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붕괴 – 1991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약칭 소비에트 연방 또는 소련(蘇聯)은 1922년 12월 30일부터 1991년 12월 26일까지 유라시아 북부에 존재하였던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였다. 소련은 공식적으로 (그러나 본질상 상징적인 날짜인) 1991년 12월 25일 저녁 7시(모스크바 시간)에 붕괴되었다. 이후 소련의 공화국 15개가 독립하였다.

소련의 붕괴는 그 의미가 한층 복잡했고, 한층 장기간에 걸친 것이었으며, 불확실한 것이었고, 붕괴의 원인과 관련하여 논쟁의 여지가 있었고, 뭐라 표현하기에도 모호한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한 단계 발전한 국가로의 진행을 위한 혁명과 같은 진통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그에 이은 독일의 통일(1990년), 그리고 소련의 붕괴(1991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의 특징이었던 냉전체제의 종식을 가져왔다. 얄타체제, 즉 냉전체제의 붕괴는 ‘신세계 질서’를 외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세계정부로 나아감을 말하는가? 『장기 20세기』에서 아리기(Giovanni Arrighi)가 언급한, 레이건 시대의 ‘사적 고도금융’과의 동맹과 관련된 듯한 ‘세계화’, ‘신자유주의’와 맞물려 관찰해야 할 듯하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991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코드 그린

–  토머스 프리드먼 / 최정임 역 / 21세기북스 / 2008.12.15

 

2007년 2월, 나는 세계화와 에너지 정치를 주제로 미국 대사관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강의가 끝난 후 나는 러시아 국가경제아카데미 소장 블라디미르 마우와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소련 정권이 몰락한 것은 로널드 레이건 때문이 아니라, 배럴당 10달러였던 유가 때문이었다는 내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물어 보았다. 실제로 소련이 붕괴했던 1991년 크리스마스 당일의 유가는 17달러였다.

마우 교수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흔들며 아니라고 말했다. 내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다. 그는 소련을 사망시킨 것은 배럴당 10달러의 유가가 아니라, 그 이전 배럴당 70달러에 달했던 유가라고 말했다. 아랍의 석유 봉쇄 조치와 이란혁명으로 1970년대 급격히 상승한 바로 그 70달러의 유가 때문에, 소련 정부는 이성을 잃고 과도한 보조금으로 자국의 비효율적인 사업들을 지원해주면서 진정한 경제 개혁들을 뒤로 미루었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에도 뛰어들게 되었다. 그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유가가 붕괴되자 무감각하고 도를 지나쳤던 제국은 무너지게 된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비효율적인 소련 경제가 초기 몇십 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집단농장에서 농부들이 강제로 재배한) 저렴한 농산물과 (국가 산업을 일으키는 데 이용된) 저렴한 죄수 노동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에 들어서자 이러한 저비용의 인력 투입조차도 충분치 않게 되면서 소련 정부는 곡물을 수출하기보다는 수입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공산주의가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1973년과 74년 일어난 아랍의 석유 봉쇄와 유가 급등으로(러시아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제2위의 산유국이다) 소련은 저렴한 세 번째 자원, 즉 ‘석유와 가스’를 손에 넣어 15년간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마우 교수의 말에 따르면, 석유로 굴러들어온 재력 덕분에 브레즈네프 정부는 “돈으로 토지개혁론자 같은 다양한 이익집단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으며, 일부 재화들을 수입하고, 군부와 산업의 연합 세력을 매수할 수 있었다. 총수출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10~15%에서 40%까지 올라갔지요.” 이런 상황은 소련의 경직성만 더 부추겼다. “석유가 많을수록 정책은 필요가 없어지지요”라고 마우 교수는 지적한다.

1970년대에 러시아는 석유와 가스를 수출해 “그 돈을 식량과 소비재 및 석유와 가스를 뽑아낼 기계 등을 수입하는 데 썼다.” 소련은 자기 몸을 불리는 동시에 보조금도 점점 더 많은 분야로 확대해갔는데, 이런 보조금은 실질적인 제조업이나 농업 생산물, 혹은 세입 등이 아니라 거의 전부가 석유 수익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 초에 이르자 국제 유가가 내려앉기 시작했다(여기에는 미국의 자원 보존 노력도 한몫했다). “소련으로서는 다른 재화에 대한 소비를 줄이는 것이 한 가지 대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련 정부는 그럴 수가 없었지요. 모든 지지자들의 환심을 돈으로 사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소련 정부는 “외국에서 차입해오기 시작해 그 돈을 대개 소비와 보조금 지급에 이용했습니다. 인기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지요.” 소련의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공산주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면서 유가와 함께 생산량도 계속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모스크바 소재의 전환기경제연구소에서 현재 소장직을 맡고 있는 예고르 가이다르는 이 전환기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다. 1991년에서 1994년까지 러시아 총리 대행 및 경제부 장관, 제1부총리 등을 역임한 것이다. 2006년 11월 13일, 가이다르는 미국기업연구소를 대상으로 ‘제국의 몰락 : 현대 러시아를 위한 교훈’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소련 붕괴의 시작점은 1985년 9월 13일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날,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성 장관 야마니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정책을 급선회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유가 보호를 중단하고 세계시장에서 자신의 비중을 재빨리 회복해나갔다. 그 후 6개월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생산량은 네 배 증가했고, 석유 가격도 실질가격에서 대략 4분의 1로 폭락했다. 그 결과 소련은 연간 약 20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그 돈이 없으면 소련은 살아남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세계체제 동북아 한반도

–  이수훈 / 아르케 / 2004.02.28

 

