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각 나라 국력을 인구 중심으로 자료 수집

임진왜란 당시 조선 · 중국 · 일본의 국력에 관련된 자료를 모아보았다.

 

우선 16세기 후반은 소빙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시기임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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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란이 있는 IPCC 1990년 1차 보고서에 나오는 중세온난기와 소빙하기

 

83만여명이 사망하여 중국 역사상 최악의 지진 피해로 기록되고 있는 1556년 산시 대지진과 소빙기와 관련한 자연재해가 16세기 후반부터 명明을 괴롭힌다. 명이 멸망하고 27년이 지난 뒤에, 강소(江蘇) 무석(無錫) 사람인 계육기計六奇는 그가 저술한 『명계북략(明季北略)』의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명조明朝가 천하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① 외부의 강적(여진족의 위협), ② 내부의 농민반란, ③ 자연재해의 유행, ④ 정부의 무능력이다. 이들 요인 중에서 계육기는 재해와 농민반란의 상호관계를 특히 강조했다.

『하버드 중국사 원.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명의 쇠락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선, 1572년 황위에 올라 1620년에 사망한 만력제(신종)의 통치 시대로 돌아가 보자.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과 달리, 명의 쇠락이 만력제의 결함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만력 연간에 발생한 두 차례의 환경 위기가 그러한 큰 그림에 해당한다.

1586~1588년에 발생한 첫 번째 ‘만력의 늪’은 정권 자체를 마비시켰다. 그 늪은 사회 재난의 새로운 기준이 될 정도로 엄청난 환경 차원의 ‘붕괴’였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이 재난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는데 이는 1580년대 초반부터 장거정이 시행했던 국가재정에 관한 개혁 덕분이었다. …… 그리하여 장거정이 1582년 사망할 때 국고에는 은이 넘쳐났다. 이렇게 보유한 자금 덕분에 만력제의 조정은 1587년 폭풍처럼 밀어닥친 자연재해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을 필두로 한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의 해양강국이 동아시아 해역으로 진출하여 활발한 무역활동을 하면서 소위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동아시아 바다에는 이들 서구인 외에도 각종 해상세력이 번성하면서 새로운 기운이 넘쳐나게 되었으니, 왕직(王直) · 정지룡(鄭芝龍) 등 중국 동남해안을 거점으로 활동한 거대 밀무역조직, 일본 서부의 여러 대명(大名, 다이묘) 등이 그들이다.

일본은 왜구라는 형태로 이미 대외적으로 팽창하고 있었다 볼 수 있고, 16세기에 들어와 한때 전세계 은의 1/3을 생산하기도 했던 일본은 대항해시대와 맞물러 일본 경제의 상업적 발전을 이룬 시기와 겹친다. 16세기 일본사는 중세에서 근세로의 이행기로 이해되고 있고 상업발전의 획기적인 발달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해석된다.

※ 일본의 이와미 은광과 16~17세기 아시아 무역 네트워크 : http://yellow.kr/blog/?p=1583

 

이러한 16세기 동아시아 해상세계의 급변이라는 시운을 타고 통일정권을 창출해낸 일본은 동아시아의 신흥강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신무기 조총은 이미 오랜 내전을 통해 단련된 일본의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증강시켰고, 통일 일본의 총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도발하여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정면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말 동북아에서 발발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세계의 격동의 산물이며 당시 동북아 국제관계를 반영한 국제전쟁이었다.

 

조선은 율곡 이이의 글에서 느낌이 온다.

 

오늘의 나라 형세는 마치 오랫동안 고치지 않고 방치해둔 만간대하萬間大廈(여러 간의 큰 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크게는 대들보에서 작게는 서까래에 이르기까지 썩지 않은 것이 없어, 근근이 날만 넘기며 지탱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동쪽을 수리하면 서쪽이 따라 기울고, 남쪽을 뜯어 고치면 북쪽이 휘어 넘어져서 어떤 장인도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오직 날로 더 썩어 붕괴할 날만 기다리는 그 집과 오늘의 나라 꼴이 무엇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 1574년 <만언봉사萬言封事> 중에서

 

예로부터 나라를 세운 지 오래되면 점점 법제의 폐단이 생기고 인심이 해이해지는 것인데, 반드시 어진 임금이 나타나 퇴폐하고 타락한 것을 말끔히 없애고 정치를 고쳐야만 국세가 떨치고 운명이 새로워지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물쭈물하다가 퇴락하여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니 그 형상을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건국된 지 200년이 지나 중쇠(中衰)의 시기에 해당하는데, 권간(權姦)이 어지럽혀 화를 많이 겪었고 오늘에 이르러는 노인이 원기가 소진되어 다시 떨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다행히 성상께서 나셨으니, 이것은 장차 다스려질 수도 있는 때입니다. 만일 분발하고 진작하시면 억만년 동안 동방의 복이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장차 무너지고 잦아들어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 1581년 <경연일기經筵日記>

 

200년 역사의 나라가 지금 2년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 1582년 <진시폐소陳時弊疏> 중에서

 

지금 국가의 저축은 1년을 지탱하지 못합니다. 이야말로 진실로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 1583년 <육조계六條啓> 중에서

 

 

연구자별로 전근대의 국력의 원천인 인구에 대해서 여러 주장들이 존재하고 있다. 역사적 인구통계의 연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한계가 뚜렷해지는데 관련된 기록과 참조자료의 존재 여부와 그 신뢰성에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자료를 찾아서 단순 나열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인용된 자료의 연도를 감안하기를 바란다.

 

조선 후기는 명백한 근대적 추계가 주어졌기에 대체적으로 유사하지만, 조선초에 대한 인구 논쟁은 다양하다. 반면 일본은 중세시기 봉건제라는 특성에 의해 지방영주에 의한 역사인구학의 기초 자료가 풍부하게 존재하는 편이다.

 

아래의 자료를 취합하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인구는 400만~1400만 정도이고 일본은 1,200만에서 3,200만까지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참 오차가 크다.

(국내 통계청에서 발행한 ‘인구 대사전’은 권태환·신용하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임진왜란 당시 1400만)

 

고려 말 몽골과의 오랜 전쟁과 그 이후 원나라의 경제적 수탈, 홍건적의 난, 고려 말의 경제 피폐 그리고 조선초까지의 왜구의 준동 등도 조선의 인구에 악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래 자료를 보면 임진왜란 전에는 왜구의 영향으로 전라도 지역의 농업 생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고, 감자 같은 구황작물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였기도 하다. 반면에 일본은 전국시대라는 내전이 있었지만 16세기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2016년 기준으로 남북한 인구는 7600만, 일본은 1억2670만으로 인구 비율은 약 60%이다. 1600년 기준으로 일본의 인구가 1200만~1700만의 주장이 많은 것 같은데 단순무식하게 60%라는 비율을 적용하면 조선은 720만~1020만이 나온다. 물론 조선은 임진왜란의 피해로 더 줄어야겠지만 말이다.

※ 참고로 쌀 생산량은 백미 기준으로 2016년 예상치가 한국 400만톤, 북한 160만톤, 일본 768만톤이다.

