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차일드가의 시대 (1866 ~ 1931)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 family)은 유대계 국제 금융재벌 가문이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주요 국가들의 공채 발행과 왕족과 귀족들의 자산 관리를 맡아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철도와 석유산업의 발달을 주도하며 유럽의 정치와 경제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스트리아와 영국 정부로부터 귀족 작위도 받았다.

 

로스차일드는 독일어 로트실트(Rothschild)의 영어식 발음으로 프랑스어로는 로쉴드라고 읽는다.​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 하버드대 교수의 저서 『전설의 금융가문, 로스차일드』에 따르면 로스차일드 가문은 “the richest family in all of history”이다. 그는 “19세기 대부분 동안 N. M. 로스차일드는 국제 채권 시장을 지배했던 세계 최대의 은행의 일부였다. 오늘날 그와 대등한 은행이 존재한다면, 메릴린치, 모건스탠리, J. P. 모건, 골드만삭스를 합병한 기업을 상상하면 된다. 또, 로스차일드가가 19세기 여러 정부의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 맡았던 역활을 고려하면 국제통화기금(IMF)까지 합병 시켜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또한 “로스차일드 가문이 어떻게 천문학적인 부자가 됐는지 설명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 경제사 자체를 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거대한 전환』에서 1815 ~ 1914년 유럽의 예외적인 평화의 기간, 즉 ‘100년 평화’를 가능하게 했던 배경으로 ‘오트 피낭스(high finance)’를 꼽았다. 오트 피낭스는 원래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글로벌 거대 금융자본을 의미하는데, 로스차일드가는 탐욕스러운 자본가였지만 자신의 탐욕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막고 평화체제를 지켜냈다는 것이다. 역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오트 피낭스는 “주어진 경제 시스템 내에서 경제활동의 자금을 중개한다는 보통의 금융 업무의 수준을 넘어 그러한 시스템을 아예 창출하거나 변동하는 것에서 큰 수익을 얻는 높은 수준의 대형 금융자본의 활동을 지칭하는 말”이다. 폴라니는 이러한 오트 피낭스가 특히 로스차일드 가문을 중심으로 위력을 발휘했다고 말한다. 이들은 어느 나라나 정부에도 구속받지 않으면서 오히려 여러 나라와 정부를 규율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은 존 앳킨슨 홉슨(John A. Hobson)의 『제국주의론』(1902)에서 시작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로스차일드가와 같은 글로벌 거대 금융자본을 제국주의 엔진의 조속기(governor, 調速機)로 표현하고 있다.

투자자 고유의 이해관계가 공공의 이익과 충돌하고 골자 빠진 정책을 양산하기 쉽다면,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금융가들의 특별한 이해관계다. …… 이 거대한 사업들(은행업, 중개업, 어음 할인, 채권 발행, 발기 설립)은 국제적 자본주의의 중추를 이룬다. 가장 강력한 유대의 편제로 뭉쳐 언제나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신속히 교류하고, 전 국가의 기업 자본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특히 유럽에 관한 한 수세기에 걸쳐 금융 경험을 쌓아 온 특정한 민족이 지배하는 이 사업들은 국가들의 정책을 조종하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 로스차일드가와 그의 일당들이 외면한다면 유럽의 그 어떤 국가가 대전(大戰)을 치르고 대규모 국채를 발행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자본 흐름을 일으키거나 기존의 투자 가치에 큰 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정치 행위는 무엇이든 이 작은 무리의 금융 왕들로부터 허락을 받거나 실질적 지원을 받아야 시행된다. …… 투기꾼 혹은 금융 도박꾼들인 그들은 …… 제국주의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일개 요소를 이룬다. …… 그들이 꾸리는 수익성 높은 사업의 모든 조건이 …… 그들을 제국주의 편에 서게 만든다. …… 전쟁, 혁명, 무정부주의자의 암살 기도, 그 어떤 충격적 사건이 대중을 놀라게 하든 그들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들은 대중의 신용에 일어나는 갑작스러운 혼란에서 이득을 빨아먹는 괴물이다. …… 그들 기업의 부, 사업의 규모, 범세계적인 조직은 그들을 경제 정책의 최고 결정권자로 만든다. 그들이야말로 제국주의 사업에서 최대한의 배당을 받는 이들, 자신들의 의지대로 각국의 정책을 움직일 만한 막대한 수단을 지닌 이들이다. …… 금융은 …… 제국주의 엔진의 조속기(governor, 調速機)로, 에너지의 방향을 정하고 수행할 과업을 결정한다.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의 『장기 20세기』를 따라 로스차일드가의 전성시대를 1866년 ~ 1931년으로 선택했다. 당연히 학자들에 따라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900

 

아리기의 『장기 20세기』에서 영국의 체계적 축적 순환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네덜란드의 쇠락으로 대형 금융자본의 중심지가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이동되었다. 유럽의 대형 금융자본에서 영국의 지배적 위상은 프랑스전쟁 중에 새롭게 획득된 것으로, 이는 영국의 권력추구에서 사실상 무제한의 신용을 허락했다.

19세기 중엽 세계무역의 대팽창은 앞선 체계적 축적 순환의 모든 실물적 팽창 단계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축적 행위자들에 대한 체계 전반에 걸친 경쟁 압력의 격화로 이어졌다. 이에 영국 자본가계급 측에서는 교역과 생산으로부터 금융으로 주요한 교체가 진행되었다.