필자가 주장하는 ‘세계체제의 동요’라는 전제의 단초이자 첫번째 이유는 바로 미국 헤게모니체제의 해체인 셈이다. 이 진술 역시 논쟁의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다. 언론을 위시한 학계 바깥 세계는 말할 것도 없이, 학계 내부에서도 다수의 국제정치학자들은 아직도 미국의 헤게모니가 지속되고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들은 그 근거로 미국의 경제력, 군사력, 국제정치 무대에서의 권력 등이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우위에 있다는 점을 꼽는다. 이런 일반적인 입장은 1989년 소련의 붕괴로 더욱 강화되었다. 더불어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이 무너지고 유일 패권국으로 미국이 세계질서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1991년 걸프전 승리를 계기로 세계질서에 ‘단극 모멘텀’이 초래되었다고 주장하는 국제정치학자도 있다(Krauthammer, 1991).

필자는 이 인식에 반대하며, 나중에 확인할 수 있듯이 1989년 사태에 대한 해석도 정반대, 즉 미국 패권(헤게모니와 구분해 생각해볼 필요도 있는)의 강화가 아니라 패권질서를 받쳐주었던 소련이라는 버팀목이 제거됨으로써 더욱 약화되기 시작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1989년 소련 해체 이전에 소련은 이미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으며, 미국과의 허구적 경쟁관계로 인해 그 위상을 꾸려나온 측면이 다분하다. 그러나 경제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허구와 포장이 벗겨진 것이다.

……

이런 각도에서 볼 때 냉전은 이중적 기능을 담당했다. 첫째, 미국을 비롯한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 내에서의 기능인데, 노동에 대한 자본과 국가의 안정된 지배의 확립을 담보하는 데 일조함으로써 순조로운 축적활동 보장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제로서의 기능을 했다. 둘째, 미국의 탈식민화정책에 따라 대거 등장한 신생독립국의 민족해방 열기를 잠재우고 그들을 계속 중심-주변이라는 세계자본주의 계서제(hierarchy) 속에 묶어두는 데도 일조했다(Hopkins et al., 1996). 1989년 냉전의 공식적 종말 시점까지 소련은 미국과 더불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한 기둥 역활을 해왔던 것이다. 소련은 미국 헤게모니의 주니어 파트너에 불과했지 미국의 실질적 위협이 된 적이 없었다. 소련의 위협은 미국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사실과 달리 부풀려지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했다(서재정·정용욱, 1996).

이런 점은 냉전구조의 공고화와 동북아 지역으로의 확산에 결정적 계기가 된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 특히 그랬다. 당시 미국 헤게모니사업 추진세력이었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국 내 ‘전쟁공포’를 일으키고 소련의 위협을 과장하여 국제파 대 국내파 사이의 제도정치 위기를 타개하고 헤게모니사업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재무장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진척시킨 바 있다(Lee,H.J., 1999).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군사적 케인스주의 노선 채택에 성공하고 광범위한 개입을 내용으로 하는 외교노선 확립에 성공하였다. 따라서 냉전구조를 단순한 국제 정치군사적 동서대립으로 보는 것에서 나아가 전후 미국 헤게모니체제의 형성과 그 성공적 전개의 일부로서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이수훈, 2001).

……

1989년 이후 미국은 신냉전의 고안을 위해 본격적인 ‘악마 만들기(demonization)’에 나섰다. 소련의 몰락이 갖는 독자적 의미의 하나는 그나마 미국의 노골적 군사력 행사에 제동을 걸어왔던 세력이 사라졌다는 점일 것이다. 파나마의 노리에가 대통령을 시발로 해서 악마는 줄을 이었다. 니카라과의 오르테가, 리비아의 가다피, 이란의 호메이니,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북한의 김정일, 유고의 밀로셰비치 등등 리스트는 길다. 우리로서는 북한이 이 리스트에 포함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일인데, 북한은 미국에게 ‘불량국가(rogue state)’로 낙인찍혀 기존의 봉쇄보다 훨씬 더 가혹한 압박을 받고 있다. 이런 북미관계의 기조는 ‘포용정책’을 내걸었던 클린턴 행정부 아래서도 변하지 않았다. 즉 클린턴 대통령은 사실상 대북포용 정책을 펼쳤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은 남반구의 도전을 상징하는 이들 악마를 제거하기 위해 노골적인 군사적 침공을 서슴지 않았다. 라틴아메리카 지역(파나마, 그라나다, 아이티)를 시발로 해서 1991년 1월 걸프전에서 압권을 이루고 일차적 결말을 본 과정은 미국이 패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군사적 행동도 서슴지 않으며, 언술의 일관성도 전혀 지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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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 선 필자로서는 ‘1989년 사태’를 사회주의 국가들의 시효만료로 보아야지 자본주의 체제의 승리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16세기 농업자본주의의 등장 이후 현재까지 자본주의는 어느 때고 패배한 적이 없으며 승리한 적도 없었다. 그냥 역사적으로 존속해 왔고 전개되어 나왔을 뿐이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1978년이 되면, 미국 정부는 느슨한 화폐정책을 지속하여 유로통화시장을 통제하는 세계시민주의적 금융 공동체와의 대립을 파국으로 몰아갈지, 아니면 그 대신 건전화폐의 원리 및 실천을 더 엄격히 고수함으로써 그 공동체와 화해를 추구할지 선택의 기로에 직면했다. 결국, 자본주의적 합리성이 우위를 차지했다. 카터 대통령 재임기의 마지막 해에 시작하여 레이건 재임기에 더욱 단호하게, 미국 정부는 두번째 행동 노선을 택했다. 그리고 국가권력과 자본권력 사이의 새로운 “기억할 만한 동맹”이 형성되어, 전체 냉전 시기의 특징이던 미국의 느슨한 화폐정책이 전례 없는 긴축적인 화폐 정책에 길을 내주었다.

