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라스 전투(The Battle of Talas) – 751년

751년의 탈라스 전투(The Battle of Talas)는 두 개의 제국, 이슬람 제국과 중국의 당唐 제국이 중앙아시아 패권을 결정지은 전투이다. 아바스 왕조의 이슬람은 뜨는 해, 당唐은 지는 해로 비유할 수 있겠다.

오늘날 탈라스 전투는 누구나 알정도로 유명하지는 않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중국의 당唐 제국과 아바스 이슬람 제국의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군사적 충돌이었던 탈라스 전투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8세기의 중앙아시아는 여러 부족과 지역 강국들, 실크로드 장악을 위한 투쟁 그리고 정치적 권력, 종교적 헤게모니라는 여러 요소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자이크와 같았고, 수많은 전투와 동맹, 그리고 양다리를 걸치거나 배신 등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그때 현재의 키르기스스탄 탈라스강 유역에서 일어난 하나의 전투가 중앙아시아에서의 중국과 이슬람의 패권 다툼을 끝내고 불교/유교의 아시아와 이슬람의 아시아 사이의 경계선을 확정시켰다. 그리고 종이 만드는 방법이 탈라스 전투 전에 이미 중앙아시아에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 탈라스 전투로 세계사적 주요 발명품인 제지법이 중국에서 서방 세계로 전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 탈라스 전투의 배경

강력한 당 제국(618~906)은 중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대부분의 기간동안 군사적인 점령보다는 일련의 무역협정과 명목상 보호령이라는 형태의 ‘소프트 파워soft power’를 사용하였다. 640년 이후로 당唐이 마주한 가장 까다로운 적은 손챈캄포(Songtsan Gampo)가 세운 토번이라는 강력한 티베트 제국이었다.

 

현재의 신장(Xinjiang)에 해당하는 중국 서부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패권은 7~8세기 동안 중국과 토번의 뺏고 뺏기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중국은 또한 북서쪽에서는 투르크계인 위구르족, 인도-유럽어족의 투르판인들, 그리고 남쪽 국경에서는 라오스/타이족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 나당전쟁과 토번 : http://yellow.kr/blog/?p=745

 

# 이슬람의 팽창과 중국과의 충돌

중국이 이러한 주위의 적들과 상대하고 있는 동안, 새로운 초강대국이 중동에서 성장했다. 아랍인들에 의한 번개같이 빠른 이슬람의 팽창은 필연적으로 중국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기득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651년 이슬람은 사산 제국(Sasanian Empire)의 야즈데게르드 3세(Yazdegerd III)가 마지막으로 도망갔지만 결국 암살당한 곳인 메르브(Merv)를 점령하는데, 위치는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의 마리(Mary) 근처이다. 이곳을 전진기지 삼아 이슬람은 부하라(Bukhara, 안국安國), 페르가나 분지(Ferghana Valley), 그리고 한때 오늘날 중국과 키르기즈(Kyrgyz)와의 국경선 근처인 카슈가르(Kashgar, 소륵疏勒)까지도 정복했다.

메르브는 한나라 반초(班超, 32~102년)가 서역원정때 점령하기도 했었다.

 

사산 제국의 멸망은 야즈데게르드 3세의 아들인 페로즈 3세(Peroz III)에 의해 당나라 장안(Xian, 長安)에 알려지게 된다. 그는 아랍군의 추격을 피해 동방으로 도피하다가 670년 중국 당나라에 도착하였다. 8년 후 파사(波斯, 페르시아) 왕으로 책봉되어 서역에 돌아가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의 타하르 지방에 머물렀다.

 

당 제국과 이슬람 제국은 715년 아프가니스탄 페르가나 분지에서 군사적으로 처음 충돌했다. 아랍인들과 티벳인들은 소그디아(Sogdia), 페르가나 분지 주변의 왕 또는 통치자인 이히시드(ikhshid)라 불리는 사람을  ‘Alutar’라 불리는 사람으로 교체했는데, ikhshid가 당唐에 개입을 요청했고 당은 10,000명의 군대를 보내 Alutar를 전복시키고 ikhshid를 다시 복귀시켰다.

2년후, 아랍과 티벳의 군대는 악수(Aksu)라는 현재의 신장 지역에 있는 2개의 도시를 포위하자 중국은 카를룩(Qarluq) 용병을 보내 그 포위를 풀게한다.

