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자 합의 (Plaza Agreement) – 1985년

G5 재무장관들은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달러 대비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절상을 유도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플라자합의(Plaza Accord, Plaza Agreement)를 도출했다. 당시 미국 재무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는 지나친 달러 강세는 세계 경제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의 하나라며 달러 약세를 위한 정책 공조를 설득했다. 물론 미국은 달러 강세로 떠안은 막대한 재정, 경상수지 적자를 플라자합의로 경감시킨다는 핵심적 의도가 있었다.  또한 당시 뉴욕 증권가에서는 미국의 대일본 채무의 50% 탕감이 플라자합의의 숨은 배경이라 분석했다.
플라자 회의에서 일본에 강제된 미국 달러에 대한 엔화의 상대적 평가절상은 미국 달러에 투자한 일본 자본에 엄청난 손실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의식하지 못한 것이지만, 이는 또한 동아시아에 심층적으로 그리고 광범하게 뿌리를 뻗어 나가는 일본 자본의 힘을 강화시켰고 동아시아 시장은 가장 역동적인 팽창 지대가 되었다.

 

달러는 1979년부터 6년 연속 강세였는데 FRB를 이끌던 폴 볼커(Paul Volcker)가 미국의 고 인플레이션 위험에 맞서 1979-1982년 단행한 통화긴축이 배경이 됐다. 엔/달러 환율은 플라자합의를 기점으로 240엔 대에서 2년 간 120엔 수준까지 하락(달러 가치 하락)했다. 달러는 같은 기간 독일 마르크화 대비로도 30% 가까이 떨어졌다.

위의 달러의 급격한 변화는 위기의 달러를 구하고, 제3세계 국가들을 무릎 꿇게하고 나아가 소련과 진행하고 있던 제2차 냉전에서의 승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동시에 발생한 플라자합의와 사우디의 산유량 증산 같은 복잡한 국제정치경제…)

 

– 케인지안과 신자유주의 시대 (출처 : 동부증권)

미국이 주도하는 세상은 70년대의 화폐 위기, 달러 위기를 정치경제적인 방법으로극복(?)하고 플라자 합의 즈음으로 신자유주의가 주도하는 세상, 현상적으로 달러 약세와 금리 약세의 세상이 되었다. 향후의 세상은 어떻게 될런지…

※ 관련글

– 미국체제 위기 (1968년 ~ 1973년) : http://yellow.kr/blog/?p=582

– 닉슨, 달러-금 태환 정지 선언 – 1971년 : http://yellow.kr/blog/?p=1106

 

한국은 플라자합의 이후 저유가와 저금리에 이어 저달러(엔화 대비 달러화 가치 하락)로 ‘3저(低)’ 호황을 구가했다. 1986년부터 3년 동안 연 10%가 넘는 성장률을 보였다. 아래 관련 그림을 보면 1985년부터의 종합주가의 강력한 상승을 볼 수 있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985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레이건 시대 대부분에 일본은 전체적으로 미국의 요구를 추종했다. 이렇듯, 1980년대 초중반 제2차 냉전 시기에 일본은 미국의 대외 경상적자와 내부적 재정 불균형을 지원하기 위해 엄청난 자본을 투여했다. 게다가 일본은 미국의 전략적 필요상 중요하다고 간주된 나라인 터키, 파키스탄, 수단, 이집트 등에 점점 더 많은 양의 쌍무적 원조를 제공했다. 동시에 일본은 고도금융에서 미국의 지배를 흔들지 않았다. 세계금융시장에서 대출가능한 자금을 놓고 벌어진 미국의 경쟁 때문에 몇몇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에서 거의 파산상태가 초래되었을 때, 일본은행들은 B. 스톨링스의 말을 빌리자면(Stallings 1990: 19), “미국은행들 자신보다 더욱 긴밀하게” 잇따른 왜채 위기를 관리하기 위한 미국의 지침을 따랐다. 그리고 미국 정부가 이 위기를 다루기 위해 IMF와 세계은행을 강화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일본은 그 투표 구조를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도 이들 조직에 대한 공여금을 늘리는 데 기꺼이 동의했다(Helleiner 1992: 425, 432~4).

일본이 미국의 요구를 추종한 것은 일본이 아직도 미국의 군사적 보호가 아니라 – 그 한계는 베트남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 일본 사업의 수익성을 위해서 미국 및 여타 중심부 시장에 근본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전적으로 이해가능한 일이다. 구체제가 일본의 금융적 지원 부족 때문에 붕괴한다면, 일본 사업이 가장 먼저 고통을 겪을 것이다.