그 결과는 레이건 시대의 벨에포크였다.

……

셋째, 균형예산을 내걸고 선거에 승리한 레이건 행정부는 세계역사상 가장 놀라운 국가 부채의 팽창을 추동하였다. 1981년 레이건이 백악관에 들어섰을 때, 연방 예산적자가 740억 달러, 국가 총부채가 1조 달러였다. 1991년이 되면, 예산적자는 네 배로 증가해 연간 3천억 달러 이상이 되었고, 국가 부채도 네 배 증가하여 거의 4조 달러가 되었다.

……

넷째, 이런 미국 국가 부채의 놀라운 증가는 소련과의 냉전의 격화(전적이지는 않더라도 주로 전략방위계획SDI을 통해서)와 일련의 선별된 비우호적 제3세계 정권들에게 징벌적으로 군사적 완력을 보여 주는 것(1983년 그레나다, 1986년 리비아, 1989년 파나마, 1990~1991년 이라크)과 결합되었다. 모든 앞선 금융적 팽창에서와 마찬가지로, 생산 수행과 뗄 수 없는 난관이나 위험성에 노출될 필요 없이 불모의 화폐에 생기를 불어넣는 힘을 준 그 “마법사의 지팡이”의 동원은, 마르크스가 국채를 통한 “국가의 양도”를 묘사한 것처럼, 이렇듯 또다시 국가 간 권력투쟁의 증폭과 결합되었다.

……

마침내 미국 정부는 사적 고도금융과 대립하는 뉴딜의 전통을 포기하고, 대신 전지구적 권력투쟁에서 상석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가용한 수단을 활용해 사적 고도금융의 지원을 획득하려 노력할 시기가 되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결과 형성된 “동맹”은 최고의 장밋빛 예상을 넘어서는 수익을 가져왔다. 구매력을 미국 수중에 재집중시키자, 미국 군사력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을 것을 거의 즉각적으로 달성해 냈다. 미국의 긴축 화폐 정책, 높은 실질 이자율, 그리고 탈규제가 제3세계 국가들에 파괴적 효과를 미치자, 이들 국가들은 신속히 무릎을 꿇었다.

……

마치 마술처럼 방향이 전환되었다. 그 이후로 제1세계 은행가들은 더 이상 제3세계 국가들에게 자신들의 과잉자본을 빌려 가라고 구걸하지 않았다. 이제는 점점 더 통합되고 경쟁적이고 위축되고 있는 세계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신용을 공여해 달라고 제3세계 국가들이 제1세계 정부와 은행가들에게 구걸하게 되었다. 이동자본을 둘러싼 목숨을 건 제3세계 국가들의 경쟁에 머지않아 제2세계 국가들이 뛰어들었는데, 이는 제3세계 국가들에는 더 나쁜 일이고 서구에는 더 좋은 일이었다.

이들 중 일부 국가들은 1970년대의 자본 과잉의 이점을 활용해 세계 최대로 금융부채를 짐으로써, 전지구적 자본 순환의 고리에 빠르게 얽혀 들었다(Zloch-Christy 1987). 자본이 다시 희소해지자, 소련 블록 전체가 갑자기 경쟁의 찬바람이 불어닥침을 느끼게 되었다. 자기 자신의 베트남(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발목잡히고, 미국과의 새로운 군비경쟁 고조에 도전을 받자, 경화된 소련 국가구조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연문명

–  르우안웨이 / 최형록,김혜준 역 / 심산 / 2011.05.10

 

1720년대부터 유럽 형태의 근대성 이식이라는 측면에서 러시아는 길고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러시아는 70여 년 동안 사회주의 실험을 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는 효율성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고, 혹은 효율성이 더 높은 유럽 양식의 근대성에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러시아의 독특한 지연地緣 현실과 지연 정치적 경험 및 지연 문화적 신분을 충분히 고려한다면 다음의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즉 러시아의 사회주의 실험은 사실상은 유럽 양식을 띤 자본주의의 한 변종이라는 것이다. 양자는 대규모 자본축적과 자본운용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측면에서, 사회 생산력을 크게 향상시켜 근대화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양자의 다른 점은 유럽은 시장과 개인의 작용을 더 중시했고, 러시아는 이와 달리 국가계획의 작용을 더 중시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는 러시아의 독특한 역사 및 문화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로 인해 러시아의 사회주의 실험은 유럽 양식과는 다른 근대성을 대표하게 되었고, 이러한 종류의 근대성은 사실상 더 효율성 높은 근대성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길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러시아의 사회주의 실험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다. 1990년대 이후 유럽식 정치적 현대성을 이식하는 데 러시아는 대단히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이러한 성공 또한 사회주의 실험이라는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전 70년 동안에 사회경제발전 수준을 대폭 끌어올리지 못했다면 1990년대 초의 혁명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백년의 급진

–  원톄쥔 / 김진공 역 / 돌베개 / 2013.10.07

 

1990년대 초에 소련과 동유럽 진영이 해체될 즈음 현지 조사를 한 경험을 회고해보면, 소련과 동유럽 진영 국가의 전반적인 실패를 단순히 ‘정치 개혁을 우선한’ 탓으로 돌리거나, 무식하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실패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는 스탈린주의적 관료주의의 상부구조와 교조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산업자본 단계의 경제적 토대에 반작용하여 초래한 실패이다.