19세기 말 영국의 금융적 팽창의 주요 수행주체가 홉슨이 말한 “제국 엔진의 통치자” 로스차일드 가문이었고, 칼 폴라니의 말을 빌리면 “세계의 정치적 조직과 경제적 조직 사이의 주요 고리로 기능하였다.”

영국 정부가 로스차일드가의 통제를 받는 금융망에 제공한 보호와 우대조치에 대한 대응물로, 로스차일드가는 그 금융망을 영국이 세계를 통치하는 데 동원한 권력장치에 병합시켰다.

 

아리기는 세계시민주의적 대형 금융자본망이 폴라니의 생각처럼 특유한 것은 아니라고 얘기한다. 19세기 말 런던에 중심지를 둔 독일계 유대인 금융망에 대한 로스차일드 가의 관계가 16세기 말 제노바 금융망에 대한 노빌리 베키(nobili vecchi)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집단 모두 “제국적 엔진”에 대한 “통치자”가 아니라, 제국적 엔진의 금융에 대한 “통치자”였다고 주장한다.

 

 

리오 휴버먼(Leo Huberman)은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역사책을 읽어 보면 이런저런 왕들의 야망 · 정복 ·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장황하게 이어진다. 그런 책들의 강조점은 완전히 틀렸다. 국왕들의 이야기에 지면을 할애하기보다 왕권의 배후에 있는 진정한 힘, 즉 그 시대의 상인과 금융업자의 이야기에 지면을 할애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오늘날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향력이 19세기보다 약화되었다는 의견이 주류이다. 그러나 여전히 반유대주의의 뿌리를 가진 음모론의 주인공으로서 등장하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를 로스차일드 가문이 장악하고 있다는 음모론이 대표적이다. 사실 FRB의 주주 구성은 철저하게 가려져 있다.

 

“로스차일드는 오늘날에도 최고의 사금융기관 가운데 하나이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는 피터 드러커(Drucker)는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2008년 10월 런던의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기사 : “이 글로벌 은행 가문은 부, 권력 및 재량권(discretion)의 대명사입니다.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아마도 어떤 다른 가문도 필적할 수 없을 정도로 돈과 권력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화폐전쟁』의 저자 쑹훙빈은 책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을 약 50조달러(약 5경원, 1경=1만조)로 추정했다.

 

영국 패권에서의 금융에 대한 통치자가 로스차일드가라면 미국 패권에서의 금융 통치자가 있을까? 록펠러 가문이 맞을까? 아니면 여전히 로스차일드, 아니면 춘추전국시대같은 상황? 알 수가 없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특정 재벌이 갖는 영향력도 잘 모르는 판에…

※ 데이비드 록펠러 : http://yellow.kr/blog/?p=1863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더욱이, 앞선 모든 체계적 축적 순환에서와 마찬가지로, 실물적 팽창국면이 초래한 경쟁 압력의 첨예화와 결합하여, 영국 자본가계급 측에서는 처음부터 교역과 생산으로부터 금융으로 주요한 교체가 진행되었다. 19세기 후반부에는, 영국 바깥으로 나가는 자본수출의 큰 물결이 일어난 것뿐 아니라, 앞서 지적한 것처럼 영국의 지방은행망이 팽창하고 이것이 점점 더 시티의 망 속으로 결합된다는 특징이 두드러졌다. 상황들이 이렇게 결합되었다는 것은, 영국 재계에 대한 경쟁 압력의 격화와 19세기의 금융적 팽창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

여기서 우리는 홉슨(Hobson)의 19세기 말 금융적 팽창의 두번째 수행주체를 발견한다. 그가 보기에, 시티를 통해 투자처를 찾은 화폐자본 보유자들은 단지 “거대한 금융가문의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금융가문에 “제국 엔진의 통치자”라는 집합적 역활을 부여했다.

이러한 대사업-은행업, 중개업, 어음할인, 가변 이자율 대출(loan floating), 회사 설립-이 국제자본주의의 중추를 이룬다. 서로 항상 긴밀하고 신속한 접촉하에 있는 최강의 조직 유대로 통일되어 있고, 모든 국가의 기업자본의 핵심에 자리잡은 …… 이런 대사업은 민족들의 정책을 좌우하는 독특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승인 없이, 그리고 그들의 대행자 없이 어떤 대대적이고 신속한 자본의 진로 설정도 가능하지 않다. 만일 로스차일드 가문과 그 거래처들이 외면한다면, 어느 유럽 국가가 대전쟁을 일으키거나 대규모 국가 차관을 신청할 수 있으리라 진지하게 상상조차 해볼 수 있겠는가?(Hobson 1938: 56~57)

결국 홉슨 자신이 예측했듯이, 영국 제국 지배집단의 영토주의적 성향을 고취한 직접적 결과, 세계시민주의적 금융자본은 “제국 엔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었다(Arrighi 1983: 4장 and passim). 그러나 칼 폴라니의 용어를 빌리자면, 거의 반세기 동안 이른바 고도금융은 “세계의 정치적 조직과 경제적 조직 사이의 주요 고리로 기능하였다.”