……

 

1985년 G7의 플라자 회의에서 일본에 강제된 미국 달러에 대한 엔화의 상대적 평가절상은 미국 달러에 투자한 일본 자본에 엄청난 손실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의식하지 못한 것이지만, 이는 또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심층적으로 그리고 광범하게 뿌리를 뻗어 나가는 일본 자본의 힘을 강화시켰다. 아래의 도표가 보여 주듯이, 일본의 해외 직접투자가 새로운 고조를 경험하고 지역적 산업 팽창의 제2 라운드가 시작된 것은 바로 1985년 이후였다.

 

1

– 20세기 말 동아시아 흐름의 공간 / 출처 : Ozawa(1993: 143)

 

일본 자본이 이 방향을 향해서 더 나아갈수록, 일본 자본은 미국의 보호력과 구매력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졌다. 앞서 지적했듯이, 전반적으로 정체 상태에 있고 점점 더 침체되는 세계경제 속에서 동아시아 시장은 가장 역동적인 팽창 지대가 되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일본 자본의 초민족적 팽창이 더욱 자국 가까이로 방향 전환됨에 따라 등장한 새로운 두 번의 지역적 산업 팽창 라운드는 냉전 시대의 오래된 적들을 상호의존적인 두텁고 넓은 상업망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 이 지역의 보호비용은 크게 줄어들었고, 그에 상응해 세계의 새로운 작업장으로서 동아시아의 경쟁우위는 증가했다.

 


위기와 동아시아 자본주의

–  이수훈 / 아르케 / 2001.10.13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상당 기간 미국은 일본에게 막대한 지원을 했다. 일본을 동아시아의 ‘공장’으로 부활시켜 이 지역을 자신이 주도하는 자유주의적 교역 질서 속으로 통합할 필요 때문이었다. 1940년대 말에는 일본 산업의 부흥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으며, 그 다음 케네디 행정부 때에는 일본에게 역내 경제적 영향력을 부활하도록 만드는 충동이 주어졌다. 한일 간의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지역적 · 국제정치적 맥락도 이것이다(커밍스, 1996, pp. 48-49).

특히 1949년 중국공산당의 승리, 연이은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등 역내 공산주의의 확산 위협은 미국에게 일본을 자신의 ‘헤게모니 사업의 하위 파트너’로 삼도록 추동한 추가적 요인이 되었다. 미국은 일본이 미국시장에 접근하는 데 특혜를 허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 필요한 군수 구매라는 ‘선물’을 내려 일본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었다. 미국이 자신의 ‘헤게모니 사업’을 위해 출혈을 하는 동안 일본은 ‘무임승차’로 산업발전의 탄탄대로를 달렸던 것이다. 브레진스키 같은 사람도 “미국과 연계가 없었으면 현재 일본의 융성은 없었을 것”(Brzezinski, 1988)이라는 진술을 하고 있는 바, ‘아메리뽄’이라는 새로운 공동관리기구를 주장하는 그의 정치적 입장을 떠나보면 이 같은 분석은 타당하다.

두 국가가 공조관계를 형성한다고 해서 매사에 양국이 협조하거나 부드러운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일본은 특히 1980년대 후반 들어 경제 분야에서 서로 첨예한 경쟁을 벌여온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 일본의 경제적 우위가 가시화되자 미국민들은 정서적으로 일본에게 적대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실제로 정치지도자들도 ‘일본 때리기’에 나섰다(Chiu and So, 1996: pp. 44-45). 미국민에게 일본은 불공정한 경제관행을 실행하여 미국의 산업적 기반을 침식하는 장본인이자,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적’ 국가이다. 극단적으로는 일본이 종국에 미국과 전세계를 식민지화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던 것이다(McCormack, 1990, p. 2). 보호무역주의가 전면에 나선 것도 이때이며, 다기한 무역분쟁이 미· 일 간에 첨예한 형태로 나타난 것도 바로 이때다.

미국은 이런 노력과 조치에도 불구하고 국제수지의 개선 조짐이 보이지 않자 1985년에 엔화 평가절상을 요체로 하는 ‘플라자 협정’을 체결한다. 그 결과 엔화는 급작스럽게 평가절상되었는데, ‘플라자 협정’ 이전에 1달러당 237엔이던 환율이 1988년에는 128엔으로 떨어졌다(Chiu and So, 1996, p. 43). 불과 3년 사이에 엔화가 거의 두 배로 평가절상된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미국의 수지적자는 나아지지 않았다. 수지적자는 재정적자와 맞물리게 되었고, 위기의식에 봉착한 레이건 행정부는 ‘공정 무역’이라는 이름으로 의회의 지원을 받아 이른바 ‘옴니버스무역 및 경쟁력 입법’을 제정하여 ‘슈퍼 301조’라는 전가의 보도를 마련하고 이를 휘두르기도 하였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한국도 이때 심한 개방 압력에 시달렸다. 일본에 대한 공세는 이에 그치지 않고 내정간섭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지경에 달하여, 일본인들의 소비와 저축 행태를 문제 삼기에 이르렀다. 일본인은 더 많이 소비(미국 제품을)해야 하고, 저축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