이렇게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구소련이 주도한 동유럽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에 소속된 국가들은 오랫동안 ‘물물교환 무역’ 체제를 유지했고, 그래서 ‘경제의 화폐화 수준’을 높이기가 어려웠다. 하물며 미국처럼 저비용 금융의 무제한적 확장을 특징으로 하는 가상 경제(fictitious economy)를 실행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 따라서 소련이나 기타 동유럽 국가 모두 화폐화를 통해 적절한 규모의 금융자본을 형성하지 못했고, 국제 금융자본의 제국주의가 주도하는 글로벌 경쟁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즉 소련과 동유럽의 경우는, 능동적으로 ‘자립적 화폐화'(self-monetization)의 속도를 높인 중국의 경험과 비교할 때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1971년 브레턴우즈 체제의 해체 이후, 달러를 중심으로 한 서구의 화폐금융자본이 고삐풀린 야생마처럼 날뛰던 때,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시종 산업자본 단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금융자본 단계로 진입하지 못했다.

따라서 소련과 동유럽 진영 국가들이 자본주의의 국제적 경쟁 와중에 해체된 것은 사실 마르크스주의의 경제법칙에 제대로 부합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구소련을 대표로 하는 전통적인 산업자본 제국주의가 미국을 대표로 하는 현대적인 금융자본 제국주의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또한 인류가 여전히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가 창조한 문명’ 안에 있는 한, 무제한적으로 팽창하다가 결국 붕괴할 수밖에 없는 그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외부의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내부의 모순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거대한 체스판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 김명섭 역 / 삼인 / 2000.04.01

 

그 이전의 수많은 제국과 마찬가지로 소련은 직접적인 군사 침략보다는 경제 · 사회적 긴장에 의해 가속화된 해체 과정을 거치며 결국 내폭과 파열을 경험하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한 학자의 표현은 소련의 운명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Donald Puchala, 1994).

제국은 본래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다. 왜냐하면 하위 단위가 항상 더 큰 자주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하위 단위의 대항 엘리트가 거의 끊임없이 더욱더 많은 자주권을 획득할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국은 붕괴하기보다는 균열하게끔 되어 있다. 가끔은 매우 빠른 속도로 균열하기도 하지만, 대개 균열은 매우 완만한 속도로 진행된다.

유일한 경쟁국이 붕괴함에 따라 미국은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미국은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세계 강국이 되었다.

……

1991년 후반 세계 최대의 영토를 지닌 국가의 해체는 유라시아 중심부에 ‘블랙홀’을 남겨 놓았다. 마치 지정학자들이 그토록 중요시해 왔던 ‘심장부'(heartland)가 갑자기 세계 지도 위에서 사라져 버리는 듯했다.

이 새롭고 당혹스러운 상황은 미국에 중대한 위협을 제기하고 있다. 당연히 미국이 긴박하게 처리해야 할 임무는 아직까지도 막강한 핵무기를 보유한 채 쓰러져 가는 국가들이 적대적인 독재 국가가 되거나 정치적 무정부 상태에 빠질 가능성을 줄여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 임무가 여전히 존재하는데, 어떻게 러시아의 민주적 변화와 경제적 회복을 뒷받침하는 한편으로 새로운 유라시아 제국의 출현을 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새로운 유라시아 제국의 출현은 거대한 유로-대서양 체제를 형성하고자 하는 미국의 지정 전략적 목표를 가로막을 것이다. 미국이 의도하는 거대한 유로-대서양 체제 안에서 러시아는 안정적이고 비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의 붕괴는 단기적으로나마 징기스칸의 영토에 버금 가는 지역을 포괄했던 중 · 소 공산 블록이 균열되어 온 역사적 과정의 최종 국면이다. 징기스칸 제국에 비견될 수 있었던 현대의 유라시아 블록은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일찌감치 이탈했고, 처음부터 공산 진영에 대한 충성보다는 민족적 열망이 강할 수 있음을 시사했던 마오쩌뚱의 중국 역시 불복적 태도를 보임으로써 민족적 열망이 이념적 연대보다 강함을 증명하였다. 중 · 소 블록은 약 10년간 지속되었고 소비에트연방은 약 70년간 존속되었다.

……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는 기념비적인 지정학적 혼란을 야기했다. 단지 2주일 동안, 러시아 인민들-일반적으로 외부 세계보다도 소련의 임박한 붕괴 사실을 몰랐던-은 갑자기 자신들이 더 이상 범대륙적 제국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러시아의 국경은 과거 1800년대 초 그들이 거주하던 코카서스 지방과 1800년대 중반의 중앙아시아로, 그리고 서쪽 국경은-무엇보다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1600년대 공포의 왕 이반의 통치 시대로 축소되었다. 코카서스의 상실은 새로이 부상하는 터키의 영향력에 대한 공포를 낳고, 중앙아시아의 상실은 이 지역의 거대한 에너지 자원 및 지하 자원과 관련한 박탈감과 더불어 이슬람의 잠재적 위협에 대한 우려를 낳았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러시아가 범슬라브적 정통성과 관련된 공통적 표준의 유일하고 거룩한 담당자라는 러시아적 요구의 핵심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

요약하자면 최근까지 거대한 영토적 제국이자 유럽 중심부로부터 남중국해에 이르는 이념적 블록의 리더였던 러시아는 문제 많은 민족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외부 세계로 쉽게 이어질 수 있는 지리적 접근로는 차단되었으며, 서쪽, 남쪽 그리고 동쪽에 인접해 있는 국가와 소모적 분쟁에 노출되어 있다. 단지 사람이 살기도 어렵고 접근하기도 힘든, 거의 항상 얼어붙어 있는 북쪽 공간만이 지정학적으로 안전할 뿐이다.

