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곡물법 폐지 – 1846년

1846년 5월 15일 영국 하원에서는 국내 농산물 보호를 위해 수입 농산물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곡물법(corn laws)을 철폐하는 법안을 327대 229로 통과시켰다.

 

곡물법 폐지는 자유무역체제를 낳았다. 농업관세를 철폐한 영국은 모든 부문에서 무역을 자유화하고 다른 나라들에게 영국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대외무역에서 영국의 지위는 더욱 강해지고 세계시장은 대영제국 중심으로 재편됐다. 곡물법 폐지는 영국이 주도하는 19세기판 세계화였던 셈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곡물법 폐지는 토지 귀족에 대해 산업자본이 거둔 승리의 마침표이다.”

 

장하준 교수는 영국의 곡물법 폐지 등 일련의 조치를 “농업 상품 및 원자재 시장을 확장함으로써 유럽 대륙의 산업화를 저지”하려는 ‘자유 무역 제국주의’적 행위라고 평가한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846

 

1820년 영국 의회는 일련의 변화들을 일으키게 될 원칙의 선언을 가결했는데, 그러한 변화가 가져온 결과 가운데 하나는 바로 거의 1세기 후 세계대전의 발발과 그 비극적 여파다. 강력한 이익집단인 잉글랜드은행과 베어링브러더스 무역 금융회사의 알렉산더 베어링을 중심으로 한 런던 해운업계와 금융계의 요구에 부응하여 의회는 수십 년 전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가 옹호한 개념인 이른바 ‘절대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원칙의 성명서를 통과시켰다. 이 원칙의 선언은 1846년 영국의 국내 농업 보호책인 그 유명한 곡물법이 의회에서 폐지되는 것으로 공식화되었다. 곡물법 폐지는 자신들의 세계 지배로 결정적인 이득을 취하게 될 런던의 강력한 금융업계 및 무역업계의 계산에 기초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이득을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정책을 철저히 밀어붙여야 했다. 만일 그들이 세계 무역을 지배한다면 ‘자유 무역’은 다른 저개발 무역국가들을 희생시켜 그들의 지배를 가속화해줄 수 있을 뿐이었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자유시장을 위한 자유주의 십자군 운동은 일련의 법안 입법으로 귀결되었다. 핵심조치는 1834년의 신(新)구빈법으로, 이는 국내의 노동 공급을 시장의 가격 결정 기제에 종속시켰다. 1844년의 필 은행법은 국내 경제의 화폐 유통을 앞서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금 본위제의 자기조정 기제에 종속시켰다. 그리고 1846년의 곡물법 폐지는 영국시장을 전세계의 곡물 공급에 개방하였다. 이 세 가지 조치가 영국에 중심을 둔 자기조정적 세계시장체계의 핵심을 형성하였다. 이것들은 하나의 일관성 있는 전체를 형성하였다.

 

19세기의 시장 체제의 확장이란 곧 자유무역, 경쟁적 노동 시장, 금본위제가 서로 발맞추어 확장되어 나간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말이다.

 

리카도(폐지)와 맬서스(존속)가 경제학자로서 이름을 날린 것도 곡물법 논쟁을 통해서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거대한 전환

–  칼 폴라니 / 홍기빈 역 / 길 / 2009.06.30

그런데 자유방임의 신조를 구성하는 교리들을 따로따로 고찰하게 되면 그것들이 이렇게 유토피아적 사고방식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점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 세 가지의 교리들-경쟁적 노동 시장, 자동적 금본위제, 국제 자유무역-은 동일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세 요소들이다. 그중 다른 두 가지 조건이 똑같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 가지만 달성하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그럴 경우엔 결국 그러한 노력에 들어간 모든 희생도 허사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었다. 모두 다 함께 달성되든가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하는 것, 즉 모 아니면 도인 셈이었다.