……

물론 어느 단일 정부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뜻하지는 않았다. 로스차일드 가의 자율성에 가장 중요한 제한을 부과한 것은, 영국은행과 재무부를 통해 이들을 영국 제국에 연결시킨 정치적 교환에 함축되어 있던 제한이었다. 1장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정치적 교환에서, 영국 정부가 로스차일드 가의 통제를 받는 금융망에 제공한 보호와 우대조치에 대한 대응물로, 로스차일드 가는 그 금융망을 영국이 세계를 통치하는 데 동원한 권력장치에 병합시켰다.

이런 세계시민주의적 고도금융망은 폴라니의 생각처럼 19세기 마지막 1/3과 20세기 처음 1/3에 특유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3세기 전 제노바 시대에 유럽 화폐체계를 규제한 세계시민주의망과 얼마나 유사한지를 보면 매우 놀랍다. 우리는 19세기 말 런던에 중심지를 둔 독일계 유대인 금융망에 대한 로스차일드 가의 관계가 16세기 말 제노바 금융망에 대한 노빌리 베키(nobili vecchi)의 관계와 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 두 집단 모두 “제국적 엔진”에 대한 “통치자”가 아니라, 제국적 엔진의 금융에 대한 “통치자”였다. 그들은 이윤추구를 통해 그리고 그들이 통제하는 세계시민주의 사업망을 통해, 제국적 조직-각각 대영제국과 에스파냐 제국-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행동하는 사업 도당이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손” 덕에 두 제국적 조직 모두 그들이 단지 자신의 국가형성과 전쟁형성 장치들의 “보이는 손”만 사용했을 때 가능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많은 권력 및 신용망에 손을 뻗쳐 이를 통제할 수 있었다.

도구성은 두 방향에서 모두 작동했다. 로스차일드 가나 노빌리 베키 모두 제국적 조직들에 “봉사하는” 단순한 도구들은 아니었다. 두 도당 모두 영토주의 조직이라는 배에 올라타, 이 조직의 팽창을 자신들이 통제하는 상업 · 금융망의 자기 팽창의 강력한 엔진으로 솜씨 좋게 전환시킨, 더 광범한 상인 은행가 서클에 속했다. 노빌리 베키가 이베리아 해양 팽창의 배에 올라탄 더 광범한 제노바 상인 은행가들 서클의 일부로, 한 세기 후에는 에스파냐 제국의 “중앙 은행가”로 등장한 것처럼, 로스차일드 가는 영국의 산업 팽창의 배에 올라탄 더 넓은 독일계 유대 상인 은행가들 서클의 일부로, 반세기 후에는 영국 제국의 “중앙 은행가”로 등장했다.

……

물론 제노바의 시대(1557~1627)와, 우리가 로스차일드 가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시대(1866~1931)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부분적으로 이런 차이점들은 두번째 시기에 세계시민주의적 금융자본의 작동 규모와 범위가 더욱 거대했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규모와 범위 면에서 로스차일드 가 하에서 런던 시티의 집수(集水)지역은 3백 년 전 노빌리 베키 하에서 피아첸차 정기시의 집수지역에 비해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거대했는데, 우리가 그것을 잉여자본 획득망과 관련해서 “측정”하건 아니면 잉여자본 재분배망과 관련해서 “측정”하건, 별 차이는 없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제노바 시대와 로스차일드 가의 시대 사이의 차이점들은 그들 각각의 영토주의적 파트너, 즉 16세기 에스파냐 제국과 19세기 대영제국의 권력추구의 대립적 산물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고도금융의 “로스차일드식” 구조의 공고화가 랜디스가 말하는 “인류 기억에서 가장 격심한 디플레이션”과 결합된 반면, “비센초네” 정기시의 공고화는, 일단 그 정기시가 피아첸차에 정착한 이후에는, 매우 격심한 인플레이션과 결합하여, 역사가들은 이를 16세기의 가격혁명이라 지칭한다. 첫번째 (제노바) 체계적 축적 순환과 세번째 (영국) 체계적 축적 순환 중에 이처럼 가격의 움직임이 분기되어 나타나는 이유는, 16세기에 에스파냐가 더 작은 규모로 헛되이 건설하려 노력한 종류의 세계제국을 19세기 영국이 다른 수단들로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에서 대부분 찾을 수 있다. 이 “다른 수단들”이 무엇인지 – 동방에서 억압적 통치, 그리고 서방에서 세계시장 및 세력균형을 통한 통치 -는 1장에서 예견되었고, 이 장과 다음 장의 여러 곳에서 더욱 자세히 탐구될 것이다.

 


거대한 전환

–  칼 폴라니 / 홍기빈 역 / 길 / 2009.06.30

 

1815년 이후 급작스럽고도 완벽한 변화가 나타났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동과 그 당시 막 일어나고 있던 산업혁명의 물결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평화로운 영리 활동을 전 세계적인 보편적 이익으로 확립하려는 강력한 흐름이 나타났다.