 


미국의 마지막 기회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 김명섭 역 / 삼인 / 2009.02.18

 

…… 세계화에 열정을 보였던 옹호자들은 소련의 몰락도 스탈린주의의 범죄나 반공산주의 저항운동의 결과로 돌리기보다는, 소련이 새로운 시대의 경제적이고 기술적인 요구 사항에 합당하게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세계화가 미국의 비즈니스 엘리트 사이에서는 물론, 냉전이 쇠퇴해가던 기간에 급속하게 성장한 다국적 기업의 세계에서 강력한 지지층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사회 · 경제적 유동성이 갑자기 커져버린 세계에서 방향성과 항상성을 열망했던 이들 엘리트들 중 다수는 단 하나 남은 초강대국이 세계화 개념을 거의 종교적 주문처럼 수용할 것을 열망했다.

……

공산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던 혼란은 소련의 영역에만 한정된게 아니었다. 중국 역시 폭발 직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1989년 여름, 소련이 강제로 만든 정권이 폴란드에서 몰락할 때, 중국에서도 사회적 불안은 표면화되고 있었다. 정치적 통제와 사회 · 경제적 자유화의 경계와 희미해지면서 학생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대대적인 요구가 전례 없는 규모로 분출한 것은 중국 공산주의 체제 역시 내폭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

첸치천에 의하면, 차우셰스쿠의 사망 직후, 중국의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은 중국을 방문한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라바크(Hosni Mubarak)에게 부시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해줄 것을 요청했다. “동유럽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에 너무 흥분하지 말고, 중국을 같은 방식으로 다루지 마라.”

……

1990년 말 독일의 통일은 유럽 대륙의 정치적 중력의 중심에 역사적으로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전 지구적인 지정학적 균형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부시는 고르바초프가 통일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을 뿐만 아니라(서독 수상 헬무트 콜이 유인책으로 경제적 우대 조건을 덧붙인 가운데), 통일된 독일의 8천만 인구가 안보와 정치적인 문제에서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 허용되어야만 한다고 설득했다. 이것은 NATO와 유럽공동체(곧 유럽연합이 된) 양쪽 모두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러시아가 얼마 안 가 독일에서 밀려나고 동유럽(얼마 안 가 중부 유럽으로 재정의된)의 공산주의가 해체됨에 따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획득한 것들 대부분을 상실했다.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  윌리엄 엥달 / 서미석 역 / 길 / 2007.10.25

 

1986년 세계 유가 폭락은 아마도 부패한 공산당 관료조직을 개혁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모스크바의 환상에 마지막 치명타가 되었다. 1970년대 초 이후 경화 수입의 주요 원천인 대서방세계 석유 판매로 벌어들이는 소련의 수출 소득은 1986년 이후 급감했고, 바로 이때 국민들의 변화 요구로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연이어 일어난 경제적 혼란은 바르샤바 조약에 의한 동유럽 위성국가와의 유대관계를 끊어버리도록 모스크바 수뇌부를 자극한 주요 요인이었다. 모스크바는 서독의 강력한 경제 지휘를 받는 통일된 독일이 붕괴하고 있는 소련 체제 재건을 도와줄 적합한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워싱턴 당국은 동유럽에서 40년에 걸친 공산당 지배의 극적인 종말을 공식적으로는 환영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미국의 은밀한 정보세계에 의해 형성된 세계 정치관을 갖고 있으며 그 자신이 전직 CIA 국장이었던 부시는 동유럽에서의 혁명 성공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영국에서는, 토리당 내 대처 파벌이 심지어 ‘독일 제4제국’이라 할 수 있는 체제의 출현 가능성을 똑같이 경계했다.

……

1990년대 초반 소련이 붕괴하면서 많은 지역에서는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이 드높았다. 그런데 이어진 10년은 완곡하게 표현하여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지정학과 냉전이 끝나기는 커녕 그저 무대만 옮겨졌을 뿐이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은 자국의 신세계질서를 실현하기 시작했다. 1991년 연두교서에서 내세웠다가 비판적인 주목을 받은 후 조지 부시는 신세계질서라는 용어 자체를 재빨리 철회했다. 그 질서가 누구의 질서이며 긴급한 사안이 무엇인가에 대해 너무 많은 의문들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

소련의 붕괴는 지난 세기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1990년대 초 부시 행정부 내의 정책 입안자들이 러시아와 러시아의 옛 위성국가들을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지 냉정하게 계산하고 있었음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러시아는 ‘시장개혁’을 강요하여 미국 경제권 안으로 편입되게 만들 것이었다.

……

워싱턴의 정책은 거의 1세기 전 핼퍼드 매킨더 경이 개관했듯이 고존적인 지정학이었다. 매킨더는 독일, 러시아,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비롯한 당대 유라시아 주요 강대국들의 연합은 지정학적으로 결속력이 있으며 어떤 경쟁 상대와도 맞설 수 있는 필요한 경제적 원자재와 충분한 인구를 보유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세계의 지배세력이 될 잠재력이 있다고 영국 고위층에 경고했었다.