 

이를테면 금본위제는 지독한 디플레이션의 위험 그리고 아마도 공황 시기에는 치명적인 통화 긴축을 의미한다는 것이 누구의 눈에도 자명했다. 따라서 공장을 운영하는 이들은 자기 상품이 채산성을 보장하는 수준의 가격을 유지한 채 생산을 확장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므로 공장 문을 닫아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846년의 곡물법 철폐 법안(Anti-Corn Law Bill)은 금본위제를 본격화한 1844년의 필 은행법(Peel’s Bank Act)의 당연한 귀결이라 볼 수 있다. 또 양자 모두가 전제로 삼는 것은 노동계급의 존재이다. 이러한 노동계급의 창출을 가져온 것은 1834년의 수정 구빈법(Poor Law Amendment Act)이니, 이 법이 발효된 이후로 모든 노동 인민들은 굶주림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그것을 면하기 위해 기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임금을 곡물가격 하나만으로 규제할 수 있는 새로운 조건이 창출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3대 조치는 모두 내적 일관성을 갖춘 단일한 전체 체제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경제적 자유주의가 이제 전 지구를 휩쓸게 될 것이라는 점은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엄청난 규모의 메커니즘의 작동을 보장하려면, 자기조정 시장을 다름 아닌 세계적 규모에서 확립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이제 각종 보호 무역 장치도 없는 판이니, 세계 어디로부터든 얻을 수 있는 가장 싼 곡물을 찾아 들여오고 또 그 가격으로 임금 수준이 결정된다는 메카니즘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생산 기업들은 자기들이 자발적으로 모셔온 감독자인 금본위제의 손아귀에 잡혀 파멸을 맞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19세기의 시장 체제의 확장이란 곧 자유무역, 경쟁적 노동 시장, 금본위제가 서로 발맞추어 확장되어 나간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말이다. 이러한 대모험에 얼마나 큰 위험이 잠복하고 있는가가 일단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자 경제적 자유주의가 일종의 세속 종교로 변질되었다는 점도, 그래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옮김 / 그린비 / 2008.12.25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자유시장을 위한 자유주의 십자군 운동은 제약적 규제의 폐지를 목표로 삼은 일련의 법안 입법으로 귀결되었다. 핵심조치는 1834년의 신(新)구빈법으로, 이는 국내의 노동 공급을 시장의 가격 결정 기제에 종속시켰다. 1844년의 필 은행법은 국내 경제의 화폐 유통을 앞서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금 본위제의 자기조정 기제에 종속시켰다. 그리고 1846년의 반(反)곡물법은 영국시장을 전세계의 곡물 공급에 개방하였다. 이 세 가지 조치가 영국에 중심을 둔 자기조정적 세계시장체계의 핵심을 형성하였다. 이것들은 하나의 일관성 있는 전체를 형성하였다.

노동의 가격이 가용한 최저가의 곡물에 의존하지 않았다면, 보호받지 않은 산업들이 자발적으로 수용한 감독관인 금의 손아귀에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19세기 시장체계의 팽창은 동시적으로 국제 자유무역, 경쟁적 노동시장, 그리고 금 본위제의 확산과 동의어였다. 이들은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Polanyi 1957:138~9)

 


부의 역사

–  권홍우 / 인물과사상사 / 2008.06.09

곡물법 제정 논의가 일던 1811년 36 대 20이었던 잉글랜드 지역의 농림수산업과 광공업의 생산 비중은 1821년 26 대 32로 역전된 뒤 급격히 벌어졌다. 제조업 종사자도 그만큼 늘어났다. 공산품을 수출해서 얻는 이익이 농가의 소득 감소로 인한 손해보다 크다는 주장이 먹혀 곡물법은 폐지됐다.

기후 변동과 선거권 운동도 곡물법 폐지의 배경이었다. 이상 기후로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들어 식량이 부족해지자 값싼 외국산 곡물의 수입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주로 도시 선거구에서 선거권 제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며 참정권 운동이 격화한 점 역시 선거 패배를 우려하던 로버트 필(Robert Peel, 1788~1850) 당시 영국 수상의 곡물법 폐지 결정을 앞당겼다.

……

 

곡물법 폐지는 자유무역체제를 낳았다. 농업관세를 철폐한 영국은 모든 부문에서 무역을 자유화하고 다른 나라들에게 영국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대외무역에서 영국의 지위는 더욱 강해지고 세계시장은 대영제국 중심으로 재편됐다. 곡물법은 영국이 주도하는 19세기판 세계화였던 셈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곡물법 폐지는 토지 귀족에 대해 산업자본이 거둔 승리의 마침표이다.”