 

 

* 14세기의 위기 – 기근과 흑사병 : http://yellow.kr/blog/?p=1376

* 17세기 위기 – 소빙하기(소빙기) 절정 : http://yellow.kr/blog/?p=939

* 일본의 이와미 은광과 16~17세기 아시아 무역 네트워크 : http://yellow.kr/blog/?p=1583

* 그림과 지도로 보는 임진왜란 (1592년~1598년) : http://yellow.kr/blog/?p=1299

 

* yellow의 세계사 연표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 http://yellow.kr/mhistory.jsp?sub=5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  송복 / 시루 / 2014.05.20

 

1973년 미국의 유명한 1세대 동양사학자 페어뱅크(John Fairbank) · 라이샤워(Edwin Reischauer) · 크레이그(Albert Craig), 3인 공저의 『동아시아, 현대적 전환 East Asia’s Tradition and Transformation』이란 책이 나왔다. 이 책의 초판은 『동양문화사』란 이름으로 번역 · 출간되었다. 이 미국의 동양사학자들이 쓴 책에 의하면 1590년대 일본의 인구는 3천 200만 명이고 조선의 인구는 500만 명 이하로 추정된다고 했다.

조선 인구에 대한 이 같은 추정은 그 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연구한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60년 후인 1657년(효정 8년)에 실시된 호구조사에서의 조선 인구는 229만 83명이었고, 호수(가구 수)는 65만 8천 771호로 되어 있다.

……

10만 양병이 당시 인구 구성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면, 당시 국가 전체의 경제적 능력으로는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보다 직설적으로 그때 조선조 재정의 세입은 얼마나 되었고, 생산 가능한 토지면적은 전체적으로 얼마나 되었으며, 1년 곡물 총생산량은 얼마나 되었겠는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생산 가능한 총토지면적은 170만 결(1결은 일반적으로 평균 600평, 어떤 지역은 800평)이고, 1결당 평균 생산량 3석으로 해서 총곡물생산량은 500만 석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세입은 1결당 평균 4두로 해서 60만 석이 전부다.

이 60만 석으로 정부를 운영하고 정부 관리들의 녹봉을 주고, 군대를 길러야 한다. 10만 명의 군대를 기르려면 연간 소요되는 군량은 얼마로 계산할 수 있을까.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이 쓴 『진사록辰巳錄』의 기록에 의하면, 군병 1만 명의 한 달 식량은 6천 400석이다. 1년 식량은 7만 6천 800석이고, 이를 10만 명으로 계산하면 최소한 연 76만 석 이상의 군량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조 곡물 총생산량은 겨우 500만 석이고 정부 세입은 고작 60만 석이다.

총생산량 500만 석이면 400만 명의 백성도 먹고 살기 어려운 양이다. 거기에 70만 석 이상을 군량으로 조달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며,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래서 평시에는 생산하고 전시에는 동원 가능한 병농일치의 둔전병제屯田兵制와 더불어 농민은 병역 대신 납포納布하며 농사짓고, 정부가 그 돈으로 따로 병정을 고용하는 고립제雇立制가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실현 가능한 가장 현실적인 방책이었기 때문이다.

……

조선에 군대를 보내던 1590년대의 명은 이미 재정적으로 파산상태에 다다른 상태였다. 1430년대 이후 내륙 아시아 변방에서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몽고와, 1550년대 이후 동부 몽고에서 대규모 공격군을 통합해 강력한 지도자로 등장한 알탄 칸과 만리장성 안팎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느라, 명은 군사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이미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거기에 조선 출병은 이미 바닥까지 드러낸 마지막 자원을 완전히 고갈시키는, 대타격이며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런데 명은 왜 조선에 군대를 보냈는가.

……

명이 조선에 군대를 보낸 것은 ‘조선’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명’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왜로부터 명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조선이 왜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을 일본에 보내기 훨씬 전부터 명 조정은 왜의 조선침략 정보를 입수했다. 왜의 조선침략이 가도정명에 원뜻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1551년부터 1563년까지 명의 남부 해안 지역에 가까운 절강 · 복건 · 소주 · 송강 등지에서 왜로부터 명이 입은 피해는 실로 엄청났다. 거기서 왜 세력의 강대함과 위협성을 진작부터 인지했다. 임진왜란이 있기 7년 전부터 ‘일본이 대규모로 조선을 침략하고, 명도 함께 침략할 것’이라는 유구琉球로의 보고서가 진공사進貢使 편에 여러 번 전해졌다. 이렇듯 왜의 동태와 의도를 명 조정은 훗날 조선이 알리기 전에 이미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인터뷰] “징비록…한중일 국제전의 뼈아픈 기록”

–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와 전병근 기자 / 조선비즈 / 2015.02.14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12/2015021200086.html

 

……

 

-임진왜란 하면 일본을 보고 온 사신들의 엇갈리는 정보 보고가 유명한 일화인데.

정탐 보고 말인데, 그것은 전세에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본다. 조선도 대비를 하긴 했다. 문제는 일본이 침략해 봐야 왜구가 얼마간 올 것으로 생각했다. 한 만 명 정도 올 줄 짐작했던 거다. 그걸 류성룡도 반성하고 있다.

훈련된 수십 만 명이 올 줄은 몰랐다는 점에서 대응의 실패를 말할 수는 있다. “통신사를 보내서 일본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고 일본 정세를 늘 살펴야 한다”는 신숙주의 유언을 조선이 지키지 않았다는 점을 책 앞 부분에서 반성하고 있다.

 

-그 당시 실제로 일본의 군사 역량은 어느 정도였나?

그 때까지 100년 동안 전쟁을 거쳐 통일을 이뤘고, 그 흐름을 가지고 정말 세계 정복까지 노렸던 것 같다. 일부에서는 일본 내부 무사의 불만을 해소하는 시도로 보거나 남는 힘을 내보낸 정도로 보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안 맞는 부분이 있다.

 

당시 일본 열도 서쪽 규슈에 있는 군사가 먼저 쳐들어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람들이 나중에 왔다. 정적이 뒤쪽에 있는 상태에서 주력이 먼저 나간 거다. 주력을 먼저 내보낸 건 진지하게 침략에 나섰다는 얘기다.

 

히데요시도 전쟁 중간에 죽어버렸고 주력 부대가 실제로 피해도 많이 입었다. 그래서 2년 뒤 도요토미 세력이 세키가라 전투에서 지게 된다. 그걸 보면, 단순한 불만 세력 척결이 아니었다. 진짜로 세계 정복을 하려 한 거다.

 

그렇게 훈련시킨 병사 수십 만을 이끌고 왔을 때 정말 조선이 쉽사리 대적할 수 있었겠느냐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류성룡의 큰 업적 중 하나가 훈련도감, 상비군의 창설이었다. 그 때 1만 명을 유지하는 데도 나라가 허덕였다.

 

나중에 명나라가 일본이 다시 쳐들어올 수 있으니 군대를 더 주겠다고 하는데 우리가 식량을 댈 수 없어서 안 된다고 했다. 당시 조선의 국력이 장기적으로 몇십 만을 유지할 수준이 안됐다.