 


불황의 경제학

–  폴 크루그먼 / 안진환 역 / 세종서적 / 2009.05.18

 

사회주의의 붕괴는 묘하게도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1978년에 덩샤오핑이 중국을 훗날 자본주의로 향하게 만든 길 위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이 지금도 잘 믿기지 않는다. 베트남에서 공산당이 승리를 거둔 게 불과 3년 앞선 일이었다. 문화혁명을 다시 시작하려던 급진적 마오쩌둥주의자들이 당내에서 패배한 것은 불과 2년 전이었다. 어쩌면 덩샤오핑 자신도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확실하게 깨닫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10억의 인구가 조용히 마르크스주의를 버렸다는 사실을 다른 세계가 알아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사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중국의 변화는 중상류 지식층의 화젯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 무렵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세계 경제는 유럽과 미국, 일본이 육박전을 벌이던 투기장이었다. 중국은 고려 대상이 된다고 해도 부수적인 존재였고, 그것도 한창 떠오르던 엔 블록의 일부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점쳐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어느 날 무언가가 변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소련의 붕괴였다.

 

당시의 소련 체제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결과론적인 해석으로, 소련의 전체 구조가 일종의 날림 건축물이어서 결국은 실패로 끝날 운명이었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하지만 소련은 내전과 기근을 겪고도 살아남은 체제였다. 또 상당히 불리한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나치 정권을 물리쳤으며, 과학 및 산업 자원을 동원하여 미국의 핵 우위에 맞섰던 체제였다. 이런 체제가 어떻게 이토록 황망하게 갑자기 끝날 수 있었던 것일까? 총소리 한 방 없이 신음 소리만 내다가 말이다.

구소련의 붕괴는 정치경제학의 크나큰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임이 틀림없다. 어쩌면 단순히 시간의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즉 대의를 표방하며 반대파를 숙청하는 혁명의 열정은 두 세대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이유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쇠락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버티는 자본주의에 서서히 잠식당한 건지도 모른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나름의 이론은 다음과 같다. 아시아의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하자 역사가 자기들 편이라는 소련의 주장은 갈수록 설득력을 잃게 되었고, 결국 이것이 미묘하지만 깊숙하게 소련 체제를 뒤흔들었다는 생각이다. 승리는 거두지 못하고 기력만 소진했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분명 이 과정을 촉진시켰다. 소련의 산업이 로널드 레이건의 군비증강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사정도 한몫했다. 이유야 어쨌든 1989년 동유럽의 소비에트 제국은 갑자기 해체되었고, 1991년에는 소련 자체가 붕괴되었다.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

–  페터 가이스, 기욤 르 랭트랙 / 신동민,이학로,김승렬 역 / 휴머니스트 / 2008.09.08

 

1985년 3월, 소련이 위기에 처한 와중에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 소련 경제는 레이건이 강요하는 기술 경쟁을 지원할 수도, 그렇다고 자국민의 기대에 부응할 수도 없으리만큼 바닥을 드러낸 상황이었다. 불만에 찬 소련 사회에는 부패가 만연했고 범죄가 증가했으며, 거리는 알코올 중독자들로 넘쳐났다. 1986년 4월에는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일어나 파국 직전에 몰린 소련의 상황이 만청하에 드러났다.

고르바초프는 미국과의 파괴적 분쟁을 끝내야만 자신이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보고 미국과 대화를 재개했고, 이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예로 1987년 미국과 체결한 중거리 핵미사일에 관한 워싱턴 조약(중거리핵전력조약)은 핵군축의 시발점이 되었다. 1989년에는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각 나라가 자국의 정치노선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다. 소련이 제한 주권론을 포기하고 유럽의 위성국가들에게 자유를 선사한 것이다. 이렇게 ‘철의 장막’이 사라지고 독일이 통일되면서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유럽 공동의 집’ 정책이 현실화된 듯 했다. 하지만 제국 소련이 예상치 못한 속도로 붕괴되어 나갔다. 소련은 1991년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경제상호원조회의 해체를 선언한 직후 완전히 붕괴되었다.

 


공산주의

–  리처드 파이프스 / 이종인 역 / 을유문화사 / 2006.05.25

 

1980년대 중엽 소련은 정말로 위기를 맞았다. (아무리 공산당이 위기를 틈타 정권을 강화시켰다고 하지만) 이번의 위기는 독재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날조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중생활의 모든 부문에 걸친 쇠퇴가 오랜 세월에 걸쳐 꾸준하게 진행되어옴에 따라 발생하였다. 공산당 정권은 처음으로 무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맞닥뜨렸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광범위한 개혁이 필요했다. 즉 양보였다.

……

우선 소련의 해체부터 다루어본다. 소련은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이며 공산주의 운동을 세계적으로 추진한 원동력이었다. 1991년 이래 출판된 연구서들은 이처럼 극적인 사건(소련의 해체)이 벌어진 데 대하여 다양한 설명들을 제시했다. 예를 들면, 경제의 침체, 소련 시민들이 외국의 정보 원천에 접할 수 있는 통로의 증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패배, 무기경쟁을 지속할 능력이 없는 것 등등. 억압할 수 없었던 국내의 반체제운동과 폴란드 자유노조연대운동이 소련 지도부를 무기력하게 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공산주의에 대한 대담한 도전도 더욱 소련 정부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소련 정부는 미국이 베트남에서의 참패 이후 냉전을 추구할 의욕을 잃었고 고립주의로 후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은 참이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위에서 열거한 요소들(소련 붕괴의 원인)이 제 몫의 역활을 했다. 그러나 소련이 건강한 조직체였다면 이 요소들이 그렇게 막강한 제국을 무너뜨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국 원인은 소련이라는 조직체가 병든 때문이었다.

