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제2중간기는 고대 이집트의 역사에서 두 번째로 혼란에 빠진, 중왕국의 끝(제12왕조의 끝)인 기원전 1800년경부터 기원전 1570년경 신왕국(제18-20왕조)의 시작 사이를 말한다. (고대 이집트 연표는 지금도 여전히 논쟁 중이다)
※ 고대 이집트 연표, 연대표 (Egyptian chronology) : http://yellow.kr/blog/?p=980
이집트 제2중간기 동안 힉소스Hyksos인이 이집트 역사에 나타나 나일강 동부의 델타(Delta) 유역을 점령하고 이집트 제15왕조를 만들어 통치한 것이 유명하다.
4200년전의 기후변화 사건과 이후의 한랭화로 인한 대규모 민족이동이 역사적 배경이 아닌가 추정된다. 게르만족의 이동과 5호16국의 시기(400년 전후)와 비슷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 4200년전 기후변화 사건 – 이집트 제1 중간기 : http://yellow.kr/blog/?p=716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인의 이집트에서의 체류와 출애굽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등장하는 것이 힉소스의 이집트 정복과 이집트로 부터의 축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다. 힉소스의 주류가 가나안 출신으로 서부 셈어를 말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이 둘 사이의 연계를 시사해주고 있다.
또한 그리스 신화의 다나오스와 카드모스에 관한 이야기도 힉소스와 관련있다는 주장이 있다.
※ 모세의 출애굽 – 기원전 16세기 ? : http://yellow.kr/blog/?p=2308
힉소스(Hyksos)라는 이름은 ‘외국 땅의 지배자ruler(s) of the foreign countries’라는 뜻의 이집트어(헤카 카수트heqa khsewet)에서 유래한 말로써, 기원전 3세기 이집트 사제 마네토Manetho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이 이름의 원형 헤카 카수트는 힉소스 시대만이 아니라 그 전후의 시기에도 존재했음이 입증되었다.
힉소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으나 관련 문헌이 거의 없어 불분명한 점이 많다. 주요한 논쟁은 두 부류의 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한편은 힉소스는 가나안어를 말하는 인근 팔레스타인 주민만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편은 힉소스는 북시리아와 동코카서스로부터 온 북후르리적 또는 아리아적 요소도 포함한다고 믿는다.
가나안인 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힉소스’ 또는 헤카 카수트라는 칭호는 족장 또는 지도자의 의미를 담고 있지 결코 특정 인종에 대한 함의를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대항해 후르리인 설과 아리아인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마네토를 따르고 있는데, 그는 힉소스를 먼 ‘동쪽 지역’에서 온 ‘모호한 종족의 침입자’로서 묘사했기 때문이다.
야만인의 공격이나 정복은 학자에게 항상 혼란을 일으키는 사건이다. 그것은 급격히 발생했다가 사라지거나 빠르게 동화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의 시간적 범위가 짧거나 지리적 범위가 넓게 분산되어 있다면 체계적인 발굴은 어렵다.
야만인의 정복이 갖는 또 다른 특징은 ‘외부의’ 야만인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내부의’ 야만인(그들은 종종 수세기 동안 더 부유한 문명권에 인접해 살아왔다)을 부추겨 부유한 문명권을 침입하게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훈족이나 터키어를 말하는 자들은 로마제국에 침입한 경우가 거의 없지만, 훈족의 출현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고트족과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비슷하게, 비록 인도를 정복하고 지배했던 무굴인의 지도자가 터키어를 말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침입으로 인도에 도입된 문화는 터키나 중앙아시아의 문화가 아니라 페르시아 문화였다. 그 문화는 수세기 동안 인도의 북서쪽에 살았던 고도로 문명화된 사람들의 문화였다.
이러한 ‘축적된 자극cumulative impulses’의 모델은 시리아-팔레스타인 및 하이집트에서 발굴되는 기원전 1750-1570년 사이의 고고학적 증거와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마네토의 전승, 스페오스 아르테미도스 비문, 기원전 18세기 시리아로 후루인의 팽창, 미탄니의 말과 전차에 대한 관계, 기원전 15세기 팔레스타인에 후루어와 인도유럽어를 쓰는 자들의 현존에 대한 증거 등을 고려하면, 후루리어와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자들이 힉소스의 이집트 침입에서 한 부분을 형성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 이집트 제2중간기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표현한 지도로 여러 추정 중의 하나임을 감안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700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 이집트 제2중간기의 시기
고대 이집트 연표는 http://yellow.kr/blog/?p=980 를 참조하면 되는데 워낙 오래된 과거의 사건이니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언제 이집트 제2중간기가 시작되었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제2중간기의 끝과 신왕국의 시작 연도 역시 논쟁 중이다.
비교적 잘 확립된 제12왕조의 연표와는 달리 뒤따르는 시기는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혼돈된 시기 중 하나이다. 제13왕조 시대는 학자마다 왕조가 존재했던 연대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중왕국시대에 존재하였다는 설은 이집트 제13왕조가 제12왕조를 계승하여 창시한 왕조였다는 설이고 제2중간기에 존재하였다고 하는 설은 통일 국가였던 이집트가 정권이 붕괴되어 제12왕조와 제13왕조가 연속되지 못하고 분단이 되었다는 설로 이 시기가 매우 혼란했던 점을 중점적으로 파악한 설이다.