미국이 자국의 국제수지 규모가 너무나 커 위기의식을 느끼고 또 그 주범이 대일 무역적자라고 판단하여 급기야 ‘플라자 합의’를 도출해낸 1985년 한 해만 하더라도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는 500억 달러를 넘었다. 이후 엔화의 급격한 평가절상, 무역입법, 슈퍼 301조의 발동 등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미 · 일 무역불균형에는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본의 주력 수출상품인 자동차, 반도체, 기계부품, 전자제품 등이 환율 변동에 비교적 탄력성이 낮다는 점과, 1980년대 말기 일본의 경기침체로 미국의 대일본 수출품목인 농산물, 목재, 기타 천연재료 등이 부진한 실적을 기록하였다는 데 있다(Chiu and So, 1996, p. 35). 가령 1991년에도 미국의 대일본 무역적자는 382억 달러에 이르러, 이전보다 다소간 감소하긴 하였지만 무역수지 불균형구조가 계속 유지되었던 것이다.

 


복잡계 워크샵 – 복잡계 이론의 사회과학적 적용

–  복잡계 네트워크 / 삼성경제연구소 / 2006.06.30

 

복잡계 이론이 동적 메커니즘을 구현하는 데 강점을 지닌 이론틀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국제정치 분야에서 냉전의 종식이나 9.11사태와 같은 갑작스러운 변화를 모델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예측은 어렵지 않다. 앞에서도 논의했지만, 기존의 국제정치 이론들이 이처럼 중요한 격변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복잡계 이론의 ‘임계성(criticality)’ 관념은 시스템 다이내믹스의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특히 협력의 현상뿐 아니라 전쟁이나 폭력과 같은 갈등 현상들의 급격한 발발이 국제정치에서 더 많은 관심을 끌고 있으므로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유도해내는 꼭짓점인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의 관념은 앞으로 활용 분야가 넓을 것으로 전망된다(글래드웰, 2000).

……

지금까지 국제정치 이론에서 이와 같은 임계성의 관념과 밀접하게 연관된 연구들이 드물지만 산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헤게모니의 붕괴에 따른 다자간 협조체제의 등장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셸링(Schelling)의 k-group 이론을 기반으로 하는 이러한 연구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지탱해오던 헤게모니 체제가 붕괴된 이후에도 어떤 방식으로 세계경제의 질서가 유지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있다. 여기에서는 현실주의 이론에서 강조하는 강력한 리더십, 즉 헤게모니가 세계의 관리를 책임질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한다 하더라도, 체제가 붕괴될 경우 헤게모니와 더불어 손실을 더 크게 입게 될 여타 강대국들이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여 헤게모니를 떠받치는 원리를 모델로 구현하고 있다(Snidal, 1985). 아마도 1970년대 초반 미국의 금태환 중지 선언 이후 헤게모니 국가의 지위가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음에도 유럽과 일본 등 기타 국가들이 미국의 경제를 지지해주는 보조적인 역활을 담당해오고 있는데, 오늘날의 G8과 같은 선진국 연합이 이러한 그룹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셸링이 말한 ‘k’란 결국 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자발적으로 협조체제에 동참하는 국가들의 수를 일컫는 것으로, 복잡계 이론에서 제기하는 ‘임계성’ 또는 ‘임계값’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Schelling, 1978, pp. 213~243).

 


21세기 자본

–  토마 피케티 / 장경덕 역 / 글항아리 / 2014.09.12

 

1970년에서 2010년 사이의 가장 극적인 거품은 분명 1990년 일본의 경우다(도표 참조) 일본에서 민간 부의 가치는 1980년대 초 국민소득의 4배를 약간 넘는 수준에서 1980년대 말에는 거의 7배 가깝게 치솟았다. 분명 이런 거대하고 극단적인 급등은 어느 정도는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는 1990년대 초에는 민간자본의 가치가 급락하다가 1990년대 중반부터 국민소득의 6배 정도로 안정화되었다는 사실을 봐도 알 수 있다.

 

2

– 1970년 부유한 국가들의 민간자본의 가치는 국민소득의 2배에서 3.5배였는데, 2010년에는 4배에서 7배로 상승했다.

