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산토리니(Santorini)는 에게해의 눈부신 풍경을 지닌 유럽 최고의 관광지로 꼽히는 섬이다. 옛날에는 테라(Thera)로 불렸는데, 이 섬은 기원전 1620년경에 대규모 폭발을 일으킨 화산섬이다.
– 산토리니를 대표하는 이아 마을에서 바라 본 칼데라
– 산토리니의 항공사진으로 둥근 칼데라의 흔적이 보인다.
테라 화산 폭발(Thera eruption)은 산토리니 화산 폭발(Santorini eruption) 또는 ‘Minoan eruption’라고 불린다. 이 사건으로 지금은 산토리니로 불리는 테라 섬은 물론 근처의 섬들과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인 크레타 섬의 해안도 지진이나 쓰나미로 황폐화되었다. 테라 화산 폭발과 관련한 명확한 고대 기록은 그리스, 이집트, 중국을 포함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테라 화산 폭발(Minoan eruption)은 동東 지중해 세계의 청동기 시대 연대기의 핵심 마커(marker)이다. 테라 화산 폭발은 에게 해의 기원전 2천년기의 중반의 절대연표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하는데, 그 이유는 분출의 증거가 이 지역 전체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라 화산폭발의 정확한 연대는 아직 논란 중이다.
고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연표에 테라 화산 폭발 사건을 대략 기원전 1500년에 배치했다. 흘러내린 화산의 용암 아래에 묻혀있던 올리브 가지의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은 기원전 1627년 ~ 기원전 1600년(95% 신뢰 구간) 사이의 연대를 제시하는데, 이를 포함한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은 고고학자들의 제안보다 100여 년이나 더 빠른 것으로 제안되어 두 분야의 연대가 상당 부분 일치하지 않는다.
2012년에 고고학적 연대기를 지지하던 Felix Höflmayer는 고고학적 증거가 기원전 1590년과 일치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간격을 약 50년으로 줄이기도 했다.(Höflmayer, F. 2012. “The Date of the Minoan Santorini Eruption: Quantifying the ‘Offset’.” Radiocarbon 54(3-4).Felix)
그린란드 아이스 코어에서 기원전 1642 ± 5년에 큰 화산의 분출 기록이 있어 테라 화산 폭발과의 관련성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화산재가 테라의 것과 일치하지 않으며 알래스카 Aniakchak의 분화(VEI 6)가 그 근원으로 여겨진다는 반론이 나왔다.
연령연대학(年輪年代學, dendrochronology)으로도 테라 화산 폭발 시기를 접근할 수 있는데, 연령연대학이란 나이테를 세거나 측정하고 비슷한 상황을 다른 나무들에 맞춤으로써 다소 광활한 지역에 걸쳐 연대를 설정하는 방법이다.
북미에서 정상적인 나무 성장을 방해하는 큰 사건이 기원전 1629~1628(±65)년 동안에 발생했다는 것을 나이테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기원전 1628년경의 기후 변화 사건에 대한 증거가 아일랜드의 유럽 오크나무와 스웨덴의 스코틀랜드 소나무의 성장 둔화에 관한 연구에서 발견되었고, 강털소나무(bristlecone pine)의 서리테(frost rings) 또한 기원전 1627년의 연대를 나타내었다.
테라 화산 폭발이 기원전 1620년경이라면 당시 이집트는 제2 중간기라는 혼란기였기 때문에 화산 폭발에 대한 기록이 없음을 감안할 수 있겠다.
※ 힉소스 (Hyksos) – 이집트 제2중간기 : http://yellow.kr/blog/?p=1352
화산 폭발 지수(Volcanic Explosivity Index, VEI)라는 것이 있다. 화산 자체의 크기가 아니라 폭발의 크기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구분의 기준은 화산 분출물의 양이다. 0부터 8로 구분되며, 8이 최대 규모다. VEI가 1 올라갈 때마다 분출물의 양은 대체로 10배가 된다.
인류 문명이 태동한 기원전 1만년 이후 VEI 8은 없었고 VEI 7은 10(?)번으로 보고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 정도의 폭발은 직간접적으로 인류의 문명에 크든 작든 영향을 미친다.
