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위기 – 소빙하기(소빙기) 절정

’17세기 위기 The Crisis of the Seventeenth Century’ 또는 ‘일반 위기 The General Crisis’라는 용어는 에릭 홉스봄, 휴 트레버-로퍼와 같은 몇몇 역사학자들이 17세기 초에서 18세기 초까지 유럽에서의 광범위한 갈등, 충돌과 불안정의 시기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주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이 글에서는 기후의 관점에서 ’17세기 위기’를 설명하는 자료를 주로 수집하였는데, 기후가 ’17세기 위기’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것은 대략 1970년대 이후로 보면 되겠다.  그 선구자 중의 한명인 엠마뉴엘 르 로이 라두리(Emmanuel Le Roy Ladurie)는 『축제의 시간, 기근의 시대』(1967)에서 소위 ’17세기 위기’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이 문제는 “단순히 당대의 유럽 사회와 경제에 대한 내적인 분석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기후적인 기원을 갖는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나 그 뒤로도 ’17세기 위기론’을 탐구했던 역사학자들은 기후의 관점에서 ’17세기 위기론’을 바라보는데 대체로 인색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유럽사를 둘러싼 ’17세기 위기론’에서 소빙기 문제를 적극 도입하면서 이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제 소빙기 연구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역사인문학에서도 상당히 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 yellow의 세계사 연대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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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PCC 2차 레포트에 나오는 기온 그래프로 역사적인 사건과는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물론 온난화와 관련하여 논란이 많다.

 

’17세기 위기’ 또는 ‘일반 위기’는 소빙하기(소빙기, Little Ice Age)의 절정기라 보고있는 17세기와 거의 일치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마운더 극소기 Maunder Minimum’라 불리는 태양 흑점이 거의 소멸한 시기인 1645~1715년와 겹친다는 것이다. 소빙하기의 원인이 태양인지 화산인지 해양의 순환 문제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인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아직 소빙하기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소빙하기는 거의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다만 그 정도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거나 시기적으로 차이가 나기도 한다. 소빙하기의 시기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외국에서는 H. H. Lamb은 1190년~1900년을, Brian Fagan은 1300년~1850년을 소빙하기로 간주한다. 그리고 NASA Earth Observatory에서는 3개의 주요 냉각 시기를 1650년, 1770년,1850년 근처를 언급하였다.

 

한국의 경우, 『증보문헌비고』나 『조선왕조실록』 등 고문헌의 천재지변 관련 기사를 통해 소빙하기의 실체를 접근하고 있는 실정인데, 『조선왕조실록』을 분석한 이태진의 경우 1490년~1750년 시기를 소빙하기로, 김연희의 경우(석사 논문)는 제1기(1511~1560년), 제2기(1641년~1740년), 제3기(1781년~1850년)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증보문헌비고』를 분석한 김연옥은 냉량(冷凉)지수를 중심으로 제1기(1551~1650년), 제2기(1701~1750년), 제3기(1801~1900년)으로 구분하였으며, 이 중 1601년~1650년에 가장 극대가 나타나며, 1801년~1900년간에 두 번째 극대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 17세기의 각 나라의 물리적 충돌과 전쟁 등의 대변화

– 30년 전쟁 (1618~1648)

– 신성로마제국의 경제위기 (1619~1623)

– 청교도 혁명 (1640~1660) / 명예 혁명 (1688)

– 명의 이자성의 난 (1641~1644)

– 명이 멸망하고 청 성립 (1644~1662)

– 프롱드의 난 (1648~1653)

– 스페인 왕가에 대한 반란 : 나폴리, 포르투갈, 카탈로니아

–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절정기 및 관련된 여러 충돌들

– 오스만 제국의 수많은 내부 반란들 (특히 1622)

– 러시아 대기근 (1601~1603) / 로마노프 왕조의 등장 (1613)

– 러시아 스텐카 라진의 난 (1670~1671)

– 일본 시마바라의 난(1637~1638)과 쇄국령 공포

– 모리타니 30년전쟁 (1644~1674)

 

우리나라에서는 이 시기에 ‘인조반정(1623)’,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경신 대기근(1670~1671)’, ‘을병 대기근(1695~1696)’ 등의 사건과 극심했던 당쟁이 있었다. 위키백과의 ‘경신 대기근‘을 보면, 조선 현종 재위기간인 경신 대기근(庚辛大飢饉)은 한국사상 전대미문의 기아 사태였으며, 임진왜란 때부터 살아온 늙은이들이 ‘전쟁 때도 이것보다는 나았다’고 생각할 정도의 무지막지한 피해를 입었다. 경신 대기근의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조선 8도 전체의 흉작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으며, 당시 조선 인구의 1200~1400만 명중 30~40만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보았다.

