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전쟁과 토번(티베트)

한반도 전체를 직접 지배하려는 당唐의 야욕에 맞선 신라의 투쟁 그리고 비록 대동강 이남의 지역에 한정되지만 한민족의 기본틀을 형성한 삼국통일의 마지막을 장식한 나당전쟁과 관련하여 그 당시 초강대국인 당唐 주위의 지정학적인 상황에 있어 지금의 티베트인 토번에 대해 살펴보고 자료를 수집해 보았다.

당연하겠지만 중국 · 일본 등의 외국학계에서는 나당전쟁에서 신라의 역활을 축소하고 토번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정세를 중요시하는 외부 지향적으로 설명하고 있고, 국내학계는 당시 국제정세는 고려하지 않고 과잉 민족주의적 입장으로 내부 지향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7세기의 동아시아는 무대를 중원에서 동쪽으로 옮겼을 뿐 전국시대와 다름없었다. 중국의 수 · 당, 한반도의 고구려 · 백제 · 신라, 바다 너머의 왜국, 중앙 초원의 돌궐 · 설연타 · 거란 · 토욕혼, 티베트 고산지대의 토번 등이 뒤엉켜 벌인 국제전은 그야말로 ‘유라시아판 열국지’였다.  원교근공(遠交近攻)과 합종연횡(合從連衡)이 되풀이되는 복잡다단한 시대였다.

 

당의 지원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친 신라가 어떻게 세계 최강 당나라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물론 신라의 성공적 방어가 기본적인 승리의 요인이지만 나당전쟁 당시는 무엇보다 서역의 강국 토번에 주목해야 한다.

 

당이 고구려와 싸울 때에는 토번에게 기회가 왔고, 당이 토번과 싸울 때에는 신라에게 한반도 통일의 기회가 왔으며 이를 놓치지 않았다. 학자에 따라 경중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토번의 강성이 나당전쟁의 승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 대해 부정하기는 힘들 것 같다.

 

당시의 세계사 연표는 :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mhistory.jsp?sub=1

 

※ 관련 글 :

대비천 전투 (670년) – 당과 토번의 전쟁 : http://yellow.kr/blog/?p=974

백강 전투 (663년) : http://yellow.kr/blog/?p=1641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보았다.

 


나당전쟁과 토번

–  서영교 / 동양사학연구, 제79집(2002.07)

 

나당전쟁은 실로 서역의 전황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669년 9월 토번이 천산남로를 급습하자 670년 4월 설인귀가 이끄는 한반도 주둔 병력이 청해에 투입되었다. 그때 요동이나 한반도 북부지역의 당군은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고, 670년 3월 신라군은 압록강 이북까지 작전 반경을 넓힐 수 있었다. 670년 7월 청해 지역에서 설인귀가 이끄는 당군이 전멸 당하자, 그 해 같은 달에 신라는 백제 대부분 지역을 장악한다.

672년 4월 토번의 사절이 장안에 도착하여 당 고종과 측천무후를 접견하면서 모종의 협상을 진행시키자, 같은 해 8월 당장 고간高侃이 이끄는 정예기병이 황해도 서흥(石門)에서 신라 중앙군단을 거의 전멸시킨다. 나아가 동년 12월에 당군은 고구려 유민이 지키고 있던 백수산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를 구원하려고 온 신라군마저 격파했으며, 그 이듬해인 673년 윤5월에 임진강 서쪽에서 고구려인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673년 겨울까지 당군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673년 12월 토번이 궁월弓月 등 천산지역의 서투르크 제부족을 충동하여 천산북로를 봉쇄하려 하자, 나당전쟁은 674년 전기간과 그 이듬해 2월까지 14개월 간 소강상태에 들어간다. 670년 토번에게 천산남로를 상실한 당은 그 대안으로 천산을 북쪽으로 우회하는 천산북로를 이용했는데, 이것마저 위협 당하자 이 루트의 방어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이다. 674년의 전쟁소강은 신라가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소중한 기간이 되었다.

그러나 675년 1월에 토번의 사절이 장안에 와서 평화회담을 진행시키자, 그 해 2월에 당군은 한반도에 재침해 왔다. 유인궤가 이끄는 당군은 임진강 이남까지 남하하여 칠중성을 대파하고 그곳을 전진기지로 삼아 매소성까지 장악했다.