 

750년에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는 아바스 왕조에게 전복되어 멸망한다. 이때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 장군과 싸운 실질적인 인물이었던 호라산 총독 아부 무슬림(Abu Muslim)이 747년 메르브에서 무장 봉기하여 혁명군을 서쪽으로 진군시켜서 우마이야 군대를 격파했다. 그 공적으로 인해서 호라산 총독이 됐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부 무슬림이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지 않았다면 아바스 왕조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 아바스 왕조 이슬람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왕조의 팽창 정책을 지양하고 거대한 이슬람 제국을 견실화 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한 관심 지역의 하나가 페르가나 분지와 그 너머의 동쪽 국경 지대였다.

중앙아시아 동부에서 티베트,위구르와 동맹한 이슬람 세력은, 뛰어난 전술가인 지야드 이븐 살리흐(Ziyad ibn Salih) 장군이 이끌고 있었고 중국은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의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있었다. 그는 고구려 유민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탈라스에서의 결정적인 충돌은 페르가나의 또 다른 분쟁에 의해 촉발되었다. 750년 페르가나의 왕은 이웃인 석국(현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수도 타슈켄트Tashkent 일대)의 통치자와 국경 분쟁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군대를 지원해 달라고 중국에 호소하였고, 고선지 장군이 출병하게 된다.

 

원래 타슈켄트(석국, 石國)는 수 · 당 시대에 있던 소무(昭武) 9국 중 하나인데, 지리적으로 당과 아랍-이슬람의 양대 제국 사이에서 양쪽 세력의 눈치를 보며 강한 세력에 사대주의 정책을 펴고 있었다.

당이 고창(高昌)을 격파하고 구자(龜玆)와 토화라(吐火羅, Tokharistan, 박트리아)를 정벌하자 이들 9국은 잇따라 당에 스스로 신하라 칭하고 조공하였다. 7세기 후반부터 아랍제국이 강성해 페르시아를 공멸하고 하외지역(河外地域, 중앙아시아의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까지 육박하자, 이제는 당에 등을 돌리고 그들에게 복종하고 신하가 되기를 청하였다.

 

고선지는 타슈켄트를 포위했고 타슈켄트 왕을 속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약속과 달리 장안으로 연행된 타슈켄트 왕은 처형 당했는데, 마치 651년 이슬람이 메르브Merv 정복에서 일어났던 일과 데쟈뷰인 것처럼 타슈켄트 왕의 아들이 탈출하여 아바스 왕조의 호라산 총독 아부 무슬림(Abu Muslim)에게 사건을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아부 무슬림(Abu Muslim)은 메르브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동쪽으로 행군하여 지야드 이븐 살리흐(Ziyad ibn Salih) 장군과 합류하였다. 이슬람은 이 지역에서의 아바스 왕조 이슬람의 힘을 보여주고자 했다.

 

# 탈라스 전투

751년 7월, 두 개의 강력한 제국의 군대가 현재 키르기스, 카자흐스탄 국경 근처인 탈라스에서 만났다. 그리고 5일 동안 전투를 치뤘다.

 

전쟁터가 어딘지 아직 모른다. 일반적으로는 막연하게 역사상의 구(舊) 탈라스라고 지목하지만, 그 탈라스가 오늘날 구체적으로 어느 지점인지를 놓고도 탈라스성이니, 탈라스평원이니, 탈라스강이니 하는 등의 주장이 엇갈린다.

 

당(唐) 쪽의 기록에는 “고선지가 이끌었던 한(漢)과 번(蕃,오랑캐)의 군사가 모두 3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슬람 쪽 기록인 『이븐 아시르 연대기』에 따르면 “아바스군은 당군 5만을 죽이고, 2만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당(唐) 쪽의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이 연대기의 기술은 상당히 과장되어 있는 것 같다.

이슬람 군의 규모는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이슬람 쪽 문헌에는 권력 투쟁에서 패한 우마이야 왕조의 지지자들이 당(唐)의 힘을 빌려 아바스 왕조에 보복하려 한 것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탈라스 전투는 전쟁으로서는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구당서(舊唐書』「본기(本記)」에서는 이 전쟁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신당서(新唐書)』「본기」에 “고선지가 대식과 탈라스 성에서 전쟁을 벌였으나 패했다”고 단 한 줄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우마이야 왕조의 지지자들에게 부탁을 받고 아바스 왕조라는 새로운 이슬람 세력의 실력을 시험해 볼 요량이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

 

투르크계 카를룩(Qarluq)이 전투 시작후 며칠만에 아바스 측에 합류하자 당唐 군대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중국측 기록에서 카를룩이 원래 당의 번蕃으로 참전하였으나 전투 중에 배신하여 아바스측으로 돌아섬으로써 당군이 크게 패하고 말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슬람의 기록에 따르면, 카를룩은 이미 탈라스 전투 전에 아바스와 동맹을 맺은 것으로 암시하고 있다. 카를룩이 당 군대 진형의 배후를 갑자기 공격한 사실을 보면 이슬람의 서술이 더 신뢰가 가긴 한다.