(출처 및 통계 : piketty.pse.ens.fr/capital21c )

 


경제독법

–  곽수종 / 원앤원북스 / 2009.09.01

 

한국경제가 3저 호황을 누리던 때 밖에서는 일본과 독일을 상대로 한 미국의 ‘폭탄 돌리기’가 시작되었다. ‘제1차 플라자 합의’의 요구가 그것이다. 이미 1 · 2차 오일쇼크를 통해 세계경제의 불균형이 어느 정도 조정되었으나 충분치 못했다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균형조절이 필요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출범한 GATT의 다자간 자유무역주의는 서독과 일본이라는 신흥선진국을 탄생시킨다. 한쪽이 뜨면 다른 한쪽이 반드시 지게 마련이므로 미국 제조업은 독일과 일본의 부상으로 직·간접적인 구조조정의 압력에 직면하게 된다.

미국 제조업의 성장 한계를 나타내는 물적 증거로는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들 수 있다. 미국경상수지 적자 규모가 크게 증가했던 시기는 크게 1950년대 중반 이후, 1970년대 초반, 그리고 1980년대 초반 2차 오일쇼크 기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 가운데 1950년대와 1970년대 쇼크는 금리인상정책을 통해 거의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초반에 발생한 오일쇼크, 즉 공급측면의 비용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과 미국경상수지 적자 확대로 글로벌 환율정책을 통해 새로운 해결을 시도하게 되는데, 제1차 플라자 합의가 그것이다.

 

독일과 일본의 수출 주도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제조업 중흥이 원유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상승과 미국의 경상수지적자를 주기적으로 발생 시키는 원인으로 지적된 것이다. 1985년 이루어진 제1차 플라자 합의는 미국이 산업구조를 금융산업 중심으로 재편하는 데 소요된 경비, 즉 경상수지 적자의 공동부담을 요구한 것이다. 제1차 플라자 합의가 바로 독일과 일본에 이러한 자국의 구조조정 비용을 공유하자는 것이며, 이에 독일과 일본은 ‘죄수의 딜레마’의 해법처럼 모두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독일과 일본의 합의에 의해 제1차 플라자 합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자, 한국 및 동남아 국가들에게 예상치 못했던 기회가 오게 된다. 당시 3저 호황이 그것이다. 이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소위 네 마리 용이라고 불리던 한국 · 홍콩 · 싱가포르 · 대만의 경제성장 주요 배경이기도 하다. 또한 독일과 일본은 마침내 ‘탈냉전’의 난기류 속에 통일과 부동산 버블붕괴에 의한 장기침체를 맞게 되고, 멋모르고 앞만 보고 나가던 아시아 신흥개도국들은 1998년 그동안 말로만 듣던 외환위기의 막강한 파괴력을 몸소 경험하게 된다.

 

1985년 제1차 플라자 합의로 일거에 경상수지 적자문제를 일소한 미국은 명실상부한 세계경제의 1인자로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취하게 된다. 실리라 함은 냉전시대에 세계경찰국가로서 지불했던 비용을 탕감받고, 부채에 대한 부담 없이 IT산업을 근간으로 하는 금융산업의 급속한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1990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페레스트로이카 · 글라스노스트로 인한 동독과 소련연방의 해체는 1917년 볼세비키 혁명 이후 지속해오던 이데올로기적 대립구도를 완전히 붕괴시켜버린다. 미국은 탈냉전으로 나타날 수 있는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 또는 ‘공백’ 현상을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에 대한 연합군의 응징, 즉 ‘사막 태풍(desert storm)’으로 잠재운다.

 


주식자본주의와 미국의 금융지배전략

–  홍찬선 / 무한 / 2000.01.20

 

미국의 금융지배전략이란 말 그대로 ‘미국이 금융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전략’을 가리킨다. 현재 세계경제의 주도권은 돈의 흐름, 즉 금융에 있다. 80년대까지는 물건을 만드는 제조업에 있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달라진 점이다. 제조업 시대에서는 일본이 세계제패의 꿈을 키웠다. ’21세기는 일본의 시대’라든지 ‘일본제일(Japan is number One)’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일본의 영향력은 급격히 축소됐다. 일본이 2류국가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감도 많아졌다.

일본이 이처럼 패권경쟁에서 뒤떨어지게 된 것은 파워의 중심이 제조업에서 금융으로 옮겨가는 패러다임 시프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패러다임 시프트는 미국이 지난 70년대부터 은밀히 추진해 온 ‘금융을 통한 세계지배전략’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은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S&L(저축대출조합)의 대규모 부도로 요약되는 금융위기를 극복하면서 금융의 실력을 축적했다. 그때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실력행사에 나서고 있다. 97년 7월부터 시작된 동남아시아의 통화 · 금융위기도 이런 미국의 금융지배전략에 의해 비롯됐다는 것이 이 책이 주장하는 요지다.