 


기후의 문화사

–  볼프강 베링어 / 안병옥, 이은선 역 / 공감IN / 2010.09.10

 

16세기 말 농업은 중세 온난기가 끝나갈 무렵처럼 이미 한계에 봉착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더 이상 적절한 가격으로 부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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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말부터 17세기 중엽까지 곡물가격은 몇 배나 상승했다. 이로서 인구성장은 한계에 봉착하는데, 우리는 이와 같은 사회현상을 17세기의 위기라 부른다. 인구감소에는 많은 전쟁과 내전, 그리고 혁명들이 영향을 미쳤지만, 사실상 이 위기는 맬서스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당시의 유럽은 이미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사회였다. 식량결핍과 물가상승이 사회구성원 모두의 빈곤을 초래했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사회정치적인 균형이 무너지는 결과를 빚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빵의 원료가 되는 곡식을 소유한 사람들과 중간상인들은, 곡물가격의 상승으로 이득을 보았던 계층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엘베강 동쪽의 대지주와 중부유럽 또는 서부유럽의 일부 봉건귀족들을 들 수 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이 종속이론을 유럽의 역사에 적용한 이래 강조되듯이, 사회 전반의 전환은 계층적인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동유럽이나 스페인의 식민지처럼 유럽의 주변부에서 곡물생산을 늘리기 위해 제2차 농노화가 진행되는 동안, 유럽이라는 세계경제의 중심부에서는 상인계급이 정치적 권력집단으로 성장하게 된다. 네덜란드인들의 황금시대는 정확히 유럽대륙의 다른 지역들이 주기적인 기근에 시달리고 있을 때 찾아왔다. 신성로마제국과 이탈리아를 필두로 유럽의 곳곳에서 곡식소유주들과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 양극화가 발생했다. 독일 북부에서 형성된 베서 르네상스(Weser-Renaissance)의 부는 놀랄만한 것이었다. 이는 치솟는 곡물가격과 증가하는 식량수요로 많은 이득을 누렸던 귀족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

사망률의 위기는 단지 흑사병에 의해서만 초래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내성이 약해졌기 때문에 흑사병은 다른 질병들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질병 가운데 유럽에서 전형적인 것으로는 피부병, 헝가리 열병으로 알려진 발진티푸스, 아동들에게 특히 위험한 천연두, 치명적인 설사병인 이질, 홍역과 성홍열을 들 수 있다. 기침이나 백일해를 수반하는 유행성 독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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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조사와 유골조사를 통해 밝혀진 체격왜소화 현상은 당시의 영양부족 상태를 알려주는 지표였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사람들의 평균 체격은 지난 2000년 동안 가장 작은 편이었으며, 굳이 비교하자면 14세기 초의 궁핍기와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당시의 기록들은 왜소한 체격과 굶주림, 열병 혹은 선페스트와의 연관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물가폭등이 이어지면서 잔혹한 질병이 발생했다. 특히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은 목숨을 빵 한 조각으로 유지하는 사람들이었다.”

……

기후악화가 초래한 사회구조의 변화는 모든 대륙에서 엇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흉작은 어디서나 높은 발병률과 사망률에 따른 인구 감소를 동반했다. 17세기에는 심지어 중국에서도 인구성장이 지체되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스페인령 필리핀 제도와 네덜란드령 암본(Ambon), 그리고 타이의 인구에 대해서는 믿을만한 통계자료가 존재한다. 17세기초 이들 지역에서는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

많은 자료들은 이 시기에 폭력이 증가했으며, 특히 30년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30년전쟁은 당시 인구의 2/3를 나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당시의 군대는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따라서 전투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의 수는 16세기 말 전염병으로 발생했던 수보다 적은 수준이었다. 약탈하는 병사들, 공격적인 걸인들, 그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범죄자들의 손에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통계적으로 큰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전쟁이 수반하는 폭력과 처형은, 자원 결핍으로 첨예한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갈등에 내몰렸던 시대의 상징이었다. 전쟁과 폭력의 결과는 언제나 잔혹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사망률 통계를 지역별로 살펴보면, 전쟁과 폭력보다는 질병에 의한 사망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폭력의 향연 속에서 몰락의 길을 걸었던 중국에 대해서는 별도의 언급이 필요하다. 중국에서도 17세기는 끔찍했던 유럽의 중세 초기와 비견될 정도로 혹독한 재난을 겪었던 시기였다. 1601년 온화한 중국 남서부 지방인 운남(雲南)에 강한 눈보라가 불어 닥쳤으며, 전국이 극심한 한파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추위로 죽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중국농업을 붕괴시킨 것은 한파가 동반한 건조한 기후였다. 1618년부터 1643년까지 지속된 살인적인 기근은 중국인들을 괴롭혔던 최대의 위협이었다. 길가에 누운 채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식인행위가 횡행하고 대규모 이주 과정에서 폭력이 난무했다. 결국 명나라는 이자성(李自成)이 주도했던 농민봉기로 멸망하게 된다. 그런데 명나라의 급격한 몰락은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명나라는 기후조건이 비슷하게 열악했던 300년 전, 몽골의 원나라(1260~1368)가 몰락하면서 권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명나라를 세운 태조(홍무제 주원장, 재위 1368~1399)는 봉기한 농민들의 지도자였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 피비린내 나는 내전 끝에 만주왕조, 곧 청나라가 들어섰는데, 청왕조는 1912년까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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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감은 기후가 나빠졌던 시점에 최고조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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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바텐베르크(Friedrich Battenberg)는 “13세기까지 지속되었던 중세 전성기의 경제 호황은 유대인 공동체와 주거지들의 평화로운 발전을 가능케 했다.”고 주장한다. 14세기 초반 들어 위기가 시작되면서 이른바 ‘속죄양 찾기’가 기승을 부렸으며, 1340년대 말 흑사병의 유행과 함께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도시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말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많은 문제들을 유대인 탓으로 돌렸지만, 날씨는 유대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연현상이었다. 우박, 가뭄, 추위와 유대인 사이에는 어떠한 사상적 연관성도 찾기 힘들다. 문헌은 유대인 박해가 왜 15세기에 드문 현상이 되었으며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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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가 노먼 콘(Norman Cohn)은, 과거에는 유대인들이 감당해야 했던 속죄양 역활을 15세기 이래 마녀들이 넘겨받았다고 믿었던 최초의 인물이다. 마법은 소빙하기의 가장 중대한 범죄였다. 마법은 날씨, 농토의 낮은 생산성, 무자녀, 인위적인 질병 등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14세기에 나타난 사회적 현상으로서 마법의 등장은 시기적으로 소빙하기의 출현과 일치한다. 마녀사냥이 최고조에 달했던 것은 중부유럽에서 소빙하기의 추위가 가장 혹독했던 때였다. 마법은 소빙하기가 끝나고 점차 계몽주의 사고방식이 자리 잡으면서 마침내 형법목록에서 사라졌다.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