 

전쟁에 참여한 수만의 당나라 군사 중 소수만 살아 남았다. 고선지도 병사들의 주검을 남긴 채, 부하 이사업 등과 백석령을 통해 허겁지겁 퇴각하여 생존하였다. 『신당서(新唐書)』「이사업」전에는 “험한 백석령에서 꼬챙이에 꿴 생선처럼 늘어선 적의 보병과 기병들을 몽둥이로 마구 때려 죽이며 길을 터 귀환했다”고 당시의 참상을 기록해놓았다.

 

살아남은 전쟁 포로들은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사마르칸트(Samarkand)로 보내졌다.

 

고선지 당唐 군대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탈라스 전투는 어떻게 보면 전략적 무승부와 가까웠다. 제국의 전면적인 싸움이 아닌 지방 영주의 싸움같은 성격이었는지 이슬람의 동쪽으로의 전진은 중지되었고,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혼란스러웠던 당나라는 관심을 중앙아시아에서 북부와 남부 국경에서의 반란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당 사람들이 그 싸움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긴 것도 아니었는지, 고선지는 그 패전으로 문책을 받지 않았다. 그는 뒤에 안록산의 군대와 싸우다가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755년). 아이러니하게도 탈라스 전투의 다른 주인공이었던 아부 무슬림(Abu Muslim)도 같은 해에 그의 세력신장을 두려워한 제2대 칼리프 만수르에게 암살당한다.

 

# 탈라스 전투의 결과

탈라스 전투는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중국과 이슬람이라는 두 개의 문명권이 충돌한 것이고, 오늘날까지 이 지역 주민의 대다수가 이슬람을 신봉하고 있는 것도 이 전투의 결과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탈라스전투는 세계사의 전개에서 이처럼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승리를 거둔 이슬람 측에서는 이 전투에 대해 거의 아무런 언급도 없을 뿐만 아니라, 수만 명이 몰살당한 중국 측에서도 아주 단편적인 기록만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당唐의 쇠퇴기가 시작되는 한 부분으로서 이 전투를 언급하고 있다. 같은 해에 북중국에서는 거란이 당의 군대를 격파했고, 지금의 윈난성인 중국 남쪽에서는 타이/라오스 민족이 봉기하였다.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내전 수준이었던 755~763년의 안사의 난(安史─亂)은 당 제국을 더욱더 약화시켰다. 763년에는 티베트가 중국의 수도인 장안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국 내부의 극심한 혼란으로 말미암아, 751년 이후 중국은 타림 분지 너머로 영향력을 미칠 의지도 힘도 없었다. 서역은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명(明)이 신강성 동부에 잠시 진출했던 것을 빼놓으면 18세기 중엽에 청(靑)이 진출할 때까지 중국은 서역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당연히 승자가 역사를 쓰는 것이지만, 이슬람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이 전투는 주목받지 못하였다.  탈라스 전투 이후 얼마동안은 이 전투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이슬람 내부의 권력 투쟁인지는 몰라도, 이 전투의 승리자였던 아부 무슬림(Abu Muslim)의 암살(755년)과도 상관이 있을 수도 있겠다.

탈라스 전투 직후 중앙아시아를 시찰한 칼리프의 동생 만수르는 아부 무슬림의 권위에 강한 위기감을 느끼고 형에게 “그를 빨리 죽이지 않으면 왕조는 안정될 수 없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베리 호버만(Barry Hoberman)은 9세기 이슬람 역사가 타바리(al-Tabari, 839~923)가 탈라스 전투를 전혀 언급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탈라스 전투 이후 500년이 지나서야 역사가 이븐 아시르(al-Athir, 1160~1233)와 다하비(al-Dhahabi, 1274~1348)의 글에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라스 전투는 중요한 결과를 가지고 왔다. 약화된 중국 제국은 중앙아시아에 더 이상 간섭할 수 없었고, 아바스 이슬람의 영향력은 증가하였다.

