인의 눈으로 누르하치 진영의 상황을 직접 정탐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조처였다. 신충일은 1596년 1월, 허투알라를 다녀온 뒤 선조에게 상세한 보고서를 올렸다.
* 날짜 : 1596/01 | |
1596/07 | 이몽학의 난 |
이몽학의 난(李夢鶴-亂)은 1596년 임진왜란 뒤 정유재란 전 이몽학이 불만에 찬 농민들을 선동하여 충청도 일대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 날짜 : 1596/07 | |
1596/09 | 명·일본 화의교섭 결렬 |
양방형·심유경 일행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회담. 화의 교섭 결렬.
* 날짜 : 1596/09 | |
1597/01 | 정유재란 |
임진왜란 중 화의교섭의 결렬로 1597년(선조 30)에 일어난 재차의 왜란.
* 날짜 : 1597/01 | |
1597/02/25 | 이순신,삼도수군통제사 해임 |
정유년인 1597년 4월 11일(음력 2월 25일)에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4월 19일(음력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그때 우의정 정탁(鄭琢)의 상소로 5월 16일(음력 4월 1일)에 사형을 모면하였으며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 날짜 : 1597/02/25 | |
1597/03 | 명,조선 파병 시작 |
1597년 1월 조선에 대한 파병을 결정, 2개월 만에 조선 파병 시작.
* 날짜 : 1597/03 | |
1597/06 | 명,심유경 체포 |
심유경은 일본으로 망명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가는 도중, 의령 부근에 도달하였을 때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체포되어 '나라와 황제를 기만한 죄'로 처형되었다.
* 날짜 : 1597/06 | |
1597/07 | 명,양응룡 반란 |
임진왜란이 채 끝나지 않은 1597년(만력 25년) 7월 보저우(播州)의 소수민족 추장인 양응룡(楊應龍)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진압에도 2년이란 세월과 대군이 동원되었다.
* 날짜 : 1597/07 ~ 1600 | |
1597/07/08 | 일본군 주력 상륙 |
일본군의 침공군 주력이 6백여 척의 선단에 의하여 경상도 남해안 일대에 상륙.
* 날짜 : 1597/07/08 | |
1597/07/15 | 칠천량 해전 패배 |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또는 칠천 해전은 1597년(선조 30년) 8월 27일 (음력 7월 15일) 칠천도[1]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전사한다.
* 날짜 : 1597/07/15 | |
1597/08/03 | 이순신,삼도수군통제사 복귀 |
칠천량 해전 패배 후,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 날짜 : 1597/08/03 | |
1597/08/15 | 남원성 함락 |
남원 전투(南原 戰鬪) 또는 남원성 전투(南原城 戰鬪)는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전북 남원성을 공격해 조명 연합군과 전투를 벌인 것으로 조명 연합군뿐만 아니라 각지의 의병장들과 군민들까지 합세해 전투를 치렀으나 결국 패배해 모두 살해당하고 지휘관 이복남은 자결하였다.
* 날짜 : 1597/08/15 | |
1597/08/19 | 전주성 함락 |
남원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전주성으로 진격했고 전주성을 지키던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과 전라부윤 박경신은 일본군이 몰려오자 도망갔고 결국 일본군은 전주성에 무혈입성을 하게 된다.
* 날짜 : 1597/08/19 | |
1597/09 | 교토의 코무덤 축조 |
그곳에 묻힌 것은 대부분 사람의 코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해 목 대신 베어갔던 코를 묻은 무덤이다.
* 날짜 : 1597/09 | |
1597/09/07 | 직산 전투 |
임진왜란 중인 1597년(선조 30) 9월 7일 직산에서 명군이 일본군을 격파한 전투. 이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서울 진격을 포기하고 남하할 수밖에 없었고, 한편 조·명 연합군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면서 압박을 가하자 일본군은 충청도 지역을 버리고 남하하여 다시 해안으로 밀리게 되었다.