–  김문기 / 역사와 경계, 제77집 / 2010.12

 

순치 11년 12월(1655.1~2) 북경에 있던 담천談遷은 고향인 절강성 북부의 바다가 결빙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믿을 수 없었다. 며칠 뒤, 10월(1654.11~12)에 강남에 혹한이 닥쳐 강이 꽁꽁 얼어붙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라며 놀라워했다. 1654~1655년의 겨울 중국에서는 황하黃河와 회수淮水가 얼어붙고 강소성 북부의 바다마저 결빙했다. 강남의 태호太湖와 황포黃浦가 꽁꽁 얼어붙은 이때의 혹한으로 아열대과수인 감귤이 동사했다. 조선에서는 효종 6년(1655) 봄에 강원도 삼척과 강릉의 바닷물이 얼어붙었다. 조선시대 동해가 결빙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로부터 두어 달 후에는 제주도에 큰 눈이 내려 국마國馬 9백여 필이 얼어 죽었다. 흥미로운 것은 비슷한 시기 영국 런던의 템스 강도 얼어붙었다는 사실이다. 템스 강은 1500~1900년의 400년 동안 적어도 23차례의 완전결빙이 있었다. 17세기에만 10차례 얼어붙었는데 1654~1655년의 겨울도 그 하나였다. 당시의 강추위는 북아메리카에서도 확인된다. 뉴일글랜드 지방의 앞 바다는 한 달 동안 얼어 있었다. 담천談遷이 경험했던 겨울의 혹한은 전 지구적인 소빙기(Little Ice Age) 현상의 하나였던 것이다.

……

지난 밀레니엄 동안 인류는 중세온난기(Medieval Warm Period), 소빙기, 지구온난화라는 기후변동을 경험했다. 중세온난기가 전 지구적인 현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소빙기에 대해서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소빙기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17세기가 소빙기의 절정이었음은 분명하다. …… 1970년대에는 유럽사를 둘러싼 ’17세기 위기론’에서 소빙기 문제를 적극 도입하면서 이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최근의 환경사 연구에서 기후변동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소빙기에 대해 단순한 사회경제, 정치적 영역에서 벗어나 문화사의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시도가 나오고 있다. …… 이처럼 영미권에서의 소빙기 연구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역사인문학에서도 상당히 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중국과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소빙기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미흡하고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

마지막으로 구미역사학계에서의 동아시아 소빙기 연구에 대해서 살펴보자. 17세기 동아시아 연구에서 소빙기의 중요성을 먼저 제기했던 것은 이들 영미권의 연구자들이었다. 이것은 “17세기 위기론(Seventeenth-Century Crisis)”의 전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유럽의 ‘일반적 위기(General Crisis)’를 세계적 위기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사례는 매우 중요했다. 영미권의 연구자들은 “17세기 위기론”을 적극 수용하여, 소빙기가 명청교체의 중요한 한 배경이었음을 지적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연구자는 윌리엄 애트웰(William S. Atwell)이다. 그는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은의 유통이 명청교체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중요한 연구를 수행해 왔는데, 최근에는 소빙기 기후변동이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지속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명청시대 광동廣東 · 광서廣西지역의 환경사를 연구한 로버트 마르크스(Robert B. Marks)는 소빙기 기후변동이 17세기 이른바 “嶺南”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처럼 동아시아 역사에서 소빙기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것은 구미역사학계였다.

……

<표5>는 북반구의 수목 나이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지난 600년간 가장 한랭했던 30년을 50년을 단위로 분류한 것이다. 지난 600년간 전 지구적으로 가장 한랭했던 30년을 살펴보자. <표5>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7세기에 한랭화의 빈도가 가장 높았다는 사실이다. 총 11년이 집중되어 있다. 특히 17세기 후반은 600년간 가장 한랭했던 30년 중에 7년이 포함되어 있어 당시의 극심한 한랭한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다음은 19세기 전반으로 모두 6년이 있다.

<표5> 지난 600년 동안 하계 한랭화

 세기  총햇수 하계 한랭화 연도 (순위)
 1401 ~ 1450  3  1446(30), 1448(19), 1453(4)
 1451 ~ 1500  1  1495(23)
 1501 ~ 1550  0
 1551 ~ 1600  1  1587(17)
 1601 ~ 1650  4  1601(1), 1641(3), 1642(28), 1643(10)
 1651 ~ 1700  7  1666(12), 1667(27), 1669(16), 1675(8), 1695(6), 1698(9), 1699(11)
 1701 ~ 1750  2  1740(18), 1742(25)
 1751 ~ 1800  1  1783(26)
 1801 ~ 1850  6  1816(2), 1817(5), 1818(22), 1819(29), 1836(21), 1837(15)
 1851 ~ 1900  1  1884(13)
 1901 ~ 1950  3  1912(7), 1968(24), 1978(14)
 1951 ~ 2000  1  1992(20)

 

본 표는 K.R. Briffa et al., Ibid(1998), p450 <Table>의 지난 600년 동안 가장 한랭했던 여름으로 기록되는 30년을 시기별로 재편집했다. 괄호 안의 숫자는 순위이다.