※ 슈퍼화산과 화산 폭발지수(VEI) 6 이상 조회 : http://yellow.kr/vei.jsp
테라의 화산 폭발은 크레타 문명(미노아 문명) 몰락의 주요 요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는 주장들이 있다.
– 중국 하 왕조의 몰락
– 모세의 이집트 탈출(출애굽)
– 사라져 버린 전설적인 섬 아틀란티스
테라 화산 폭발이 미노아 문명의 몰락을 촉발시키는데 충분한 요인인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해상 세력이었던 미노아 문명이 테라 화산 폭발로 인해 국력이 약화되고 이로인해 문명의 붕괴까지 초래되었다는 설은 아직도 격렬한 논쟁 중이다. 하지만 많은 고고학자들은 테라 화산 폭발이 미노아 문명에 위기를 초래하였고 미케네인들의 침략에 대응하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기원전 17세기 후반의 화산 폭발로 인한 화산 겨울(volcanic winter)은 일부 연구자에 의해 중국 하 왕조의 붕괴를 기록한 중국 기록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되었다. 『죽서기년』의 “노란 안개와 희미한 태양과 3개의 태양, 7월의 서리, 기근과 흉작”이라고 언급한 내용이 대략 기원전 1618년의 하 왕조의 붕괴와 상 왕조의 부상이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화산에 대한 비유로 볼 수 있는 여러가지 내용이 출애굽기에 나온다. 따라서 출애굽 전승은 테라 화산 폭발의 기억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테라 폭발의 기억은 힉소스의 축출에 관한 민중 기억과 어떤 식으로든 합쳐진 것 같다. 그렇지만 테라 화산 폭발과 힉소스 축출, 출애굽을 너무 단단히 묶여야 할 이유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일부 테라 화산 폭발과 출애굽기와의 관련성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이집트 고대 왕조에 대한 연대 추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628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 마이클 우드, 피터 퍼타도 / 박누리,김희진 역 / 마로니에북스 / 2009.08.20 (원:2008)
산토리니라고도 알려진 에게해의 자그마한 섬 테라를 덮친 화산 폭발에 대한 기록은 어떠한 문헌에도 남아 있지 않으며, 폭발이 언제 일어났는 지를 두고 과학자들의 논의는 여전히 분분하다(기원전 1650년에서 1550년 사이인데, 기원전 1620년 혹은 이보다 조금 이후라는 설이 가장 널리 통용된다). 그러나 이 폭발의 여파는 동부 지중해 연안 건너편까지 미쳤다. 이는 아마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큰 규모의 화산 폭발일 것이다.
1883년 크라카토아 폭발 때의 네 배나 되는 연기와 먼지가 발생했으며, 최대 80m 높이에 이르는 부석(斧石)이 해저를 몇 마일이나 뒤덮었다. 폭발이 불러온 거대한 지진 해일은 미노아인들이 이룩한 북부 크레타 문명을 파괴했고, 다시는 회복되지 못했다. 폭발은 또한 테라 섬에도 커다란 칼데라, 즉 화산 함몰지를 남겼으며, 아크로티리 시는 8m 높이의 잿더미 아래 파묻혔다.
이집트 쪽 기록으로 보아, 이 사건이 나일 강 유역에 심각한 영향을 주지는 않았던 듯하다. 성경에 나오는 이집트를 휩쓴 재앙이 화산 폭발의 여파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몇몇 있으나, 유대인들의 이집트 탈출은 몇 세기 이후의 일이라는 견해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기원전 1618년경 하(夏) 왕조가 멸망할 무렵 중국에서 보인 기이한 날씨 변동이 폭발과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다. 어떤 학자들은 심지어 테라를 플라톤이 ‘위대하고 훌륭한 제국’의 심장부라 묘사했던, 사라져 버린 전설적인 섬 아틀란티스와 연관 짓기까지 했다.
아크로티리에서 1967년부터 시작된 발굴 작업으로 훌륭한 프레스코화가 여럿 드러났는데, 이집트, 크레타, 레반트 인들과 무역과 문화 교류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폼페이와 달리, 이곳 주민들에게는 사전에 대피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듯하다.
불운한 하루 낮과 밤 사이에 ……
아틀란티스 섬은 …
사라졌다.