미국의 금융지배전략은 BIS(국제결제은행)의 자기자본규제와 국제적인 신용평가기관, 그리고 헤지펀드와 국제자금의 신제국순환을 연결하는 네 개 기둥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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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레이거노믹스는 군사력우위와 달러강세를 양축으로 하는 ‘강한 미국(Strong America)’ 정책이었다. 이를 위해 고금리와 재정지출확대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재정적자와 경상수지적자가 함께 늘어나는 쌍둥이적자를 유발했다. 그러나 이같은 쌍둥이적자는 이면(裏面)에 신제국 자금순환 구조를 정착시킴으로써 금융을 통한 세계지배전략을 마련하는데 튼튼한 기틀이 됐다. 85년 9월에 등장한 플라자협정은 이런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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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일본은 95년 8월 그때까지 지속돼 온 「엔고 – 달러저」를 「달러고 – 엔저」로 전환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했다. 이 합의를 85년 9월, 달러약세에 합의했던 플라자협정에 빗대 ‘역(逆) 플라자협정’이라고 부른다.

주요 내용은 ① (95년 4월 한때 80엔까지 급락했던) 엔 달러 환율을 달러당 1백 엔 선으로 회복시키고  ② 미국은 일본에 대해 통상압력을 상당기간 보류하는 대신  ③ 일본은 저금리 정책을 견지함으로써 미일간 금리차를 4% 이상으로 유지하고  ④ 내수확대를 위해 재정확대정책을 채택한다는 것이었다.

역플라자협정은 금융을 통한 지배(달러강세가 미국이익에 부합한다)를 주장한 루빈과 통상압력을 통한 지배(달러약세를 통한 경상수지적자 감소)파인 버그스텐과의 이데올로기 경쟁에서 루빈이 승리한 것을 의미한다. 즉 통상을 통한 문제해결방식을 버리고 금융을 통해 세계의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정책전환인 것이다. 이는 토마스 라블렉 체이스맨하탄 회장이 94년에 “리스트럭처링을 마친 미국 은행은 자본충실도와 재무건전성에서 세계 최강이 됐다”며 ‘미국의 승리’를 선언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후 미일간 통상마찰은 사라졌으며 대신 미국의 일본금융시장 진출을 둘러싼 마찰이 심화됐다.

… …

서세동괴론(西勢東壞論)은 멀게는 71년의 닉슨쇼크에서부터 시작됐다. 미국의 금융지배전략이 싹튼 것이 바로 닉슨쇼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세동괴론의 실질적인 출발은 85년 9월의 플라자협정(Plaza Agreement)이라고 할 수 있다.

되돌아보면 동아시아의 경제발전과 통화 · 금융위기는 엔 달러환율의 변동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동아시아 경제가 높은 성장을 계속한 기간은 엔화 가치가 강세를 나타냈던 86~96년의 10년간이었다. 85년 9월 이른바 ‘플라자협정’에 의해 엔 달러 환율은 달러당 2백40엔대에서 95년 4월에는 80엔대로 3분의 1 수준으로 급락했다. 그동안 일본은 ‘엔고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아시아에 진출했다. 임금 등 생산 코스트가 싼 아시아를 생산거점으로 삼기 위한 전략이었다. 동아시아는 일본기업의 직접투자 바람을 타고 ‘기적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국제투자자금은 연평균 8~10%에 달하는 높은 성장을 노리고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자금시장에 넘치는 돈은 주식과 부동산에 몰려 결국은 버블을 발생시켰다.

그러나 95년 8월, 이런 성장의 호순환(好循環)에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이른바 ‘역(逆) 플라자협정’에 의해 엔 달러 환율이 급격히 상승(엔화가치의 하락)했기 때문이다. 역 플라자협정은 미국의 재무성과 일본의 오쿠라쇼(대장성)가 95년 8월 초 그때까지의 ‘엔고 – 달러저’를 ‘엔저-달러고’로 바꾸기로 비밀리에 합의한 것을 가리킨다. 역 플라자협정에 의해 일본은 95년 9월 재할인율을 사상 최저수준인 0.5%로 인하, 4년 4개월이 지난 99년 12월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역 플라자협정에 의해 엔 달러 환율은 ‘V자형’ 곡선을 그리며 급상승했다. 태국에서 통화위기가 일어난 97년 여름에는 달러당 120엔대까지 상승했다. 엔화가치가 2년간에 50%나 떨어진 셈이다. 엔화 약세가 진행됨에 따라 아시아의 수출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  강만수 / 삼성경제연구소 / 2005.05.06

 

플라자합의 후 엔화는 달러당 260엔에서 130엔으로 100% 절상되어 일본의 미국 수출가격은 급격히 오르고 일본의 대외자산은 엔화 기준으로는 반 토막이 되어버렸다. 이 여파는 부동산가격의 하락을 시작으로 일본경제의 ‘버블’이 터지면서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규모가 누적되었고 ‘잃어버린 10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플라자합의 후 2년간 달러는 주요통화 대비 30% 절하되었다.