기원전 3세기 마네토(또는 그의 책을 베껴 적은 사람들)는 자신의 책 『역사』에서 수차례 반복해 제15 · 16 · 17왕조를 힉소스 왕조로 언급했다. 제14왕조는 서부 삼각주 지역의 지배자로 구성되었던 것 같다. 오늘날의 이집트학 학자는 ‘제17왕조’를 테베의 이집트인 출신 왕조로 간주하고 있는데, 그들의 후손이 나중에 힉소스를 쫓아내고 나라를 재통합하면서 제18왕조를 확립했다. 제13왕조는 힉소스 통치자의 일부와 겹쳤을 가능성이 있으며, 힉소스 통치자들이 적어도 제14왕조 및 ‘제17왕조’와 함께 수십 년간 공존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 이집트 제2 중간기에 대한 주장 중의 하나. 제13,14,15,16,17왕조에 대한 제안
– 이집트 제2 중간기 연대표 : Kuhrt 2002:175
◎ 배경
힉소스 민족의 등장은 기원전 2000년 경부터 중동 전역에서 일어난 동지중해 연안으로의 대규모 민족 이동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동부 나일 삼각주가 기원전 18세기 후반에 레반트로부터 상당한 침투나 침입을 받았다는 데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고, 이는 타니스에서 발견된 세트 신전 건립 400주년을 기념하는 석비로 더 믿을 만해졌다.
4200년전 기후변화 사건 이후 점차 추워졌고 이는 북쪽 유목민의 이동을 초래했을 것이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와 동지중해 연안의 셈족들은 북쪽에서 이동해오는 후르리인, 카시트인, 인도-아리아계의 종족에 밀려 남쪽으로 밀려났을 것이다. 이는 300~500년경의 게르만족 이동과 중국의 5호16국 상황과 비슷했을 것이다.
※ 관련글 : 4200년전 기후변화 사건 – 이집트 제1 중간기
※ 인도-유럽어족의 이동 : https://en.wikipedia.org/wiki/Indo-European_migrations
※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우르에서 가나안으로의 이주와 야곱 가문의 이집트로의 이주
※ https://en.wikipedia.org/wiki/Kassites
※ https://en.wikipedia.org/wiki/Hurrians
※ https://en.wikipedia.org/wiki/Mitanni
※ https://en.wikipedia.org/wiki/Hittites
◎ 힉소스의 기원
힉소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으나 관련 문헌이 거의 없어 불분명한 점이 많다. 힉소스 민족의 기원은 셈족(Semites), 히브리인, 메소포타미아에서 활동하던 후르리인(Hurrian), 인도-아리안계(Indo-Aryans)의 아시아인 등으로 다양하게 추정된다.
요약본이 아닌 마네토의 『역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긴 구절은 힉소스와 관련되어 있다. 그 구절은 기원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 사람 아피온의 반유대주의적인 저술에 대한 요세푸스의 논박 속에 보존되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투티마이오스. 무슨 이유인지 나는 모르겠지만, 그의 치세에 신의 광풍이 우리를 쳤다. 예기치 않게도 동쪽 지역들로부터 불분명한 종족의 침입자가 승리를 확신하며 우리 땅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주력군으로 쉽게 우리 땅을 점령했다. 우리 땅의 지배자를 제압한 후 그들은 우리의 도시를 무자비하게 불태웠고, 신전을 무너뜨렸고, 모든 원주민을 잔혹한 적대행위로 다루어 일부를 학살하고 그 처자를 노예로 삼았다. 마침내 그들은 살리티스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 구성원 중 한 사람을 왕으로 임명했다. 그는 멤피스에 거처를 잡고, 상 · 하이집트에서 조공을 받아들이고 요충지에 수비대를 항상 남겨놓았고 …… 그는 사이스 주에 한 도시를 건립했는데, 대단히 좋은 위치에 있는 나일 강의 부바스티스 지류의 동쪽에 한 도시를 건립하고 고대 종교 전통에 따라 아바리스라고 명명했다. 이 장소를 그는 재건축하고 육중한 성벽으로 요새화했다. …… 19년간 통치하다가 그는 죽었다. 두 번째 브논Bnon이 승계하고 44년간 통치했다. 아파크난이 왕위를 잇고, 36년 7개월간 지배했다. 그 후 아포피스가 61년간을, 야나스가 50년 1개월을, 마침내 아시스가 등극해 49년 2개월간 지배했다. 그들의 첫 번째 지배자들인 이 여섯 명의 왕은 이집트 종족을 근절시키기 위해 점점 더 열심이었다. 그들 종족은 전체로서 힉소스Hyksos라고, 즉 ‘양치기들의 왕’이라고 불렀다. 힉hyk은 신성한 언어로 왕을 의미하고 소스sos는 일상어로 ‘양치기’ 또는 ‘양치기들’을 의미한다. 그렇게 해서 ‘힉소스’는 복합 단어이다. 혹자는 그들이 아라비아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사본에서는 힉hyk의 표현이 ‘왕들’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복합어는 ‘포로-양치기들’과 관련되었다는 것이다. 이집트어에서 힉hyk은 일부러 기음氣音(h)을 내면 학hak이 되는데, 이는 ‘포로들’을 의미한다. (Josephus, 『Contra Apionem』)
이집트학 학자와 고대사가는 이 구절을 이집트 민담에서 이끌어낸 것으로 기술했는데, 이는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원문이 몇몇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기원후 19세기 말까지 학자 대부분은 요세푸스가 발췌한 마네토의 서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힉소스를 단 한 번의 폭력적인 침입으로 이집트에 들어왔던 민족으로 보았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은 마네토의 기록과 이집트에서의 성서적 ‘체류’ 또는 ‘포로생활’ 사이의 유사점을 보고 그 침입자는 이스라엘인이거나 원이스라엘인, 어쨌든 셈족 유형의 사람들이라고 가정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는 대체로 아리아 인종의 방식으로 이집트를 휩쓴 민족이 셈인종으로, 적어도 유대인에 관련된 인종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들은 훨씬 북쪽에서 왔고 아마도 아리아 인종일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점증했다.