……

…… 신성동맹이나 유럽 협조 체제 따위는 결국 독립된 주권 국가들이 그저 무리지어 뭉쳐 있는 것일 뿐이기에 세력균형과 그에 내재된 전쟁이라는 메커니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평화를 유지해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

…… 이러한 놀라운 위업(백년의 평화)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설명하려면 우리는 이 새로운 상황에서 무언가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모종의 강력한 사회적 도구가 존재해서 예전에 왕조들과 각급 교회 조직들이 맡았던 역활을 수행하여 평화의 이익을 실현시킨 것이 아니었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 익명의 요인이 바로 오트 피낭스(haute finance, 고도 금융)였다.

 

19세기 국제 은행의 성격에 대한 전면적인 탐구는 아직 이루어진 바가 없다. 이 신비로운 제도의 정체는 여전히 단조로운 흑백의 정치 경제의 신화 속에 깊이 묻혀 있는 상태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각국 정부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것이 오히려 각국 정부들을 도구로 삼아 자신의 끝없는 이윤의 갈망을 채웠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국제적 분쟁의 씨앗이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것이야말로 강건한 나라들의 전투력을 좀먹는 나약한 국제주의의 도구였다고 주장했다. 모두 일리가 있는 주장들이었다. 오트 피낭스라는 이 유례를 찾기 힘든 제도는 1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과 20세기의 처음 3분의 1 기간에만 고유하게 나타났던 것으로서, 이 기간 동안 전 세계의 정치적 · 경제적 조직 사회를 이어주는 주요한 연결 고리의 기능을 담당했다. 이것은 국제 평화 체제가 실제로 작동하기 위한 여러 도구들을 제공하는 것이었으니, 비록 국제 평화 체제는 강대국들의 도움으로 작동하는 것이었지만 강대국들 스스로는 그 평화 체제를 확립할 수도 없었고 또 유지할 수는 더더욱 없었던 것이다. 유럽 협조 체제는 그저 가끔 한번씩 작동하는 것인 반면, 이 오트 피낭스는 최고의 탄력성을 가진 채 상시적으로 작동하는 기관의 기능을 했던 것이다. 가장 강력한 정부조차도 이것의 독립성을 해칠 수는 없었으므로 이것은 결국 특정 정부에도 종속되는 일 없이 모든 정부와 접촉을 유지했다. 잉글랜드 은행(The Bank of England)을 포함한 그 어떤 나라의 중앙은행도 이것의 독자성을 해칠 수 없었으며 한편 이것은 또 그 모든 중앙은행들과 긴밀한 관련을 맞고 있었다. 금융과 외교 사회에는 긴밀한 연관이 존재했으니, 이 둘 중 어느 쪽도 다른 쪽의 호의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평화 쪽이든 전쟁 쪽이든 장기적 계획을 구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반적 평화를 이렇게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비밀이 국제 금융의 입장, 조직, 그리고 각종 기법들 쪽에 있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독특한 조직은 구성원으로 보나 행동의 동기로 보나, 철저한 영리 이익이라는 사적 이해에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어느 한 정부에 종속되는 법이 없었다. 이 가문의 여러 가족은 서로 다른 나라로 퍼져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의 단일한 가문으로서는 국제주의라는 추상적 원칙을 몸소 체현하는 것이었다. 이 여러 가족의 충성을 찬 몸에 지닌 단일한 기업으로서의 로스차일드가 제공하는 신용이야말로 당시 급속히 성장하던 세계 경제의 산업 활동을 정치 영역의 정부와 잇는 초국가적(supranational) 연결 고리가 되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따져본다면, 당시에는 한 나라의 정치가들과 국제적 투자가들이 함께 신뢰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관이 필요했고, 로스차일드가 누리던 독립성이란 바로 이러한 당시의 시대적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유럽 여러나라의 수도에 둥지를 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나라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치외법권을 누리는 로스차일드 유대인 은행가들의 왕조야말로 그러한 절박한 필요에 대해 거의 완벽한 해답을 제공해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들은 결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수많은 전쟁에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재산을 축적한 자들이며, 도덕적인 고민 따위에는 전혀 무감각하고, 전쟁이 아무리 많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 규모나 기간이 대단치 않고 또 국지적인 것이기만 하다면 눈 하나 깜빡 않을 이들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주요 강대국들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고 체제 전체의 화폐적 기초까지 건드리게 된다면 이들의 영리 이익은 큰 손상을 입을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사실적 논리에 의하여, 전 지구의 모든 민족들을 휘말아 넣은 혁명적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계적인 평화를 유지한다는 필요 조건을 충족시키는 과업이 그들의 어깨 위에 떨어졌던 것이다.

……

또 강대국이 아닌 무수한 작은 나라들의 경우에는 금융이 아예 의회에서의 결정과 정책에 개입하여 큰 전쟁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강력한 조정자의 역활을 맡았고, 오트 피낭스는 이것을 채널로 삼아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 그래서 어떤 약소국이 금본위제와 헌정주의라는 제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나라가 19세기의 이 새로운 국제 질서에 순응한다는 상징이 되었으며, 또 그 두 제도는 그것을 받아들인 수많은 약소국들에게 런던 금융가(City of London)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팍스브리타니카, 즉 영국 패권 아래에서의 세계 평화는 어느 날 갑자기 거대한 함포를 탑재한 영국 함대가 해안에 불길한 모습을 드러내는 식으로 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국제통화 네트워크 안의 줄을 적절한 시점에서 잡아당기는 방법으로 지배력을 발휘하는 때가 더 많았다.