플라자합의와 관련하여 뉴욕 증권가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미국이 대외부채를 갚기 위해 1,000억 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일본에, 500억 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독일에 지불하고 서로 교역을 폐쇄하면 일본과 독일 경제는 50~70%가 붕괴될 것이고, 미국은 30% 이하의 피해를 볼 것이란 것이다. 미국은 일본과 독일을 이런 논리로 압박해서 합의를 유도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법률상 액면 금액의 제한이 없어 1,000억 달러짜리도 발행할 수는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 1만 달러 지폐가 발행된 경우도 있다고 했다. 당시 뉴욕 증권가에서는 미국의 대일본 채무의 50% 탕감이 플라자합의의 숨은 배경이라 분석했다.

……

우리가 1989년 8월 한 · 미 금융정책회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3004조’가 직접적인 근거이지만 ‘슈퍼301조’에 의한 무역보복을 피하기 위한 것도 배경이 되었다. 미국은 일본에 대하여 1983년 엔달러 위원회(Yen-Dollar Committee)를 발족시키고, 1985년의 플라자합의에 따라 엔화의 절상을 유도하며, 1989년부터 일본은행들이 BIS 자기자본비율 8%를 지키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일본과의 무역적자가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1989년 ‘슈퍼301조’에 의한 보복조치를 피하기 위해 일본은 미국과 구조조정협의(Structual Impediment Initiative, SII)’를 하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일본의 시장개방을 위해 토지제도, 계열기업 관계, 유통체계 등 광범위한 자율화를 압박했다. 일본에 적용한 방법을 한국에도 적용하게 된 것이다.

 


붐 앤 버블

–  로버트 브레너 / 정성진 역 / 아침이슬 / 2002.12.12

 

재무부장관 로버트 루빈의 주도하에 미국은 1995년 봄과 여름 사이에 일본 자동차 부품 시장 개방 압력을 모두 중단했다. 게다가 미국은 일본과 독일 정부와 엔화와 마르크화 가치의 하락과 달러 가치의 상승을 위한 공동 보조를 취하기로 합의했다. 이것은 그때까지 경쟁력 지향적이고 수출지향적인 미국의 대외 경제정책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 보였던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켰다. …… 미국과 일본과 독일이 이룬 합의는 중요한 것이었으며, 1985년 플라자합의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미국의 주요 동맹국과 경쟁국들의 정책 기조의 돌발적인 전환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 …

어떤 의미에서 클린턴 행정부는 레이건 행정부가 1980년대 전반기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비교역재의 공급자, 대부자, 주식시장 투기자를 유리하게 하고 제조업체를 불리하게 하고 있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미국 제조업 부문이 갈수록 몸이 가벼워지고 경쟁력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달러 가치 상승을 성공적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을 수도 있다. 또한, 클린턴 행정부는 비제조업 부문의 이윤율과 경제적 활력의 증대와 제조업 제품의 국내 소비 증대가 국제 기준 상대적 비용 증가와 수출 증가율 하락으로 인해 발생한 제조업 부문에 대한 압력 증가를 보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계산에서 그랬건 간에, 이와 같은 국제 경제정책의 급격한 입장 선회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일종의 도박이었다. 역 플라자합의의 엄청난 반향은 세계체제 전반에 걸쳐 즉시 그리고 갈수록 크게 나타났으며, 원래의 플라자합의의 극적인 충격을 역으로 재현했다.

… …

결국 레이건 행정부는 저항할 수 없는 정치적 압력에 대응하여, 그리고 위기에 시달리는 미국 제조업 부문의 활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획기적인 방향전환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85년 9월 22일 G5 국가는 미국의 압력을 받아 플라자합의(Plaza Accord)에 서명하고 달러 환율을 인하하여 황폐해진 미국 제조업을 구출하기 위해서 공동 보조를 취하기로 합의했다. 바로 그 다음날 레이건은 타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을 공격하고 미국 무역정책을 노골적인 보호무역주의 방향으로 전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조치는 플라자합의 자체를 보완하는 것이었으며, 1970년대 닉슨 · 포드 · 카터 행정부의 공격적 정책들, 즉 달러의 급격한 평가절하를 추구했을 뿐 아니라, 1973년 다국간 섬유협정과 1974년 통상법 301조를 통해 강력한 보호무역주의와 ‘시장개방’ 압력을 가한 정책들을 부활시킨 것이었다.