– 20세기 이후
에두아르트 마이어(Eduard Meyer)
1925년 에두아르트 마이어는 초기 인도유럽인의 팽창에 관한 새로운 논문을 발간했는데, 거기에서 그는 인도유럽인이 미탄니인과 카시트인에게 미친 중요한 영향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인도유럽인과 후루인이 셈족인 힉소스가 시리아, 이집트, 에게해권으로 이동하는 데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 『고대사』의 1928년 판에서 마이어는 널리 퍼진 유물의 발견을 키얀이라는 이름과 연관시키며 힉소스 제국이 크레타와 시리아로부터 이집트와 수단에 이르기까지 뻗어 있었다고 추론했다.
파호르 라비브(Pahor Labib)
1936년 출판된 이집트의 이집트학 학자 파호르 라비브의 논문 「이집트에서 힉소스의 지배와 그 몰락」은 그 주제에 관한 금석학적 · 문헌적 전거에 관한 상세한 연구였다. 라비브는 셈어적 왕의 이름으로 힉소스는 셈족이라고 결론지었다.
세베-쇠데르베르그(Torgny Säve-Söderbergh)
1951년 스웨덴 학자 세베-쇠데르베르그는 대단히 영향력있는 글을 발표했는데, 거기에서 ‘북쪽 사람들’의 침입은 물론 또는 침입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힉소스의 이집트 지배는 아시아인에 의한 내부 봉기의 결과였는데, 그들은 원주민 이집트인의 도움을 받아 이미 수 세기에 걸쳐 이집트에 정착했던 자들이었다.
가디너(Alan H. Gardiner)
가디너는 1947년에도 여전히 후루인이 힉소스라는 이집트 침입자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고 믿었지만, 1961년에 펴낸 『파라오들의 이집트』에서는 세베-쇠데르베르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롤랑 드 보(De Vaux), 알브레히트 알트(Alt)
세베-쇠데르베르그는 프랑스 셈학 학자 롤랑 드 보, 독일 셈학 학자 알브레히트 알트의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셈어를 말하는 아모리인이 시리아 사막에서 레반트와 가나안으로 이주하면서 생겨난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알트는 이러한 흔적이 제13왕조의 소위 ‘저주의 문서Execratio Texts’에 나타난다고 주장했는데, 그 문서에서 이집트인은 내륙의 시리아-팔레스타인 군주(그들은 그곳의 이집트 세력을 위협했다)의 이름을 저주했다.
– 현대의 학문
셈인종의, 세부적으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지역적 이동으로 힉소스를 보는 견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세하다. 적어도 중부 유럽 밖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제2중간기 전문가인 독일의 위르겐 폰 베커라트(von Beckerath)와 캐나다의 이집트학 학자이자 고대사가인 존 반 세터스(J. van Seters)에 의해, 그리고 『캠브리지 고대사』의 윌리엄 헤이즈(Hayes)에 의해서 강력하게 주장되어왔다.
존 반 세터트(J. van Seters)에 의해 널리 알려진 견해로는 힉소스는 고도로 도시화된 페니키아-팔레스티나 문화에 속하는 아모리족 침입자 집단이다. 델타 지역에 사는 셈계 주민 일부의 지원으로 힉소스는 결국 여기에서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볼프강 헬크(Wolfgang Helck)는 기원전 3천년기와 2천년기 이집트와 중동 사이의 관계에 관한 표준서를 썼는데, 그는 새로운 경향에 반대하며 힉소스 중에는 후르리인의 요소가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헬크는 힉소스에 관한 마네토의 기술에서 ‘불분명한 인종’ 또는 ‘동쪽의 지역에서 온’이라는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 그는 한편으론 동부 삼각주의 셈어를 말하는 침입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힉소스라고 부르는 그들의 소小군주 및 후기 파라오를 날카롭게 구분했다. 그는 지배적인 학파의 반대에 대해 힉소스 파라오의 여러 이름이 셈어 또는 이집트어 관점에서 설명될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고수했다.
◎ 종교와 문화
비록 후르리어 같은 다른 요소가 섞여 있었다고 보이지만, 힉소스는 압도적으로 셈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인도아리아어를 말하는 자보다는 후르리인이 확실히 더 많았다.
물질문화는 레반트적이었다. 힉소스의 수도인 현재 텔 엘 다바(Tell El-Dab’a, 당시 이름은 아바리스)에서 나타난 문화는 시리아-팔레스타인의 중기청동기Ⅱ 문화와 이집트의 중황국 후기 문화가 뒤섞인 것이었다.
힉소스는 이집트에 새로운 전쟁 무기를 소개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복합궁(composite bow)과 말이 끄는 전차이다.
힉소스는 특별히 세트를 섬겼고 아바리스Avaris(현재의 텔 엘 다바)에 세트 신에게 봉헌된 중요한 신전이 있었다. 『블랙 아테나』에서 마틴 버낼은 포세이돈이 황야와 바다의 신으로서 힉소스의 숭배를 받았던 이집트의 세트(Seth), 그리고 셈족의 얌(바다) 및 야훼(Yahweh)와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부분은 따로 정리 예정
◎ 힉소스 추방
테베의 아모세 1세(제18 왕조의 초대 파라오)는 힉소스 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이집트 ‘신왕국 시대’를 열었다. 신왕국 시대에 이르러 이집트는 제국에 걸맞은 권력과 영광의 새로운 정점에 올라섰다.