또 세계 지도의 광대한 부분을 차지한 반식민지 지역에서는 오트 피낭스가 아예 비공식적으로 그 나라 금융 행정을 맡아보는 식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일까지 있었다.

 


제국의 시대

–  에릭 홉스봄 / 김동택 역 / 한길사 / 1998.10.15

 

본질적으로 세계주의적인 국제금융과 같은 경제적 행위들이 존재해왔고 또 존재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민족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은 그것이 효율적인 한 확실한 진리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초국가적 기업들조차도 자신들에게 맞는 적절한 국민경제에 달라붙어 있는 데 신경을 써왔다. 따라서 (거대한 독일의) 상인, 은행, 가계들은 1860년 이후 파리에서 런던으로 자신들의 본부를 옮기려 했다. 그리고 가장 거대한 국제적 은행가 집안인 로스차일드(Rothschild)가는 주요한 국가의 수도에서 활동할 때 가장 번영했으며 그렇지 못했을 때는 움츠러들었다. 런던, 파리, 빈의 로스차일드는 주요한 세력으로 남아 있었지만, 나폴리나 프랑크푸르트의 로스차일드(이 회사는 베를린으로 옮기기를 거부했다)는 그렇지 못했다. 독일의 통일 이후 프랑크푸르트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것들은 기본적으로 경쟁에 대항하여 산업화되어가는 자국(自國)의 경제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발전된’ 세계의 일부에게만 적용될 수 있었으며, 자국의 경제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발전된’ 핵심부에 종속되어 있었던 지구상의 나머지 부분에 속한 국가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었다. 두 지역 모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제국의 권력이 종속국들의 경제에 발생할 일들을 결정하였으며, 제국의 경제는 그들로 하여금 바나나 공화국이나 커피 공화국으로 전환시킬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위키백과 – Rothschild family

–  https://en.wikipedia.org/wiki/Rothschild_family

 

현재의 주요 사업, 투자, 자선사업을 살펴보자.

 

19세기말부터 로스차일드 가문은 세상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노력했는데, 많은 유명한 자산과 예술작품들을 기부하고, 자선사업을 하고, 그들의 부가 확실히 드러나는 행동을 피했다. 오늘날 로스차일드의 비즈니스는 부동산, 금융 서비스, 혼합 영농, 에너지, 광업, 포도주 양조  및 비영리 단체를 포함하여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지만 19 세기에 비해 규모는 작다.

 

– The Rothschild Group

 

– Edmond de Rothschild Group

 

– RIT Capital Partners

 

– Investment

 

– Wine

 

– Art and charity

 


부의 세계사

–  데들레프 귀르틀러 / 장혜경 역 / 웅진씽크빅 / 2005.08.30

 

1818년까지가 로트실트의 ‘질풍노도’기였다면 그 직후부터 이 가문에는 ‘고전주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파리와 런던 그리고 빈에서 로트실트 가문의 은행은 각 도시의 가장 중요한 은행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황금 및 국채 거래에서 선도적 역활을 맡았다. 왕과 수상에게 돌아가는 몫의 조건을 정하고 국채의 발행을 경제 운영의 견실성과 연관시켰다. 그래서 국가들은 어쩔 수 없이 자국의 경제적 견실도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1820년부터 로트실트 가문은 현재의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역활을 맡았다.

19세기 민족 국가가 안정화 단계로 접어들고 상대적으로 큰 문제없이 경제 발전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프랑크푸르트 게토 출신의 5형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 활동을 하다 보니 이들에게는 국내에서만 활동하는 정치가나 기업인들에 비해 앞서는 점이 있었다. 바로 이들이 평화에 대해 직접적 · 경제적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는 정부는 적국을 희생시켜 이익을 얻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법이다. 하지만 두 적국 모두에게 뒷돈을 대주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쪽 사업 파트너의 이익이 다른 한 쪽의 손실은 아닐지 항상 고민을 해야 한다.

 


나는 고집한다, 고로 존재한다 (세계 최강이 된 기업들의 명품경영)

–  삼성경제연구소 / 삼성경제연구소 / 2011.03.01

 

로스차일드, 불확실성 속의 승부!

– 정태수

 

“로스차일드의 지원이 없다면 유럽의 어느 왕도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19세기 유럽의 숨은 지배자로 군림했다.

……

현재 21세기 로스차일드 가문의 위력 역시 막강하다. 그들은 금융업을 기본으로 석유, 다이아몬드, 금, 우라늄, 레저, 와인, 백화점 분야에서 여전히 건재함을 자랑한다. 런던의 로스차일드은행은 국제 금 가격을 결정하는 은행이고, 세계 5대 샤토(Chateau) 가운데 샤토 무통 로칠드(Chateau Mouton-Rothschild)와 샤토 라피트 로칠드(Chateau Lafite-Rothschild)가 로스차일드 가문 소유이다.

표면적으로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10명이 현재 약 15억 달러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난 세기 세계를 움직였던 그들의 권세에 비하면, 다소 위축되긴 했지만 그들이 실제로 보유하고 있는 자산은 추산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포스트 자본주의 새로운 시작

–  폴 메이슨 / 더퀘스트 / 2017.01.13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시대에 맞게 발전시키는 과제를 떠맡은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33세 박사였던 루돌프 힐퍼딩(Rudolf Hilferding)이었다. 힐퍼딩은 ‘벨 에포크’ 때 활동했던 지식인의 전형으로, 1890년대 후반 오스트리아 빈에서 소아의학을 공부하던 중 경제학에 뛰어들었다.

