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교과서나 백과사전 등을 보면 551년의 백제 한강유역 재점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538년 사비로의 천도 후 백제 성왕은 한강 유역 회복작전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자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신라·가야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대외적으로는 서북으로부터 돌궐(突厥)의 남하에 따른 압력을 받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외척들이 싸움을 벌이는 등 내분에 처해 있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신라·가야군과 연합한 백제군은 551년에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여 마침내 백제는 한강 하류를 차지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성왕(聖王, 490년경? ~ 554년, 재위: 523년 ~ 554년 음력 12월)은 백제의 제26대 국왕이며, 성은 부여(扶餘), 이름은 명농(明襛)이고, 중국 측 기록인 양서(梁書)에는 이름이 명(明)으로 기록되었다. 무령왕의 아들로 결단성이 있고 지혜와 식견이 빼어났다. 무령왕이 죽자 왕위를 이은 명농을 백성들은 성명왕이라 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성명왕(聖明王) 또는 명왕(明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475년 장수왕이 한성을 공략한 후 한강유역의 주인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551년 백제 성왕이 한강유역을 되찾는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한성 수복 관련기사는 백제본기에서는 보이지 않고, 고구려본기와 신라본기에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다.
4세기 후반부터 삼국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4세기 후반 ~ 433년 : 고구려 + 신라 ↔ 백제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후견기)
– 433 ~ 551년 : 백제 + 신라 ↔ 고구려 (나제동맹기, 성립을 455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553년 : 신라 + 고구려 ↔ 백제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
– 554년 이후 : 고구려 + 백제 ↔ 신라 (이후 동아시아 국제전쟁과 삼국통일)
그리고 당시의 대외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혼란과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왜의 충돌은 무관하지 않다.
– 534년 북위의 분열
– 548년 남조의 양, 후경의 반란
– 550년 북제의 성립
– 551년 남조의 양, 후경이 황제에 오르지만 552년에 전투 중 사망
– 551년 돌궐의 독립
– 556년 북주의 성립
* 옐로우의 세계사 연대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550
※ 관련글
–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다 – 553년 : http://yellow.kr/blog/?p=2400
– 관산성 전투, 백제 성왕의 전사 – 554년 : http://yellow.kr/blog/?p=2414
– 535 – 536년의 극단적인 기후 사건 : http://yellow.kr/blog/?p=1436
그 당시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 보았다. 아래에 언급한 『일본서기』는 720년에 완성되었으며 <동북아 역사재단>의 번역본을 참조하였고, 삼국사기는 1145년에 완성되었으며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를 참조하였다.
548년
※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진흥왕
9년(서기 548) 봄 2월, 고구려가 예인(穢人)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청하였다. 임금은 장군 주령(朱玲)을 보내었다. 주령은 굳센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九年 春二月 高句麗與穢人攻百濟獨山城 百濟請救 王遣將軍朱玲 領勁卒三千擊之 殺獲甚衆
※ 삼국사기 제19권 고구려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十九 高句麗本紀 第七) – 양원왕
4년(서기 548) 봄 정월, 예(濊)의 병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주진(朱珍)이 와서 백제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가을 9월, 환도(丸都)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동위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四年 春正月 以濊兵六千 攻百濟獨山城 新羅將軍朱珍來援 故不克而退 秋九月 丸都進嘉禾 遣使入東魏朝貢
◎ 한강 북쪽의 독산성(漢北獨山城)이라는 말은 551년 한강 유역의 회복이라는 사실과 맞지않다. 백제본기가 전하는 475~551년 사이의 영역 관련기사는 그대로 신뢰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 독산성의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으나 충주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16412&cid=4395&categoryId=4395
– http://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326502
※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 성왕
26년(서기 548) 봄 정월, 고구려왕 평성(平成, 양원왕)이 예(濊)와 공모하여 한수 이북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해오자, 임금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朱珍)을 시켜 갑옷을 입은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출발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병사들과 일전을 벌여 크게 이겼다.