이집트 원주민 세력의 대 힉소스 전쟁은 제 17왕조의 세크넨라부터 제 18왕조의 아모세 1세 통치 제 20년까지 약 30년(기원전 1560-1530) 가까이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 아모세 1세가 힉소스인들을 전투에서 치는 모습
◎ 힉소스와 유대인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인의 이집트에서의 체류와 출애굽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등장하는 것이 힉소스의 이집트 정복과 이집트로 부터의 축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다. 힉소스의 주류가 가나안 출신으로 서부 셈어를 말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이 둘 사이의 연계를 시사해주고 있다.
기원전 4세기 말에 저술활동을 한 압데라의 헤카타이오스는 「출애굽기」라는 유대인 전승과 다나오스 및 카드모스의 이주라는 그리스 전승은 모두 힉소스의 축출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했다(Diodoros).
마네토는 『역사』의 한 구절에서 제18왕조의 첫 파라오를 테트모시스Tethmosis라고 부르면서 그가 ‘양치기들’을 축출한 것으로 보았다. 또 다른 곳에서는 ‘양치기들’을 그들의 지도자 모세의 지도하에 있었던 ‘유대인’이라고 부른다. 유대인과 힉소스를 동일시 한 것이 (후기의 발췌자인지) 마네토인지는 확실치 않다.
기원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반유대주의자인 아피온과 그의 논적 요세푸스가 힉소스와 유대인을 동일인으로 다루었다. 요세푸스는 힉소스를 “양치기들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조상”으로 기술했다.
힉소스를 유대인과 연관시키는 것은 요세푸스뿐만 아니라 헬레니즘-로마 시대 이집트 역사가들의 보편적인 역사관이기도 하다.
◎ 베니 하산의 분묘 벽화
특정한 인종 집단이 아닌 보통 명사로 ‘외국의 통치자’로서 힉소스에 대한 언급은 기원전 19세기 초의 중부 이집트에 있는 베니 하산에 위치한 영주 크눔호텝Khnumhotep 2세의 무덤 기록에서 발견되었다. 포제네(Posener)는 베니 하산의 분묘 벽화에 그려진 아시아인은 수행원을 거느린 부유하고 아마도 교역이나 공식 임무를 띤 족장임을 제시했다.
– 크눔호텝Khnumhotep 2세 무덤의 북쪽 벽화
– 위 벽화의 세 번째 구역에 등장하는 소위 ‘힉소스 그림’에 있는 15명의 아무(Aamu) 사람들
그림의 윗부분에 셈족 사람들의 이집트 방문 목적을 알리는 구절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도착. 37명의 아무 사람들(Aamu)이 그에게 메스젤트(Mesdjemt, 눈 화장품)를 가져왔다.
그들은 화려한 채색옷과 독특한 수염 때문에 이집트인들과는 쉽게 구별된다. 야곱 가족들의 이집트 방문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Aamu’는 서구 이집트학자들에 의해 대부분 ‘아시아인들(Asiatics)’로 번역되었는데, 좀 더 정확한 번역은 ‘레반트 인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고대 이집트 기록에서 아무는 주로 레반트 출신들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 족장, 헤카 카수트(힉소스)
https://en.wikipedia.org/wiki/Beni_Hasan
https://en.wikipedia.org/wiki/Khnumhotep_II
◎ 카모세 석비
제 17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카모세(Kamose)의 통치 기간은 3년이 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확인된 카모세 기록물은 세 종류의 석비(K1, K2, K3)를 비롯하여 한 점의 서판(카르나르본 서판) 등 모두 네 점으로 구성되었다. 힉소스 추방 자체 그리고 그 사건 직전과 직후의 이집트의 역사적 상황은 모두 세 종류(K1, K2, K3)로 확인된 카모세 석비(카르나본 서판(K1) 포함)가 거의 유일한 자료이다.
카모세가 말한, 아포피스의 아시아적 기원에 대한 명백한 언급은 대다수의 힉소스인들이 가나안이 배경이라는 것에 대한 강력한 증거이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영어 번역판은 다음의 사이트 참조
※ http://www.reshafim.org.il/ad/egypt/kamose_inscription.htm
이의 부분적 번역은 김성의 <고대의 힉소스 전승과 후대의 문학적 수용>에서 가져왔다. 우선 카모세 석비 K1
……
어떻게 나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겠는가? 한 명의 우두머리는 아바리스에,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쿠쉬에 있다. 나는 아무(Aamu) 사람들과 쿠쉬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을 수밖에 없다. 두 사람 모두 이집트 땅의 한 부분 씩 차지하여 나와 나누어 갖고 있다.
멤피스가 이집트 인들의 수로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도시까지 항해할 수 없다. 보아라, 그는 헤르모폴리스까지 차지했다. 아무 사람들의 세금 때문에 아무도 편안하게 젖을 짤 수 없다.
나는 그와 겨루어서 그의 배를 찔러버리겠다. 나의 포부는 아무 사람들이 파괴시킨 이집트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자 위원회의 대신들이 말했다. “보십시오, 코스(Kos)까지 아무 사람들의 수로가 되었지만, 우리는 이집트 지역에서는 안전하고 엘레판틴은 확고합니다.
코스까지의 내륙은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쉬는 땅이 우리를 위해 개간되었고, 우리의 가축들이 삼각주의 늪지에서 풀을 뜯고 있으며, 돼지들의 사료도 제공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축들이 약탈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 사람들의 땅을, 그리고 우리는 이집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적대감을 갖고 공격한다면 우리도 그에게 대항할 것입니다.