……

곡물교역에서 조선이 명과 청에 보이는 태도는 극명하다. 계갑대기근 때 중강개시를 통해 기근을 구제했던 것은 조선 사대부들에게는 ‘은혜’였다. 그렇기에 1619년과 1628년의 기근 때는 조선이 보다 적극적으로 명과 곡물교역을 추진했다. 이에 반해 청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보였다. 경신대기근 때 끝내 곡물교역을 요청하지 않은 것은 ‘은혜’를 입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을병대기근 때 어쩔 수 없이 곡물을 들여왔지만, 그것은 곧바로 커다란 분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17세기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국가 간의 곡물교역은 그 자체로 기근에 대한 대응력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은 17세기 전반에 있었던 숭정 13~15년의 대기근을 겪으면서 명청교체가 이루어졌다. 명은 끊임없는 기근에 시달리면서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를 이은 청은 이민족 지배라는 불리함을 딛고, ‘강건성세’의 길을 열었다. 17세기 후반의 기후가 전반보다 훨씬 나빴던 점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은 17세기 전반 청에 대량의 곡물을 제공하는 등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지만, 17세기 후반은 1백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대기근을 두 차례 겪었다. 특히 을병대기근 때는 꺼려왔던 청으로부터 곡물을 제공받아야 했다. 이런 면에서 강희제의 해운진제(海運賑濟)는 17세기 소빙기의 기근에 대해 청이 성공적으로 적응한 반면, 조선은 그다지 성공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결론은 다소 단면적이고 거친 부분이 있다. 보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의 기후대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날 한반도는 온대지역에 속한다. 이에 반해 중국은 온대지역 외에도 회수 이남으로 아열대와 열대지역까지 포괄하고 있다. 명청시대 중국의 농업생산력을 화중지역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온대인 화북지역이 잦은 기근에 시달릴 때, 아열대인 화중지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곡물이 긴급하게 수송되어 기근을 구제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소빙기의 관점에서, 기온이 하강할 때 아열대보다 온대지역이 농업생산에 훨씬 불리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런 사실은 17세기 후반 조선이 대기근을 겪게 되었을 때, 중국보다 훨씬 불리한 한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문제는 앞으로 보다 심도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지난 600년 동안 북반구의 여름 한랭화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는 동아시아 기후변동의 지구적인 ‘동시성’을 확인시켜준다. 현저하게 한랭했던 시기들에는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이상저온현상, 흉작, 기근, 폭동, 반란 등이 목격된다. 이러한 동시성을 확인하면 소빙기의 시기구분에 대한 한국, 중국, 일본의 기존 연구들에 적지 않은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구사적인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소빙기 기후를 검증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름의 이상저온현상은 17세기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대기근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640년대 명말인 崇禎 12~14년의 대기근, 일본의 간에이대기근, 1670년대 현종대의 경신대기근, 일본의 연보延寶대기근, 1690년대 숙종대의 을병대기근, 일본의 원록元祿대기근은 거의 동일한 시기에 발생했다. 이들 기근들은 지구적으로 현저하게 한랭했던 시기에 발생했다는 것에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동시성은 17세기 동아시아 소빙기가 지구적인 기후변동의 일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덕일 [조선 왕을 말하다] 현종 – 경신 대기근

 

16~19세기는 전 세계적인 소빙기였다. 조선에서는 17세기 중·후반 현종 때 기상이변과 재난이 집중되었다. 예송논쟁이 치열했던 한편으로 대동법 논쟁이 거셌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지배 엘리트들은 백성들의 조세를 경감해주고 풍년든 지역의 곡식 일부를 흉년 든 지역으로 직접 보내는 탄력적 운영으로 국가적 재난을 극복하려고 했다.

※ 중앙선데이 120호 / 2009.06.27

본문 : http://jyrkim.tistory.com/12

 

유례를 찾기 힘든 경신 대기근을 맞아 조선은 기민(饑民) 살리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인간의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소빙기(小氷期)의 재앙에 맞서 수도(修道)하는 자세로 재난 극복에 나선 것이다. 그 결과 망국 지경까지 갔던 나라가 되살아났다. 위기를 맞이하고도 당리당략 외엔 관심이 없어 보이는 대한민국 정치권이 되돌아볼 만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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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선데이 121호 / 2009.07.05

본문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13137

 


캘리번과 마녀

–  실비아 페데리치 / 황성원, 김민철 역 / 갈무리 / 2011.11.30

 

서유럽에서도 1580년대부터 인구감소가 시작되어 17세기까지 계속되었으며, 인구의 3분의 1을 상실한 독일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와 같은 인구위기는 1345~1348년의 흑사병을 제외하고는 전례가 없는 것이었으며, 그럼에도 그 자체로 무시무시한 통계가 전체 그림을 보여 주지는 못한다. 죽음은 “가난한 사람들”을 공격했다. 페스트나 천연두가 도시를 휩쓸 때 죽은 것은 대체로 부자가 아니라 장인, 날품팔이, 부랑자였다(Kamen 1972:32~33).