 

그런 점을 모르고 이 책을 보면 조선이 대비를 잘못한 것이고 대비만 잘했으면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쉽게 한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또 당시 조선은 주적이 북쪽에 있었다. 여진 같은 무리다. 그래서 주력 부대도 다 북쪽에 가 있었다. 압록강, 두만강에. 남쪽에는 왜구를 막는 정도였다. 그게 뚫린 거다.

 

전략의 실패이기도 했다. 일본은 섬나라니 해군에 강할 거라고 생각하고, 내륙에서 싸우자고 전략을 짰다. 그게 오판이었다. 일본은 섬나라지만 오랫동안 내전을 치른 나라였다. 그렇게 해서 육로가 뚫린 뒤 임진강에 왔을 때, 기억이 맞다면 5월쯤인데, 그때에야 국면이 바뀐다.

 

압록강, 두만강을 지키던 주력 부대가 내려오고 명나라 선봉대도 조금씩 온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일본의 진격이 막혔다. 그때쯤 되면 전쟁의 첫 흐름이 끊기고 히데요시의 세계 정복 꿈도 바뀌게 된다. 한반도 4개 지역을 받는다는 것으로.

 

북쪽에서는 여진을 지키던 부대가 내려오니 만주 컨트롤에 공백이 생겼다. 명의 이여송 같은 장군도 여진족을 막던 사람이었다. 명과 조선의 군대가 다 내려오다 보니 만주에 큰 공백이 생겼고, 결국 누르하치가 만주를 통일하고 명청 교체의 큰 흐름을 만든 계기가 됐던 거다.

 

-그렇게 보니 임진왜란이 정말 국제전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 일본 내에서 실제로 세계 정복의 담론이 구체적으로 오갔나?

그렇다. 1592년 7월쯤 히데요시의 세계 정복 계획이 나온다. 히데요시가 발급한 공문서에 세계 정복 계획이 들어있다. 이런 내용이다. 텐노는 베이징으로 옮긴다. 히데요시 자신은 남경 근처로 간다. 한반도는 누가 가서 지배하고 남은 본토는 누가 지배한다. 그렇게 딱딱 나눴다. 그걸 보고 있으면 7월 시점에서는 정말로 그런 계획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 임진왜란이 일본으로서는 세계 정복 구상이 처음 실행에 옮겨진 사건인 거네?

그렇다. 오다 노부나가가 먼저 세계 정복 꿈을 꿨다는 설은 있다. 하지만 명확한 문장으로 세계 정복의 계획을 작성한 인물은 히데요시였다. 전쟁에 나서기 직전에 인도 고아에 있던 포르투갈 총독, 마닐라에 있던 에스파냐 총독, 타이완에도 편지를 보내 항복하라고 요구한다. 상대방은 너무 어이가 없었는지 무시해 버리긴 했는데, 여튼 그런 행동까지 했다.

 

-정말 그런 서신까지 보냈나?

금방 중국을 정벌할 건데 그 다음이 곧 너네 차례니까 항복하라고 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중국에는 “왜구를 우리가 잡아줬는데 왜 감사하지 않느냐”면서, 그러니 무찌르러 가겠다고 했다. 조선이나 중국은 왜구=히데요시로 봤지만, 히데요시는 왜구가 자신들과는 별개의 발작적인 세력이고, 그걸 자기네가 눌러줬다고 본 거다. 그것에 대해 조선과 명이 감사해야 하는데 왜 안하느냐고 했다. 조선이나 명이나 그냥 ‘왜구’가 오겠지 하는 식으로 대비를 소홀히 한 측면이 있었다.

 

-그 당시에 세계 정복 꿈을 꾸고 해외에 선전 포고까지 했다는 게 놀랍다.

그 사람들 입장에선 이미 그 시대에 동남아가 다 자기네 세계관에 들어가 있었다. 그 당시 히데요시가 쓰던 부채가 있는데 거기에 그려진 세계지도를 보면 일본과 중국 이외의 세계는 작아 보인다.

 

-그런 걸 보면 일본은 한국과 많이 달랐다는 생각이 든다. 우린 안으로 문(文)에 묻혀 있었고, 일본은 전쟁에다 해외로 눈을 돌렸고.

그렇게만 보기는 힘들다. 조선 역시 여진에 대해서는 엄청난 무력을 가했다. 한반도와 여진 관계사를 보면 여진이 불쌍할 정도로 계속 죽인다.

 

-그걸 대외 팽창이라고 할 수 있나?

4군6진 정복이 팽창이다. 고구려와 발해 고토 회복이라고는 하지만 끊겨있던 역사 영역 아닌가. 당시 함경도에 여진이 살고 있었는데 그곳을 정복하는 과정이었다.

 

-일본으로 내려가지는 않았다.

일본의 존재는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삼국시대부터 무력이 밀렸다. 삼국사기 같은 한국 쪽 역사서와 일본서기 같은 일본 쪽 역사서, 위지 동이전 같은 중국 역사서를 함께 보면 잘 알 수 있다. 한반도가 문화에서는 앞서는데 무력에서는 열세였다.

 

생산력과 군사력의 문제는 이미 삼국시대 때 우열이 뒤집혔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 무만 있었느냐. 그것도 아니다. 일본 귀족들은 철저히 문의 문화였다. 헤이안 때까지 유지되다가 엎어진 게 있었다.

 

반대로 한국은 조선 전기까지 여진을 주도적으로 장악하다가 점점 야성의 역사가 작아지면서 중국에 의해 순치되는 과정이 있었다. 일본은 무력 혼란기인 100년간 전쟁을 겪으면서 더 무력이 강해진 거다.

 

결국 조선의 확장은 4군6진이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본다. 신숙주와 김종서가 했던. 류성룡의 문집을 보면 가장 존경하는 재상이 신숙주와 김종서다. 4군6진의 주역들이다.

 

-임진왜란을 국제전으로 보는 흐름은 언제부터 있었나?

명지대의 한명기 교수, 국방대의 노영구 교수가 시도했다. 한명기 선생은 내가 알기로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최초로 명실록을 이용해 임진왜란을 연구하려고 한 분이다. 그 전까지 임진왜란을 연구하던 한국 학자들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한국 책만 봤는데 한명기 선생은 중국쪽 사료도 함께 봐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제 나는 일본책도 함께 보자는 입장이다. 일본 기록을 보려면 한문만으로는 안 되고 일본 초서를 봐야 한다. 그 전까지는 20세기 전반에 나온 일본인들이 활자로 옮긴 일부 문헌만 간신히 이용했지만, 다른 책도 많다는 걸 소개한 거다.

 

군사학에 대해서는 노영구 선생, 해군사관학교의 이상훈 선생 등이 이야기한다. 전술적인 문제. 제일 큰 것은 의병에 대한 재평가다. 노 교수는 의병이 너무 과대 평가됐다고 본다.

 

의병은 7년 내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초기 4월부터 그해 연말까지 7, 8개월로 역할이 끝난다고 본다. 그것도 관군이 없어진 상태가 아니라 관군 아래에서 움직였다는 거다.