–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기원전 360년경
블랙 아테나 2
– 마틴 버낼 / 오흥식 역 / 소나무 / 2012.03.25 (원:1991)
1985년에 케빈 팽(Kevin D. Pang)과 저우홍샹(Chou Hung-hsiang)은 또 다른 논문을 발표했는데, 거기에서 그들은 이 폭발에 관한 자신들의 주장을 다시 펴면서 산토리니 폭발을 논했다. 그들은 산토리니 폭발이 하 왕조의 몰락과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거기에 여라 가지 기상학적 현상(마른 안개, 희미한 태양, 혹독하고 계절에 맞지 않는 추운 날씨, 흉작)이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한 현상은 주요한 폭발의 결과로 그럴듯하게 설명될 수 있다. 1985년의 논문에서 팽은 가뭄이 든 해에 뒤이어 이례적인 홍수의 보고를 인용함으로써 그의 명분을 강화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러한 것은 폭발로 야기되었을 것이며 상 왕조 초까지 연장되었을 것이다.
팽과 주는 이러한 기후 변화가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가에 관해 매우 부정확했는데, 왜냐하면 폭발의 연대와 하 왕조의 몰락 연대가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테라 폭발을 기원전 1400년과 1600년 사이에 두었고, 왕조의 교체를 기원전 16세기에 두었다. 그들이 설정한 테라 폭발의 연대는 전통적인 연대인 기원전 1450년 및 1500년과, 그들이 알고 있었던 수령연대학(年輪年代學, dendrochronology)적 증거가 말하는 기원전 1628년 사이의 타협이었다. 중국 왕조 교체에 관한 전통적 연대기에 따르면 상 왕조의 시작은 기원전 1785년과 1557년인데, 그들은 두 가지 전통적인 연도가 허용하는 법위에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초기 상商 지층에서 얻은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결과(기원전 16세기 초)로 뒷받침되었다.
그런데 이후 팽은 왕조 교체가 기원전 1600년경에 있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테라에 관한 의견의 변동 때문이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상 왕조의 끝이 기원전 1100년경이었다는 그의 점증하는 확신에서 왔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근거한 계산에 따르면, 상 왕조는 471년간 지속되었는데, 이는 상 왕조의 건립 연도를 기원전 16세기 초에 두게 한다. 『죽서기년』에 근거한 연대기는 상 왕조의 지속 기간을 508년으로 보는데, 이는 맹자(기원전 4세기)가 제안한 ‘500여’ 년과 잘 맞는다. 이에 따르면 하의 몰락은 기원전 1600년경이 되는 셈이다. 팽의 ‘세대에 근거한 계산’도 동일한 결과를 산출했다. 만약 주에 의한 상의 정복 연도를 천문학적으로 이끌어낸 기원전 1117년으로 받아들이고 508년을 계산하면 하의 몰락은 기원전 1625년이 된다. 이 연도는 개정된 테라 폭발의 연도인 기원전 1628년과 거의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세계사를 바꾼 화산 탐보라
– 길런 다시 우드 / 류형식 역 / 소와당 / 2017.04.25
몇 년째 탐보라를 연구하면서 필자는 탐보라와 다른 화산들을 비교해보았다. 특히 필자의 주의를 끈 화산은 폼페이를 파괴한 베수비오 화산도, 소빙하기를 초래한 것으로 유명한 1258년 미지의 화산도, 빅토리아 시대 화산의 영웅 크라카타우 화산도 아니었다. 그 대신 역사의 DNA에 훨씬 깊숙이 박혀 있는 전설적인 화산들을 생각했다. 미노아 문명의 몰락, 아틀란티스 전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탈출 등과 관련이 있는 기원전 1628년의 에게 해 산토리니 화산도 그중 하나이다.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기는 하지만, 탐보라 이야기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와 비슷할 것이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1815년 탐보라의 사례를, 약 3,500년 전의 산토리니 화산 폭발처럼,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전 세계 인간 사회 및 토템의 변화를 초래한 세계사적인 사건으로 취급할 것이다.