… …

플라자합의와 그 후의 결과는 미국 제조업 회복의 전환점이자 세계 경제 전체의 주된 분수령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로 인해 달러화는 10여 년 동안 엔화와 마르크화에 대해 다소 지속적으로 또 대폭 평가절하 상태를 유지했다. 또 이는 10년 동안 실질임금 증가율을 제로 수준으로 유지시켰다. 그리하여 미국 제조업은 경쟁력을 회복하고 수출은 비약적으로 증가했으며, 독일 산업과 일본 산업은 장기적인 위기에 빠졌고, 동아시아 전체는 수출 기반 제조업의 폭발적 성장을 구가했다. 특히 동아시아 경제는 대부분 통화를 달러화와 연동시켰기 때문에 1985년에서 1995년 사이에 달러 가치가 떨어지는 동안 자국 제조업 수출기업들이 일본 경쟁자들과 비교하여 주요한 경쟁우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경쟁력 추이의 역사적 전환과 그에 수반되는 제조업 이윤율의 상승은 국민경제 사이의 생산성 증가율 차이나 미국 제조업 생산성 증가율의 가속화(1994년 이전)에 조금도 기인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것이 임금 상승률의 차이와 환율 차이의 결과였다.

 


화폐전쟁

–  쑹훙빙 / 차혜정 역 / 랜덤하우스 / 2008.07.28

 

영국과 미국이 1980년대에 실시한 고금리 정책은 달러의 신인도를 높이는 데 성공하고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개발도상국을 위기에 빠뜨렸다. 그러나 고금리는 미국의 공업 능력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혀 일본 제품이 1980년대 들어 미국 시장을 대거 점령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그러나 일본 전국이 경제 개발의 성과와 자신감에 한껏 부풀어 있을 때 일본 금융을 습격하는 국제 금융재벌들의 전략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1985년 9월, 국제 금융재벌들이 마침내 손을 쓰기 시작했다. 미국,영국,일본,독일,프랑스 5개국 재무장관이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플라자합의’를 체결했다. 목적은 다른 주요 화폐에 대한 달러의 환율을 통제하면서 평가절하하는 것이었다. 일본은행은 미국 재무장관 베이커의 압력으로 엔화의 평가절상에 동의했다. 플라자합의를 체결한  후 몇 개월 안에 엔화 대 달러의 비율은 250대1에서 149대1로 엔화가 크게 절상했다.

1987년 10월, 뉴욕 증시가 붕괴하자 미국 재무장관 베이커는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 수상에게 압력을 행사해 일본은행이 금리를 계속 인하하도록했다. 그래서 미국 증시가 일본 증시보다 강해져 도쿄 증시로 들어간 자금이 미국으로 방향을 틀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베이커는 민주당이 집권하면 미일 무역적자 문제를 들고 나와 일본에게 보복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물론 당근 정책도 빠뜨리지 않았다. 즉 공화당이 계속 집권할 경우 부시가 미일 친선을 대대적으로 촉진할 것이라고 했다. 나카소네 수상은 베이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엔화의 금리를 2.5%까지 인하했다. 일본은행 시스템은 유동성 위기가 찾아왔다. 대규모의 염가 자본이 증시와 부동산으로 몰려들었다. 도쿄 증시의 성장율은 무려 40%나 되었으며, 부동산은 심지어 90%까지 성장함으로써 거대한 금융 거품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토록 짧은 시간 동안 발생한 통화 환율의 극단적 변화는 일본의 수출 생산업자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엔화의 평가절상으로 말미암은 수출 하락의 손해를 만회하고자 기업들은 은행에서 저리로 대출을 받아 증시에 투자했다. 일본은행의 단기 대출시장은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가 되었다. 1988년이 되자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은행은 모두 일본이 독차지했다. 이때 도쿄 증권시장은 이미 3년간 300%나 올라 있었다. 부동산은 그보다 더 심해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일본의 금융 시스템은 위태로운 상태로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외부에서 그토록 파괴적인 공작을 하지 않았다면 일본 경제는 안정적인 긴축 작전으로 무사히 연착륙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가 국제 금융재벌들이 저지른 선전포고 없는 금융 교살 행위라는 사실을 일본은 꿈에도 몰랐다.

 


하나의 동아시아

–  박번순 / 삼성경제연구소 / 2010.04.21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는 모두 고투자 · 수출 주도형을 기반으로 하는 ‘동아시아 경제 발전 모델(EAEM : East Asia Economic Model)’을 통해 성공했다. 그러나 두 지역은 중요한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등 동남아시아 선발국들은 투자나 수출의 담당자가 자국기업이라기보다는 다국적기업이었던 것이다.