……

1906년 힐퍼딩은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베를린으로 건너가 독일 사회민주당의 교육기관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은 세계 좌파운동의 이론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1910년 힐퍼딩은 은행과 산업자본의 융합에 하나의 명칭을 부여했다. “이런 관계를 통해 (…) 자본은 금융자본(finance capital)의 형태를 취한다. 자본이 가장 추상화 · 고도화한 형태가 바로 금융자본이다.

힐퍼딩의 『금융자본론(Finance Capital)』은 이후 한 세기 동안 자본주의의 미래에 관한 좌파들의 모든 논쟁에 참조할 지점을 제공했다. 힐퍼딩은 자본주의의 변이가 어떤 규모로 진행되는가를 이해했던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였다.

……

20세기에는 기업의 이윤을 재분배하고 자본을 조달하면서 보조적인 역활에 머물렀던 금융 시스템이 이제는 비지니스의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한다. 위기에 대한 반작용들은 새롭고 더 안정적인 시스템의 일부가 됐다.

……

하지만 힐퍼딩의 책은 좌파 경제학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금융자본을 자본주의 체제의 ‘최종 단계’로 설정했는데, 여기에는 금융자본주의가 마지막이 되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체제는 자본주의의 “최고이자 가장 추상적인” 형태이며 더 이상의 진화는 없다.

금융자본의 사회화라는 특징은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목표 실현에 더없이 유리하다. 금융자본이 생산의 가장 중요한 부문들을 틀어쥐고 나면 그 조건이 마련된다. 노동계급은 정부를 장악하고, 사회는 그 의식적인 집행기관들을 움직여 금융자본을 손에 넣음으로써 생산 부문을 통제할 수 있다.

 


로스차일드 2

–  니얼 퍼거슨 / 박지니 역 / 21세기북스 / 2013.03.19

 

1868년 11월 15일, 마이어 암셸의 다섯 아들 중 유일하게 남아 있던 제임스 로스차일드가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11월 18일에 치러진 제임스의 장례는 가문의 역사에 있어 분수령이 되었음은 물론, 프랑스 공직 사회에서도 특기할 만한 사건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대표로 온 가족들과 런던에서 온 가족들(앤서니, 레오, 내티, 알프레드)은 삼촌의 하관식에 나타난 추도 물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레오는 이렇게 전했다. “파리 전체가 일어나 경의를 표했습니다. 지인들과 낯선 사람들이 뒤섞여 저택 앞을 지나는 통에 안마당에는 발 디딜 틈도 없었습니다. 장례 행렬이 출발했을 때 대로에는 구경꾼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어요. …… 가족들이 과장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타임스》의 파리 특파원 프레보 파라돌(Prevost-Paradol)도 감탄할 정도였다. “오전 10시가 되기도 전에 라피트가는 가족에게 조의를 표하러 파리 전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제껏 많은 행사가 있었지만 나는 그 거리의 모퉁이에서부터 생드니 개선문에 이르는 대로가 그보다 북적였던 것을 본 적이 없다. 순경들이 애를 써야 행렬이 지나길 길이 겨우 뚫렸다.” …… 레지옹도뇌르 대십자 훈장을 수여받은 이에게 치러 주는 군장(軍葬)의 예는 가족들이 사양하여 생략되고, 그의 묘비에는 군더더기 없는 비명만이(그저 “R”이라는 머리글자만) 새겨져 있었는데도, 제임스의 장례는 알프레드에게 “민간인의 장례식이라기보다는 황제의 장례식 같다”는 인상을 남겼다.

……

개인으로서도 그는 분명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타임스》에 따르면 그의 유언에 따라 상속자들에게 분배된 재산은 11억 프랑(4400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한다. 《쾰니셰 차이퉁(Kölnische Zeitung)》은 그보다 더 높이 잡아 20억 프랑으로 추산했다. 이 액수(심지어 라피트 가, 페리에르, 불로뉴, 샤토 라피트에 소유한 광대한 전원 및 도시 부동산은 포함하지 않은 액수였다)는 너무나 엄청나서 믿기 힘들 정도다(프랑스 국민총생산 대비 백분율로 따지면 11억 프랑은 무려 4.2%에 해당했다).

……

제임스가 세상을 떠난 뒤 로스차일드가는 비할 데 없이 독보적인 우위에 오른 듯했다. “결국 한 명이 줄어든 로스차일드가가 있을 뿐이다.” 1868년 한 언론인은 찬양조의 기사에서 그렇게 선언했다. “로스차일드가는 영원할 것이다.” 1870년 영국의 잡지 《시대》는 라이오넬을 현금과 채권의 왕좌에 앉아 세계 각국의 지배자들(중국 황제, 술탄, 나폴레옹 3세, 교황, 빌헬름 1세, 빅토리아 여왕 등등)로부터 인사를 받고 있는, 새로 권좌에 오른 로스차일드 “왕”으로 묘사한 만화를 실었다.