공산주의의 이론적 기초인 마르크스주의는 자체 내에 파멸의 씨앗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 씨앗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자본주의의 속성상 공산주의가 필연적으로 도래한다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근거 없는 주장을 들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마르크스주의는 잘못된 역사철학과 비현실적인 심리학적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유엔미래보고서 1

–  박영숙, 제롬 글렌, 테드 고든 / 교보문고 / 2008.12.05

 

1950년 이후 양 진영의 냉전상태가 시작되고, 유럽연맹이 결성되면서 세계정부 설립에 대한 논의는 잠시 주춤했다. 그러다가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다시금 활발한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세계연방정부운동가들의 성공사례는 1998년 로마법운동이고 이것이 결국 2002년 세계형법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를 설립하도록 이끌었다. 1952년에 시작된 세계정부운동이 사실상 유럽연합을 가능하게 해서 2007년까지 27개국의 5억 인구가 가입했다. 2002년 아프리카연맹이 설립되고 2004년 남아메리카연맹이 설립되었다.

세계정부로 가는 첫 번째 단계는 지역정부의 탄생이다. 유럽연합은 현재 세계정부가 모델로 삼아야 할 가장 좋은 형태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나라들이 같은 지역에 존재함으로써, 5억의 인구가 함께 모인 것이다. 이밖에 다음과 같은 형태가 있다.

 

◎ EU통합으로 다양한 지역연합이 형성되었다.

◎ 53개 아프리카국가들의 연맹인 아프리카연맹은 2002년 7월 9일 결성되었다.

◎ 아세안 역시 지역국가연합으로, 1967년 8월 8일 10개 아시아국가가 가입 · 설립되었다. 여기에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등이 속해 있다.

◎ 상하이협력기구(SCO, Shanghai Cooperation Organization)는 2001년 6월 14일 중국 · 러시아 · 카자흐스탄 · 타지키스탄 · 키르기스스탄 지도자들의 동의에 의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상하이 5’란 이름으로 출범했다가 2001년 우즈베키스탄이 합류하자, 지금은 그 명칭을 바꾸어 ‘상하이협력기구’라고 부른다.

◎ 남아메리카연맹은 2004년에 EU와 나프타 등 경제블록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에콰도르, 가이아나, 파라과이, 페루, 수리남,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등이 가입했다.

◎ 아랍연맹(Arab League)은 1945년 3월 중동의 평화와 안전을 확보하고 아랍제국의 주권과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 북아메리카자유무역협정(NAFTA)은 1994년 1월 발효되어 미국 · 캐나다 · 멕시코를 연결하는 관세와 무역장벽을 폐지하고 자유무역권을 형성한 협정이다.

 


화폐전쟁 1

–  쑹훙빙 / 차혜정 역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07.28

 

문제는 하나의 세계정부가 과연 좋은지 나쁜지가 아니라, 세계정부를 과연 누가 주도하며 그것이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부유함과 사회 발전을 진정으로 실현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200여 년의 사회적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엘리트들의 공약에 기대를 걸 수 없을 것 같다.

숱하게 많은 전란과 경제위기를 통해 서민들이 깨달은 진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경제적 자유가 없을 때 정치적 자유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며, 경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민주제도 역시 뿌리를 잃고 돈의 농간에 놀아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자유의 본질이 국민에게 선택할 권한을 주는 것이라면 미래 세계정부의 길은 단 한 갈래뿐이다. 세계의 엘리트들이 이미 전 세계 국민을 대신해 선택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폴 와버그의 아들 제임스 와버그의 말을 음미해보자. 우리는 마땅히 하나의 세계정부를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말입니다. 유일한 문제는 이 세계정부가 과연 평화적인 공감대를 거치느냐 무력적인 정복으로 형성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왜 전쟁을 필요로 하는가

–  자크 포웰스(Jacques R. Pauwells) / 2003 / 원문 : Why America Needs War

 

대부분의 미국 역사가들은 이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피해가 컸던 나라였던 소련이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훨씬 우월한 미국에 대해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미국정부 자신이 소련을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 들인다. 미국의 역사가들은 또한 소련정부가 전후 미국과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기를 매우 열망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실로 소련정부는 원자탄을 독점한 덕분에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던 초강대국 미국과의 갈등으로 얻는 것은 없었고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나 미국은-최부유층의 미국은- 전후에도 미국 경제의 수레바퀴를 최고 속도로 굴리는데 필요한 거대한 국방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긴급하게 새로운 적을 필요로 했다. 미국은 이런 방식으로 필요한 이윤폭을 유지했고 심지어는 이윤폭을 늘리기도 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냉전은 1945년 소련이 아닌 미국의 ‘군산복합체’에 의해 부추겨진 것이다(군산복합체라는 표현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전쟁 경제’로부터 이윤을 만들어낼 줄 아는 최고의 개인과 기업을 그렇게 불렀던 데에서 연유한다).

……

……1989년~1990년에 풍요로운 냉전이 지나가버렸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자신들이 전쟁 비용을 감당해왔다는 것을 알았던 보통의 미국인들은 ‘평화 배당금’을 기대했다. 이들은 국가가 그동안 군비에 지출했던 돈이 이제는 자신들을 위한 이익-예를 들어, 대부분의 유럽인들과 비교할때, 미국인들이 결코 향유해보지 못했던 국민건강보험과 다른 사회적 혜택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익-을 창출하는데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92년 빌 클린턴은 실제로 국민건강계획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려 했지만, 물론 이 계획은 결코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 당시 ‘평화 배당금’은 미국의 부유한 엘리트들에게 결코 이득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국가에 의한 사회복지의 공급은 기업가와 기업에게 이윤을 가져다 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의 군비에 의해 창출되는 어마어마한 이윤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의 군비지출이 없어져버리는 위협적인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도 시급히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로날드 레이건과 공산주의의 붕괴

–  리 에드워즈(Lee Edwards) / 2010

 

다음은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리 에드워즈(Lee Edwards) 박사가 작년 초 부다페스트의 헝가리 과학원에서 행한 “로날드 레이건과 공산주의의 붕괴”라는 제목의 강연 내용 중 일부이다.