[……..] 나에게 대항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나와 땅을 나누어 갖고 있는 한, 절대로 나를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 아무 사람들………
나는 그가 도망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집트를 무시했던 아무 사람들을 물리친 다음 아무 사람들 한 가운데 있는 네프루시로 향할 수 있었다.
나는 배에서 밤을 지낸 후 날이 밝았을 때 나는 마치 한 마리 매처럼 그에게 돌진했다. 아침 식사 시간 쯤 되어서 나는 그를 제압하고, 도시의 성벽을 파괴했으며, 그의 사람들을 죽였다. 나는 그의 아내가 강둑으로 내려오도록 했다.
나의 군대는 마치 사자처럼 그들의 재산 – 노예, 가축, 버터, 꿀 – 을 약탈했으며 부하들에게 분배했고 그들은 매우 기뻐했다.
네프루시 지역은 평정되었다. 바이(Bai)가 포위당하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진격하자 페르-사크(Pr-sak)는 투항했다. 그들의 말은 성 안으로 도망쳤고, 골짜기에서 밤을 지새웠던 국경 순찰대는…
다음은 카모세 석비 K2
……
당신은 스스로를 통치자(ḥḳʒ, 아포피스)로 여기고, 나는 단지 족장(wr)에 불과하다는 당신의 연설은 비열하다.
……
나는 이니트-네트-헨트(Inyt-nt-hnt)에 도착하여 그들을 심문하기 위해 강을 건넜다. 나는 함대를 지휘하여 차례로 전진시켰다.
나는 근위대와 함께 빠르게 노를 저어 마치 송골매처럼 강 위를 날듯이 건너갔다. 나의 “황금의 배”가 선두에 섰으며 나는 마치 그들의 머리 위의 송골매처럼 다가갔다.나는 메크 선(mk-ship)으로 하여금 광야 가장자리를 탐색토록 했다. 나의 함대가 차례대로 마치 솔개처럼 아바리스의 페후(Pehu) 땅(*)을 약탈했다.
……
오, 무너진 아무 사람!
오, 마음이 강팍한 자!
악한 아무 사람!
그가 전에 말하기를, 아슈무네인에 이르기까지 대항할 자가 없고
페르-하토르(Pr-Htr)마저 두 강 사이에 위치한, 아바리스에게 조공을 바친다고 하더니만……
나는 그들을 폐허로 만들어 아무도 살지 못하게 했다. 나는 그들의 도시들을 폐허로 만들었고, 왕궁들을 불태워 영원한 붉은 언덕으로 만들었다.
……
“아우세라, 라의 아들, 아포피스가 나의 아들, 쿠쉬의 통치자에게 문안한다. 왜 내게 알리지 않고 통치자로 등극했는가?
이집트가 내게 한 행위를 알고 있었는가? 그 악한 통치자 카모세가 내 땅에서 나를 공격했으나, 그가 너에게 대항한 것처럼 그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들을 처형하기 위해 나의 땅과 너의 땅을 차지하여 파멸시켰다. 두려워하지 말고 하류 쪽으로 내려 와라.
보아라! 그가 여기 나와 함께 있다. 이집트에서 너를 기다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네가 도착할 때까지 그가 철수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이집트의 도시들을 함께 나누고, “헨트-헨-네페르(Hnt-hn-nfr)”의 땅은 기뻐할 것이다.”
* : 페후(Pehu)는 하 이집트의 제 14주에 속한 한 장소를 의미한다. Habachi 1972, 35.
◎ 아비나의 아들 아흐모세의 무덤 비문
테베 남쪽 80km 지점에 위치한 네켑(엘-캅) 출신의 고위 장교였던 아흐모세(Ahmose)의 무덤 비문을 통해 그가 직접 참전하여 겪은 대 힉소스 전쟁의 몇 가지 구체적인 상황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아흐모세는 동시대 파라오 및 다른 역사적 동명 인물들과 구분하기 위해 “아흐모세 시-아비나”, 또는 “아비나의 아들 아흐모세”로 종종 표기된다.
※ https://en.wikipedia.org/wiki/Ahmose,_son_of_Ebana
※ 영어 번역 : http://www.reshafim.org.il/ad/egypt/ahmose_inscription.htm
이의 부분적 번역은 김성의 <고대의 힉소스 전승과 후대의 문학적 수용>에서 가져왔다.
해군 사령관 아흐모세, 아비나의 아들, 의로운 자가 말하기를 “당신들에게 내가 겪었던 일들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모든 땅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일곱 번씩이나 황금 상을 받았고, 남종과 여종을 받았다. 나는 넓은 땅을 하사 받았다. 용맹의 이름으로 행한 것이다. 이러한 나의 행위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네켑(Nekheb)에서 성장했다. 나의 아버지는 상 하 이집트의 왕 세크넨라 치하의 군인이었고, 의로운 자였으며, 그의 이름은 라이네트의 아들 바바(Baba)이다. 나는 의로운 자, 네브-페티-라(아흐모세 1세) 치하에서 그(아버지) 다음으로 “거친 황소”라 불리는 선박의 수병으로 군대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미혼 시절 젊었을 때에는 해먹에서 잠을 잤다. 그 후 나는 가정을 꾸렸다. 그 후 나는 나의 용맹성 덕분에 북쪽함대에 배치되었다. 그 후 나는 폐하는 모시고 그의 병거를 호위하는 보병으로 활동했다.