 


자본주의

– 홍기빈 / 책세상 / 2010.08.20

 

따라서 리카도는 의도했든 아니든 영국 사회 전체를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을 위해 개조하는 정치 운동의 선구적 이론가가 되고 말았다. 우선 그는, 빈민들에게 구호 수당을 지급하여 자유로운 노동 시장과 임금 형성을 방해하는 구빈법(Poor Laws)을 완전히 철폐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영국 지주들에게 높은 수익을 보장하기 위해 외국으로부터 값싼 곡물이 수입되는 것을 방해하고 결국 계속해서 영국의 농업 생산성을 악화시키는 주범으로 지목된 곡물법(Corn Laws)을 결사적으로 반대- 리카도 자신이 굉장한 지주였음에도 불구하고 -했다. 또 화폐의 발행이 영국 국가나 은행가들의 재량에 따라 마구 불안정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막고 자동적으로 국제 수지 균형과 물가 안정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겨진 철저한 금본위제를 주장했다. 이후 영국 부르주아들은 1832년 선거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꾸어 대거 의회로 진출하게 되었고, 1834년 구빈법 철폐, 1844년 필 은행법 제정, 1846년 곡물법 철폐를 통해 이러한 리카도의 자본주의 사회의 비전을 실현하게 된다.

……

셋째, 경제 성장을 위한 구체적 행동 강령은 다름 아닌 경제와 정치의 확고한 분리라는 것이다. 경제는 스스로의 법칙으로 움직이고 축적하고 성장하는 하나의 기계이니 이를 위해 따로 무슨 조치를 취할 필요가 없다. 그저 그러한 성능이 최고로 살아나도록, 정치나 사회, 문화 등 사회의 다른 영역이 그 작동에 끼어들지 않게 하면 된다. 리카도가 옹호한 세 가지 조치, 즉 곡물법 철폐, 구빈법 철폐, 지폐의 철저한 금태환이야말로 이러한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확실히 실현하는 것이다. 지주나 농민들의 불만 따위로 곡물 가격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은행가들과 사업가들의 방만과 타협으로 통화량과 화폐 가치가 등락해서는 안 된다. 어쭙잖은 온정주의로 노동 시장의 균형과 탄력성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폴라니의 표현을 빌리면, 이리하여 사회의 기본 구성 요소인 곡물, 화폐, 노동이 모두 완전한 상품처럼 움직이는 ‘상품 허구’가 완벽하게 실현되어야만 경제, 즉 ‘자기 조정 시장’의 최상의 균형이 달성된다.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  황경식 / 삼성경제연구소 / 2001.09.29

 

『대전환』은 19세기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등장과 20세기 초 자유시장의 후퇴를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다. 폴라니는 19세기 자유주의를 지탱한 질서축으로 세력균형체제, 금본위제, 자유주의 국가, 그리고 자기조정적 시장을 들면서, 그중에서 핵심은 자기조정적 시장이고 19세기의 자유주의 국가 및 국제질서는 자기조정적 시장 성립의 조건으로 기능했다고 본다. 달리 말해 19세기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경제적 자유주의로 일면화하여 접근한다는 점에서 그의 자유주의 해석은 최근의 신자유주의자들과 동일한 것이다.

다른 한편, 19세기에 자기조정적 시장이 성립되는 과정은 자연적 과정이 아니었다. 그 과정은 자유주의 국가의 인위적 개입이 전통적인 공동체적 관계에 기반을 둔 각종 제도와 관행을 파괴하고 그것을 허구적 상품으로 대체하는 과정이었다. 폴라니는 이 과정을 ‘악마의 맷돌(Satanic Mill)’로 비유한다. 19세기의 허구적 상품의 등장은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1834년의 신빈민법은 기왕의 빈민법이 지녔던 공적 부조의 성격을 제거함으로써 노동의 가격이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될 수 있도록 만든 자유주의적 제도개혁이었다. 1846년 곡물법 폐지는 이를 계기로 농산물이 자유시장에 포섭이 되고 결과적으로는 토지와 자연자원의 시장이 제도화되게 하였다. 그리고 1830년대와 1840년대 영국은 수 차례에 걸쳐 영란은행과 관련된 제도 및 관련법의 개정을 겪는데, 이 과정에서 영란은행은 근대적 중앙은행으로 확립된다. 그런데 이러한 중앙은행의 확립은 화폐의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금융시장의 제도적 안정을 국가 차원에서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리하여 화폐가 보편적 매개수단의 기능을 안정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  리오 휴버먼 / 장상환 옮김 / 책벌레 / 2000.04.01

 

(곡물법의)그 취지는 영국 국내의 밀 경작을 장려해 비상시에 충분한 식량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농민에게 만족할 만한 곡물 가격을 보장함으로써 경작을 장려했다. 농민은 외국 밀과 경쟁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밀이 일정한 가격으로 오르기 전까지는 한 톨의 밀도 영국에 들여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의 수확량이 수요에 비해 지나치게 많을 때 – 1790년 이후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를 제외한다면, 그것은 상당한 이윤을 뜻했다.