이야기로 떠나는 지구기행
– 문희수 / 연세대학교출판부 / 2006.08.17
크레타섬에서 떨어져 있는 키클라데스제도 최남단에는산토리니(과거에는 테라라고 불리었음)라고 하는 작은 섬이 있었는데, 이 섬에서도 문화가 번성하였으며 큰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섬에서도 문화가 번성하였으며 큰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섬에서 기원전 1600년경(최근 학자들에 의하여 가장 정확하게 추정된 분출 시기) 후기 청동기시대에 대규모의 화산 폭발이 일어났는데, 이 분출을 테라분출이라고 한다. 그 규모는 섬의 많은 부분을 사라지게 한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에는 산토리니가 폭발 이전의 섬 모양이 원형으로 가정하여 반 이상이 사라졌다고 하였으나 최근 지질학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분출하기 전 섬의 형태가 지금과 유사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폭발로 그 섬의 많은 부분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후세의 지질학자들은 앞서 설명한 크라카토화산보다 더 강력한 폭발이었다는 것을 밝혔다. 폭발할 때 만들어진 분화구는 오늘날 이 섬의 만(灣)을 이루고 있는 부분이다. 그리스 고고학자 마리나토스는 엄청난 엄청난 규모의 산토리니섬의 화산 폭발 시 일어난 강력한 지진과 해일이 크레타섬에도 피해를 줘 미노스 문명의 종말을 가져왔다고 주장하였다. 최근에 리처드 포티란 고생물학자 역시 이러한 가설을 화산 폭발과 연관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고고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의 연구 결과 미노스문명은 화산이 폭발되면서 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며, 지진과 해일에 의한 피해에 의하여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분출시 발생된 화산재는 에게해 미노스 문명권의 거의 모든 것을 덮어버려 황폐화시켰다. 그 결과로 국력의 대부분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 곳에서 사람들이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는데 100여 년이 걸렸다고 믿고 있다. 이런 사실은 추정이 아니라 지질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이 화산의 첫 번째 주요한 폭발에서 분출된 부석질 화산회는 산토리니섬에서는 최대 6m의 두께로 쌓였다. 이 부석질 지층의 바닥에서는 불에 탄 나무의 줄기나 뿌리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폭발에 의하여 하늘로 올라간 화산회가 지상으로 떨어져 퇴적될 당시에도 상당한 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불에 탄 식물들로부터 구한 탄소 동위원소는 기원전 1600~1700년의 년대를 보여준다. 당시에 분출된 화산회는 동부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서도 발견되며, 지중해 바닥에서 채취된 시료들로부터도 역시 확인된다. 이 정도만 해도 배를 이용하여 피신하지 않았다면 이 작은 섬에서 살아남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분출에 의하여 해수가 분화구로 유입되면서 두 번째, 세 번째 분출은 더욱 격렬한 폭발성으로 변화되어 수m 크기의 암석 덩어리를 첫 번째 분출한 부석질 퇴적층 위에 쌓아 놓았다. 이 정도라면 산토리니는 끝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거리가 좀 떨어진 크레타 섬에서는 이보다는 덜했지만 그 파괴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정도의 자료라면 미노스 문명이 사라진 직접적인 원인이 화산 분출이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비록 화산 분출은 산토리니섬은 물론 크레타섬에 번성하던 미노스문명을 사라지게 했지만, 3천5백여 년이 지난 오늘 지중해의 관광명소로 만든 것은 순기능이라면 순기능이다. 그 때 만들어진 해안 절벽 위에 들어선 마을, 흰색의 집과 에게해의 푸른 바다가 만드는 조화는 꿈에서나 그려 볼 수 있는 경관이 되었다.