……
아바리스가 포위되었을 때, 폐하의 면전에서 나는 용감하게 행동했다. 그 후 나는 “멤피스의 대관식”이라 불리는 선박에 배치되었다. 당시 아바리스의 파즈쿠(Pajdku) 물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나는 한 명을 포로로 잡고, 손 하나(*)를 가져왔으며 이 모든 것이 왕궁에 보고되었다. 그러자 용맹의 황금이 나에게 수여되었다. 같은 장소에서 또 전투가 벌어졌고 나는 또 한 명의 포로와 손 하나를 획득했다. 나에게 용맹의 황금이 또 다시 수여되었다. 이 도시의 남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나는 강으로 들어가 전투 한 후 포로 한 명을 붙잡았다.건너 도시로 그를 압송했다. 이러한 사실이 왕궁에 보고되었다. 나에게 황금이 또 다시 수여되었다. 아바리스가 함락되었고 나는 그곳으로부터 전리품을 가져왔다. 한 명의 남자, 세 명의 여성 노예 등 모두 네 명인데 폐하께서는 그들을 나에게 종으로 하사했다.
……
삼 년 동안 샤루헨(**)이 포위된 후 폐하께서 그 도시를 약탈했다. 나도 그 곳으로부터 전리품을 가져왔다. 두 명의 남성 노예와 손 하나. 용맹의 황금이 나에게 주어졌다. 노예들이 나에게 전리품으로 하사되었다.
* : 고대 이집트 군에는 적을 죽일 경우, 그 증거로 오른 손을 잘라 갖고 와 상부에 보고하는 관습이 있었다.
** : 샤루헨(Sharuhen)은 레반트 남부의 항구 도시로 알려져 있다.
◎ 스페오스 아르테미도스 비문
1898년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가 근동 역사에 관한 논문을 발간했다. 그가 조사했던 비문은 북부 상이집트에 있는 스페오스 아르테미도스(Speos Artemidos)에서 기원전 15세기 초 여성 파라오 하트셰프수트의 명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뮐러에 따르면, 그 비문에 다음과 같은 힉소스와 관련된 문장이 있다.(제임스 프리차드의 번역)
Hear ye, all people and folk as many as they may be, I have done these things through the counsel of my heart. I have not slept forgetfully, (but) I have restored that which had been ruined. I have raised up that which had gone to pieces formerly, since the Asiatics were in the midst of Avaris of the Northland, and vagabonds were in the midst of them, overthrowing that which had been made.
– Pritchard, James B. ed. Ancient Near Eastern Texts, Princeton, 1969, p. 231
뮐러는 ‘Asiatics’에 해당하는 단어를 항상 이집트 북쪽에 있었던 전통적으로 셈족 유목민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고, ‘vagabonds’에 해당하는 즉 ‘외국인’ 또는 ‘방랑자’로 이해되는 단어를 동쪽의 지역에서 온 마네토의 ‘불분명한 종족’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또한 이 ‘지배 종족’이 아리아 인종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 Hatshepsut’s temple inscription at Speos Artemidos.
※ https://en.wikipedia.org/wiki/Speos_Artemidos
◎ 타니스의 400주년 기념 석비와 세트 신전
시리아-팔레스타인 사람 또는 힉소스가 적어도 이집트 동부 삼각주에서 기원전 18세기 동안 힘을 갖고 있었다는 생각은 텔 엘 다바의 북쪽에 있는 타니스Tanis에서 발견된 세트 신전 건립 400주년을 기념하는 석비로 더 믿을 만해졌다. 이것이 아바리스에서 힉소스 권력의 확립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관해서는 상당한 논쟁이 있어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힉소스가 특별히 세트를 섬겼고 아바리스에 그 신에게 봉헌된 중요한 신전이 있다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타니스 석비’를 건립한 제19왕조의 파라오인 세티는 제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하렘헤브 치세에 관리를 지냈다. 하렘헤브는 기원전 1348~1320년간 통치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타니스 석비에 각인된 400년이라는 기간의 정확성에 관해 의문이 있었지만, 학자들 대부분은 그 수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그 신전은 기원전 1748년과 1720년 사이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간주된다.
– 타니스의 400주년 기념 석비
※ https://en.wikipedia.org/wiki/Year_400_Stela
그런데 이집트 제19왕조의 친아시아적인 태도는 풀어야 할 의문점이다.
。람세스 1세(Ramses I) : 아바리스 부근에 세습된 재산이 있었다.
。세티 1세 (Seti I)
– 힉소스가 섬긴 세트신을 의미하는 왕호
– 세트 신전 건립 400주년을 기념하는 석비를 세움
。 람세스 2세(Ramses II)
– 그의 아버지 세티 1세(Seti I)에 경의 표하며 세트 숭배 400주년 기념일을 축하하였다.
– 그의 딸들 중의 한명의 이름으로 셈어를 사용(Bintanath는 “아나트의 딸 the daughter of the goddess Anath”이라는 의미)
– 그의 훌륭한 전차 말 몇 마리를 아나트 여신에 헌정했다.
– 수도를 다시 아바리스로 옮겼다(이름을 피 람세스 Pi Rameses라 하였다).
。 람세스 왕조 초기에 민간 행정에서 아시아적인 것을 지배적인 위치로 장려했다.
。 18왕조 초반에 있었던 반 힉소스의 비난들이 19왕조에서는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19왕조 말의 혼란 시기에, 엘레판티네 비석과 해리스 파피루스에서 이집트 제20왕조 초기 파라오들이 북쪽의 아시아계 거주인들에 대해 원주민들의 부흥을 강화하는 반 힉소스 입장을 되살리자는 내용이 있다. 20왕조를 창시한 세트나크트(Setnakht)때 세운 비석에 의하면 투스레트(Twoset) 임기 말과 20왕조 초기의 혼돈사이에 이집트를 침입한 거대한 아시아인들의 세력을 패배시키고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다.