二十六年 春正月 高句麗王平成與濊謀 攻漢北獨山城 王遣使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朱珍 領甲卒三千 發之 朱珍日夜兼程 至獨山城下 與麗兵一戰 大破之
◎ 독산성 전투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53845&cid=4395&categoryId=4395
생포된 병사들이 이번 침공은 백제를 공격해 달라는 안라와 일본부의 부탁을 받고 감행했다는 사실을 털어 놓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550년
※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진흥왕
11년(서기 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어 공격하게 했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천 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十一年 春正月 百濟拔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伊飡異斯夫出兵擊之 取二城增築 留甲士一千戍之
◎ 도살성은 충북 괴산군 도안면(민덕식), 충남 아산(이병도)
◎ 금현성은 현재의 충북 진천군 진천읍으로 비정하는 견해와 충남 연기군 전의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http://www.mediapen.com/news/view/289863
※ 삼국사기 제19권 고구려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十九 高句麗本紀 第七) – 양원왕
6년(서기 550) 봄 정월, 백제가 침입하여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이 기회를 틈타 두 성을 빼앗았다.
여름 6월,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북제가 임금을 사지절시중표기대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책봉하였다.
六年 春正月 百濟來侵 陷道薩城 三月 攻百濟金峴城 新羅人乘間取二城 夏六月 遣使入北齊朝貢 秋九月 北齊封王 爲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 성왕
28년(서기 550) 봄 정월, 임금이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게 하여 빼앗았다.
3월, 고구려 병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다.
二十八年 春正月 王遣將軍達己 領兵一萬 攻取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兵圍金峴城
551년
※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진흥왕
12년(서기 551) 봄 정월,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
3월, 임금이 지방을 돌아보다가 낭성(娘城)에 묵으며,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특별히 불렀다. 임금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기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 가실왕(嘉悉王)이 열두 달의 음률을 본떠 십이현금(十二弦琴)을 만들고, 우륵에게 명하여 악곡을 만들게 했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순하였기에,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加耶琴)이라 하였다.
임금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는데, 승세를 타고 10개 군을 취했다.
十二年 春正月 改元開國 三月 王巡守次娘城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 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 先是 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 以象十二月之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國亂 操樂器投我 其樂名加耶琴 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
※ 삼국사기 제19권 고구려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十九 高句麗本紀 第七) – 양원왕
7년(서기 551) 여름 5월, 북제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돌궐(突厥)이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임금이 장군 고흘(高紇)에게 병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신라가 침공하여 10개의 군을 빼앗았다.
七年 夏五月 遣使入北齊朝貢 秋九月 突厥來圍新城 不克 移攻白巖城 王遣將軍高紇 領兵一萬 拒克之 殺獲一千餘級 新羅來攻 取十郡
◎ 고구려는 유연이라는 우방을 잃고 돌궐이라는 강적을 만났다.
◎ 돌궐이 551년에 고구려와 전쟁을 한 것에 대해 의문이 있다. 돌궐은 552년에 유연을 격파한다.
※ 삼국사기 제44권 열전 제4(三國史記 卷第四十四 列傳 第四) – 거칠부
진흥대왕(眞興大王) 6년(서기 554) 을축에 그는 왕명을 받들어 여러 문사(文士)들을 소집하여 신라의 국사를 편찬하였고, 벼슬이 파진찬으로 올라갔다.
진흥왕 12년(서기 560)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ㆍ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을 시켜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이때 혜량법사가 무리를 이끌고 길가에 나와 있었다.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로써 인사하고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옛날 유학할 때 법사님의 은혜를 입어 목숨을 보전하였는데, 지금 뜻밖에 만나게 되니 어떻게 보답하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머지않았으니, 귀국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라오.”이에 거칠부가 같이 수레에 타고 돌아와서 왕에게 배알시켰다. 왕이 그를 승통(僧統, 승려의 가장 높은 지위)으로 삼고 처음으로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법회(八關法會)를 열었다.
(眞智王) 원년(서기 576) 병신에 거칠부가 상대등이 되어 군국사무를 자임(自任)하다가 늙어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78세였다진지왕.
眞興大王六年乙丑 承朝旨 集諸文士 修撰國史 加官波珍飡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飡比台角飡耽知迊飡非西迊飡奴夫波珍飡西力夫波珍飡比次夫大阿飡未珍夫阿飡等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 乘勝取竹嶺以外 高峴以內十郡 至是 惠亮法師 領其徒 出路上 居柒夫下馬 以軍禮揖拜 進曰 昔 遊學之日 蒙法師之恩 得保性命 今 邂逅相遇 不知何以爲報 對曰 今 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 於是 居柒夫同載以歸 見之於王 王以爲僧統 始置百座講會及八關之法 眞智王元年丙申 居柒夫爲上大等 以軍國事務自任 至老終於家 享年七十八
◎ 위에서 말한 평양(平壤)은 남평양(南平壤)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있다. 남평양은 위례성의 다른 이름, 경기도 양주, 황해도 재령 등 다양한 주장이 있다.