세계 역사의 미스터리(상)
– 양지에 / 문소라 역 / 북공간 / 2007.11.30
1820년대의 알렌과 1830년대의 칼은 크레타 문명과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미케네 문명에 관한 증거를 발견해 미케네 문명이 크레타 문명에서 완전히 독립되어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기원전 1500년 이후 미케네인이 크레타인을 정복하고 크노소스(Knossos)를 통치하면서 미케네 문명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통해 볼 때, 테세우스의 전설이 어느 정도 역사적 근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아테네인들도 그리스 민족의 하나였기 때문에 테세우스의 승리는 전쟁에서 미케네가 크레타를 무찔렀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떻게 미케네인이 크레타인을 통치하게 되었을까? 우선 자연재해로 인해 크레타의 국력이 약해져 미케네인이 쉽게 공격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이 자연재해란 아마도 테라 섬의 화산 폭발을 이야기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화산 폭발은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며 해일도 함께 일어나 크레타를 멸망시켰다는 것인데, 지진과 해일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에 굴복한 크레타인이 미케네인에게 문을 열어주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렇지만 크레타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들을 살펴볼 때, 화산재나 홍수가 아닌 화재 때문에 대다수 건물들이 소멸되었다는 추측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부 과학자들은 테라 섬의 화산 폭발로 크레타 문명이 쇠퇴했을 것이라는 관점을 부정한다. 그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세우스 이야기가 상징하는 바는 그리스인의 상징인 테세우스가 크레타인의 상징인 반인반수 괴물을 죽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워낙 오래된 일인데다 남아 있는 역사적 자료도 충분하지 않아 명확한 답을 구하려면 더 많은 연구와 발견이 필요할 것이다.
지오그래피
– 케네스 C. 데이비스 / 이희재 역 / 푸른숲 / 2003.06.27 (원:1992)
그러나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의 전설은 에게 해의 크레타 섬에서 북쪽으로 약 113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던 테라 섬(산토리니 섬)의 재난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지리학과 고고학의 기록을 보면 기원전 165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산토리니 화산이 폭발하여 테라 섬 전역을 쑥밭으로 만들고 물이 괸 거대한 칼데라(대야 모양의 거대한 분화구로 대부분 화산이 내려앉을 때 생겨나는데 위에는 물이 괸다)의 한쪽 면에 작은 바위의 테두리를 남겨놓았다.
당시 크레타 섬에 살았으며 전설적인 미노스 왕으로 널리 알려진 미노아 문명이 멸망한 것은 화산 분출과 그에 뒤따른 해일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미노아인은 고대의 여러 민족 가운데 가장 부유했으며 막강한 군사력과 선진 문물을 보유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아틀란티스 섬의 거주자들에 대해 플라톤이 달았던 설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노아인은 황소를 숭배하는 복잡한 종교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황소 머리에 사람의 몸집을 가진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해 미노스 왕이 만들도록 명령했다는 미궁(迷宮)의 전설도 이 종교의식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기원전 1400년 이후로 미노아 문명은 기록에서 사라진다. 산토리니의 화산 폭발을 시발점으로 미노아 문명이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각에서는 엇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구약성서』「출애굽기」에 기술된 이집트의 대재앙을 몰고 왔으며 이어서 갈대바다-우리는 오래 전부터 홍해로 배워왔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를 가른 모세의 기적을 가능케 한 자연 현상은 바로 산토리니의 화산 폭발이라는 설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이론은 논란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지만 테라 섬의 화산 폭발로 생긴 화산재와 해일을 가지고 「출애굽기」에 묘사된 자연 현상의 일부를 설명한다는 것은 퍽 재미난 발상 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유대인의 이집트 탈출이 일어난 시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출애굽 사건은 기원전 13세기에 일어났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화산 폭발은 기원전 16세기에 일어났을 개연성이 높다.
고고학의 즐거움
– 이바르 리스너 / 최영인,이승구 역 / 살림 / 2008.09.24
크레타에서 북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고대에 ‘테라’라고 불렸고 중세에는 수호천사 산타 이리니의 이름을 따서 ‘산토리니’라고 불리는 작은 말굽 모양의 섬이 있다. 그러나 기원전 2000년 중반에 일어난 무시무시한 화산폭발로 이 섬의 모든 생명은 전멸했다. 그리스의 지질학자 마리나토스는 크노소스의 토기, 프레스코 기법, 그리고 궁전안의 거울에 각인된 자국들을 통해 재앙의 시기를 기원전 1550 ~ 기원전 1500년으로 추정했다. 테라 섬 엘리아스 산맥의 산중턱에는 화산폭발로 인해 부석층이 쌓였는데, 부분적으로는 60미터에 이를 정도로 두껍게 쌓이기도 했다. 남해안의 작은 테라지아 섬의 부석층 밑에는 기원전 1800 ~ 기원전 1500년의 미노스 주택지 잔해들이 발견되었다. 끔찍한 화산폭발 때문에 화구가 무너지고 바닷물이 분화구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러나 그리스의 지질학자 마리나토스는 화산폭발이 거대한 파도를 일으켜서 크레타의 해안을 파괴시켰다고 추측했다. 마리나토스는 테라 섬의 화산폭발이 3만6000명이 사망했던 1887년 인도네시아의 크라카타우 폭발보다 4배는 더 심했다고 추측했다. “테라 섬에서는 83제곱킬로미터가 폭발하고 가라앉았는데, 크라카타우에서는 23제곱킬로미터였다.”