……

인구위기와 경제위기는 1620~1630년대에 정점에 이르렀다. 유럽과 식민지 모두 시장이 위축되고, 무역이 중단되고, 실업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동안 발전도상의 자본주의 경제가 붕괴할 가능성도 있었다. 유럽과 식민지의 경제적 통합이 진행되서, 각지의 위기들이 서로를 빠른 속도로 상승 · 확대시키는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최초의 국제적 경제위기였다. 역사가들은 이를 17세기의 ‘일반적 위기 General Crisis‘라 부른다(Kamen 1972:307ff; Hackett Fischer 1966:91).

이런 맥락에서 노동, 인구, 부의 축적의 상호관계가 정치논쟁의 전면에, 그리고 인구정책과 “생권력” 레짐의 최초 성분들을 만들어 내기위한 전략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논쟁에서 “인구조밀도”와 “인구”를 혼동할 정도로 개념 사용이 조잡했다는 점과 국가가 인구증가에 방해가 되는 모든 행동을 무자비하게 처벌했다는 점에 속아서는 안된다. 푸코는 유럽에서 기근이 끝난 18세기에 재생산과 인구증가가 국가적 문제이자 지적 논쟁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그 시기가 18세기가 아닌 16~17세기의 인구위기였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 시기에 “마녀”에 대한 박해가 격렬해진 것과, 출산을 규제하고 재생산에 대한 여성의 주도권을 파괴하기 위해 국가가 새로이 훈육조치들을 도입한 것 또한 “일반적 위기”로 거슬러 올라가 규명해야 한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마르크 블로흐가 언급한 적이 있듯이, “근대 초 유럽에서 농민 반란은 오늘날 산업사회의 파업만큼이나 흔했다”(Parker and Smith 1985). 그러나 16세기 말, 그리고 무엇보다 17세기 전반에 이런 농촌 소요는 전례 없는 규모로 도시 반란과 뒤섞였는데, 이런 반란의 대상은 “고용주”가 아니라 국가 자체였다. 영국 청교도 혁명은 농촌과 도시 반란의 이런 폭발적 결합의 가장 극적인 일화였지만, 거의 모든 유럽 통치자들이 사회적 격변에 직접적으로 충격을 받았고 심각하게 위협을 느꼈다(Parker and Smith 1985: 12ff).

이처럼 체계 전반에 걸쳐 사회 갈등이 첨예해진 것은 앞선 시기 그리고 이 시기에 통치자들 사이의 군사적 갈등이 증폭된 결과였다. 1550년경에서 1640년경 사이에 유럽 열강이 동원한 군인 수는 두 배 늘었고, 1530년에서 1630년 사이에 군인 한 명을 전장에 보내는 비용은 평균 다섯 배 늘었다(Parker and Smith 1985: 14). 이렇게 보호비용이 증가하자 피지배자들에 대한 재정 압박이 크게 증가하였고, 이는 다시 17세기 수많은 반란을 촉발시켰다(Steensgaard 1985: 42~4).

이런 보호비용 상승과 더불어, 이데올로기 투쟁도 증폭되었다. 중세 통치체계가 계속해서 무너지자, ‘지역을 통치하는 자가 종교를 결정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리를 따르는 위로부터의 종교혁신과 종교복고(religious restorations)가 결합되어 나타났는데, 이는 둘 다에 대한 대중적 분노와 반역을 불러일으켰다. 통치자들이 종교를 자신들의 상호 권력투쟁 도구로 전환하자, 피지배자들은 나름대로 종교를 통치자에 반대하는 봉기 도구로 전환시켰다.

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통치자들 사이의 군사적 갈등이 증폭되자 그들의 전쟁수단 획득과 피지배자들의 생계가 의존하고 있던 범유럽 교역망이 붕괴하였다. 정치적 관할권역들을 가로질러 재화를 이동하는 데 드는 비용과 위험부담이 극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주요 공급물이 생계수단 제공에서 전쟁수단 제공으로 바뀌었다. 17세기 일반적 위기의 사회적 · 경제적 배경이 되는 방랑의 급격한 악화라는 문제와 “생계위기”에 기여한 것은 인구와 기후 요소보다는 훨씬 더 결정적으로 이런 교역 흐름의 붕괴와 전환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그럴 법해 보인다.

 


하버드 중국사 원.명

–  티모시 브룩 / 조영헌 역 / 너머북스 / 2014.10.30

 

명의 쇠락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선, 1572년 황위에 올라 1620년에 사망한 만력제(신종)의 통치 시대로 돌아가 보자.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과 달리, 명의 쇠락이 만력제의 결함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만력 연간에 발생한 두 차례의 환경 위기가 그러한 큰 그림에 해당한다.

1586~1588년에 발생한 첫 번째 ‘만력의 늪’은 정권 자체를 마비시켰다. 그 늪은 사회 재난의 새로운 기준이 될 정도로 엄청난 환경 차원의 ‘붕괴’였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이 재난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는데 이는 1580년대 초반부터 장거정이 시행했던 국가재정에 관한 개혁 덕분이었다. …… 그리하여 장거정이 1582년 사망할 때 국고에는 은이 넘쳐났다. 이렇게 보유한 자금 덕분에 만력제의 조정은 1587년 폭풍처럼 밀어닥친 자연재해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다.