다국적기업들은 현지의 저렴한 생산 요소를 활용하여 대량생산형 조립산업에 진출했는데, 필요한 부품이나 중간재를 현지에서 조달하기보다는 모기업 혹은 모국에서 수입하고 생산된 제품은 미국 등 선진국으로 수출하는 방식으로 기업 운영을 했다. 이와 같은 다국적기업이 주도하는 동남아시아의 경제 발전은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에서 1970년대 시작되었으나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에는 동남아 전역에 꽃을 피워 1990년대 초반까지 동남아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다국적기업이 주도하는 동남아 선발국의 경제 발전은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첫째, 기술 기반이 강화되지 못하면서 부품산업이 발달하지 못했고, 최종 제품은 소득탄력성보다는 가격탄력성이 높은 상품이 되었다. 현지기업, 주로 화교기업은 정부와 유착하여 내수 일부 부문을 독과점화했고 부동산, 금융, 유통 부문에 집중하면서 수출 부문은 다국적기업에 맡겨두었다. 그러나 다국적기업은 현지의 저렴한 인건비를 활용했을 뿐 기술 이전은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동남아는 중소기업이나 부품산업이 발전하지 못해 중간재나 부품을 해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수출이 늘어나고 경제가 성장했으나 무역수지 적자도 증가했다. 또한 환율 변동은 동남아의 중저급 제품 수출 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본 엔화 환율 변동은 동아시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 가치가 급속히 상승하자 일본의 수출 경쟁력은 저하되었고, 다른 동아시아 국가의 경쟁력은 높아졌다. 엔화는 1989년, 1990년에 일시적으로 약세로 전환되었다가 1991년부터 1995년 전반까지 다시 강세를 유지했다. 이 시기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는데, 특히 일본기업의 투자가 파도와 같이 밀려왔던 동남아의 성장은 눈부셨다. 또한 동남아의 통화들은 미국 달러에 강하게 연동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 엔화에 약세를 유지했고, 그 결과 기업들의 경쟁력은 높아졌다. 그러나 1995년 중반부터 엔화가 다시 약세로 전환됨에 따라 미국 달러에 연동된 동남아 통화는 강세가 되어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수출용 상품 생산에 필요한 부품과 중간재를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던 동남아의 무역수지 적자는 대폭 증가했다.

 


커런시 워

– 제임스 리카즈 / 신승미 역 / 더난출판사 / 2012.02.28

 

…… 20세기는 주목할 만한 두 차례의 대형 통화 전쟁이 일어났다. 먼저 제1차 통화 전쟁은 1921~1936년에 계속 이어졌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거의 모든 기간이며,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공황 기간이 포함된다. 제2차 통화 전쟁은 1967~1987년에 일어났다. 이 통화 전쟁은 군사 대결로 치닫지는 않고 1985년의 플라자 협정과 1987년의 루브르 협정으로 해소되었다.

 


<관련 그림>

 

 

3

– 달러 인덱스 / 1985년 플라자협정 후 급격히 약세로 전환

 

 

달러인덱스와역사적이벤트

– 달러 인덱스와 주요 역사적 이벤트

 

 

4

– 엔/달러 환율 차트인데 플라자협정 후 엔화 강세를 볼 수 있다.

 

 

 

 

5

– 국제 원유가격 변화 / 1985년 9월 플라자합의 이후 달러 약세와 1985년 9월 사우디 산유량 증산을 같은 시각으로 봐야한다.

 

 

6

– 1985년부터 종합주가는 상승

 

fredgraph

– 1954년부터의 미국 기준금리(파란색)와 그 전의 기준금리 데이터가 없어 비슷한 3개월 채권금리(빨간색)로 1934년부터의 기준금리를 유추할 수 있다. 1981년까지는 상승하고 이후 지금까지 하락하고 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하여 금리는 0%대로 내려와 1930~40년대와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플라자 합의와의 상관관계는……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네이버 지식백과(시사상식사전) : 플라자합의

위키백과 : 플라자 합의

2015-10-30 일본 신드롬 겪는 중국

2011-09-05  탈패권 시대의 국제관계, 6자회담을 다시 생각한다

2011-04-12  플라자합의가 日불황 불렀다고? IMF, 中 주장에 조목조목 반박

2010-10-08 : 中 “獨(70년대)·日(80년대)·한국(90년대)처럼 안될 것”…

[경제광장]글로벌 임밸런스의 문제

미국의 제로금리 정책이 뜻하는 것

일본이 장기불황에 빠진 이유

정치경제학으로 풀어본 ‘위기 이후 국제질서’

누가 감히 강만수에게 돌을 던지랴 – 플라자의 추억은 고집을 낳고, 낭인의 서운함은 변심을 낳는 게 세상사 이치인 것을

플라자 합의 (Plaza Agreement) –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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