블랙 아테나
– 마틴 버낼 / 오흥식 역 / 소나무 / 2006.01.10
힉소스(Hyksos)라는 이름은 ‘외국 땅의 지배자’라는 뜻의 이집트어(헤카 카세트)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들은 북쪽에서 온 침입자로 기원전 1720년부터 1575년까지 적어도 하 이집트를 정복하고 통치했다. 비록 후르리어 같은 다른 요소가 섞여 있었다고 보이지만, 힉소스는 압도적으로 셈어를 사용했다.
……후기 고대(대략 기원후 3~6세기) 이래 작가들은 이집트 제18왕조가 증오의 대상이던 힉소스를 쫓아냈다는 이집트 기록과 이스라엘인이 이집트에 억류되었다 탈출했다는 성서의 전승, 그리고 다나오스가 아르고스에 도착했다는 그리스 전설 사이에 관련성이 있다고 보았다.
……
이집트 신화에서 세트는 외부 세계의 신이자 사막의 신이며, 그곳에 사는 야생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자들의 신이었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바다의 신이었다. 힉소스의 정복이 성서에 나오는 이집트 체류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힉소스의 세트가 곧 황야와 화산, 그리고 사나운 바다의 신인 이스라엘의 야훼였다고 여길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듯하다.
……
기원전 300년 무렵의 언젠가 스파르타의 왕 아레이오스 Areios가 예루살렘으로 보낸 편지는 바로 이 기록(그리고 스파르타 왕의 선조가 힉소스 식민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헤로도토스의 믿음)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그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대사제 오니아스Onias께 문안드립니다. 스파르타인과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친족임을 보여주는 한 문서가 나타났습니다.
……
우리는 힉소스가 이집트를 통치하던 시기에 관해 직접적으로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제18왕조에서 이집트 민족주의와 문화가 부흥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지배를 받던 시기에 주요한 문화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스터빙스가 힉소스를 전사 계급으로 이해한 것은 올바른 판단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라시아 문화를 휘저은 몽골족과 마찬가지로, 힉소스는 셈족 문화를 이집트에 전달하고 ‘미노아’와 이집트 문명을 그리스에 전달하는 등 다른 문명을 전달하는 가운데 문화적 수성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집트와 달리 문명의 전통이 얕던 그리스는 훨씬 더 변화하기 쉬웠다. 따라서 힉소스가 에게 해에 미친 영향은 훨씬 컸을 것이다.
서양 (위대한 창조자들의 역사)
– 이바르 리스너 / 김동수 역 / 살림 / 2005.11.05
요셉과 그 가족이 이집트에 눌러 살게 된 사정은 힉소스의 외세 지배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힉소스는 기원전 1750년경 아시아에서 시나이 반도를 거쳐 이집트에 침입해 기원전 1580년까지 130여 년간 이집트를 지배했다. ‘외래 지배자’란 뜻의 힉소스는 아시아 대륙 유목민족으로 그 정확한 유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가 기원전 275년에 밝힌 바로는 무력이나 전쟁으로 이집트가 힉소스의 수하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아마 오랫동안에 걸쳐 내부적으로 붕괴과정을 밟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집트 문화가 두 번째 꽃을 피운 중기 왕국에서 엄청난 활력을 보인 이후 모든 분야가 쇠락하고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유목민족 왕의 새로운 이름인 살리티스, 아포피스, 치안 등은 어느 정도 셈족의 이름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한 지배자 중 하나는 야콥-헤르, 또는 야콥-엘로 불렸다. 아시아 유목민의 쇄도에 따라 히브리인들이 나일 강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 같고 요셉의 부상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 사람들이 이집트의 궁전에서 막강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사실은 힉소스의 지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힉소스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이주를 내버려 두었던 것은 힉소스가 그들이 새로운 수도로 건설한 아바리스(나중에 타니스라 불림)와 같은 지역인 고셴 지방과 나일 강 삼각주 지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착한 탓이었다. 이집트 학자 올브라이트는 그 지방의 수코트, 발제폰, 마그달, 질로 같은 지명이 가나안식 이름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서기 100년경의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는 많은 힉소스 사람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예루살렘을 건설했다는 이집트 사람 마네토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마네토는 가나안으로 간 힉소스 사람이 240,000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성 교수의 성서고고학 이야기
– 김성 / 동방미디어 / 2002.01.15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했다기보다는 무력으로 이집트를 점령했다는 사실은 신약시대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한 작품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당시 이집트의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매우 번성했다.그 도시의 아피온이라는 한 이집트인이 `유대인들에 대항함’이라는 글을 통해 출애굽 당시 유대인들이 문둥병자들이었기 때문에 이집트로부터 쫓겨났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서는 금으로 만든 당나귀를 만들어놓고 숭배했다고 주장했다.그러한 치욕적인 비난에 대항해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을 발표했다.그는 그 글에서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를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이 한때 이집트를 통치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유대인을 옹호하거나 반박하는 편 모두가 인용했던 마네토라는 인물은 기원전 3세기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으로서 이집트의 역사를 그리스시대까지 모두 30왕조로 나누어 저술한 이집트 최초의 역사가였다.비록 그의 역사책 원본이 남아있지 않고 요세푸스에 의해 부분적으로 인용됐을 뿐이지만,힉소스라 불리는 이방민족이 다름아닌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언급했다는 점에서 그의 저술은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에 의하면,힉소스 민족은 북쪽에서 쳐들어와 많은 도시들을 불사르고 신전을 파괴했으며 이집트민족을 학살했다.그들은 처음에는 멤피스를 점령해 수도로 삼았다가 아바리스라는 도시를 건설했고,나중에 이집트에서 쫓겨날 때는 그들의 재산을 모두 가지고 나가서 유다 지방에 예루살렘이란 강력한 요새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고고학자와 함께하는 이집트 역사기행
– 요시무라 사쿠지 / 김이경 역 / 서해문집 / 2002.11.05
그런데 도망간 힉소스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불가사의하게도 힉소스라는 민족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집트 역사에는 물론이요, 팔레스티나 역사에도 시리아 역사에도 일체 기록이 없다. 이른바 ‘수수께끼의 민족 힉소스’라 하여 세계사의 커다란 테마가 된 문제이다.