……

20년이 지난 1615년, 두 번째 ‘만력의 늪’이 발생했다. 이번 늪이 있기 2년 전부터 북부 중국 전역에서 홍수가 지속되었고, 2년째 되던 해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추워졌다. …… 1616년 후반기에 기근은 북부중국에서 양쯔강 유역으로 파급되었고, 이어서 광동성을 덮쳤다. 최악의 사태는 1618년 이전에 종결되었지만, 이후에도 만력제의 마지막 2년 동안 가뭄과 메뚜기 떼의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

만력 연간의 기근으로 고통 받은 이들은 명나라 뿐만이 아니었다. 이 시기 북부 중국을 강타한 가뭄은 요동으로도 확산되었다. 요동은 이후에 만주로 알려진 만리장성의 동쪽 끝 부분에 해당한다. 바로 이곳에서 여진족의 지도자 누르하치가 여진족과 몽골족 사이에 전례없이 폭넓은 동맹관계를 형성해냈고, 이 동맹은 1636년 마침내 ‘만주’라는 새로운 민족의 칭호를 탄생시켰다.

……

원-명을 통털어 숭정제만큼 심각하게 비정상적인 기후를 만났던 황제는 없었다. 통치 첫 해에는 심각한 상황이 제국의 서북쪽에 몰려 있었다. 1628년 어사의 보고에 따르면, 가뭄과 기근이 너무 심각해 섬서성 전체가 재난 지역이었다고 한다. 다음 해에는 기온이 급강하했고 1640년까지 한파가 지속되었다.

중국만 한파를 겪은 것은 아니었다. 1630년대 러시아도 12월부터 2월 사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심각하게 추웠다. 그러다가 1640년에 이르면 겨울마다 매달 극심한 추위가 잇따라 보고되면서 12세기 이래 러시아 역사상 가장 혹독하게 추웠던 10년으로 기록된다. 만주에도 역시 혹독한 추위가 덮쳤다. 여진족이 남쪽으로 진출한 것은 명의 경제력을 노린 측면도 있겠지만, 혹독한 추위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다.

……

1632년 이후 재해는 더욱 심각해졌다. 1635년, 메뚜기떼가 대규모로 출현했다. 숭정 10년(1637년)에는 전국적인 가뭄이 덮쳤다. 이후 7년에 걸친 가뭄으로 굶주린 사람들은 나무껍질을 벗겨 먹기 시작했고, 급기야 썩은 송장까지 건드리게 되었다.

……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가장 타격을 받은 곳은 정부 조달에 의존했던 북방 지역이었다. …… 조정이 긴축 재정을 운영하면서 군사들과 역참 병졸들에게 돌아갈 보수는 한푼도 없었다. 많은 병사가 주변지역으로 도망쳐 도적질로 간신히 목숨을 이어갔다. …… 1628년 봄, 섬서성을 덮친 가뭄을 계기로 병사들 일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시작으로 향후 1년간 전국을 뒤덮는 반란이 되풀이되었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황정(荒政)과 왕조교체(王朝交替)

–  김문기(부경대) / 중국사학회 / 2014년

 

명조가 멸망하고 27년이 지난 뒤에, 상주부常州府 무석현無錫縣의 계육기計六奇는 그가 저술한 『명계북략(明季北略)』의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명조明朝가 천하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① 외부의 강적(여진족의 위협), ② 내부의 농민반란, ③ 자연재해의 유행, ④ 정부의 무능력이다. 이들 요인 중에서 계육기는 재해와 농민반란의 상호관계를 특히 강조했다.

가령 유구(流寇,무리 지어 떠돌아다니는 도적)가 소란을 일으켰을 때 백성들이 기근의 근심이 없었다면, 오히려 살아남기를 탐하고 죽기를 두려워하여 성지城池를 굳건히 지켰을 것이니 도적의 형세는 점차로 고립되었으리라. 어찌하랴! 섬서와 하남에 여러 해 동안 대기근이 들고, 산동과 호광에 매년 황재蝗災와 한재旱災가 드니, 궁핍한 백성들이 살아갈 방도가 없어 단지 도적을 따라서 약탈하며 잠시의 죽음을 연장하길 바랐을 뿐이다. 그렇기에 도적이 이르는 곳마다 앞 다투어 문을 활짝 열고 그들을 맞이하여 그 무리로 들어갔다. 비록 수령守令일지라도 또한 금할 수 없었으니, 도적의 무리는 날로 많아지고 도적의 세력은 더욱 확대되니, 대란大亂이 이로 말미암아서 이루어졌다.

계육기는 명말의 농민반란이 변경의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해 병향兵餉을 가파加派하는 등 국가의 가혹한 착취에서 시작되었지만, 이것이 왕조를 무너뜨릴 정도의 대란으로 발전했던 원인은 연이은 재해로 인한 극심한 기근에 있었다고 보았다. 그는 당시의 재해가 대기근으로 발전하지 않았다면 농민반란이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명조의 멸망과정에서 재해의 파괴력을 그 시대를 겪었던 계육기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

명청교체를 바라보는 전통적 시각은 ‘계급투쟁’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의 부패, 관료체제의 붕괴, 농민계급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강조하지만, 재해와 인화(人禍)로 끝내 농민반란을 추동하여 명조가 멸망했다는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이러한 관점에서 벗어나 각기 다양한 관점들이 제시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전환은 환경사적 관점에서의 접근이다. 페스트가 명조의 멸망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는 연구도 그 중의 하나이다. 다만 이것은 지엽적인 문제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기후변동이었다. 명청교체가 이루어진 17세기는 ‘지난 1만년 사이에 가장 한랭했던 시기’였다. 바로 소빙기(Little Ice Age)의 기후 변동이 최절정에 달했던 기간으로 ‘지구적인 위기(Global Crisis)’를 초래했다.