* 날짜 : 1597/09/07 | |
1597/09/16 | 명량 해전 승리 |
명량 대첩(鳴梁大捷) 또는 명량 해전(鳴梁海戰)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2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3척(총 참여 함선은 333척)을 물리친 조선 전사에 빛나는 해전이었다.
* 날짜 : 1597/09/16 | |
1597/10/24 | 명나라의 칙서 파문 |
1597년 10월 24일. 정유재란 와중이었다. 명나라에서 칙서가 당도했다. 문책으로 가득했다. 이 칙서는 큰 파문을 불러왔다. 영의정 유성룡, 우의정 이원익이 책임지고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는가 하면 선조 자신이 양위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 날짜 : 1597/10/24 | |
1598 | 누르하치, 원병 파견 제의 |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1598년 초에 누르하치는 2만 명의 군사를 보내 조선을 돕겠다는 의사를 다시 요동아문에 전해왔다.
* 날짜 : 1598 | |
1598/01/04 | 제1차 울산성 전투 패배 |
울산성 전투(蔚山城戰鬪)는 1597년~1598년에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이 벌인 전투로 흔히 한국에서 알려진 울산성 전투는 제1차 전투이고 제2차 전투는 울산왜성에서 벌어진 전투로 조명 연합군은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패배했고 왜군은 주위 성으로 후퇴했다.
* 날짜 : 1598/01/04 | |
1598/07/19 | 절이도 해전 승리 |
절이도 해전(折爾島海戰, 1598년)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해(선조 31)에 절이도(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에서 왜군들과 전투를 벌여 왜적의 머리 71급을 베는 전과를 올린 해전이다.
* 날짜 : 1598/07/19 | |
1598/08/18 |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
게이초 3년(1598년) 음력 8월 18일 고다이로 필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보호역을 맡은 마에다 도시이에에 후사를 부탁하고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다. 사인은 위암, 독살등 여러 설이 있다. 향년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 날짜 : 1598/08/18 | |
1598/08/18 | 조명 연합군의 출전 |
조선 조정과 명군 지휘부 또한 여러 경로를 통해 히데요시의 사망 사실을 인지했다. 명군 지휘부는 철수하는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병부상서로서 명군을 총괄적으로 지휘하고 있던 군문 형개(邢玠)는 ‘일본군을 모두 섬멸하겠다’며 이른바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을 제시했다. 마귀(麻貴), 동일원(董一元), 유정(劉綎) 등 세 명의 제독에게 육군을 이끌고 각각 울산, 사천, 순천 등지의 왜성을 공략하도록 하고 도독 진린(陳璘)을 시켜 수군으로써 남해 일대의 일본군을 협공하도록 하는 방책이었다. 8월18일 마귀, 동일원, 유정 등은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출발했다. 선조는 숭례문 밖까지 나아가 그들의 무운과 승전을 기원했다. 선조가 위로하자 마귀는 장담했다. “천조(天朝)가 귀국을 구원하는 이상 왜적을 모두 섬멸하고 강토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직분입니다.”
* 날짜 : 1598/08/18 | |
1598/09/19 | 사천 전투 패배 |
사천 전투(泗川 戰鬪)는 1598년 10월, 한반도의 사천 선진리성에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인솔하는 시마즈군 7천 명이 약 4만 명의 조·명 연합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 날짜 : 1598/09/19 ~ 1598/10/01 | |
1598/09/20 | 왜교성 전투 |
왜교성 전투(倭橋城 戰鬪)는 1598년 9월 20일 ~ 10월 7일. 참전국 3국의 수륙연합군이 얽혀 싸운 격전이다. 연합군에 의해 일본의 해상 병력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나, 성의 방어에서는 일본이 성과를 거둠
* 날짜 : 1598/09/20 ~ 1598/10/07 | |
1598/09/22 | 제2차 울산성 전투 패배 |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의 제독 마귀는 별장 김응서, 선거이 등과 함께 다시 조명 연합군 3만 9,000명의 병력을 모아 울산 도산성을 다시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선거이가 전사한다. 하지만 왜군은 철수 준비로 인해 울산왜성, 서생포왜성에서 철수한다.