676년 토번의 내분을 이용하여 당 고종이 총 공세를 가하면서 나당전쟁은 무기한 휴전상태로 돌입했다. 그 해 이근행의 말갈사단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청해의 對토번전선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676년 당시 약자인 신라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당의 재침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만일 당과 토번이 평화관계를 유지한다면 그 예봉은 또 다시 신라로 돌려질 수도 있다.

적대국가가 건재해 있을 경우 전쟁종결은 항상 여진餘震을 남긴다. 양국의 국력이 현저한 차이가 있다면 전쟁재발에 대한 우려는 대개 약소국의 몫이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나당전쟁 후 당의 재침은 결코 없었다. 따라서 나당전쟁 이후를 긴장이 없는 평화기로 상정하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를 놓고 본 것이다.

세계 최강국 당이 신라조정에 가한 압력으로 상당시간 동안 신라 전체가 떨었고, 두려워했다. 나당전쟁 후 전쟁이 다시 재발되지 않았다고 해서 전후에 바로 평화기가 도래했다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 결과만을 보고 그것에 맞추어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렇지만 거의 25년에 걸쳐서 신라조정과 당 사이에 벌어진 신경전은 약자인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아슬아슬한 것이었다.

당 고종은 나당전쟁 이후에도 한반도에 대한 지배의지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678년 9월에 당 고종은 신라를 재침하려 했다. 하지만 토번 정벌이 시급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은 여전히 토번에 발목이 잡혀있었던 것이다. 그 이듬해인 679년에 나당전쟁의 정신적 귀의처였던 사천왕사가 신라의 왕경에 세워졌다. 이는 당의 재침에 대한 우려가 신라사회에 팽배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신라인들은 나당전쟁을 경험하면서 서역의 전황이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을 인식하면서, 676년 휴전 이후에도 서역의 전황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당군의 재침에 대한 두려움은 전후戰後 신라의 급진적인 군비 증강과 일본에 대한 저자세 외교로 나타났다.

 


나당전쟁 연구

–  이상훈 /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12)

 

나당전쟁은 당시 최강대국 당과 동북의 변방국인 신라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당이나 신라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하거나 패배하였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일련의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당은 공세를 지속하였으나, 신라가 당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며 당의 보급문제를 야기시켰던 것은 분명하다. 당은 원정군의 보급문제 · 국내의 여론악화와 더불어, 토번의 서북변경 위협이라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신라원정에 실패한 이 사건은 축소되고 점차 잊혀져 갔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국사서에도 자세한 기록이 남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나당전쟁에 투입된 당군은 말갈병이 주력이었으며, 기병 위주의 부대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당전쟁기의 당군은 말갈병 중심의 번병이 아니라, 당 본토의 하남도 · 하북도 · 강남도에서 동원된 주력부대들이었다. 특히 전투 양상을 분석한 결과 말갈병은 오히려 보병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말갈족 출신 이근행은 부족을 이끄는 번장이라기보다는 당의 행정체계에 흡수된 객장으로 보아야 한다. 이근행이 토번 전선으로 이동되었다고 해서 한반도 주둔 당군 대부분이 서역으로 이동하였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즉 이근행의 서역 이동에 따라 나당전쟁이 종전되었다고 보는 ‘한반도 방기론’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나당전쟁은 정확한 정세판단을 바탕으로 한 신라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당은 대규모 원정군을 투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를 ‘정벌’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당전쟁은 최강대국 당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낸 ‘약소국’ 신라의 승리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신라는 당에 맞서 대의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해 강경책과 유화책을 적절히 구사하였다. 그리고 신라군은 당시 고유의 군사 편제단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최대 7~8만명 정도 동원할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그러므로 나당전쟁의 승리는 신라 자체의 전력이 안정되어 있었고, 신라 수뇌부의 전략전술이 주효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나당전쟁은 신라에 있어 對백제· 고구려전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전쟁이었다. 국가의 존망을 다투는 그것도 외부의 지원없이 최강대국과의 전면전이었던 것이다. 신라는 당과의 전면전에 앞서, 백제고지 일부지역과 서북상 군사 요충지인 비열홀을 장악하고, 요동으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전쟁 초기의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즉 나당전쟁은 전체적으로 볼 때 전략상의 요충지를 선점하여 당의 침략을 미연에 대비하고자 한 신라의 예방전쟁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신라는 8년에 걸친 당과의 장기전을 치루면서 한반도를 굳건히 지켜내었다. 이러한 나당전쟁의 개전과 종전은 국제정세의 영향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신라의 역량과 주도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당전쟁에서 만약 신라가 당의 전략이 토번을 중심으로 전환되기 이전에 당에게 패배하였다면, 당은 한반도의 내지화를 강화하고 만주에 대한 장악력도 높혀 나갔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만주지역에서 발해의 건국이나 티벳지역에서 토번의 발호도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토번의 발호 때문에 나당전쟁이 종전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당군의 신라 원정 실패로 인해, 토번이 강성해질 수 있는 여유와 기회가 생기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백제와 고구려의 패망을 목도한 신라의 목표는 대의명분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으며,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최강대국에 맞서 그것을 성취하였던 것이다.