’17세기 위기’의 관점에서 명청교체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구미연구자들에 의해 먼저 시도되었다. 환경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중국 학자들도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최근에는 명청교체를 아예 ‘생태위기’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17세기의 소빙기 기후변동이 생태를 악화시켜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농민반란을 촉발하여 명조의 멸망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소빙기는 명조의 멸망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한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소빙기의 생태위기를 강조할 때 주의해야할 부분이 있다. 소빙기의 기후변동은 17세기의 전반보다 후반이 훨씬 극심했다. 명조는 이런 생태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했지만, 청조는 오히려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이루었다. 왕조는 교체되었지만 소빙기는 지속되었다. 명조의 멸망이 소빙기 때문이라면, 청조의 성공도 소빙기를 통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재해에 대한 국가의 대응은 양조兩朝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단서일 것이다.

 


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  로버트 B. 마르크스 / 윤영호 역 / 코나투스 / 2007.04.13

 

매우 포괄적인 관점에서 지난 1000년 동안 이루어진 인구의 증감에는 세 차례의 커다란 파장을 볼 수 있다. 900년부터 1000년 사이에 시작된 첫 번째 인구증가는 130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1350년대에 발생한 흑사병으로 인해 급격히 퇴조했다. 그 후 1400년대에 또 다시 인구가 증가했지만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감소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1700년대에 시작된 세 번째 인구증가는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2100년대에 그 증가는 멈추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페르낭 브로델

–  김응종 / 살림 / 2006.07.30

 

16세기는 인구 증가의 시대였다. 1500년에서 1600년 사이에 두 배가량 늘어났다. 브로델의 역사 설명체계에서 ‘인구’는 다른 어떠한 문제 이상으로 중요하며, 시대의 척도와 방향을 주는 본질적인 문제였다.

 

독자들은 이 생물학적인 혁명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여러 가지 운명에게 중요한 사실이었다는 점을, 터키인들에 의한 정복이나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식민지화 혹은 스페인 제국의 사명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와 같은 인구 증가가 없었더라면 이들 역사의 빛나는 페이지가 씌어질 수 있었을 것인가? 이러한 혁명은 가격혁명보다도 중요한 것으로서, 아메리카로부터의 은의 대량 유입에 앞서서 이 혁명을 설명해준다. 이러한 상승은, 인간이 처음에는 필요한 노동자였다가 다음에는 커다란 부담으로 변해간 시대의 승리와 파국을 동시에 만들어냈다. 1550년부터는 바퀴가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서로 떼밀릴 정도였다. 1600년경 이러한 초과 하중은 발전을 정지시키고 강도 행위와 같은 잠재적인 사회적 위기의 소지를 만들어냈으며, 이로써 17세기의 씁쓸한 장래에는 모든 것이 또는 거의 모든 것이 악화된다.

 


스페인·포르투갈사

–  강석영, 최영수 / 미래엔 / 2005.07.15

 

17세기의 위기는 스페인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위기의 출발점은 스페인보다 전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정치, 사회 및 경제적으로 먼저 발생했다. 특히, 일부 유럽의 위기는 1618년에 30년 전쟁의 발발로부터 시작되었다. 17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 중상주의 정책에 따라 산업 생산의 증대 및 교역의 확대로 서서히 경제 발전의 계기를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국가에서 쇠퇴의 원인은 다양했다. 주요 요인은 정치면에서 절대 군주들의 천문학적인 비용 지출과 기후의 변화에 따른 흉작 및 전염병의 만연에 있었다.

17세기의 스페인 몰락의 요인은 16세기부터 계속된 경제 활동의 쇠퇴와 재정의 결핍, 군사력의 약화 및 스페인 사회의 윤리 및 정신 사조를 이끌어 갈 창조적인 지성의 고갈에 있었다. 따라서, 17세기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자연적인 원인과 정치에 있었다. 자연적인 원인은 전염병과 흉작에 있었다. 아스투리아스 왕가의 정책은 분명히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역대 왕들은 방대한 제국의 영토적 통합을 끝까지 유지하려는 데 최대의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정책의 운용에서 경제적으로 더 이상 막대한 비용을 부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쇠퇴의 징후는 17세기 초부터 인구 및 산물의 감소로 시작되어 이베리아 반도의 고원 지대와 북부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펠리페 3세의 집권 때에는 수확의 증가와 아메리카에서 은의 도착으로 약간 회복의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1627~1628년에 제2의 심각한 위기가 정치와 경제면에서 동시에 발생했다. 그 후, 잠시 회복기를 맞았다가 1640년에 정치적으로 제3차의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그 결과, 1678~1683년에 다시 제4차의 위기를 맞이했다. 당시 스페인의 왕실 행정과 의회는 비효율적으로 운용되고, 플란데스에서의 전투는 국가를 패망의 길로 이끌었다. 결국, 북서 유럽 국가들이 발전의 계기를 맞이할 때 스페인의 농촌은 황폐하고 산업화는 정체되어 있었다.