 

중앙아시아는 탈라스 전투 후 250년 이내에 대부분의 불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전투이후 이슬람군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 중에는 두환(杜環, Du Huan)을 포함하여, 숙련된 중국인 장인들이 다수 있었다. 그들을 통해 처음에는 이슬람 세계에서 나중에는 유럽까지도 종이 만드는 법을 배웠다.

얼마되지 않아 제지 공장이 사마르칸트,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카이로, 델리 등으로 속속 만들어졌다. 그리고 1120년에 유럽 최초의 제지 공장이 지금의 스페인 사티바(Xativa, 현재의 발렌시아)에 설립되었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이 도시에서 제지 기술은 아탈리아, 독일, 그리고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이 종이 기술의 출현은, 목판 인쇄술과 이후 목활자(木活字) 인쇄술과 함께 중세 유럽의 과학, 신학, 역사의 발전에 커다란 역활을 하였다.

 

1

– 751년의 역사지도

 

2

– 현대판 실크로드도 옛날과 다르지 않다. 페르가나(Fergana)와 타슈켄트(Tashkent)가 탈라스 전투 당시 양 제국의 주요 갈등 지역이었다.

 

당시의 세계사 연표는 :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751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보았다.

 


사료 관련 자료

◎ 『신당서(新唐書)』「본기」

고선지가 대식과 탈라스 성에서 전쟁을 벌였으나 패했다.

 

◎ 『신당서』「고선지6」

천보 9년(750), 석국(石國)을 토벌하였다. 그 나라의 왕 거비시(車鼻施)가 항복을 청하였는데 고선지가 포로로 잡아 궁궐에 바치자 목을 베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서역(西域)이 복종하지 않게 되었다.

석국의 왕자는 대식(大食)으로 달아나 병력을 빌려 탈라스에서 고선지를 공격하여 자기들의 원한을 되갚았다.

 

◎ 『자치통감』권216, 「당기(唐紀)」32의 현종(玄宗) 천보(天寶) 10년(751) 4월 임오(壬午)

고선지가 석국의 왕을 사로잡을 때 왕자가 달아나 여러 오랑캐 나라로 가서 고선지가 그들을 속이고 해친 실상을 자세히 아뢰었다. 여러 오랑캐들이 모두 화가 나서 몰래 대식(大食)의 군대를 이끌고 사진(四鎭)을 함께 공격하고자 하였다. 고선지가 그 소식을 듣고 번과 당의 3만 병력을 이끌고 대식을 공격하였다. 깊숙이 700여 리를 들어가 항라사성(恒羅斯城)에 이르러 대식과 마주쳤다. 서로 5일을 대치하였는데, 갈라록(葛羅祿) 병력이 배반하여 대식과 함께 당군을 협공하였다. 고선지가 대패하여 군사들이 거의 모두 사망하고 살아남은 병력은 겨우 수천 인이었다. 우위위 장군(右威衛將軍) 이사업(李嗣業)이 고선지에게 밤을 틈타 달아날 것을 권하였다. 달아나는 길은 험하고 좁았는데, 발한나(拔汗那) 병력이 앞에서 달아나고 있어서 사람과 가축이 길을 메우고 있었다. 이사업이 앞에서 말을 몰며 큰 몽둥이를 휘둘러 치자 사람과 말들이 모두 쓰러져, 고선지가 이에 지나갈 수 있었다. 장교와 사졸들이 대오를 잃고 있었는데 별장(別將)인 병양군 출신 단수실(段秀實)이 이사업의 소리를 듣고 꾸짖었다: “적을 피해 먼저 달아나는 것은 무용(無勇)이고, 자기만 살고 부하를 버리는 것은 불인(不仁)이다. 다행히 뚫고 나가더라도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사업이 그의 손을 잡고 사과한 뒤 남아 추격병을 막으면서 흩어졌던 사졸들을 수습하여 함께 빠져나왔다. 안서로 돌아와 고선지에게 말하자 단수실을 겸도지병마사(兼都知兵馬使)로 임명하여 자신의 판관으로 삼았다.

 

◎ The earliest Arabic account for the battle itself from Al-Kamil fi al-Tarikh (1231 AD) suggests 100,000 troops (50,000 deaths and 20,000 prisoners), however Bartold considered them to be exaggerated (Xue 1998, pp. 256–7; Bartold 1992, pp. 195–6).