그 당시에는 2차 건축시기에 크레타 내륙인 크노소스, 파이스토스, 하기아 트리아다, 티리소스와 스클라보캄포스에 건설된 궁전들도 파괴되었다. 마리나토스에 의하면 이 장소들은 해일이 직접적으로 덮칠 수는 없는 곳들이었다. 그러나 테라 섬에서 화산이 폭발하면서 대규모의 지진이 발생하여 크레타의 건축물들을 붕괴시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당시 크레타는 서너 차례 심한 지진의 공격을 받았다.
세 번째 가설은 아르카이크 그리스인들에 의한 공격, 즉 인간에 의한 파괴와 화재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파괴 후에도 아직 많은 것들이 남아 있어 100년 정도는 섬 위에 풍요로운 삶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400년쯤에는 건축물, 창조력, 예술은 점점 쇠퇴하여 결국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
옥스퍼드 트리니티 칼리지의 J. V. 루스 교수는 학술 저서에서 아틀란티스가 미노스의 크레타 섬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했다. 아틀란티스의 침몰은 테라 화산의 폭발, 지진 그리고 해일로 인한 크레타 섬의 파괴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루스는 특히 테라에 있는 마리나토스의 발굴과 발굴품으로 얻었던 새로운 결과들에 의존했다. 마찬가지로 1909년부터 벨파스트의 젊은 학자가 아틀란티스가 미노스의 크레타 섬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크레타의 통치자와 미노스의 문화는 기원전 1500년 자연재해로 인해 파괴되었고,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레타와 그 동화와 같은 문화가 아틀란티스였다는 주장에는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
<관련 그림>
– 산토리니 섬에서 이집트를 포함한 주요 지역까지의 거리
– 테라 화산 폭발때의 화산재 피해 범위
– 테라 화산 폭발 이전의 산토리니 섬의 형태에 대한 모델.
과거에는 산토리니가 폭발 이전의 섬 모양이 원형으로 가정하여 반 이상이 사라졌다고 하였으나 지질학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분출하기 전 섬의 형태가 지금과 유사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기원전 1620년경의 폭발 이전의 폭발로 이미 칼데라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 테라 섬의 미노아인 정착지 아크로티리(Akrotiri)에서의 발굴 모습
– 아크로티리의 프레스코화, ship procession or flotilla
– 위 그림의 왼쪽 확대
– 아크로티리의 프레스코화, 권투하는 소년들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Minoan_eruption
https://en.wikipedia.org/wiki/Volcanic_Explosivity_Index
2012-03-14 “그리스 산토리니 화산, 폭발 가능성” 경고
2012-02-02 `슈퍼 화산 폭발, 수십년 전 예측 가능
2011-06-08 고고학·과학·지질학·역사로 풀어낸 출애굽기 이집트의 10가지 대재앙
2010-05-12 ‘크레타문명’ 멸망 부른 화산 폭발
2009-10-10 <과학> 아틀란티스 전설, 쓰나미에서 온듯
2008-02-24 How The Eruption of Thera Changed the World
2007-04-23 “3500년 전 유럽 고대 문명, 초대형 쓰나미가 삼켰다”
2006-04-28 <과학> 올리브 나무가 유럽 문명사 다시 쓴다
1996-06-27 Anatolian tree rings and the absolute chronology of the eastern Mediterranean,2220-718 BC
1987년 The Minoan eruption of Santorini in Greece dated to 1645 BC?
https://www.volcanodiscovery.com/santorini/minoan-eruption/siz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