 


나당전쟁기 당의 군사전략 변화

–  이상훈 / 역사교육논집, 제37집(2006.08)

 

670년대 당의 군사전략의 중심은 서북의 토번전선과 동북의 한반도전선이었으며, 당시 토번의 전황과 한반도의 전황은 서로 맞물려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669~670년 토번의 서역로 공격으로 안동도호 설인귀가 서역전선으로 이동하였고, 이와 동시에 고구려 검모잠의 부흥운동이 일어았으며, 675년 1월 토번사신이 화친을 청하자 바로 다음달 한반도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또한 의봉년간(676~679) 당의 군사전략이 대전환되어 한반도 주둔군이 철수하자, 신라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통일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669년 토번의 서역로 공격은 토번의 토욕혼 공격과 이에 대한 당의 대응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이며, 서역로보다는 청해 일대에서 벌어진 접전으로 여겨진다. 이 접전에서 토번이 승리한 후 서역으로 눈을 돌려 이듬해 4월 안서4진을 모두 함락시키게 된다. 토번이 안서4진을 함락시키자 당은 안동도호로 있던 설인귀 주도 하에 나사도행군을 편성하였고, 곧이어 한반도에서 검모잠의 고구려 부흥운동이 발생하자 당은 별다른 모병없이 즉시 고간 · 이근행을 투입시켰다. 즉 670년 당시 당은 토번전선과 한반도전선을 동시에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두 전장을 유지하던 시기인 672년 1월에 요주의 蠻이 반란을 일으키자, 또 다른 행군을 편성하여 토벌을 실행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670년대 초반 당은 병력수급에 큰 차질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의 군사전략은 주변 민족 특히 토번의 발호로 인해 의봉년간 이후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되는데, 토번의 급성장이 주요인이었다. 토번은 660년대 이후 서역과 하서河西지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670년에는 서역의 핵심지역인 안서4진을 함락시켰고, 672년에는 완충지대인 토욕혼을 완전 점령 · 병합하였다.

이러한 토번의 발호에 대해 당은 지속적으로 견제하게 되는데, 對토번전에 670년 설인귀를 투입한데 이어 강각을 투입시켰으며, 그 이후에는 소사업으로 하여금 서역지역을 재탈환케 하였다. 결국 지속적인 서역 재탈환 시도의 결과로 675년 초 우전에 비사도독부가 설치되고, 상원(674~676) 년간에 소륵도독부도 재설치되기에 이른다. 이는 서역로의 일시 회복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당은 675년 1월까지 토번에 지속적인 압력을 가해 서역로를 재탈환해가는 한편, 674년 한 해 동안 신라 정벌을 준비하였고 결국 675년 2월에 유인궤가 한반도에 등장하게 된다. 675년 초 토번이 화친을 청하자 이를 거부하여 토번에 대해 공세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렇게 볼 때 당은 670년 이후 토번전선과 한반도전선을 동시에 유지하였으며, 675년까지 당의 대외 군사전략은 공세의 지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은 676년 윤3월 토번의 내지 공격으로 인해 감목장 상실 · 교통로 단절 · 군사력 약화는 물론 수도 장안까지 위험에 노출되자, 토번에 대해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기에 이른다. 기병의 근간을 이루는 감목장의 상실과 경제적 이윤을 보장하는 서역으로 통하는 요충지의 상실 그리고 1차 방호벽 구실을 했던 하서지역의 상실은 당에게 큰 위협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당은 677년부터 하서지역에 본격적으로 진수하기 시작하고, 대규모 모병을 실시하는 등 대외 군사전략을 수세로 전환하게 된다. 그러므로 당의 대외 군사전략의 구체적인 전환시기는 676년 윤3월 토번의 내지공격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통일전쟁사