 


중국

–  백범흠 / 늘품플러스 / 2010.04.19

 

당나라는 고종(高宗) 시대에 한반도 동남에 자리 잡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왜 연합세력을 격파하고,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돌궐과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신흥강국 토번吐蕃을 하서회랑에서 축출하고, 서돌궐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신강의 투르판 분지에 위치한 고창高昌을 정복하여 북신강北新疆마저 손아귀에 넣었다. 이후 천산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키르키즈-우즈베키스탄 지역을 흐르는 추Chu강, 탈라스Talas강과 시르 다리야Syr Dariya를 넘어 아랄해 근처까지 영유한 세계제국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수도 장안長安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

무조(측천무후)가 죽은 후 그녀의 손자인 이융기는 쿠데타를 통하여 숙부인 중종의 황후 위씨韋氏 일당을 제거했다. 그는 황제(현종)가 된 다음 적극적인 대내외 정책을 실시하였다. 당시 당나라 최대의 라이벌은 티베트 고원에서 흥기한 토번(吐蕃)이었다. 고구려가 멸망당한 다음해인 669년, 명장 가르첸링이 이끄는 토번군은 설인귀가 지휘한 10만의 당나라-토욕혼 연합군을 청해호 남쪽의 대비천(大非川)에서 격파하였으며, 여세를 몰아 신강의 안서 4진 즉, 카라샤르(언기), 쿠차(구자), 호탄(우전), 카슈가르(소륵)을 장악하였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영역으로 하는 발해가 독립하고, 한반도 남부의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대비천 전투에서 당나라가 토번에 대패했기 때문이었다.

678년 가르첸링의 토번군은 중서령 이경현이 이끄는 당나라 18만 대군을 청해호 부근의 승풍령에서 대파하였는데, 이로써 청해(토욕혼)의 티베트화가 공고하게 되었다.

 

현종시대에도 당나라와 토번은 신강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놓고 전쟁을 계속했다. 당나라와 토번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오늘날 파키스탄 동북부에 위치한 훈자족의 나라 소발률(길기트)이었다. 소발률(小勃律)은 동쪽은 티베트, 서쪽은 아프가니스탄, 남쪽은 인더스강 유역, 북쪽은 신강과 연결되는 전략 요충지였다. 소발률은 사마르칸드(康國), 부하라(安國), 타슈켄트(石國), 샤흐리 샤브즈(史國) 등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이 당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목구멍과 같은 곳으로 토번이 장악하고 있었다.

747년 고구려 유민 출신인 안서도호부 부도호(副都護) 고선지는 7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방심하고 있던 토번군을 격파한데 이어 빙하로 뒤덮인 다르코트 계곡을 달려 내려가 소발률 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인 750년 고선지는 당나라 조정의 명령에 따라 다시 중앙아시아 원정의 길에 올랐다. 타슈켄트(石國)가 사라센(압바스 왕조)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중앙아시아에 대한 당나라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갔던 것이다. 고선지가 이끄는 당-서역 10만 연합군은 751년 1월 타슈켄트성을 포위했다. 고선지는 타쉬겐트 왕을 속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약속과 달리 장안으로 연행된 타쉬겐트 왕은 처형 당하였으며, 이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당나라에 등을 돌리고 사라센으로 넘어갔다. 당나라의 중앙아시아 지배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라센 세력은 타슈켄트와 페르가나를 넘어 키르키즈의 탈라스강까지 촉수를 뻗쳐왔다. 751년 8월 고선지가 지휘하는 당나라군은 탈라스 전투에서 사라센과 돌궐계 카를룩 연합군에게 대패하였으며, 이로써 당나라의 중앙아시아 지배도 종식되었다.

 


페이퍼 로드

–  진순신 / 조형균 역 / 예담 / 2002.03.12

 

지금 실제로 그렇게 되었지만 제지법이 전해진 경위에 대해서는 ‘탈라스 전투설’이 유력하다. 8세기 중반 탈라스에서 당(唐)과 이슬람군이 전쟁을 벌였을 때, 당군은 자군 내에 적과 내통하는 세력이 있어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때 이슬람군에 포로로 잡힌 병사 중에 제지공이 있어 사마르칸트까지 끌려가 그곳에서 제지 기법을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즈베키스탄 과학 아카데미의 고고학자 아스카로프 씨와 종이에 관한 전문가인 나짐 씨는 탈라스 전쟁 이전에 이미 제지법이 전해졌다는 의견을 말한 바 있다.