나폴레옹 전쟁 때문에 밀 가격이 급등해 더 많은 토지가 경작지로 돌려졌다. 지주들은 밀 가격이 비싸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밀 가격이 비싸지면 지대도 비싸지고, 지대가 비싸지면 호주머니에 들어오는 돈도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제조업자들은 밀 가격이 비싸지 않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노동자의 생계비가 올라가고, 생계비가 올라가면 불만이 커지고 파업이 일어나고 그래서 결국은 임금이 올라가고, 임금이 올라가면 호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보호 무역을 지지하는 지주들과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제조업자들은 맹렬한 싸움을 벌였다.

 


다시쓰는 근대 세계사 이야기

– 로버트 B. 마르크스 / 윤영호 역 / 코나투스 / 2007.04.13

 

그러나 영국 면직물산업의 진정한 황금기는 미국이 독립한 직후에 찾아왔다. 1793년 엘리 휘트니가 조면기를 발명하면서 아메리카 목화의 가격이 하락했기 때문이다. 1815년 부터 1840년 사이에 여러 차례 혁신을 통해 증기기관을 응용한 방적기와 방직기가 개발되면서 맨체스터 공장들은 다시금 생산성을 증대했고 마침내 영국의 면직물 가격이 더욱 하락하면서 세계시장에서 인도산 면직물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영국은 ‘자유무역’을 옹호하면서 중상주의와 수입관세를 모두 철폐했다. 실제로 19세기 세계 최대강국으로 부상한 대영제국은 자유무역을 가장 이상적인 제도로 간주했다.

……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의 개념과 더불어 자유무역과 경제에 대한 정부 간섭의 최소화는 인도를 식량생산지와 천연자원의 수출지로 전락시켰다. 더욱이 관세가 폐지되면서 식민지정부는 굳이 방직공들을 보호하거나 산업화정책을 촉진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자유시장’은 인도의 식량과 천연자원을 영국으로 유입시키고 인도가 영국의 산업생산품을 구매하는 체제를 공고히 구축했다.

……

 

최초로 산업화에 성공하고 그 열매를 군대에 활용한 영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도약했고 다른 국가들에 비해 산업과 군사력에서 모두 우위를 점유했다. 1830년 영국은 철, 증기기관, 면직물의 생산을 사실상 독점했고 엄청난 권력을 활용하여 자국의 생산품들을 세계 전역에 수출하면서 단지 인도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다른 지역들까지 아우르는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다. 이처럼 최고의 권력을 앞세워 식량과 천연자원에 대한 관세장벽의 폐지를 강요하면서 영국은 더욱 빠른 속도로 자국의 산업체제를 확장할 수 있었다. 인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유무역’은 영국의 행동지침이 되었다. 그러나 인도에서 시행한 자유무역 원칙이 인도의 제3세계화를 이끌었지만,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이나 과거 식민지였던 미국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  윌리엄 엥달 / 서미석 옮김 / 길 / 2007.10.25

 

1820년 영국 의회는 일련의 변화들을 일으키게 될 원칙의 선언을 가결했는데, 그러한 변화가 가져온 결과 가운데 하나는 바로 거의 1세기 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그 비극적 여파다.

강력한 이익집단인 잉글랜드은행과 베어링브러더스 무역 금융회사의 알렉산더 베어링을 중심으로 한 런던 해운업계와 금융계의 요구에 부응하여 의회는 수십 년 전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가 옹호한 개념인 이른바 ‘절대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원칙의 성명서를 통과시켰다.

1846년 이 원칙의 선언은 영국의 국내 농업 보호책인 그 유명한 곡물법이 의회에서 폐지되는 것으로 공식화되었다. 곡물법 폐지는 자신들의 세계 지배로 결정적인 이득을 취하게 될 런던의 강력한 금융업계 및 무역업계의 계산에 기초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이득을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정책을 철저히 밀어붙여야 했다. 만일 그들이 세계 무역을 지배한다면 ‘자유 무역’은 다른 저개발 무역국가들을 희생시켜 그들의 지배를 가속화해줄 수 있을 뿐이었다.