–  노태돈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9.02.25

 

그 다음 신 · 당 개전의 구체적 계기로 토번의 당의 서부 지역 공격을 거론한 설을 검토해보자. 확실히 이 시기 강성해진 토번과 당의 전쟁은 일찍이 진인각(陳寅恪)이 말했듯이 당의 군사력 중심이 동에서 서로 옮기게 된 계기였고, 676년 당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게 된 원인의 하나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신 · 당 개전의 원인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토번이 당 공격을 본격적으로 감행한 것은 670년 4월이었다. 이때 토번은 당의 서역 18주를 공략하였다. 이에 당은 하서(河西) 4진을 폐지하고 설인귀를 행군대총관으로 한 10만의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설인귀는 그해 8월 청해(靑海)의 대비천(大非川)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설인귀는고구려 멸망 직후인 668년 10월 안동도호로 임명되어, 2만의 군대를 휘하에 거느리고 평양에 주둔하였다. 그런 그의 차출과 토번전 투입은 당의 군사력 중심이 서쪽으로 이동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그러나 토번의 대두가 적어도 신 · 당 개전의 동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위에서 보았듯이 설인귀가 토번전에 차출되기 전인 669년 상반기부터 신 · 당전은 시작되었다.

 

한편 이 점을 달리 보는 견해가 있다. 즉 당이 평양성에 설치하였던 안동도호부를 669년 요동의 신성(新城)으로 옮겼는데, 이를 토번의 강성에 따른 대응책으로 보아, 이미 이때부터 토번의 강성에 따른 여파가 한반도에 주둔한 당군에 영향을 미쳤고, 안동도호부를 옮김에 따른 당군의 이동으로 야기된 군사력 공백이 신라가 당에 대한 공세를 취하게 하였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토번의 당 공격이 신 · 당 전쟁 개시의 주요 동인이며, 신 · 당 전쟁의 발발 시점은 구체적인 신 · 당 전투의 기록인 위 인용문에서 전하는 670년 3월 이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토번과 당은 660년대에 들어 천산남로와 타림분지에 있던 서돌궐 여러 부족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대립하였으며, 토욕혼(吐谷渾) 또한 갈등의 요소였다. 하지만 당과 토번의 본격적 무력 충돌은 670년 4월에 들어서다. 당이 토번의 강성을 경계는 하였지만 670년 4월 이전에는 구체적으로 군사적 공격을 가하지 않았고, 토번도 그러하였다. 토번의 당 공격 사례로 드는 다음 사안도 실제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즉 669년 9월 당 고종이 토번에 쫓겨 당에 내부(來附)해 있던 토욕혼을 다시 양주(凉州)의 남산 지역으로 옮기라고 하자, 당 조정에서 의논이 분분하였다. 즉 토욕혼을 양주로 이주시키면 토번에게 다시 침탈당할 것인데, 그것을 방지하려면 먼저 토번을 공격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흉년을 이유로 군대 동원을 반대하는 견해에 부딪혀 실행되지 못하였으며, 토욕혼을 옮기자는 안도 함께 폐기되었다. 그리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긴 것을 토번과 연관하여 논하지만, 안동도호부가 평양성에 있든 신성에 있든 그 군사력을 토번 전쟁에 투입하려면 거리상 큰 차이는 없다. 또 당의 행군제도에서 설인귀가 토번전에 차출된다 하여 안동도호부 주둔군 2만이 모두 그를 따라 투입된 것은 아니었다. 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긴 것은 다른 이유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은 669년 2월 이후 옛 고구려 땅에 부·주·현(府州縣) 편제를 시도하였다. 그것을 추진하면서 예상되는 고구려 유민의 반발에 대한 근본적 대책으로, 당은 669년 4월 부강한 고구려 유민 3만여 호를 강제로 당 내지로 이주시킬 것을 결정하고 5월 시행하였다.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김도 강제 사민(徙民)과 유관한 조처였을 가능성이 크다. 신성은 요서와 요동을 연결하는 교통로 가운데 북로의 길목에 위치하며, 북으로 부여지역 및 말갈족 거주지와 통하는 요지이다. 이런 전략적 거점에 도호부를 옮기는 것은 고구려 유민 강제이주 작업에도 편리하고 아울러 당이 말갈 부족들을 제압하고 고구려 지역을 통할하는 데에 유리하였다. 그런데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김과 강제이주 정책에 대한 고구려 유민의 저항 때문에, 평양을 비롯한 서북한 지역 일대의 당 지배력이 크게 흔들렸다. 이런 상황은 신라 조정이 새로운 도전의 가능성을 확신케하는 요소가 되었다.