* 날짜 : 1598/09/22 | |
1598/11/19 | 유성룡 파직 |
1598년 일본과의 화친을 주도했다는 누명을 씌운 북인 세력의 거센 탄핵으로 영의정에서 파직되었다.
* 날짜 : 1598/11/19 | |
1598/11/19 | 노량 해전 |
노량해전(露梁海戰)혹은 노량대첩(露梁大捷)은 임진왜란 당시 1598년(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이순신이 이끈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수군이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워 크게 무찌른 대첩으로서, 이순신이 전사한 해전이기도 하다.
* 날짜 : 1598/11/19 | |
1598/12 | 일본군,조선에서 철수 |
일본군은 1598년 12월 조선에서 모두 철수했다.
* 날짜 : 1598/12 | |
1599 | 명, 임청민변 |
임진왜란 직후에 남북간 물자이동의 거대 집산지인 산동山東 임청臨淸에서 민변民變이 발발하였다. 임청민변은 稅監 馬堂의 강압적 약탈적 징세에 직접적 원인이 있었다.
* 날짜 : 1599 | |
1599 | 해서여진 하다부 항복 |
1599년 누르하치는 자신을 적대하던 해서여진 하다부를 멸망시켰다. 직후 히데요시 군이 철군하자, 명나라는 누르하치에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해서여진의 예허 부족을 지지함으로써 누르하치의 대항마로 삼으려 했다.
* 날짜 : 1599 | |
1599 | 누르하치, 만주문자 창제를 명함 |
누르하치, 만주문자 창제를 명함.
* 날짜 : 1599 | |
1600/09 | 명군,조선에서 철수 |
명군은 일본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2년 가까이 더 머물다가 1600년 9월 조선에서 철수한다.
* 날짜 : 1600/09 | |
1600/09/15 | 세키가하라 전투 |
전투의 본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그 권좌를 두고 벌어진 도쿠가와 이에야스파와 이시다 미쓰나리파의 다툼이었고, 일본 전국의 다이묘가 두 세력으로 나뉘어 싸운 결과 도쿠가와 측이 승리했다. 대규모 전투였음에도 단 하루 만에 승패가 결정되어 군사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지만, 전투로 이어지는 과정과 전후 처리 과정과 연관된 정치적 의미는 매우 크다.
* 날짜 : 1600/09/15 | |
1601 | 이성량 다시 요동총병 |
1601년(萬曆 29년), 이성량은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심일관(沈一貫)의 건의에 따라 다시 요동총병(遼東総兵)으로 기용되었다.
* 날짜 : 1601 | |
1603 | 누르하치, 허투아라로 이동 |
누르하치가 군사를 일으킨 후 건주여진을 통합하면서 거점으로 삼았던 퍼아라지역을 떠나 허투아라 지역으로의 이주를 실행.
* 날짜 : 1603 | |
1603/03/24 | 에도 막부 개막 |
에도 막부(일본어: 江戶幕府) 또는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는 일본사에서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에 이어 일본사에서 세 번째로 나타난 최후의 막부이다. 1603년 3월 24일(게이초(慶長) 8년 음력 2월 12일)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征夷大将軍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고 막부를 창설하였을 때부터 시작되어, 1867년 11월 9일 (게이오(慶應) 3년 음력 10월 14일)에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大政奉還)이라는 이름으로 정권을 천황에게 넘기게 된 것으로 막을 내렸다.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들이 일본을 지배한 이 264년간의 시기를 에도 시대 또는 도쿠가와 시대라 한다.
* 날짜 : 1603/03/24 | |
1604 | 유성룡,징비록 |
징비록(懲毖錄)은 조선 선조 때 류성룡이 쓴 임진왜란에 대한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7년 동안의 일을 수기(手記)한 책으로,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한거(閑居)할 때 저술하였고 1604년(선조 37년) 저술을 마쳤다.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 날짜 : 1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