……

19세기를 통틀어 존재했던 한 가지 경향(법칙이라고 하기에는 예외가 너무 많다)은 외교 관계가 실제로 자본의 이동을 기초로 수립되지는 않았을지언정 자본의 이동 위에는 돈독해졌다는 것이다.

……

처칠이 “세계의 위기”라 부른 1차 세계대전은 로스차일드 가문 내부의 극심한 위기와 동시에 벌어졌으며, 그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1905년에 알퐁스의 죽음을 시발점으로 1918년에는 알프레드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1875년경 이래 로스차일드 가족 회사를 지배해 온 세대는 모두 사라졌다.

……

《웨스턴 모닝 뉴스》는 이렇게 썼다. “로스차일드 경의 죽음은 전쟁도 퇴색 시키지 못할 일 대 사건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영국에서는 중요한 정책 결정이 있을 때마다 그 직전에는 ‘로스차일드 경이 어제 총리를 방문했다’는 짧지만 의미심장한 발표가 등장했다. 큰 결단이 임박했을 때, 막후의 인물들은 바로 그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융가와 중금주의자(Financier and Bullionist)》의 표현에 따르면 “그가 왕이나 내각 각료들과 속내를 털어놓는 사이라는 것은 ……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

그러나 내티를 칭송했던 이들 중 누구도 그를 ‘위대한 은행가’였다고 추켜 올리지는 못했다. 《신 목격자(New Witness)》의 시티 담당 기자는 내티를 한껏 칭송하는 기사를 썼지만, 어떻게 보면 그 내용은 모욕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같은 세대의 금융가들에 비해 실수가 적었다. 그는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일이면 회사에 이득이 된다고 해도 손을 대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 그는 세계 최대의 상업 도시에서 최고의 사업 가문을 이끌었고, 왕과 통치자들에게 조언하고 제국의 정책을 좌지우지했으며, 죽을 때도 적을 남기지 않고 평화로이 눈을 감았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성취가 아니겠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티가 지휘했던 시기의 N. M. 로스차일드 앤드 선즈는 시티의 경쟁자들에 비해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내티가 정치에 몰두해 있었고 그와 형제들 모두 사업을 안일한 태도로 꾸려 나갔기 때문이었으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그러나 진짜 문제를 감당해야 했던 것은 다음 세대였다. 월터 배젖(Walter Bagehot)은 1870년대에 쓴 글에서 “대형 개인 은행들”이 합자은행에 맞서 과연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의문을 표하며 일찌감치 이 문제를 예견했다.

……

…… 1901년, 클린턴 도킨스는 이에 대해 무뚝뚝한 평을 남겼다. “로스차일드가의 다음 세대를 생각하면 절로 눈물이 날 지경이다.”

……

1914년 이후로 로스차일드가가 겪은 경제적인 곤란(그런 곤란이 있었다고 친다면)을 순전히 전쟁에서 비롯된 충성심 문제로만 설명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로스차일드가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1905~1918년에 걸친 전반적인 변화, 같은 시기에 일어난 정체성의 분열만큼이나 전쟁이 경제에 초래한 결과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로스차일드가가 전쟁으로부터 한두 가지 개별적인 면에서 이득이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전쟁은 비커스 총, 뉴칼레도니아의 니켈, 드비어스 다이아몬드의 수요를 증가시켰다), 그 순효과는 명백히 부정적이었다. 로스차일드가가 번성했던 세상이 1914년부로 끝장났다고 표현하는 것도 심한 과장은 아닐 것이다.

……

…… 그렇다면 어째서 로스차일드가는 1차 세계대전의 금융 기회를 이용하지 못했을까? 한 세기 전, 마이어 암셸과 그의 아들들에게 절체절명의 사업 기회를 가져다준 것은 나폴레옹전쟁이 아니었나?

답은 분명하다. 나폴레옹전쟁 당시 프랑스의 패배는 상당 부분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에 제공한 영국의 차관과 보조금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프랑크푸르트와 런던, 파리에 은행을 둔 로스차일드가는 이러한 이전 사업에서 특별히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동맹국들이 패배한 배경에도 영국에서 연합국으로 (97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이 이전된 사실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로스차일드가가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자금을 프랑스에 제공할 때뿐이었고, 그렇게 맡은 역활마저 부수적인 역활에 불과했다. 한때 그들은 동맹 열강들 간의 국제 거래에 있어서는 1등으로 손꼽힌 에이전트였다. 그러나 영국의 전쟁 노력이 미국의 신용에 과하게 의존하게 된 당시, 전시 재정의 핵심 에이전트로 N. M. 로스차일드의 자리를 대체한 것은 J. P. 모건이었다. 그것은 대서양 반대편에 로스차일드 은행을 만들지 않은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전략적 실수였는지를 재확인시킨 사건이었다.

……

1820년대와 1920년대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의 경우 영국이 동맹국들의 전쟁 부채를 대부분 탕감해 주었지만, 1918년 이후의 미국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1920년대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정권들은 모두 민주주의 정권이었다. 이는 은행가, 채권 보유자, 직접세 납세자들이 1820년대처럼 정치적으로 과잉 대표된 체제가 더 이상은 아니었다는 것을 뜻했다. 모건은행이 1830년대의 로스차일드가처럼 채권 시장에서 경제적 영향력을 발휘해 공격적인 대외 정책들을 좌절시키는 역활을 맡을 수 없었던 것도 부분적으로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1930년대의 정치경제적 위기는 19세기에는 없었던 식으로 금융 권력의 한계를 극명히 노출시켰다.