 

그런 게 임진왜란 연구에서 최근 10년 간 통설이 됐다. 그런데 이게 학계 밖으로 나가는 순간 충돌이 생긴다. 각 후손 집안들이 반발한다.

 

-해외에서도 임진왜란을 국제전으로 보는 논의가 많나?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일본은 세계 체제를 보려고 했고, 유럽에서 배운 세계관을 적용하려 했다는 거다.

 

최근에는 히데요시가 황제를 원한 건 아니고 해상왕국 정도를 꿈꾼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일본 내 중국 사학계 이야기다. 히데요시의 유명한 일화, 명 황제가 전한 심유경의 국서를 찢었다는 게 허구라는 주장이다. 히데요시가 어느 정도 중국의 세계 체제를 받아들이려 했는데 막판에 뒤틀리면서 한반도 4개 지역만이라도 실력으로 확보하려 했던 게 정유재란이라는 해석들이 나온다.

 

중국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한국에 와서 한 말처럼 여전히 일본의 침략을 왜구 확장론으로 보려 한다. 한국의 경우 최소한 그런 해석은 이제 많이 없어졌다.

……

 


조선전기 사노비의 사회 경제적 성격

–  안승준 / 경인문화사 / 2007.06.30

 

우리 전통사회의 대표적 악법 또는 모순을 들자면 필자는 주저 없이 노비세전법과 노비신분법을 꼽는다. 노비의 삶과 희망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던 이 법은 고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관철되었으나, 법전에 명문화되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관행이다. 노비 소유주인 국가(왕실)와 귀족 양반들의 이익을 대변한 이러한 관행은 크나큰 사회적 모순으로 작용하면서 급기야 15~17세기에 이르러서는 당시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비가 되는, 그래서 서양 연구자에 의해 이 시기를 노예제 사회라고 부르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실제로 조선전기 조선왕조실록에는 노비 기사로 점철되어 있고, 사가(私家)의 고문서를 통해 보면 500~700 여구(口)에 달하는 노비를 보유한 양반가도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16세기 말 동아시아 세계의 대충돌, 임진왜란

–  이상훈 / 해군사관학교박물관 기획연구실장 / 2013.09

 

……맥없이 조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평소 조선을 군사적 강국으로 여기고 있던 명은 관리를 파견하여 전황을 확인하기도 했다 사실 임진왜란은 단순한 한일 간의 전쟁이 아니었다. 조선이 초반 무력하게 당한 이면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무역상과 예수회 선교사의 동아시아 진출이 있었고, 100여 년에 걸친 내란을 막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등장이 있었다. 중국도 내우외환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나, 여전히 동아시아의 맹주로서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각국의 입장에서 전쟁을 보는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게 했다.

……

임진왜란 즈음 일본은 인구 1,200만이 넘고(조선은 800만으로 추산) 무(武)를 중시하는 가운데 상업이 발달하고 화려한 문화와 예술이 꽃피고 있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잣대를 가진 조선의 눈에는 일본이 신불(神佛)이나 숭상할 뿐 유교문화에 서툰 야만족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갑작스런 침입으로 대부분의 국토를 침탈당하고 왕실과 조정마저 피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조선은 그 침략의 주동 세력이 평소 무시하던 일본이라는 점에서 충격이 더 컸다.

……

건국한 지 2백 여 년이 지난 명은 임진왜란 무렵 북쪽 타타르, 오이라트와의 분쟁, 남쪽 해안을 침공하는 왜구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일본과 조선이 결탁하여 침입하려 한다는 소문도 꾸준히 나돌고 있었다. 명은 조선에서 급히 원군을 요청하자 원정군을 파견하게 되었는데, 일본군이 자국의 영토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격퇴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

명으로서는 파병이 단기적으로는 적잖은 부담이 되었으나, 국경 밖에서 일본군을 방어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패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여 명분에서도 소득이 컸다.

……

도요토미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면서 황급히 전쟁을 끝맺었지만, 일본은 장기적으로 자국의 극심한 피폐를 만회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도자기 산업의 발달을 기반으로 한 서양과의 교역에서의 부의축적, 조선 학자들에 의한 학문의 발달과 활자 보급에 의한 인쇄의 발달등을 이루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륙 진출의 선례로서의 자신감은 이후 대륙 침탈과 탈아론(脫亞論)의 사상적인 배경과 실제 행동의 전범(典範)으로 계승되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당시 조선은 당시 세계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적극 대처하지 못했었다. 또한 동남아까지 진출하여 부를 축적한 극소수의 사람도 있지만 조선 전체로는 전쟁 과정과 전쟁 후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위기 속의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 전쟁이었다.

 


Angus Maddison

–  http://www.ggdc.net/maddison/oriindex.htm

– Statistics on World Population, GDP and Per Capita GDP, 1-2008 AD
< GDP / 단위: million 1990 International Geary-Khamis dollars >

 1년

1000년

1500년

1600년

1700년

1820년

1870년

1913년

1950년

 중국

 26,820

27,494

61,800

96,000

82,800

 228,600

 189,740

 241,431

 244,985

 일본

 1,200

 3,188

 7,700

 9,620

 15,390

 20,739

 25,393

 71,653

 160,966

 한국

 4,800

 7,320

 8,244

 8,616

 13,463

 25,887

 

 

1
– 1995년 자료

 


McEvedy & Jones (1978)의 각 지역별 인구추정치

–  Colin McEvedy and Richard Jones, 1978, Atlas of World Population History, Facts on File, New York, ISBN 0-7139-1031-3.

 

단위 : 천명 / 중국은 티벳, 신강, 만주, 내몽골 제외된 지역

 연도

 한국

일본

중국

 영국

 세계

 -200

 100

100

 40,000

 500

 150,000

 1

 200

 300

 50,000

 800

 170,000

 200

 300

 700

 60,000

 900

 190,000

 400

 500

 1,500

 50,000

 1,000

 190,000

 600

 1,000

 3,000

 45,000

 900

 200,000

 800

 2,000

 4,000

 50,000

 1,000

 220,500

 1000

 2,500

 4,500

 60,000

 2,000

 265,000

 1100

 3,000

 5,750

 100,000

 2,500

 320,000

 1200

 4,000

 7,500

 115,000

 3,500

 360,000

 1300

 3,000

 9,750

 85,000

 5,000

 360,000

 1400

 3,500

 12,500

 75,000

 3,500

 350,000

 1500

 4,000

 17,000

 100,000

 5,000

 425,000

 1600

 5,000

 22,000

 150,000

 6,250

 545,000

 1650

 5,000

 25,000

 130,000

 7,500

 545,000

 1700

 6,250

 29,000

 150,000

 9,250

 610,000

 1750

 7,000

 29,000

 215,000

 10,000

 720,000

 1800

 7,500

 28,000

 320,000

 16,000

 900,000

 1850

 9,000

 32,000

 420,000

 28,000

 1,200,000

 1875

 10,500

 36,000

 400,000

 34,000

 1,325,000

 1900

 12,000

 45,000

 450,000

 42,000

 1,625,000

 1925

 18,500

 60,000

 485,000

 48,000

 2,000,000

 1950

 30,000

 84,000

 520,000

 54,000

 2,500,000

 1975

 50,000

 110,000

 720,000

 59,000

 3,900,000

 