 


동아시아의 역사 1

–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 2011.11

 

고구려의 멸망은 신라와 당의 대립을 본격화시켰다. 사실 나당연합군은 처음부터 내부 균열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당은 백제 멸망 후 노골적인 점령 의도를 드러냈다. 백제고지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고, 나아가 663년에는 신라를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로 하고 신라왕을 계림대도독에 임명하여 형식적으로나마 신라마저 복속시킨 모양을 취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664년과 665년에 신라 문무왕으로 하여금 웅진도독 부여융扶餘隆과 동맹을 맺고 상호 침략하지 못하도록 강요하였고, 이후 노골적으로 백제 유민을 지원하며 백제지역에서 신라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였다.

그러나 668년에 당과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뒤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670년 7월경부터 신라와 당은 백제부흥군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서로 불신이 극도로 높아지면서 마침내 본격적인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고구려 중앙정권이 붕괴된 후에도 고구려 전영역에서 유민들의 대당 전쟁이 그치지 않았는데, 이때 신라는 은근히 고구려 유민들을 지원함으로써 당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는 한편, 백제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던 것이다. 670년 4월에는 고구려 유민 검모잠의 거병과 한성(漢城)에서의 고구려국 재건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신라는 8월에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한성의 고구려 유민세력을 지원하면서 당군의 남하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신라와 당과의 전쟁을 개시한 것도 670년 7월에 등장한 한성의 고구려국을 의식한 신라의 대당 전략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670년을 전기로 하는 신라의 당에 대한 공세는 서역의 정세 변화와 밀접히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660년부터 당의 군사력이 한반도로 집중되면서, 빈틈이 생긴 서역에서는 660년에 천산지역의 서돌궐이 반기를 들었으며, 661년에는 철륵도 서역에서 당에 도전하였다. 다급해진 당은 662년에 한반도에서 군대를 돌려 설인귀 등을 서역에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서역은 당의 통제력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는데, 그 중심은 토번吐蕃이었다. 토번은 663년 이후 토욕혼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그러나 토욕혼의 연이은 군사요청에도 당은 미처 한반도에서 군대를 쉽사리 돌리지 못하였다. 게다가 665년에는 서돌궐도 내분을 청산하고 당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요동과 한반도에서 당의 군사작전이 장기화되자, 토번은 669년 9월부터 실크로드 지역에 대한 공세를 전개하여, 670년 7월에는 설인귀의 10만 대군을 청해靑海 지역에서 괴멸시키고, 안서安西 4진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서역의 전황이 급박해지면서 당의 주력이 서역으로 돌려지게 되자, 신라와 고구려 유민들은 대당전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공간을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라는 백제지역에서 당군과 대결하여 671년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함으로써, 백제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승리의 한쪽에는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전개된 고구려 유민세력의 활동으로 육로에서 당군의 군사행동이 불가능해진 점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에 당은 671년에 안시성에서 고구려의 유민세력을 격파하고 요동일대의 통제력을 확보한 후, 한반도로의 진공을 시도하였다. 672~673년에 당군은 계속 남하하여 황해도 일대의 전선에서 연이어 고구려 유민세력과 신라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당의 전쟁의 저울추는 675년 이후 신라쪽으로 기울었다. 신라군은 675년에 이근행이 거느린 말갈군 20만 대군을 매초성전투에서 대패시키고, 676년 11월에 설인귀가 거느린 수군마저 기벌포전투에서 격파함으로써, 당의 침공을 좌절시켰다. 당은 더 이상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였고, 안동도호부는 676년에 다시 요동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이러한 나당전쟁의 종식에도 676년 이후 급박해지는 토번과의 전쟁, 토번의 동맹세력인 서돌궐의 재흥 등이 중요한 국제적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이 7세기에는 중원세력의 움직임이 동북아정세에 깊이 개입함으로써 동북아 국제관계의 독자적 운동력이 해체되고, 동아시아 전체에 걸친 세력 변동의 흐름 속으로 편입되어 갔다. 그 결과 7세기에는 고구려 및 동북아의 여러 세력과 중원세력 간의 충돌이 빈번해지고 그 강도도 격화되었다는 점이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진 면이었다.