……

고선지는 이 전공(戰功)으로 절도사로 승진했고, 그로부터 3년 후인 750년에는 석국(石國)을 정복했다. 석국은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있던 나라였다. 출병 이유는 석국이 속국의 예를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석국 정벌은 조정의 명령을 실행한 것이 아니라 고선지가 신청해서 허락을 받은 일이라고 한다.

그는 석국의 왕에게 잘못을 사죄하면 용서하겠다고 속이고 왕이 항복한 후에는 장안으로 압송해 와서는 죽여버렸다. 고선지는 석국의 보물인 ‘대슬슬(大瑟瑟)’을 수십 석이나 빼앗았다고 한다. ‘슬슬’이란 ‘벽주(碧珠)’라는 보석인데 에메랄드의 일종이다. 그 밖에도 황금과 명마를 비롯한 서역 지방의 여러 특산물 등 엄청나게 많은 재물을 빼앗았다.

석국의 왕자가 격노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슬람 제국에게 당(唐)을 응징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마이야 왕조에서 아바스 왕조로 정권이 교체된 지 얼마 안 된 이슬람 제국으로서는 새로운 왕조의 위엄을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런 배경하에서 벌어진 전쟁이 바로 ‘탈라스 전투’다.

 

이슬람 쪽 문헌에는 권력 투쟁에서 패한 우마이야 왕조의 지지자들이 당(唐)의 힘을 빌려 아바스 왕조에 보복하려 한 것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당(唐) 쪽의 기록에는 “고선지가 이끌었던 한(漢)과 번(蕃,오랑캐)의 군사가 모두 3만 명이었다”고 한다.

전쟁은 번의 일부인 카를루크족 부대가 아바스측으로 돌아섬으로써 당군이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슬람 쪽 기록인 『이븐 아시르 연대기』에 따르면 “아바스군은 당군 5만을 죽이고, 2만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당(唐) 쪽의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이 연대기의 기술은 상당히 과장되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당군의 총사령관 고선지는 간신히 도망쳤고, 많은 병사들이 포로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 포로 가운데 제지공이 있어 이때 처음으로 중국의 제지법이 서방으로 전해진 것이다.

탈라스 전투는 전쟁으로서는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구당서(舊唐書』「본기(本記)」에서는 이 전쟁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신당서(新唐書)』「본기」에 “고선지가 대식과 탈라스 성에서 전쟁을 벌였으나 패했다”고 단 한 줄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우마이야 왕조의 지지자들에게 부탁을 받고 새로운 이슬람 세력의 실력을 시험해 볼 요량이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당(唐)으로서는 인접 지역에 강력한 정권이 존재한다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탈라스 전투는 사서에 한 줄 정도 기록될 정도의 이를테면 2류 전쟁이었지만, 만일 이 전쟁을 통해 제지법이 서쪽으로 전해졌다면 문화사적으로는 그 어떤 전쟁보다 중요한 전쟁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탈라스 전투의 원인은 고선지 장군의 석국(石國) 공격에 있었다.

……

그러나 탈라스 전투 이후 석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전체는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불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네스트리우스파 기독교 등이 공존하고 있었던 이 지역이 이슬람교 일색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

이란계, 특히 타지크족은 우마이야 왕조에 대해 계속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슬람 사관(史觀)에 의하면 고선지 장군의 석국(石國) 공격과 탈라스 출병도 “몰락한 왕조의 잔당”이 당(唐)의 원조를 받아 일으킨 반란의 하나로 되어 있다. 아부 무슬림은 이들의 반란을 회유와 협박을 통해 모조리 진압했다. 이렇게 해서 중앙아시아에서 아바스 왕조의 지배가 확립된 것이다.

아바스 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는 아바스 가문의 칼리프가 아닌 아부 무슬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영국의 동양학자 데니슨 로스도 자신의 저서에서 그렇게 쓰고 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부 무슬림이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지 않았다면 아바스 왕조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탈라스 전투 직후 중앙아시아를 시찰한 칼리프의 형 만수르는 아부 무슬림의 권위에 강한 위기감을 느끼고 동생에게 “그를 빨리 죽이지 않으면 왕조는 안정될 수 없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