※ 원본 :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67109

 

레이건의 대소 냉전 전략은 1982년5월 처음으로 시동이 걸렸다. 그는 그의 모교에서의 연설에서 “소련 제국은 경직된 중앙집권 체제가 기술혁신과 능률 및 개인적 성취의 동기를 파괴한 결과로 이제 무너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레이건은 영국 의회에서의 연설에서 “소련은 심각한 혁명적 위기에 봉착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전 세계적인 자유화 투쟁 앞에서 결국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 행진은 과거에 자유를 질식시키고 자결권을 억압했던 모든 다른 독재자들의 말로(末路)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처럼 결국 마르크스-레닌주의도 역사의 잿더미 속에 묻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예언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그의 국가안보 팀에게 소련의 붕괴를 위한 구체적 전략의 수립을 지시했고 그 결과 일련의 ‘국가안보정책결정지침'(NSDD)이 만들어졌다. NSDD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NSDD-32는 미국이 동부 및 중부 유럽 공산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장악을 ‘무력화’시킬 것을 선언하고 이 지역, 그 가운데서도 특히 폴란드의 반소·반공 세력들을 지원하기 위한 비밀 및 기타 공작 추진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았다.

 

►NSDD-66은 금융 신용과 고난도 기술 및 자연가스 등 3대 전략 부문을 타격함으로써 소련 경제를 마비시키는 것이 미국의 정책임을 선언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지침은 문자 그대로 “비밀리에 소련에 대해 경제전쟁을 선포”하는 것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NSDD-75는 미국이 “더 이상 소련과의 체제 공존을 포기하고 그 대신 소련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로써 미국은, 기회가 있기만 하면, 소련의 팽창주의 정책을 반격할 것임을 선언했다.

 


도토리 경제의 토대가 된 리뷰 경제사

–  곽해선 / 국일증권경제연구소 / 2004.12.17

 

로널드 윌슨 레이건은 1981년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연임에 성공하고 1989년 1월 워싱턴을 떠났다. 레이건 정부가 8년간 실행한 일련의 경제정책을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라고 부른다.

레이거노믹스는 흔히 ‘공급 측 경제학’이라고도 부른다. 레이건이 편 경제정책이 수요를 중시하는 케인스 류의 정책과 반대로 공급을 중시한 데서 붙은 이름이다.

레이거노믹스는 대폭 감세와 규제 완화를 한쪽 축으로 삼고 정부지출과 복지정책을 줄임으로써 ‘작은 정부’를 지향했다. 그럼으로써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한편 국민의 근로의욕을 고취시키고 저축 성향을 높이면 국민경제의 재화 공급능력이 배가되어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봤다.

한편으로는 레이거노믹스에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첫째는 미국 부유층의 세금 부담을 덜어줘 정권에 대한 부유층의 지지를 얻는 것, 둘째는 군비를 대대적으로 확충해 소련이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 나서게 해 소련 경제에 흠집을 낸다는 것이었다.

레이건 정권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더라도 미 · 소 냉전은 1980년대에 들어서자 이미 소련의 경제적 약화와 더불어 서서히 붕괴될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레이건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군비를 확장했다. 미국의 국방비가 1980년에는 1,340억 달러였는데 레이건 임기 말인 1989년에는 2,900억 달러로 두 배 이상 늘었다.

특히 레이건 정권은 SDI(전략방위구상)에 거액을 쏟아부었다. SDI란 소련이 핵탄도 미사일로 선제공격을 감행할 경우 미군이 소련 미사일을 우주 공간에서 파괴시키는 공격체계를 구상한 것이다.

미국이 군사 공세를 펴자 소련은 한때 군사력 증강 경쟁에 나섰지만 결국 SDI에 대항하는 방위체계를 만들 경제력이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했다. 이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 뒤 40여 년간 이어져 온 미소 냉전구조는 결정적으로 균형이 깨졌다. 소련은 결국 1991년 스스로 무너졌고, 군비 경쟁을 부추겨 소련을 흠집 내려 한 레이거노믹스는 뜻을 이뤘다.

 


<관련 그림>

 

 

1

<1946년 이후 국제 원유가격 변화>

 

2

 

소련 해체 이후의 공화국 목록

1:아르메니아 2:아제르바이잔 3: 벨라루스 4: 에스토니아 5: 조지아 6: 카자흐스탄 7: 키르기스스탄 8: 라트비아 9:리투아니아 10: 몰도바 11: 러시아 12: 타지키스탄 13: 투르크메니스탄 14: 우크라이나 15: 우즈베키스탄

 

 

3

<미국 명목금리와 실질금리 추이>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소련의 붕괴

위키백과 : 동유럽 혁명

위키백과 : New world order (politics)

위키백과 : New World Order (conspiracy theory)

위키백과 : World government

2017-11-04  [인터뷰] 볼셰비키 혁명 이후 암울한 러시아 봤다면 마르크스 경악했을 것

2014-12-15  [김기협의 자본주의 이후]<6> ‘탈(脫)근대’보다 ‘본(本)근대’를 생각할 때

2014-12-05  저(低)유가 음모

2014-12-03  [시각] 저유가의 지정학 그리고 중국

2014-11-30  글로벌 포커스 | 저유가 행진 음모인가, 묘수인가

2014-10-20  3차 석유전쟁, 벼랑 끝 치킨게임이 시작됐다

2013-11-11  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할까?

 

소련의 붕괴 –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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