※ 일본서기 권 제19 / 흠명천황(킨메이 천황) 12년
12년 봄 3월에 보리 씨앗 1천 곡(斛)을 백제왕에 주었다.
이 해에 백제 성명왕이 친히 백제의 군사[衆]와 두 나라[두 나라는 신라와 임나를 말한다.]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서 한성(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한 진군하여 평양(平壤)을 쳤다. 모두 6군(郡)의 땅은 고지를 회복한 것이다.
◎ 1斛은 10斗이다.
※ 일본서기 권 제19 / 흠명천황(킨메이 천황) 23년(562년)
8월에 천황이 대장군 대반련협수언(大伴連狹手彦 ; 오호토모노무라지사데히코)을 파견하여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협수언은 백제의 계책을 써서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그 왕은 담을 넘어 도망하였다. 협수언은 드디어 승세를 타고 왕궁으로 들어가 갖가지 진귀한 보물, 칠직장(七織帳), 철옥(鐵屋)을 모두 빼앗아 돌아왔다[옛 책(舊本)에는 철옥은 고구려 서쪽의 높은 누각 위에 있었으며, 직장은 고구려왕의 내전 침실에 쳐 있었다고 한다.]. 칠직장은 천황에게 바치고 갑옷 두 벌, 금으로 장식한 칼 두 자루, 구리종 세 개, 오색 번(五色幡) 두 간(竿), 미녀 원(媛)[원은 이름이다]과 그의 시녀 오전자(吾田子)는 소아도목숙녜(蘇我稻目宿禰) 대신(大臣)에게 보냈다. 이때 대신은 두 여자를 처로 삼고 경(輕 ; 카루)의 곡전(曲殿)에 살도록 하였다[철옥은 장안사(長安寺)에 있다. 이 절이 어느 국(國)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책(一本)에서는 “11년에 대반협수언련이 백제국과 함께 고구려와 양향(陽香)을 비진류도(比津留都)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흠명천황 23년은 562년이고, 어떤 책(一本)에서 말한 흠명천황 11년은 550년이다.
삼국사기에는 562년을 전후로 하여 고구려에 어떠한 왜군의 공격도 없다. 더구나 백제군이 신라나 고구려를 성공적으로 공격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562년의 기록이 아니라 550년 전후의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진위여부나 과장되었는 지는 논란이다.
고구려의 상황
–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고구려 중에서
6세기가 진전되면서 고구려는 정치적 안정이 흔들리고, 귀족들 간의 갈등이 격화되는 모습을 나타냈다. 531년 안장왕(安藏王)이 피살되고 그 동생인 안원왕(安原王)이 즉위하였다. 귀족 간의 갈등은 안원왕 대에도 지속되었다. 안원왕 말년인 544년 12월 마침내 그것은 대규모 정란(政亂)으로 분출되었다. 안원왕은 세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첫째 왕비는 소생이 없었고, 둘째 왕비와 셋째 왕비가 각각 아들을 두었다. 당시 귀족들이 각각 이 두 왕자를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하여, 이를 추군(麤群)과 세군(細群)으로 불리웠다. 왕의 병이 위중해지자, 추군과 세군은 서로 먼저 왕궁을 장악하여 우세한 지위를 선점하려 하였다. 마침내 양측 간의 무력충돌이 궁문 앞에서 벌어졌다. 이후 3일간 수도에서 양측 간의 격렬한 대결이 벌어졌고, 추군이 승리하여 정국을 장악하였는데, 이듬해 초 8세의 어린 왕자가 즉위하니, 이가 양원왕(陽原王)이다. 패배한 세군 측의 피살자가 2천여 명에 달하였다. 수도에서의 전투는 일단락되었지만, 분쟁은 여파는 지방 각지에서 이어졌다. 그래서 551년 당시 한강 상류의, 아마도 충주지역의 사찰에 머물고 있던 승려 혜량(惠亮)이 진격해온 신라군에 투항하면서 “우리나라는 정란으로 언제 망할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던 것은 그런 측면을 잘 말해준다.
이렇게 고구려 내정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백제와 신라가 551년 북진을 단행하였다. 백제는 한강 하류 6개 군을 차지하였으며 신라는 한강 상류 10개 군을 공취하였다.