 


중국

–  백범흠 / 늘품플러스 / 2010.04.19

 

당나라는 고종(高宗) 시대에 한반도 동남에 자리 잡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왜 연합세력을 격파하고,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돌궐과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신흥강국 토번吐蕃을 하서회랑에서 축출하고, 서돌궐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신강의 투르판 분지에 위치한 고창高昌을 정복하여 북신강北新疆마저 손아귀에 넣었다. 이후 천산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키르키즈-우즈베키스탄 지역을 흐르는 추Chu강, 탈라스Talas강과 시르 다리야Syr Dariya를 넘어 아랄해 근처까지 영유한 세계제국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수도 장안長安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

무조(측천무후)가 죽은 후 그녀의 손자인 이융기는 쿠데타를 통하여 숙부인 중종의 황후 위씨韋氏 일당을 제거했다. 그는 황제(현종)가 된 다음 적극적인 대내외 정책을 실시하였다. 당시 당나라 최대의 라이벌은 티베트 고원에서 흥기한 토번(吐蕃)이었다. 고구려가 멸망당한 다음해인 669년, 명장 가르첸링이 이끄는 토번군은 설인귀가 지휘한 10만의 당나라-토욕혼 연합군을 청해호 남쪽의 대비천(大非川)에서 격파하였으며, 여세를 몰아 신강의 안서 4진 즉, 카라샤르(언기), 쿠차(구자), 호탄(우전), 카슈가르(소륵)을 장악하였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영역으로 하는 발해가 독립하고, 한반도 남부의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대비천 전투에서 당나라가 토번에 대패했기 때문이었다.

678년 가르첸링의 토번군은 중서령 이경현이 이끄는 당나라 18만 대군을 청해호 부근의 승풍령에서 대파하였는데, 이로써 청해(토욕혼)의 티베트화가 공고하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

–  토머스 레어드 / 황정연 역 / 웅진지식하우스 / 2008.05.02

 

송센 감포와 문성공주의 혼인으로 상징된 양국의 비공식 평화조약은 송센 감포와 당 태종이 살아있을 때까지는 유지되었다. 태종과 송센 감포는 649년 몇 달 차이로 죽었다. 태종의 대를 이은 고종高宗은 티베트를 공격했고, 이후 200년 동안 티베트와 중국은 여섯 차례에 걸친 서면 조약을 체결했다. 중국은 처음 두 조약을 어겼다. 두 제국은 끊임없는 화해 노력 속에서도 서로를 비롯해 아랍, 투르크, 위구르 등의 중앙아시아의 강대 세력과 계속 대치 상태에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동맹과 충성, 배반 속에 중앙아시아의 5대 강국은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싸웠다. 한 티베트 공주가 투르크의 왕과 정략적으로 맺어졌고, 중국의 공주들이 위구르와 투르크의 왕들에게 보내졌다. 677년 티베트는 타림Tarim 분지 전체를 손에 넣게 되었다. 티베트 사람들은 투르크와 연합해 당을 공격했고, 동맹이 반대로 맺어지기도 했다. 그칠날 없는 전쟁과 끊이지 않고 엎어지는 동맹의 역사였다.