……

크레디탄슈탈트 위기가 전후 로스차일드가의 입지를 뒤흔든 가장 격심한 타격이었고, 로스차일드 상사 세 곳의 자본을 깊숙이 잠식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1923~1931년에 걸친 폭락의 충격이 더 한층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

1935년 《유대교 신문》은 로스차일드가의 “전성기”가 “저물어 가고 있다”는 과감한 주장을 폈다. “경영 합리화, 체인점, 화학 제품 그리고 석유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 과거의 지배 가문도 더 이상은 절대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 심지어는 세실 로스(Cecil Roth) 같은 동정적인 작가들도 쇠락의 조짐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의 책 『위대한 로스차일드가(The Magnificent Rothschilds)』(1938)는 3대 및 4대들에 대한 묘비명이자 가문의 장대함에 대한 묘비명으로도 읽힐 수 있었다. “모두가 세상을 떠났다. …… 그리고 펼쳐진 것은 다른 세상이었다.”

……

그러나 당시 그는 친구들의 변절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 같다. 1930년대와 1940년대 빅터의 정치 성향은 분명 좌익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윗세대 케임브리지 사도였던 케인스에게도 고백했듯이, 그는 공산주의를 “답답한 사상”이라 느끼고 있었다. 마침내 1962년에 필비가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는 서슴지 않고 과거 MI5 근무 당시의 동료에게 이 정보를 넘겼다.

어쨌든 빅터는 작정하고 금융계를 멀리했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공백을 메우기에 그의 사촌들은 아직 너무 어렸다.

……

가장 큰 아이러니는 로스차일드가의 권력에 대한 신화가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가 실제로는 그들이 취약했던 이 당시였다는 사실이다. 대공황의 곤궁 속에 권력을 움켜진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의 과격파 좌우익 세력 양쪽은 가문을 겨냥해서 전례 없는 강도로 프로파간다를 퍼부었다. 정치적 스펙트럼의 양끝에서 가세한 이 같은 합동 공격은 물론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로스차일드가는 무려 100년이 넘도록 그런 비난을 받아 왔다. 단 하나, 새로웠던 것은 그 같은 수사법이 처음으로 정치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었다.

……

런던에 있는 N. M. Rothschild & Sons는 19세기 대부분 동안 국제 채권 시장을 지배했던 세계 최대의 은행의 일부였다. 오늘날 그와 대등한 은행이 존재한다면, 메릴린치, 모건스탠리, J.P. 모건, 골드만삭스를 합병한 기업을 상상하면 된다. 또, 로스차일드가가 19세기 여러 정부의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 맡았던 역활을 고려하면 국제통화기금(IMF)까지 합병 시켜야 할지 모른다. 오늘날에는 이 은행이 국제 금융업계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시장만을 차지하고 있으며, HSBC, 로이즈-TSB, 시티그룹(Citigroup) 같은 기업 비대화의 산물에 비하면 왜소해 보일 정도가 되었다.

 


<관련 그림>

 

– 로스차일드가의 문장

 

 

– 런던에 있는 N. M. Rothschild & Sons. 19세기 대부분 동안 N. M. 로스차일드는 국제 채권 시장을 지배했던 세계 최대의 은행의 일부였다. 오늘날 그와 대등한 은행이 존재한다면, 메릴린치, 모건스탠리, J.P. 모건, 골드만삭스를 합병한 기업을 상상하면 된다.

 

 

 

 

– <라이오넬 드 로스차일드 남작>, 《시대(The Period)》, 1870년 7월 5일자

1870년 영국의 잡지 《시대》는 라이오넬을 현금과 채권의 왕좌에 앉아 세계 각국의 지배자들(중국 황제, 술탄, 나폴레옹 3세, 교황, 빌헬름 1세, 빅토리아 여왕 등등)로부터 인사를 받고 있는, 새로 권좌에 오른 로스차일드 “왕”으로 묘사한 만화를 실었다.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로스차일드 가

https://en.wikipedia.org/wiki/Rothschild_family

2018-07-13  [중국 비즈니스 인사이트(53)] 미중 무역전쟁에서 알아야할 것

2018-07-13  3조원 자산가 美 상무장관, “보유 주식 모두 매각하겠다”

2018-06-10  팍스(pax, 평화)

2018-04  케임브리지 5인방

2016-11-11  트럼프-로스차일드(유대계 국제금융재벌 가문), 기득권 새판 짤까

2016-05-15  가문 며느리로 EDR그룹 수장 오른 아리안 드 로스차일드

2015-01-19  로스차일드家 ‘거주 국가에 충성’ 제1원칙… 품위를 갖춘 부와 권력

2012-07-13  [철학자의 서재]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2012-05-30  손잡은 로스차일드-록펠러…미·유럽 금융계 배경에 촉각​

2010-04-29  로스차일드 가문

2008-10-25  The Rothschilds: They prefer to let their money do the talking

 

로스차일드가의 시대 (1866 ~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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