 


한국역사지리

–  홍금수,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이준선 외 / 푸른길 / 2011.09.09

 

조선 시대의 인구 조사 자료는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표 1>은 『조선왕조실록』, 『호구총수』 등 정부가 집계한 자료에서 발췌한 조선 시대의 전국 호구수를 정리한 것이다. 이 표를 보면, 대체로 조선 전기, 즉 16세기까지는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겪으면서 인구가 감소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증가와 감소가 번갈아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표 1> 조선 시대 정부 자료에서 발췌한 전국 호구 수

 연도  왕조  호수  구수  비고
 1393  태조 2

 301,300

 양계(兩界) 누락
 1406  태종 6

 180,246

 370,365

 한성부, 경기도 누락
 1440  세종 22

 201,853

 692,473

 한성부, 개성부 누락
 1519  중종 14

 754,146

 3,745,481

 1543  중종 38

 836,669

 4,162,021

 1639  인조 17

 441,827

 1,521,165

 1657  효종 8

 668,737

 2,201,098

 1675  숙종 1

 1,250,298

 4,725,704

 1693  숙종 19

 1,547,237

 7,045,115

 1711  숙종 37

 1,466,245

 6,394,028

 1726  영조 2

 1,614,598

 6,955,400

 1747  영조 23

 1,759,692

 7,340,318

 1765  영조 41

 1,675,367

 6,974,642

 1789  정조 13

 1,752,837

 7,403,606

 1801  순조 1

 1,757,973

 7,513,792

 1811  순조 11

 1,761,887

 7,383,046

 1829  순조 29

 1,563,216

 6,644,482

 1837  헌종 3

 1,331,931

 6,708,372

 1847  헌종 13

 1,587,181

 6,751,656

 1864  고종 1

 1,703,450

6,828,520

 

그런데 앞에서 다룬 바와 같이, 이러한 기록상의 인구수는 당시 실제의 인구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당시의 실제 인구수를 추정하였는데, 그 주요 결과 <표 2>이다. 이 표에 따르면, 조선이 건국한 14세기 말 전국의 인구는 적게는 약 450만 명에서 많게는 약 750만 명까지로 추산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경의 인구 규모는 인구학적 연구 방법에 의해 인구를 추산한 권태환 · 신용하의 경우, 이 시기 연평균 인구 증가율을 0.4%로 가정하여 인구를 약 1400만 명으로 추정하였으며, 한영우는 약 958만 명으로 추산하였다. 한영우도 연평균 인구 증가율을 0.4%로 보았으나, 조선 초기의 인구를 권태환 · 신용하의 약 550만 명보다 적은 약 450만 명으로 잡았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였다.

 

<표 2>

 연도  <표 1의 인구

 A

 B

 C

 기타

 인구

증가율

인구

증가율

인구

증가율

 1392

 5,549

 0.40

 7,500

 4,500 ①

 1519

 3,746

 4,000

 0.24

 10,469

 0.47

 7,210 ①

 1590

 14,039

 -0.25

 9,580 ①

 1639

 1,521

 10,665

 0.31

 1657

 2,201

 11,226

 0.77

 1675

 4,726

 13,145

 1.95

 1693

 7,045

 16,030

 -1.77

 1711

 6,394

 15,457

 1.07

 1726

 6,955

 7,500

 0.24

 17,089

 0.92

 1747

 7,340

 18,544

 0.20

 1765

6,975

 17,682

 0.02

 1789

7,404

 9,500

 0.36

 18,269

 -0.39

 17,203~17,977 ③

 1801

 7,514

 18,497

 0.11

 1810

 18,383

 0.43

 15,100

 0.08

 1830

 16,476

 0.12

 7,412 ②

 1837

 6,709

 16,479

 0.05

 1858

 12,000

 0.40

 16,845

 -0.03

 1870

 18,835

 0.05

 8,272 ②

 1884

 16,950

 0.05

 16,000

 0.34

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1998, 한국사 30 –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pp374~376

주 : 1) 증가율은 연평균 인구 증가율

2) A: 김재진(1967), B: 권태환·신용하(1977), C: 이호철(1992), ①: 한영우(1977), ②: 石ㅁㅁ(1972), ③: 김두섭(1990)

 

이와 같이 인구 규모의 추정치에는 차이가 있으나, 모든 연구자들이 조선 초기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는 인구가 증가 일로에 있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근대이전의 일본 인구통계(近代以前の日本の人口統計)

–  近代以前の日本の人口統計

 

* 1500년 일본 추정인구

– 社会工学研究所 (1974) : 9,530,000 명

– Biraben (1993, 2005) : 800만

 

* 1600년 일본 추정인구

– 社会工学研究所 (1974) : 12,273,000 명

– Biraben (1993, 2005) : 1200만

– Farris (2006, 2009) : 1500만 ~ 1700만

 


조선시대 호남의 회계 문화

–  전성호 / 다할미디어 / 2007.08.30

 

조선 왕조는 국토 이용 형태와 인구 분포에 관한 거시 통계 자료를 15세기부터 생성하였다. 15세기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수전水田 농법과 한전旱田 농법의 기반이 되는 논밭 비율의 전국적 분포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18세기 『여지도서』에는 그 비율이 전국에 걸쳐 군현 단위로 조사되어 있다.

……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일종의 오늘날 국세 조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군현 단위로 경지 면적에 해당되는 출세실결수()와 군현별로 가구 수와 인구 수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국토 이용 통계와 함께 당시 경제를 개괄할 수 있는 거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이 전국적인 거시 통계 항목은 18세기 영조 대 또다시 조사하여 『여지도서』에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의 통계 항목도 15세기 『세종실록지리지』와 동일하게 구성되어 있어 15세기와 18세기 전국 국세 개황을 횡단면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

2

<그림3> 1428년

A = 한성(109,372 경기); B = 종성(21,815 함경); C = 길주(14,819 함경); D = 평양(14,440 평안); E = 공주(10,049)

<그림4> 1789년경

A = 한성(189,153 경기); B = 평양(107,592); C = 의주(89,970 평안); D = 충주(87,331); E = 전주(72,505 전라); X = 강계(60,419 평안)

** 16세기

 

호남의 해안가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일본에 본거지를 둔 국제 해적에 자주 침입을 받은 지역이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대한 궁극적인 원인과 귀결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진왜란 이전의 왜구 활동과 그 경제적 영향,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복구 과정에 반영된 국가 체제 질서의 변화 양상을 진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방향에서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전라도 지역의 인구 및 경지 구조는 매우 중요한 함의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전라도 지역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수백 년 동안 왜구 활동의 피해 지역이었고, 한반도에서 가장 물산이 풍부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 약 200여 년간 안정적인 경제 활동에 종사할 수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림3>은 15세기 세종 대 조사된 전국 팔도의 군현별 인구 수의 횡단면 분포를 제시하고 있다. …… 지금까지 이 통계의 절대 수치에 대해 많은 의문을 제기하여 사용하지 않았으나, 전국적으로 동일 기준을 적용하여 동일 항목을 만들어 조사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 비교를 할 경우 아무런 문제가 없이 동질적인 정보를 구성하게 된다.