티베트 북쪽 국경에 걸친 방대한 타림 분지와 중가르(Jungar, 준가얼) 분지의 내아시아 사막에 있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은 실크로드 상인들의 중간 거점이었다. 주로 불교를 믿는 아리안족과 투르크족이 건설했고 주민도 대부분 아리안족과 투르크족이며 중국인과 티베트인은 거의 없었던 고립된 도시국가들을 통치하는 자는 통상로를 통한 교역을 조종할 수 있었다. 200년간에 걸친 거대한 승부가 펼쳐지는 동안 티베트는 전부 두 차례에 걸쳐 50년 동안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하지만 200년간 두 강국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경쟁이 계속되는 동안 최종 승자는 없었다.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  고마츠 히사오 외 / 이평래 역 / 소나무 / 2005.05.05

 

타림분지(Tarim Basin)와 톈산산맥(天山山脈) 일대는 8세기 중엽까지 중원의 당, 서돌궐 · 투르기스(돌기시) · 카를루크를 비롯한 투르크계 유목 세력, 남쪽의 티베트(토번) 등 세 방면의 정치 · 군사 세력 사이의 쟁탈전에 휘말렸다.

……

앞에서 언급했듯이 티베트는 이 시기에 북쪽의 타림분지 방면으로 진출했다. 티베트인들은 국지적인 관개농업과 함께 목축, 즉 야크 방목과 유목을 병행했다. 사람들은 본교(Bon-po)라는 전통 신앙을 신봉하고, 사회는 씨족별로 나뉘어 통합을 이루지 못한 상황이었다. 7세기 초기에 들어와 이러한 분열상을 극복하고 여러 종족을 통합한 통일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때부터 250년 동안 지속된 정치 통일체를 보통 토번 왕조라 부른다. 통일 왕조를 수립한 송첸감보(643~649년 재위)는 네팔의 공주 티춘을, 그리고 641년에는 당나라 태종의 딸 문성공주文成公主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 후 당과 티베트는 20년에 걸쳐 우호 관계를 유지했는데, 불교는 이들 양국에서 들어왔다고 전한다. 이와 함께 티베트인들은 당나라에서 종이, 묵, 유리, 차, 양잠을 비롯한 각종 문물과 제도를 수립하고, 인도와 네팔에서 천문학과 의학, 예술 공예를 받아들였다. 이와 함께 송첸감보 시대에는 산스크리트어를 모델로 하여 티베트 문자와 문법을 창제하는 등 티베트의 독창적인 문화가 생겨났다.

7세기 후반에 토번은 당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즉 토욕혼(Tuyuhun, 吐谷渾)으로부터 칭하이靑海, 선선, 체르첸을 빼앗아 타림분지로 팽창하기 시작하고, 수차례에 걸쳐 당의 타림분지 오아시스 지배를 위협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670년에는 쿠차에 설치되어 있던 당의 안서도호부를 우전군과 함께 투르판 분지로 철수하게 만들었으며, 돌궐의 잔존 세력과 연합하여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기도 했다. 그 후 680년대에도 토번의 타림 진출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692년 당나라는 투르기스와 연대해 쿠차를 탈환하고, 그곳에 3만 군대를 주둔시켜 안서도호부를 부활시켰다. 토번의 제5대 왕 티데축첸(704~754년 재위)은 금성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당나라와 화해했는데, 이때 티베트에 유교, 도교, 불교 경전이 전해졌다.