그런데 이무렵 고구려는 서북방면에서부터 또 다른 위협에 직면하였다.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가 552년과 553년에 걸쳐 요하 상류 지역의 해(奚)와 거란에 대한 대규모 토벌전을 전개하고, 창려성을 직접 순시하여 요하 선을 압박하였다. 이와 함께 552년에는 외교적 압박을 가해 북위 말기인 520년대에 고구려로 넘어온 북위 유민(流民) 5천 호를 다시 쇄환해갔다. 거란의 일부를 휘하에 두고 있던 고구려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한편 이 시기 몽골고원에서 새로운 변동이 일어났다. 그간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에 있던 유연이 멸망하였다. 유연의 피복속민으로서 야철업(冶鐵業)에 종사하며 알타이 산맥 서남록 준가르 초원에서 세력을 키워왔던 돌궐(突闕)이 흥기하여, 552년 옛 상전국인 유연을 격파하였다. 이 활기찬 신흥 유목제국은 조만간 흥안령을 넘어 요하 유역으로 그 세력을 확대할 기세였다. 초원에서의 세력교체에 따른 파장은 급속히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신흥 돌궐의 영향력이 고구려 휘하의 거란과 말갈에 뻗쳐오고 나아가 고구려 본토에까지 밀려들어 온다면 심각한 위기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게 된 바이다.
550년대 초에 진행된 이러한 일련의 내우외환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 귀족들은 방안을 모색하였다. 먼저 귀족들 간의 내홍을 중단하고 그들 간의 갈들을 수습하기 위해 실권자의 직인 대대로(大對盧)를 귀족들 간에서 선임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리고 방어력이 크게 강화된 평산성(平山城) 형태의 새로운 수도 건설을 제기하였다. 기존의 궁성은 동평양(東平壤)의 안학궁(安鶴宮)터 자리에 있었고, 궁성 외곽에 시가지가 조영되어 있었다. 새로운 수도는 지금의 평양 중심부에 위치하며 궁성과 시가지 전체를 나성(羅城)으로 둘러싸는 그러한 형태였다. 실제 신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으로 천도가 이루어진 것은 30여 년이 흐른 뒤인 586년이었다.
한국 고대사 1
– 송호정, 여호규, 임기환, 김창석, 김종복 / 푸른역사 / 2016.11.15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해 군사 동맹을 결성한 중부 지역과 정반대로, 남부 지역에서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분할하며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 갔던 것이다. 그렇지만 가야의 여러 나라는 백제와 신라의 분할 점령을 저지할 만한 충분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가령 백제의 군사적 위협에 시달리던 탁순국은 538년 신라에 투항하는 길을 선택했다. 또한 나머지 가야의 나라들은 541년과 544년 백제에 의탁해 신라의 진격을 막으려 시도했지만, 오히려 백제의 부용국으로 전락했다. 결국 집권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연맹체 단계에 머물렀던 가야는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삼국의 치열한 각축전 속에서 소멸의 위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551년, 백제의 성왕聖王과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백제와 가야의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한성을 공파하여 한강 하류의 6군을 차지했고, 신라군은 죽령을 넘어 고현高峴까지 진출하여 한강 상류의 10군을 확보했다. 이때 빼앗은 6군과 10군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6군은 지금의 천안에서 임진강 이남 지역으로, 10군은 지금의 충주 · 제천에서 철원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즉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한강 유역 전체를 변변한 저항도 없이 무기력하게 잃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고구려 안팎의 어려운 상황 때문이었다. 우선 내부적으로 왕위 계승전이 이어지고 귀족 세력 간의 분열이 거듭되면서 정국이 불안정했다. 여기에 요동 지역에서 돌궐의 동진으로 대외적 위기가 겹치면서 남변南邊의 방어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백제 · 신라 연합군의 한강 유역 공격은 고구려가 처한 국내외적 정세를 잘 파악하여 적절한 기회를 포착한 군사 행동이었다. 반대로 고구려는 왕위 계승전을 비롯한 중앙 정계에서 벌어진 분란으로 한강 유역의 상실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5세기 후반~6세기 중엽 高句麗와 百濟의 국경 변천
– 여호규 / 학술논문 : 백제문화 2013 48권, 48호 / 공주대학교백제문화연구소 2013년
본고는 5세기 후반∼6세기 중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을 고찰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475∼551년에 마치 백제가 한강유역을 영유한 것처럼 기술한 사료가 많이 나오지만, 이들은 대부분 475년 이전 기사와 지명뿐 아니라 표현방식도 유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 사료를 제외하고 475∼550년대 양국의 각축전과 관련된 사료를 검토한 결과, 양국은 대체로 차령산맥 북방의 천안-아산 일대 및 금강 지류인 미호천 유역에서 접경하였던 것으로 확인하였다. 한편 551년 나제연합군이 한강유역을 점령한 이후, 고구려가 곧바로 퇴각했다고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여러 사료를 검토한 결과, 고구려가 552년 신라와의 밀약을 통해 나제연합군의 북상을 저지한 다음, 오히려 신라와 합세하여 백제에 대한 역공에 나섰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서해안을 따라 안성천 일대까지 진격했지만, 백제군에 의해 저지당하였다. 이로 인해 고구려와 백제는 더 이상 국경을 접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475년 이후 551년까지 고구려와 백제는 차령산맥 북방과 금강 지류인 미호천 일대에서 대치하며 국경을 접했다고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475∼550년 백제의 한강유역 영유기사는 실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고 보기 어렵다.