……

……세종은 15세기 이미 국가의 주요 자원에 대한 국세 조사를 실시하여 그 정보를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해 두었다. 이 중 호수戶數란 오늘날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 주택 수에 해당되는 통계이며, 16~60세 사이의 남자 인구를 파악한 것은 오늘날 경제활동인구 수에 해당될 정도로 당시 국세 조사의 과학성을 엿볼 수 있다.

15세기 당시 서울은 18,794호였고, 평양은 8,125호, 개성은 4,819호, 함흥은 3,538호였다. 반면에 전라도의 대부분 지역의 호수는 매우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왜구 침몰이 빈번한 해안가의 경우 대부분 주민들이 거주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남 · 강진 등 해안가 군현의 호수는 100~150여 호를 기록하고 있다. 반면 내륙 지역의 군현인 전주 · 나주 · 남원 등은 1300~1550여 호를 구성하고 있었다. 16~60세 경제활동인구도 호수와 마찬가지로 전라도 지역은 다른 지역과 달리 함몰된 상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전라도 지역의 경제활동인구의 함몰은 조선 전기 국가 경제의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아래 <그림5>은 전국 8도에서 전라도의 각 군현의 평균 호수 분포도를 나타낸 것으로 전라도의 호수가 전국에서 가장 낮은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전라도 각 군현은 평균 343여 호로 황해도의 979호에 비하여 약 1/3 수준인 것을 알 수 있다. 전라도의 해안 지대는 한반도 전체에서 쌀 생산이 가장 많은 곡창 지대이자 풍부한 해산물이 산출되는 지역이나, 고려 말부터 임진왜란까지 약 200여 년간 왜구의 해적 활동에 시달리면서 한반도 전체의 경제 성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지역임을 명확히 보여 준다.

 

3

15~16세기 해적 활동의 근거지 일본은 동아시아의 정상적인 경제 성장에 대내외적으로 치명적인 국가였던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해적 활동을 주요 경제 활동으로 영위해 온 일본이 16세기 유럽의 군사 신기술을 접하면서 대륙 정복 가능성이라는 환상을 자극했고 급기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미친 꿈”이 현실에서 실행 된 것이 임진왜란이라고 볼 수 있다.

……

출세실결수횡단면

<그림 8>과 <그림 9>는 군현 단위 전국 출세실결수를 마찬가지로 지도 위에 표시한 것이다. 두 그림의 비교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15세기 전라도 지역의 함몰이 18세기는 융기로 나타난다는 점이고, 조선 왕조의 조세 기반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이동된 점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 전의 출세실결수는 국가 전체적으로 북한 지역이 남한 지역에 비해 우위를 점한 반면, 임진왜란 이후에는 남한 지역이 북한 지역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매우 확연하다. 그중에서도 전라도 지역의 융기가 매우 현저하다. 수전 지역이 비교적 우세한 전라도 지역이 15세기 국가 재정에 기여하는 정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된 이유는 마찬가지로 일본에 근거지를 둔 국제 해상 왜구들 때문이다. 18세기 호남을 중심으로 국가 재정 기반이 확립되어 국가 재정을 표시하는 출세실결수의 분포가 임진왜란 이전과 북한 중심에서 이후 남한 중심으로 이전된 가장 주된 이유를 제공한다. 출세실결수의 도별 판세 분석의 결과는 이순신의 “약무호남 시무국가”를 그대로 실증하는 결과라고 주장하고 싶다.

……

 

4

<그림 10>과 <표 3>은 1500 ~ 1800년 기간 동안 영국의 인구에서 수도 런던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과 1649 ~ 1904년 동안 조선 전체의 인구에서 수도 서울의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을 제시한 것이다.

<그림 10>을 보면 수도 서울의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7세기 중반(1648) 0.06을 상회하는 수준에서 18세기 초반(1726) 0.025로 지속적인 하락을 보이는 반면, 영국 런던의 경우 1500년대 0.015 수준에서 1600년대 0.045 수준으로 집중도가 올라가고 1700년대는 0.1 수준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러한 추세 대비의 의미는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 이후 도시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향촌 사회에 많은 인구가 거주하여 사회적 이동이 일어나지 않는 반면, 영국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로 농촌에서 많은 인구가 급속히 도시로 유입된 것을 의미한다. 조선은 전형적인 농촌 중심의 중농주의가, 영국은 도시 중심의 중상주의가 진행된 것을 간접적으로 전달해 주는 수치이다.

 


17세기 대동의 길

–  한명기,문중양,염정섭 등 / 민음사 / 2014.06.27

 

1601년, 임진왜란 이후 전세 수입이 급격히 줄어든 데 대해 영의정 이항복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 이후에 팔도 전결田結이 겨우 30여 만 결인데 이는 평상시 전라도의 전결 액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항복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나기 전 평상시를 기줌으로 전라도에는 40여 만 결, 경상도에는 30여 만 결, 충청도에는 27만 결 수준의 전답이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직후 토지와 인민에 대한 국가의 장악력은 이전보다 훨씬 더 약화되었다. 어느 지역에 어느 만큼의 전답이 있고, 이를 어떤 농민이 경작하는지, 그래서 전세를 얼마나 거둬야 하는지 깜깜할 따름이었다.

……

1610년 호조판서 황신이 새롭게 양전을 실시할 것을 요청했다. 황신은 계묘양전 당시 수령과 서원들이 토지 등급을 함부로 올리거나 내리고, 결국 수치를 마음대로 늘리거나 줄이는 교활한 짓을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이런 엉터리 양전이 이루어진 결과 실제의 토지 면적을 제대로 산정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도명  임진왜란 전  1610년
 전라도  44만여 결  11만여 결
 경상도  43만여 결  7만여 결
 충청도  26만여 결  11만여 결
 황해도  11만여 결  6만 1000여 결
 강원도  2만 8000여 결  1만 1000여 결
 경기도  15만여 결  3만 9000여 결
 함경도  12만여 결  4만 7000여 결
 평안도  17만여 결  9만 4000여 결
 합계  170만 8000여 결  54만 1000여 결

– 임진왜란 전과 1610년의 토지 결수

 

황신의 글에서 전쟁 이전 팔도의 평상시 결수와 1610년 당시에 파악한 결수를 정리하면 위 표와 같다. 정말 이 표처럼 전쟁 전에 170만여 결에 이르던 농경지가 그 3분의 1 수준인 54만 결까지 줄어든 것일까? 나머지 3분의 2는 전쟁 통에 황무지로 변해버린 것일까? 그렇게 볼 수는 없다. 황신도 비록 전쟁의 참화를 입어 인민의 숫자가 줄어들었다고 해도 농경지가 이렇게나 많이 줄어들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전라도 · 충청도가 30퍼센트 정도, 피해가 컸던 경상도가 50퍼센트 정도 감소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황신이 추정한 정도의 감소는 논밭이 황폐해지고 농업 생산이 위축됨에 따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농토의 3분의 1이나 사라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토지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국가가 현재 경작되는 토지를 파악할 능력을 잃어 버린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 군현의 향리들이 경작지로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 향촌의 힘센 집안의 토지가 수취 대상에서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많다. 모든 측면에서 전후 조선의 국가 경제는 위기였다.