투르크계 여러 부족의 전설상의 시조는 오그스 카간이라는 무장이다. 이 오그스 카간의 정벌군에 전 투르크계 부족이 참가했는데 큰 눈이 와서 늦게 도착한 몇 가족이 있었다. 바로 이들이 후에 카를루크족이 되었다고 한다. 카를루크는 눈(雪)의 신을 의미하는데 그 기원부터가 사연이 있는 것 같다. 동서 두 돌궐 사이에 있으면서 언제나 그들의 흥망을 지켜보며 “부반(附叛)을 되풀이했다”는 『신당서』의 기록은 앞서 소개한 바 있다. 전설로 전해지는 것이지만 눈 때문에 늦었다는 것도 무엇인가 정세를 엿보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강력한 세력 사이에 끼여 있는 약소 그룹은 주변 상황을 잘 살피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어느 누구도 카를루크족의 되풀이되는 부반에 대해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상황판단의 전문가가 되어 있었을 것이므로 그들이 당군에 속해 있으면서 이슬람 쪽으로 돌아서게 되었던 것은 분명 이슬람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슬람 세력은 번성하고, 당(唐)은 몰락할 것이라는 그들의 판단은 정확했다. 당은 탈라스 전투 이후 150년 정도 더 명맥을 유지했지만 국세는 점점 기울고 있었다. 안녹산의 난은 탈라스 전투 직후에 일어났지만, 그와 같은 당(唐)의 혼란상을 카를루크족은 미리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에 비해 아바스 왕조의 이슬람 제국은 융성기를 맞고 있었다. 세계의 수도라고 불리던 바그다드가 건설된 것은 탈라스 전투가 있은 지 불과 15년 후였다.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  고마츠 히사오 외 / 이평래 역 / 소나무 / 2005.05.05

 

쿠타이바의 사망으로 아랍 정복이 주춤하자 투르기스(돌기시)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투르기스는 돌궐의 공격을 받았지만, 한문 사료에서 소록蘇祿이라 부르는 수령의 지휘아래 신속하게 세력을 회복했다. 그 이름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아랍 측에서는 그를 아부 무자힘, 즉 ‘(아랍과) 경쟁하는 노예’라 불렀다. 소록은 카간을 칭하고, 당나라에서 책봉을 받았으며, 토번과 연대해 아랍군과 싸웠다. 그런가 하면, 투르기스와 아랍 사이에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오아시스 지배자들은 약간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당과 투르기스에 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사마르칸트의 구라크처럼 일단 아랍을 적대시했다가 다시 그의 진영에 복속하기도 했다.

 

아랍 입장에서 보면 728년까지의 정세는 최악이었다. 그들은 간신히 사마르칸트를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730년 호라산 총독에 임명된 주나이드는 투르기스와 싸우는 조건으로 모든 노예를 해방하고서 겨우 부하라를 되찾았다. 그렇지만 투르기스의 공세는 그치지 않았고, 오히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포위했다. 그리하여 당시 칼리프였던 히샴은 바스라와 쿠파에서 새로이 2만 군대를 파견해야만 했다.

737년 소록은 토하리스탄 방면에 출전했으나 아랍군의 기습으로 패배하고, 근거지로 돌아온 후 동족의 부장에게 살해당했다. 당나라는 소록의 죽음으로 발생한 투르기스의 내분에 개입하여 그들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아랍 최대의 적이 소멸되고, 740년대 중반에는 페르가나를 포함한 아무다리아 강과 시르다리아 강 사이의 지역은 아랍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아랍 세력이 시르다리아 강 건너편까지 미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마침 호라산을 무대로 압바스 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747년 말에 아부 무슬림은 메르브를 장악하고, 큰 혼란 없이 동부 지역에서 우마이야조의 지배를 종식시켰다. 그의 부장 지야드 이븐 살리흐가 이끄는 아랍군은 동쪽으로 진격을 거듭하여 751년에 탈라스 강 강변에서 고선지高仙芝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쟁은 유목 세력에 대한 이슬람 제국의 우위를 확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후 거의 2세기가 지나서야 투르크족이 다시 마 와라 알 나흐르에 진출하는데, 그때의 투르크족은 이미 이슬람을 수용하고 있었다.

 


부의 세계사

–  데들레프 귀르틀러 / 장혜경 역 / 웅진씽크빅 / 2005.08.30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긴 것은 이슬람의 팽창 단계가 막을 내리고 견실화 단계로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732년 서쪽을 향한 진군은 중단되었다. 이슬람 군대가 투르와 푸아티에에서 카를 마르텔이 지휘한 프랑크 왕국의 군대에 패하여 이베리아 반도로 물러났던 것이다. 751년 동쪽 국경의 상황은 진정되었다. 아랍인들은 우즈베키스탄의 탈라스 강변에서 중국 군대와 충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중국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물러났고 그 지역을 마호메트의 후손들에게 넘겨주었다.