고구려의 한강유역 지배방식에 대한 검토
– 양시은 / 학술논문 : 고고학 2010 9권, 1호 / 중부고고학회 2010년
475년 고구려는 당시 백제의 도성이었던 한성을 점령하고 이후 남진하여 금강유역까지 진출하였다. 551년 신로아 백제의 연합군이 북상하자 고구려는 한강 유역에서 후퇴하였다. 고구려가 한강 이남으로의 남진한 시기 내지는 점유 방식 등과 관련하여 학계에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그렇지만 최근 한강 이남 지역에서 고구려 고분과 생활 유구 등 여러 고구려 유적들이 조사되기 시작하면서, 475년부터 551년까지 약 80년간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거의 줄곧 점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구려는 풍납토성을 점령한 뒤 몽촌토성에 남진을 위한 사령부를 축조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한강 이북의 아치산 보루군에서 출토되는 것들보다 시기가 이른 5세기 중후반에 해당된다. 또한 몽촌토성 내에서 확인되는 유구의 축조 방식이나 고구려 고분에서 주로 확인되는 의례용 용기인 사이장경옹의 출토, 과거 백제의 도성이었다는 점 등은 몽촌토성이 고구려 군의 남진사령부로서의 기능하였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또한 최근 판교, 용인, 청계, 충주 등 한강 이남에서 확인되고 있는 5세기 중후반대 고구려 고분군들은 고구려가 당시 한강 유역을 안정적으로 점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역 지배를 실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다만 금강 유역의 경우에는 유적 분포 양상과 역사적인 상황들을 감안해볼 때 영역지배보다는 거점지배와 같은 군사적 점유의 성격이 보다 강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6세기가 되면 백제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남쪽 전선이 불안정해지면서 몽촌토성 내 고구려 유적의 기능이 상실되게 되고 이후에는 아차산 보루군이 한강 유역 지배와 관련된 중심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아차산 보루군은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시루봉 등의 각 봉우리에 성을 축조하여 보루가 여러 개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들 보루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아차산 보루군 자체가 마치 하나의 중대형 성처럼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아차산 보루군의 중심은 기와 건물지가 축조된 홍련봉 1보루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명문토기 등 주변 유적에서 확인된 여러 유물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고구려는 475년부터 551년까지 한강유역을 안정적으로 점유 및 지배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5세기 중엽에는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한강유역 전역을, 6세기에는 아차산 보루군 자체가 중심이 되어 한강 이북을 경영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475~551년 한강 유역 영역변천사 연구동향
– 장창은 / 학술논문 : 역사와교육 2015 20권, 20호 / 역사교과서연구소 2015년
한국 고대사에서 한강 유역의 영유권은 475년까지는 백제, 475~551년까지는 고구려, 551년 이후는 신라가 차지했었다는 것이 광복 이후 학계의 통설이었다. 통설은 475년 9월 고구려가 백제 漢城을 차지한 후 백제가 수도를 웅진[충남 공주시]으로 천도했고, 日本書紀 欽明天皇 12年(551)조의 ‘백제 성왕이 고구려를 정벌하여 마침내 한성과 平壤[南平壤 : 경기도 양주]의 옛 땅을 되찾았다’는 기록을 조합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동성왕(479~501)~무령왕대(501~523)에 麗‧濟 간 전쟁과 백제의 축성‧순행이 한강 유역은 물론 그 북쪽 너머의 황해도 일대에서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분명하게 남아 있다. 