……

1846년 이후 자유무역 시대에 민간 상업권력과 정부가 이렇게 암암리에 손을 잡은 것이 영국 패권의 비결이었다.

……

이러한 금리정책은 중앙은행의 강력한 무기였는데, 이로 인해 일글랜드은행은 경쟁자들에 대해 결정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그들은 터무니 없는 이자율이 제조업과 농업에 엄청난 불황을 몰고 와도 상관하지 않았다. 1846년 곡물법 철폐 이후 영국 경제정책의 주류는 산업이나 농업이 아니라 금융과 국제무역으로 점차 바뀌었다. 영국 국제은행의 우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 은행가들은 1960년대 케네디 암살 이후 미국에서 일아났던 것 못지않게 국내 산업과 투자를 기꺼이 희생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은행의 이러한 새로운 금리정책이 영국 산업에 미친 결과는 1873년 영국을 강타하여 1896년까지 지속된 대공황이라는 보복이 되어 되돌아왔다.

 


마르크스의 정치이론
–  최형익 / 푸른숲 / 1999.06.01

영국의 ‘곡물법 파동’에서 자본의 이해는, 노동자들의 임금 가운데 식비로 지출되는 곡물 가격을 인하하기 위해 국내 지주계급의 곡물 독점을 폐지하고, 외국에서 값싼 곡물이 수입될 수 있도록 자유무역을 주창하는 것이었다. 콥덴과 브라이트 등 자유부르주아 대표자들은 지주계급에 대응하기 위해 공장 입법과 표준 노동일 제정을 미끼로 노동자 계급을 ‘곡물법 철폐 운동’에 동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한 사회 개혁을 주창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유무역을 통해 가치 증식에 장애가 되는 각종 사회적 제약을 타파함으로써 자본의 자유가 무한정 지속되기를 기대했다.

 


역사를 바꾼 씨앗 5가지
–  헨리 홉하우스 / 운후남 옮김 / 세종서적 / 1997.06.01

 

곡물 조령 반대 운동이 면화 제조업자인 리차드 코브던과 존 브라이트의 지휘하에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1839년 그들은 반곡물법 동맹을 조직, 지주들을 매섭게 비난했다. 지주들은 대부분 충실한 토리당원들이었다. 1845년 당시 아일랜드는 감자 기근이 한창이었으며 영국도 수확량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토리당의 수상인 로버트 필 경은 반곡물법 동맹의 압력을 받아 법령을 보호하던 입장에서 폐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결국 1846년 6월에 밀 관세를 낮추기 시작, 1849년부터는 관세를 완전히 폐지했다.

그러나 코브던과 브라이트의 설득력있는 주장과 필 경의 정치적 방향 전환에도 불구하고 자유 무역만으로는 아일랜드를 도울 수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곡물의 절대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곳이나 잉여 농산물이 없었기 때문에 곡물 조령을 폐지한다 해도 난데없이 곡물 1자루가 더 생긴다거나, 아일랜드 영세 농민들이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돈을 갑자기 갖게 되는 일은 생길 리 없었다.

그 다음, 반곡물법 동맹원들은 운동을 진행하는 동안 아일랜드를 언급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아일랜드 문제는 과격하게 동맹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비참한 상황이 영국의 곡물 조령을 철폐하는 데 이용되리라고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게 돌아갔다. 1845년 가을은 ‘곡물 조령을 씻어내려가게 한 비’로 흠뻑 젖어들었다. 조령의 폐지는 웨일스나 스코틀랜드에서는 별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더 나아가 아일랜드에서는 전혀 효력을 미치지 못했다.