 


이슬람의 탄생

– 진원숙 / 살림 / 2008.02.25

 

주지하듯이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장군은 당唐나라에서 큰 공을 세웠다. 1차 원정(747)과 2차 원정(750)에 대승하여 중앙아시아를 거의 석권한 고선지는 서부 중앙아시아의 탈라스(페르가나 북쪽)에서 아바스조를 여는 데 기여했으나 알 만수르가 칼리파가 된 후 몰락한 아부 무슬림과 싸워 패했다.

탈라스전은 여러 면에서 의미 있는 싸움이었다. 키르기스탄 북서쪽 탈라스에서의 패배는 중국으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5세기에 걸친 중앙아시아 통제력을 상실하게 했다. 반면 그 전투는 아랍 무슬림들에게는 중앙아시아에 진출하는 길을 열어주었고, 중앙아시아지역은 결국 영구히 이슬람의 땅이 되었다. 그리고 반론이 제기되기는 하지만 그 전쟁을 통해 후한의 환관 채륜이 발명했다고 하는 종이가 서양 세계로 전래되었다고 한다.

 


중국과 이란

– 존 W. 가버 / 박민희 역 / 알마 / 2011.12.30

 

중국의 진과 당 왕조가 먼 서역 지방에서 점유했던 지역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진(西晉) 왕조는 수백 년 동안 계속된 분열의 시기 이후 중국을 재통일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50년밖에 유지되지 못했다. 진의 세력이 붕괴되고 중국은 다시 300년 동안 분열되었으며, 그에 따라 서역에서 중국의 세력도 쇠퇴했다. 서기 640년대와 650년대에 당의 세력이 다시 서쪽으로 확장되어 중국 역사상 가장 서쪽까지 미쳤다. 650년에 당의 군대는 서돌궐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지배력을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 동부까지 넓혔다. 이때까지 서돌궐 제국의 조공국으로 여겨졌던 서역의 제후국들은 당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써 당의 지배력은 서쪽으로 옥수스(아무다리야) 강 계곡과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서부까지 미치게 되었다. 동쪽으로 오늘날의 신장 지역에서는 타림분지가 중국의 보호령인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로 명명되었고, 사산조페르시아계 귀족에 의해 통치되었다. 하지만 옥수스 강 지역에서 당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665년 반란이 일어나 당의 서역 제후국들은 독립하게 된다.

740년대에도 당은 중앙아시아로 압박해 들어갔다. 이번에는 타슈켄트와 페르가나가 당의 조공국이 되었다. 이 제후국들은 밀려드는 아랍 군대에 맞서는 데 당이 지원해주기를 원했고, 당은 이를 받아들여 고구려인 장군(고선지)이 지휘하는 3만여 병력을 파견했다. 751년 현재의 키르기스스탄 북서부 탈라스 강 가에서 벌어진 아랍과 중국 군대의 그 유명한 탈라스전투에서 당의 군대는 패배했고, 중국의 통치는 동쪽으로 현재의 신장 지역까지 후퇴했다. 이로써 중앙아시아 지역은 유교 문화권이 아닌 이슬람 문화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티베트 세력의 흥기와 755년 중국에서 시작된 대규모 반란의 영향 속에서 신장 지역에 대한 당의 통치 또한 곧 소멸되었다(안녹산과 사사명 등이 일으킨 반란, 755~763). 한편 탈라스전투에서 아랍 군대에 붙잡힌 중국인 장인들은 제지술의 비밀을 이슬람 세계에 전수했다.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3

– 탈라스 전투 당시의 당나라와 이슬람의 영역

 

 

4

– 고선지 장군의 원정도

 

5

– 중앙아시아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탈라스 전투

위키백과 : 고선지

위키백과 : 아바스 왕조

네이버 지식백과 : 카를룩

네이버 지식백과 : 투르기스

네이버 지식백과(실크로드 사전) : 탈라스 성

네이버 지식백과(미술대사전) : 카슈가르

네이버 지식백과(이슬람 사전) : 아부 무슬림

네이버 지식백과(터키사) : 모옌초르 카간

네이버 지식백과(실크로드 사전) : 페로즈 3세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5544.html

2012-11-12  [백가쟁명:유주열] 돌궐(突厥)과 오스만제국

2012-10-31  고선지 장군과 탈라스 전쟁

2011-06-24  1300년 전 실크로드 제패한 고선지, 그의 최후는?

유투브 : 고구려의 아들 고선지

 

탈라스 전투(The Battle of Talas) – 7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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