 


한국 근대사 산책 5

–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 2007.11.19

 

‘당파싸움 망국론’을 강하게 반반한 신복룡도 ‘일본 탓’을 하는 것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한 민족이 멸망하면서 한국처럼 무기력 했고, 침묵한 민족이 흔치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무기력’과 ‘침묵’이 과연 당파싸움과는 무관하단 말인가?

앞서 양계초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의병 봉기’를 강조했던 신복룡은 10년 후엔 “대한제국이 멸망할 당시의 5년 동안인 1907년의 정미의병에서부터 병합 1년이 되는 1911년까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무장 항전에 참여한 수효는 전체 인구의 1312만 명 중에서 14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항일 참전률은 1.1퍼센트가 된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임진왜란의 경우를 보면 그 당시의 인구는 483만 명 정도였는데, 7년 동안의 전투에 참가한 총인원은 정규군과 의병을 합쳐 17만 명 정도였으니까 이 당시의 항일 참전률은 약 3.5퍼센트가 된다. 이와 같은 통계를 고려할 때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전후의 대일 참전률이 1.1퍼센트였다면 이 정도의 항쟁으로써 민족이 살아남기를 바랐다는 것 자체가 요행을 바라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해서 한국의 대일항전은 그 강인성이나 강도의 면에서 일본의 침략성에 비해 너무 나약했다.”

 


[한국경제신문] 조선시대의 인구 -장기 변동

–  2014.05.16 –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4051670741

 

……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의 전근대 인구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비교적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인구에 대해서도 아직 정설이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조선시대에는 3년마다 매 가호에서는 『경국대전』의 규정(戶口式)에 따라서 가족과 노비를 기록한 ‘호구단자’(戶口單子)를 소속 군현의 수령에게 제출하였다.

각 군현에서는 이에 기초하여 호적대장을 3부 작성하여 한 부는 해당 군현에서 보관하고 다른 2부는 감영과 호조로 보냈는데, 이로부터 전국의 호구 총수가 집계되었다.

이 호구 총수(1393~1861)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인구는 건국이후 15세기의 빠른 증가, 임진왜란(1592~1598) 이후 감소, 전쟁이후 17세기의 급속한 증가, 18세기의 정체, 19세기의 감소라는 추세를 그리며 변동하고 있었다.

 

5

 

……

국가가 파악한 인구가 1543년 416만여명이었는데, 1639년에는 152만여명에 불과하였다. 이와 함께 임진왜란 직전에 150만결이었던 경지 면적도 전쟁 직후인 1601년에는 30만여결로 줄어들었다. 17세기에는 인구 압력이 해소되고 경제상황이 호전되어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버려졌던 경지가 다시 개간되었으며 1688년께에는 “산골짜기 사이와 바닷가의 조그만 토지도 모두 개간되어 실로 노는 땅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비변사등록 숙종 14년).

……

이와 같이 호구 총수만으로 조선시대의 인구를 파악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조선왕조가 파악한 호구는 실상과 큰 차이가 있었다. 조선왕조가 파악한 인구는 1393년 30만여명, 1519년 374만여명, 1861년 674만여명에 불과하였지만 조선왕조의 호구 총수로부터 추정한 실제 인구수는 조선왕조 건국 초에 550만명, 19세기 1800만명 정도였다(표 참고). 국가가 조사한 호구 총수는 실제 인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런 차이가 발생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호구조사가 1925년부터 실시된 인구센서스와 같이 인구 관련 정보를 파악할 목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조세 징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세를 회피할 목적으로 인구를 실상보다 적게 신고할 인센티브가 지방 군현과 민간 모두 매우 컸다.

 

6

– 조선시대의 인구와 연평균 증가율

……

1788년 발간된 『탁지지』(度支志) 서문에 당시 1000만 인구가 필요로 하는 식량(5700만석)과 소비량(6000만석)을 비교하고 식량이 부족하여 굶주릴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인구 압력이 매우 높았음은 틀림없다.

 


천붕지열의 시대 명말청초의 화북사회

–  정병철 / 전남대학교출판부 / 2008.02.20

 

…… 명조는 융경5년(1571) 몽골 오이라트부의 수장 알탄(俺答)을 순의왕(順義王)에 봉하고 강화(講和)하였다. 이로써 몽골세력은 더 이상 명조를 침공하지 않았다. 한편, 일본은 16세기 후반 100여 년의 전국시대의 혼란을 통일하고 집권적인 무사정권의 단초를 열게 되었다. 이로써 ‘가정 대왜구 嘉靖 大倭寇’의 화禍도 거의 종식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부터 동북아에는 새로운 변화가 태동하였다. 포르투갈을 필두로 한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의 해양강국이 동아시아 해역으로 진출하여 활발한 무역활동을 하면서 소위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동아시아 바다에는 이들 서구인 외에도 각종 해상세력이 번성하면서 새로운 기운이 넘쳐나게 되었으니, 왕직(王直) · 정지룡(鄭芝龍) 등 중국 동남해안을 거점으로 활동한 거대 밀무역조직, 일본 서부의 여러 대명(大名, 다이묘) 등이 그들이다.

이러한 16세기 동아시아 해상세계의 급변이라는 시운을 타고 통일정권을 창출해낸 일본은 동아시아의 신흥강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통일일본의 총아 풍신수길은 임진왜란을 도발하여 명조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정면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말 동북아에서 발발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세계의 격동의 산물이며 당시 동북아 국제관계를 반영한 국제전쟁이었다.

……

명의 임진왜란 참전은 화북민華北民에게 인적 · 물적인 부담을 가중시켜 민심의 이반을 낳았고, 그 결과 일어난 사건이 만력27년(1599)의 임청민변臨淸民變이었다. 명말 중국은 도시의 민변, 변방의 소수민족 반란뿐 아니라 유적 · 토적반란 등 각종 민중반란이 만연한 가운데, 숭정년간(1628~1644) 만주족의 수 차례의 화북침공으로 화북지방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한편 이러한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민원民怨만 가중시키는 명조에 대한 이반離叛의 기운이 광범하게 퍼졌다. 그 결과 일어난 이자성 · 장헌충 반란 등 미증유의 민중반란은 17세기 중국사회의 모순의 총집결이자 동북아세계 동요의 신호탄이었다.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은 16~17세기 동북아의 격변과 동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국제전이었다. 중국은 이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전쟁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후의 국제관계는 물론 중국 자체도 큰 영향을 겪게 되었다.