이는 통설과 배치되는 부분으로 백제가 475년에 고구려에게 한성을 함락당했고 수도를 남쪽으로 천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강 유역을 점유한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통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들은 백제본기를 부정하는 입장에서 475~551년의 백제본기가 조작되었거나, 한성시대의 지명을 웅진시대로 옮겨왔다는 지명이동설, 사서 편찬과정에서 4세기대의 기록이 5~6세기대로 착간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1990년대 이후 백제본기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 475~551년까지 백제가 한강 유역을 회복했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백제의 한강 유역 회복시기에 대해 동성왕대인가 무령왕대인가, 또는 차지한 한강 유역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이해는 연구자마다 차이가 있지만, 신설의 연구 성과도 통설 못지않게 축적되었다. 한편 1990년대 이후 최근까지 한강 이남의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일대에서 고구려 유물‧유적이 지속적으로 발굴되었다. 이를 둘러싸고 통설은 그에 근거해 논리를 보강하는 추세이고, 신설은 고고학 자료의 확대 해석을 경계하면서 유동적이었던 고구려와 백제 간 영역변천의 양상을 추적하고 있다. 결국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통설과 긍정적으로 보는 신설은 475~551년 한강 유역의 영유권 주체에 대해서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
– 장창은 / 학술논문 : 진단학보 제111호 / 2011.04
신라는 6세기 중반에 들어서 기존의 수세적 방어체계를 공세적 공격루트로 전환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압박해 나갔다. 신라는 550년에 고구려와 백제가 장악하고 있던 道薩城[괴산군 증평]과 金峴城[연기군 전의]을 장악함으로써 고구려의 國原[충주]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신라 眞興王(540~576)이 이듬해 娘城[청주]으로 巡狩를 온 것은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은 사후조처이자 한강 중상류로 나아가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신라의 국원 진출은 추풍령·화령로와 죽령로의 양쪽에서 협공하는 전략 하에 550년 3월~551년 3월 사이에 이루어졌다. 신라는 국원을 차지한 후 곧바로 백제와 함께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공략하였다. 백제가 먼저 漢城과 平壤을 쳐서 깨뜨려 한강 하류의 6郡을 차지했고, 신라는 居柒夫를 주축으로 한강 중상류를 공략함으로써 竹嶺과 高峴 사이의 10郡을 차지하였다. 고구려는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北齊와 돌궐의 압박이 심해지는 위기 속에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말았다. 신라가 진출한 한강 중상류의 10군은 朔州 관내의 ① 奈城郡[奈生郡], ② 奈제郡[奈吐郡], ③ 北原[平原郡], ④ 嘉平郡[斤平郡], ⑤ 朔州[牛頭州], ⑥ 狼川郡[猩川郡], ⑦ 楊麓郡[楊口郡], ⑧ 益城郡[母城郡], ⑨ 大楊郡[大楊菅郡], ⑩連城郡[各連城郡]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의 6군은 임진강 이남의 ① 漢陽郡[北漢山郡: 平壤], ② 來蘇郡[買省郡], ③ 交河郡[泉井口縣], ④ 堅城郡[臂城郡], ⑤ 鐵城郡[鐵圓郡], ⑥ 富平郡[夫如郡]으로 추정하였다.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유역은 6군에다가 한강 이남의 한성 일대를 포함해 경기 남부 일대를 망라했다.
麗羅戰爭史의 再檢討
– 박경철 / 한국사학보 제26호 / 2007.02
삼국 간 전쟁의 최고 동원전력 수준은 3~5만 명이라는통시적 균등성을 보이고 있다. 이 점은 고구려의 수 · 당 전쟁 당시 양측의 동원 양상, 규모와 비교할 때 질 · 양 면에서 현격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 점에 비추어 당시 고구려의 군가적 운명을 건 주전장이 한반도 남부 지역이 아닌 서북전선에서 형성되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관련 그림>
– 나제연합군의 한강 유역 점령 추정 지역 / 출처 : KBS1 역사저널 그날
– 백제군사박물관에서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성왕(백제)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백제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나제동맹
네이버 지식백과(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 일본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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