힉소스란 도대체 어떤 민족인가를 둘러싸고 언어와 종교 등 다양한 측면에서 당시 이집트 주변에 있었던 여러 민족과 비교하여 갖가지 설이 나왔지만 모두 추정일 뿐이다. 최근에는 힉소스란 원래 단일 민족이 아니라 잡다한 민족이 모인 집단이 아닐까 라는 학설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이집트의 비옥한 대지에 끌려 이곳 저곳에서 조금씩 침범해 들어온 사람들 중 가장 힘이 센 자가 이민족 왕조를 세우고 이집트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이 왕조의 마지막 세습자가 아포피스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추방된 이민족들은 통솔자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다시 주변 여러 부족들로 흡수된 것이 아닐까. 확실히 단정할 수는 없지만 최근에는 이런 학설을 취하는 학자가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역사의 비밀
– 미하엘 그레고르 / 이민수 역 / 오늘의책 / 2000.09.01
오스트리아의 연구자들은 동쪽의 나일 강 삼각주에서도 가나안인과 크레타인이 서로 교류한 흔적을 찾아냈다. 기원전 17세기에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 있는 어떤 민족이 하(下)이집트의 지배권을 잡았다. 힉소스인들이었다. 거의 100년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수도 아바리스에서 파라오 제국을 통치했다. 이제 힉소스의 기원에 관한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 같다. 힉소스인은 파라오에 의해 나일 강 삼각주로 이주하여 권력을 잡았던 가나안인이었다.
성경고고학
– 김영익 교수 편저 / 총회신학교 출판부 / 2004.08.28 / http://cafe.naver.com/grace119/1276
8) 중기 청동기 II 시대(MB II : 서기전 2000 ~ 1550)
이집트의 중 왕국의 발달과 함께 가나안에서도 새로운 도시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역사시대 전체를 통하여 가나안의 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시대였다. 물질문명의 척도인 토기 제작 면에서도 고속 물레(fast wheel)를 이용한 고품질의 얇은 토기들이 멀리 이집트까지 수출되었고 파이안스(faience)와 알라바스터(alabaster) 용기들도 가나안 자체의 기술로 대량생산되었다.
9) 후기 청동기 I 시대(LB I : 서기전 1550 ~ 1400)
이집트의 제15왕조인 힉소스의 추방의 여파로 중기 청동기 도시국가들이 대부분 파괴되면서 약 100여년의 과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집트 신왕국의 제18왕조의 출범과 함께 이집트는 시리아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가나안은 이집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관련 그림>
– 힉소스의 추정 그림 중의 하나
– GeaCron 기원전 1600년의 역사지도
– 기원전 20세기 근처의 후르리어 지역 추정도 / 출처 : https://ku.wikipedia.org/wiki/Hur%C3%AE
– 아브라함 이동 경로 추정
– 하이집트의 주요 도시들
– 힉소스 상층 계층과 북쪽 사이의 접촉을 시사할 수 있는 유일한 특징적 유물로서, 네 개의 가젤 머리와 뚜렷이 아나톨리아적으로 보이는 수사슴의 머리를 지닌 놀라운 호박금琥珀金관冠이다. 이것은 텔 엘 다바로부터 1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살히야 보물Salhiya Treasure’ 중 하나이다.
– 힉소스 파라오인 아포피스 문장을 새긴 스캐럽 (the Museum of Fine Arts, Boston)
하이집트와 팔레스타인 모두에서 인장과 상아보다 더 널리 퍼진 것이 힉소스 스카랍이었다. 이것의 일부는 이집트 중왕국에서 확립된 유형을 따르거나 복사된 형식이었지만, 일부는 기본적 꼴을 유지하면서 평평한 표면에 고유한 디자인을 발전시키고 있는데 시리아-팔레스타인 예술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 폭발 시기에 대해 논란 중이지만, 테라(산토리니) 화산의 폭발과 「출애굽기」를 연계시키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면 힉소스의 축출과도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겠다.
– 기원전 2500년부터 기온 변화 (출처 : http://www.longrangeweather.com/)
<관련자료 및 참고자료>
블랙 아네타 1,2권
위키백과 : https://en.wikipedia.org/wiki/Hyksos
위키백과 : https://en.wikipedia.org/wiki/Origins_of_the_Hyksos
위키백과 : https://en.wikipedia.org/wiki/Second_Intermediate_Period_of_Egypt
위키백과 : https://en.wikipedia.org/wiki/Thirteenth_Dynasty_of_Egypt
위키백과 : https://en.wikipedia.org/wiki/Tell_El-Dab%27a
위키백과 : https://en.wikipedia.org/wiki/Speos_Artemidos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힉소스
고대의 힉소스 전승과 후대의 문학적 수용 (김성, 학위논문(박사) — 연세대학교 대학원 : 신학과 2015.2)
아시아계힉소스,델타”백년통치”/사라진수도 아바리스(문명탐험 11)
힉소스 왕조의 수도 소안(Zoan) 올리브 나무 ‘지중해 고대史’ 바꿨다
4,000 years ago, climate change caused massive civilization collap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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