중국의 왜란 참전은 그 기간과 참가규모, 그리고 전비소모 등에서 소위 ‘만력삼대정萬歷三大征’ 중에서 영하寧夏의 보바이哱拜 반란, 사천의 양응룡楊應龍 반란 보다 비중이 훨씬 더 컸다.()  파견 병력으로 요동군은 물론이요, 산서山西 · 산시陕西의 소위 북병北兵, 강남 · 절강 등지의 남병南兵 · 절병浙兵 등이 대거 징발되었으므로 이들 지역의 인력부담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대부분 모병이었으므로 특정지역에서의 병력 징발을 꼭 그 지역의 인적 · 물적부담으로만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원병파견으로 인한 재정지출 또한 대부분 은량銀兩 행태로 이루어졌으니, 이 또한 특정지역의 부담이라기 보다는 중국 전체의 재정부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본격적인 명의 원군 파견은 서북 영하 보바이哱拜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였음을 “천하에 포고”한 12월에야 이루어졌다. 파병의 규모에 대해서는 7만이었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4만여 명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이후 임진왜란 중에 조선에 주둔한 명군의 숫자는 시기에 따라 변화가 있긴 하지만 대략 4만 ~ 7만 정도가 유지되었다. 전쟁의 소강기에 주력군이 철군한 이후에는 1만 6천 명 정도가 조선에 잔류하였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파병군 규모가 9만여 ~ 11만 명 정도였다.

 

‘만력삼대정’의 전쟁비용에 관해, 영하 보바이의 반란 진압에 100만 냥 이상, 사천 양응룡의 반란 진압에 120만여 냥, 임진 · 정유년의 두 차례의 왜란참전 비용이 590만여 냥이었다는 언급이 있다(趙世卿). 한편 위 세 전쟁의 비용으로 각기 200만 냥, 200만여 냥, 780만여 냥이 소모되었다는 지적도 있다(曺于忭).

 


<관련 그림>

 

7

– 여러 학자들의 세계인구 추정 그래프

–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소빙하기가 끝나는 18세기 근처부터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8

– 세계 인구증가율 / 출처 :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9

– 일본 경지면적 추이 (산해당)

 

 

 

10

– 중국의 인구 추이 (중국국가통계국)

 

 

11

– 이호철, 조선시대 도작농업(稻作農業)의 발전과 인구증가

 

12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4) 서울에 중인은 얼마나 살았을까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인구
Year-by-Year World Population Estimates: 10,000 B.C. to 2007 A.D.
http://en.wikipedia.org/wiki/World_population_estimates
歴史上の推定地域人口
近代以前の日本の人口統計
일본 쪽에서 본 임진왜란과 이순신
블로그 : 조선의 소빙기와 대기근 그리고 한반도의 거시적 인구규모 추계 : 자맹론의 덫에 갇힌 실제
http://blog.naver.com/pretty119/220102902506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38&pn=1&num=132859
2014-07-11  조선왕조는 세계 최대 곡물저장 국가
2015-03-11  ‘징비록’이 말하지 않은 조선의 불편한 진실

임진왜란 당시 각 나라 국력을 인구 중심으로 자료 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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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thoughts on “임진왜란 당시 각 나라 국력을 인구 중심으로 자료 수집

  • Pingback: 그림과 지도로 보는 임진왜란 (1592년~1598년) – Yellow의 블로그

  • 2018년 6월 28일 at 1:4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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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좋은 글입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을 바라볼때 특유의 감수성으로 보기 때문에 주관적 자료가 많아서 답답했는데 정말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한 글이라서 속독하였습니다. 이서야 이런 정확한 자료를 보았네요, 전부터 답답했는데 이제라도 의문점을 파악했기에 속시원하고 냉정하게 미래를 대비할 수 있겠네요. 좀더 빨리 보았으면 좋았지만…하여간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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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년 6월 28일 at 5: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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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공자의 단순 자료수집한 블로그글일 뿐입니다. ^^ 정확성을 보장할 수 없으며 새로운 자료를 찾게되면 계속 수정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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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년 6월 30일 at 12:5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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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 레퍼런스 자료를 찾고 있었는데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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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년 7월 31일 at 4:0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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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한 자료이네요. 조선시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네요. 조선은 정말로 문제가 많은 나라였네요. 임진왜란 후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건국이 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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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년 2월 23일 at 9: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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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0년경 포르투칼의 바티미아 총독은 조선정벌을 계획합니다. 이때 본국에 보고한 장계들이 지명숙 교수와 왈라벤에 의해 번역되어 출간되었지요..헤이그국립문서보관소의 기록들을 검토한 것인데, 이때 바타미아 총독은 조선은 길이가 3천길로미터의 나라라고 기록했지요..바로 바이칼호수 이북부터 남쪽으로 현 동정호 아래 소흥지역까지가 조선의 강역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지요..왜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패서성, 청서성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해석할수 있어야 정확한 역사해석이겠지요..몽고의 칸발리크는 현 자이산호의 위쪽 알타이산의 좌측에 있었다고 러시아의 고지도는 알려주고 있으며, 선비족이 수도를 러시아가 1587년 정복해 투멘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투멘을 고구려의 유리왕때 정복했던 것이고요..진실과 거짓의 역사는 명확히 구분하는 안목이 필요할 것입니다. 일제와 친일파 그리고 신중국이 확정한 역사에 매몰된다면 조상에 부끄러운 일이고 후세에 당당하지 못한 역사가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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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년 2월 23일 at 9: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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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 조선을 다녀간 외국인들이 백두산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특히 1890년경 러시아는 최대규모의 조선탐사단을 보냅니다. 이 반도가 조선이라면 그럴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백두산은 친일학자인 그린피스도 산알린이라 기록하고 1000개의 봉우리가 있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주어로 흰색은 사얀 입니다. 사얀산이 바로 백두산이겠지요. 알라바마대학교의 지리도서관에는 이 사얀산이 현 알타이산으로 표기된 지도가 있습니다. 또한 러시아의 즈베킨 탐사단의 일원이었던 미하일롭스키는 백두산에 대해 타이가지역이라고 표기했습니다. 동양쪽에서 타이가지역은 알타이산의 남쪽이 해당됩니다. 성호 이익이 압록강은 서북으로 흐른다…바로 현 오비강입니다. 박종은 당주집에서 백두산의 천지는 주전자귀처럼 생겼다고 기록했지요..구글어쓰로 알타이산 정상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윌리암 앵달은 1904년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종착점인 블라디보스톡이 현 이르크츠크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고봉, 노몬한 전투가 끝난 1940년이후 현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전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윤관의 구성, 4군6진은 바로 알타이산에서 바이칼호에 이르는 거대한 산맥..이것이 바로 백두대간으로 조선의 북방이고, 권덕규는 조선유기략에서 북륙대륙 조선이란 명칭을 목터지게 외친것입니다…..스탈린이 옮긴 조선인은 바로 현 이르크츠크 부군의 함경도 사람들이었음을 간파해 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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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년 8월 4일 at 6: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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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그게 무슨의미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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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년 9월 21일 at 11: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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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결 생산량이 3석이라고? 1결의 면적이 다양한 이유는 면적이 아니라 생산량이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여말선초 1결당 생산량을 300두(=20석)을 기준으로 세금을 매겼습니다. 조선 후기엔 농업기술의 발달로 400~600두로 증가합니다. 일부 지역은 수리시설과 이앙법의 보급으로 800두 이상인 지역도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토요토미가 파악한 조선의 미곡 생산량이 약 1200만 석이었습니다. 그나마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의 생산량이 함경도의 1/3수준으로 너무 적게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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