……

영국은 1845년 이후에 상업 제국이 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은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다. 만약 아일랜드의 기근이 없었다면 영국은 그렇게 빨리, 그리고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상업 제국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곡물 조령의 폐지로 인한 최대의 악영향은 디즈레일리의 경고대로 결국 발생하고 말았다. 자유 무역 때문에 2개의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은 디즈레일리가 말한 것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일어났다. 영국은 면제품(1845년 전세계 수출품의 90%), 철로(같은 해 전세계 수출품의 70%), 석탄(같은 해 전세계 수출품의 65%)을 수출하기 위해 임금 상승을 가급적 억제해야 했다. 이는 식량 비용이 저렴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일정한 실업자들이 있어서 숙련된 작업이 필요하지 않는 한, 어느 산업에서나 미숙련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영국은 결과적으로 값싼 식량 때문에 저임금 노동자 계층을 영속시킨 셈이었다.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 유시민 / 푸른나무 / 1992.06.30

 

맬더스는 몇 가지 팜플렛을 통해 곡물법을 옹호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제시했다. 하지만 그가 택한 논리는 그리 신통치 못했다. 곡가가 하락하면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저하된다든가 일반물가를 하락시켜 경제를 침체시킨다는 맬더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터무니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도 명백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량을 다른 나라에 의존하는 것은 안보상 좋지 않다든가 곡가 하락이 토지 경작을 저해하고 농업자본을 파괴한다는 주장은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맬더스가 이 논쟁에 뛰어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주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였으며, 지주계급의 이익은 항상 사회 전체의 이익과 일치한다는 자기의 철학을 조금도 숨기려 들지 않았다.

반면 리카도는 지주계급의 이익은 항상 사회 전체 또는 사회의 다른 모든 계급의 이익과 대립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땅은 농민의 것’이라든가 ‘지주계급을 타도하자’고 주장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리카도는 지주계급의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보고 있었다. 리카도가 지주계급을 사상적으로 공격한 것은 그들이 자본가계급이 차지해야 마땅할 몫을 빼앗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주계급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세 가지의 이론적 무기를 사용했다. 차액지대론과 자유무역론, 그리고 노동가치론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몇십 년 뒤에 칼 마르크스는 스미드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을 잉여가치론이라는 이름의 날카로운 무기로 발전시켜 자본가계급의 목에 들이댔다. 만약 리카도가 그 이론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위험성을 알았다면 그것을 파기해버렸을지도 모른다.

……

리카도는 아담 스미드의 자유시장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원리를 국제무역에까지 확대 적용했다. 그는 또한 맬더스의 인구법칙을 승인했다. 그러나 맬더스의 세계를 음울하게 한 것이 인구법칙이었던데 반해 리카도의 세계를 음울하게 만든 것은 맬더스가 예찬한 지주계급과 지대의 존재였다.

곡물법 논쟁에서 곡물 수입의 자유화와 곡물 가격의 하락은 지주계급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준다고 주장한 리카도는 1817년 출간한 저서에서 이같은 견해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 저서는 리카도의 대표작이자 유일한 저서인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이다. 리카도는 이 책에서 지주계급의 이익이 항상 사회 전체의 이익과 대립하는 이유를 밝히는 지대이론, 즉 ‘차액지대론’을 개진했다.

……

아담 스미드는 생산을 위해서는 노동과 자본과 토지가 다 필요하다고 보고 임금과 이윤과 지대는 그 세 요소의 대가로 보았기 때문에 지주의 소득에 대해 특별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맬더스는 지주의 소득을 특별하게 옹호했다. 그러나 리카도는 이것을 특별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리카도에 의하면 지대는 ‘토지를 사용하는데 따르는 대가’가 아니다. 지주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사회 발전의 혜택을 독점하는 계급이다. 그들의 이익은 사회 전체의 이익과 항상 대립한다. 그들은 특히 자본가들이 마땅히 차지해야 할 몫을 가져 가 버린다.

곡물법을 둘러싸고 지주계급과 치열한 싸움을 시작한 자본가계급에게 이것은 하나의 복음이었다. 그들은 리카도를 대표로 떠받들었고 그의 사상을 칭송했다.

……

리카도의 이론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의미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중요한 것은 어쨌든 이 이론이 “지주의 이익은 사회 전체의 이익과 항상 대립한다.”는 것을 논증하는 무기였다는 사실이다. 리카도는 곡물법 논쟁에서 이론적인 우위를 차지했다. 물론 이 논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어 곡물법이 폐지된 1846년에야 종결되었다. 리카도는 1823년에 사망하였으므로 논쟁의 결말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곡물법의 폐지가 리카도의 학문적 승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산업혁명이 사회의 구조와 인간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19세기 중반까지도 낡은 지배계급인 토지귀족들은 여전히 의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자본가와 노동자, 빈민 등 사회의 모든 계급이 연대하여 대대적인 곡물법 폐지투쟁을 벌인 뒤에야 이 법은 종말을 고했다. 리카도의 승리는 신흥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의 완전한 정치적 승리와 더불어 찾아온 것이었다.