 


중국과 이란

– 존 W. 가버 / 박민희 역 / 알마 / 2011.12.30

 

중국의 진과 당 왕조가 먼 서역 지방에서 점유했던 지역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진(西晉) 왕조는 수백 년 동안 계속된 분열의 시기 이후 중국을 재통일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50년밖에 유지되지 못했다. 진의 세력이 붕괴되고 중국은 다시 300년 동안 분열되었으며, 그에 따라 서역에서 중국의 세력도 쇠퇴했다. 서기 640년대와 650년대에 당의 세력이 다시 서쪽으로 확장되어 중국 역사상 가장 서쪽까지 미쳤다. 650년에 당의 군대는 서돌궐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지배력을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 동부까지 넓혔다. 이때까지 서돌궐 제국의 조공국으로 여겨졌던 서역의 제후국들은 당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써 당의 지배력은 서쪽으로 옥수스(아무다리야) 강 계곡과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서부까지 미치게 되었다. 동쪽으로 오늘날의 신장 지역에서는 타림분지가 중국의 보호령인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로 명명되었고, 사산조페르시아계 귀족에 의해 통치되었다. 하지만 옥수스 강 지역에서 당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665년 반란이 일어나 당의 서역 제후국들은 독립하게 된다.

 


전쟁으로 읽는 한국사

–  황원갑 / 바움 / 2011.10.15

 

한반도 지배의 주도권을 둘러싼 나당전쟁은 7년 동안 벌어졌는데, 이 전쟁 최후의 전투는 육상전이 아니라 문무왕 16년(676년) 11월에 금강 하구에서 벌어졌던 기벌포(伎伐浦)해전이었다.

이 전투는 『삼국사기』에 나오는데도 중국 학계에선 부정하고 있다. 그들에게 그토록 치욕스러운 패전이 아니었다면 그런 황당무계한 강변은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당전쟁에서 신라의 승리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대는 중국을 통일한 대제국이었고 이른바 ‘정관(貞觀)의 치(治)’로 불린 당태종의 치세 전성기 직후였다. 방패 구실을 하던 고구려마저 멸망한 뒤였다.

그러나 이 나당전쟁에서 신라에게 유리한 면도 있었다. 첫째는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군과 함께 싸웠다. 그래서 675년의 매소성전투가 있기 전부터 당군은 이미 상당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둘째는 때마침 지금의 티베트인 토번(吐蕃)이 당나라의 발목을 잡았다. 7세기 초 송첸감포에 의해 통일왕국이 수립된 토번은 662년부터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당과 본격적인 전쟁을 벌였다. 675년 매소성에서 신라에 대패한 이근행이 한반도를 재침하지 못한 것은 676년 초 토번 전선으로 차출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토번 쪽 상황이 안정되자 당나라는 676년 11월 최후의 신라 침공을 감행한다. 설인귀가 이끄는 대함대가 기벌포로 진입했던 것이다. 중국 학계는 ‘설인귀가 상원(上元) 연간(674~676)의 사건에 연루돼 유배를 갔다’는 중국 측 기록을 들어 이를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구당서』를 보면 설인귀가 676년 이후에도 여전히 처벌받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상원 연간에 유배를 간 것’이 아니라 ‘상원 연간에 있었던 사건에 연루되어 나중에 유배를 간 것’이 되는데(경북대 박사과정 이상훈), 그 사건이란 바로 기벌포해전이었다.

 


관련 지도

 

 

1

< 700년 당시의 토번의 영역을 보여주는 지도 >

 

 

 

2

『나당전쟁 연구』(이상훈)에 나오는 지도인데 학자에 따라 676년3월의 공격을 다르게 보는 이들도 있다.

 

 

 

3

< 당唐의 시대별 영역 변화 >

 

 

 

4

< 나당전쟁 > 관련 지도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나당 전쟁

위키백과 : 토번국

위키백과 : 가르친링

네이버 지식백과 : 설인귀

한국학중앙연구원 : 삼국사기

위키소스 : 구당서(舊唐書)

위키소스 : 신당서(新唐書)

2016-10-10  한민족 최고의 전쟁은 통일신라의 대당(對唐) 결전

2016-02-07 티베트와 신라가 동시에 唐을 공격해 삼국통일이 가능했다

2009-03-31  “삼국통일전쟁은 국제전, 동아시아국 대다수 참전”

2007-01-30  삼국통일과 당시 국제정세 재조명

2007-01-30  신라를 위한 변명

2006-12-08  [당번고도를 가다](2)눈물바다 일월산(日月山)을 넘어

http://blog.daum.net/0116010989/15876827

http://blog.naver.com/jedda/20064609494

http://songij21.egloos.com/1374086

http://dydvlf629.blog.me/150101706066

나당전쟁과 토번(티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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