 


영국사

– 앙드레 모로아 / 신용석 옮김 / 기린원 / 1992.04.15

 

1845년과 1846년 두 해에 걸쳐 아일랜드에 감자 흉년이 닥쳤다. 필(Robert Peel)은 곧 「기근」이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인구가 과밀한 아일랜드는 주로 감자농사로 연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잉글랜드에는 아일랜드를 지원할 만한 곡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곡물관세를 폐지하고 모든 식량을 영국으로 자유로이 수입해서 이 난관을 해결해야 한다고 필은 강력히 주장했다.

급변하는 사정과 당황한 분위기는 놀랄 정도였다. 필 다음으로 유력한 관료인 스탠리경은 이제 자기도 수상의 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다고 고백했다.

 

수확기를 두 달이나 앞두고 확실히 흉년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는 일이며 아무리 외국의 곡물이 들어온다 해도 돈 한푼 없는 아일랜드인의 배가 부를 리는 없을 것이다. 수상은 앞으로 3년은 곡물관세를 약간만 유지하겠다고 언명했는데 3년 안에 흉년은 지나가 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필의 결의는 이론이 아니라 인간적인 본능에서 나온 것이었다. 보수당원들은 배신이라고 했으나 그의 견해로는 경건한 전향에 지나지 않았다. 다 같이 자유무역주의자였던 여왕과 앨버트공은 「경이 이 나라를 살렸다」면서 거듭 칭송하여마지 않았다.

……

곡물관세 폐지안은 휘그당과 자유무역주의가 필 일파와 제휴한 덕분에 의회는 통과했다. 그러나 배신한 자유무역주의자와 복수심에 불타는 보호무역주의자가 결속함으로써 그날 밤으로 필 내각은 퇴진하게 되었다.

이 분열때문에 중간에 약간 단만극은 있었으나 보수당은 약 20년간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 때부터 필의 지지자들은 수상을 실각하게 한 당내 반대파와는 끝내 화해하지 않았다.

……

얼마 안 되어서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이란 문제는 놀랄만큼 빠르게 정치적 논쟁의 대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곡물관세 폐지는 디즈레일리와 그의 일파가 예언한 바와는 정 반대로 농업에 아무 타격도 주지 않았다. 그 후 오랫동안 영국은 밀 수요량의 4분의 1 밖에는 수입하지 않았다. 몇 번 곤란한 시기를 겪기도 했으나 1850 ~ 1873년 간은 영국으로서는 굉장한 번영기였다.  인구의 증가, 철도의 발달, 해외 식민지의 건설 등이 번영의 기초였다. 농민도 이 혜택을 받았고 빈민은 없어졌다. 디즈레일리는 보호무역은 죽었을 뿐 아니라 지옥에 떨어져 버렸다고 했다.

……

자유무역 정책의 채택과 국부의 증가가 시기적으로 일치되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자유주의는  영국의 신조가 되었다.

 


<관련 그림>

 

– 1846년 영국 엑서터 홀에서 열린 곡물법 철폐 연맹 집회

 

 

 


<참고 자료>

 

2016-05-16  곡물법 폐지, 자유무역과 양당정치를 낳다

2009-08-05  “1950년대 국제사회에서 시장경제 원리만 관철됐다면?”

2009-07-28  “19세기 유럽의 꿈은 어떻게 무너졌나”

2009-07-17  “모든 빈민을 죽게 두라”… 자유주의의 탄생

2009-07-14  “폴라니는 마르크스나 케인스 아류가 아니다”

2009-01-21  케인스 부활…경제학자가 주목받는다

2004-05-04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의 허구

 

영국의 곡물법 폐지 – 18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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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영국의 곡물법 폐지 – 1846년

  • 2021년 1월 12일 at 9:5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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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저하게 준비했네요. 자국내 토지귀족을 약화시키고 대영제국의 우수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산업을 일궈내서 은행자본가와 정치세력이 만든 대영제국의 모습이 보입니다. 금이 귀해서가 아니라, 금이라는 한정된 자원으로 화폐의 유통속도를 조정하는 종속변수로 만든것이 인상깊습니다. 현재, 비트코인이나 은이 스멀스멀 종속변수로 다가오는 느낌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네요. 블로그 글 너무 잘 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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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년 1월 14일 at 4: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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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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