 

17세기에 인구는 급격히 감소되어 전 세기보다 25~30%가 줄어든 7~8백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이와 같은 인구의 감소 원인은 계속된 전투에 따른 인명 손실, 아메리카로의 이주, 성직자의 증가, 전염병의 만연 및 식량 사정의 악화로 기근과 질병에 따른 사망률의 증가에 있었다. 특히, 전염병인 페스트가 1599~1606년, 1648~1654년 및 1676~1685년에 세 번이나 만연되어 안달루시아와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많은 주민이 희생되었다. 당시 그 지역 도시들에서는 주민의 반 이상을 잃게 되었으나, 부유층은 시골로 피신함으로써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특히, 17세기의 카탈루냐 지역에서는 매 25년 간격으로 4회에 걸쳐 전염병이 발생함으로써 매 세대(世代)마다 큰 영향을 받았다. 인구의 감소는 고원 지대에서도 심각했다. 카스티야는 17세기에 들어 급격히 인구가 감소했다. 전염병은 도시와 농촌을 동시에 폐허화시켰다. 부르고스와 세고비아 등 산업이 발달된 도시들도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다만, 마드리드만이 새 수도로 결정되어 인구가 25만 명으로 증가했다.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

–  김성우 / 역사비평사 / 2001.02.28

 

세번째 시기는 18세기 전반 이후 조선왕조가 종말을 고하는 시기까지 곧 조선후기이다. 이 시기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보이면서 엄청난 인명을 살상한 ‘소빙기’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대민 정책이 새롭게 변모하면서 또다른 사회구조를 만들어간 시기였다. 전체 인구의 1/4 ~ 1/3 가량을 사망에 이르게 한 ’17세기의 위기’ 국면에서 ‘사족士族 우위’ 사회는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국가는 상민층에 대한 사족층의 지배라는 간접지배방식을 더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되었다. 상민층에 대한 국가의 직접지배 기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도 국가는 사족층의 반발과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들의 특권적 지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시기는 사족층의 안정추세가 지난 시기에 이어 지속되는 한편, 상민층의 사회적 성장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출현하는 시기였다. 사족층이 자신들의 사회적 위상에 만족하고 있을 때 새로운 사회경제적 변화추세에 발맞추어 변신에 성공한 상민층의 거센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노론(老論) 일당전제가 확립되면서 다양한 지역적 · 사상적 기반을 가진 사족층의 정치참여가 배제되는가 하면, 일정 정파에 의해 관직이 독점되면서 상부구조의 활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사족층은 밑으로부터 상민층의 도전, 위로부터 노론 일당전제의 압력이라는 양대 외압에 직면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사족층은 이제 더 이상 사회변화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사회변화의 성장을 방해하는 질곡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조선시대 생활사 3

–  한국고문서학회 / 역사비평사 / 2006.03.30

 

이처럼 조선 초기에는 주택의 한두 칸에 온돌방을 설치했으나, 시대가 내려가면서 온돌방의 비중이 점차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6, 17세기에 온돌방이 확대, 보급되는 과정과 원인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명확하게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에 경험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아니었을까? 양대 전란으로 소실된 국가 기관을 다시 건축하고, 공공건물과 민간 주택을 복원 · 신축하는 과정에서 온돌방이 채택됨으로써, 단시간 내에 온돌방이 전국에 확대 · 정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함께 16, 17세기를 거치며 장기간 지속된 지구 저온화 현상도 온돌방의 보급을 촉진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소빙기라고도 하는 당시의 저온화 현상은 지구 전체를 휩쓴 대규모 현상으로, 조선 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시기의 천재지변과 기상재해에 관한 기사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당시 조정에서 자연 재해를 극복하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들이 엿보인다.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장기간 지속된 저온화 현상을 그때까지의 화로 난방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으며, 따라서 온돌방의 보급은 자연스럽게 가속화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 사회에서 온돌방은 위로는 국왕이 거처하는 궁궐부터 아래로는 허름한 초가삼간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초월해 전국적으로 대중화되었고, 오늘날까지 우리의 주된 난방 방식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중남미 문학사

–  김현창 / 민음사 / 1994.02.01

 

17세기는 스페인의 정치적 · 경제적 쇠퇴기로서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 까를로스 2세의 치세는 다음 세기의 부르봉 왕조로 전환하기 위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무기력한 통치기간에 해당된다. 신대륙에 대한 스페인의 무역독점은 군사 · 정치면의 쇠퇴와 함께 위기를 맞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이 추구하던 보호무역정책 역시 자유무역을 통해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늘리려는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의 적개심을 부추겨 위태로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러한 본국의 상황은 식민지에도 영향을 미쳐 쇠퇴 · 위기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쇠퇴의 증상은 인구 감소추세의 지속, 광산업의 커다란 위기, 해안지역에 대한 해적들의 끊임없는 습격, 스페인 본국과의 무역량 감소, 밀수의 증가 등으로 나타났다.

……

경제적인 위기는 여러 가지 복합적 요인에 의해 나타났는데 왕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싸움으로 인한 스페인 본국의 권력 약화, 농업의 몰락, 대토지 소유자의 증가, 노동력의 고갈, 식민지에 대한 무기력한 통치, 기생적인 관료체제 유지가 곧 그것들이다. 하지만 해밀톤 Earl J. Hamilton은 이상에서 열거한 스페인적인 요인들에 치우친 것보다 오히려 식민지 내적 상황에 기인하는 요소를 핵심으로 내세운다. 그는 1640년부터 급격한 하강세를 보였던 금과 은의 채굴량을 들어 광산업의 갑작스런 쇠퇴가 식민지 경제를 위기에 처하게 한 가장 커다란 요인으로 본다. 금 · 은의 고갈과 함께 식료품의 가격과 수요가 급등하고 경제체제 역시 광산업에서 농업과 축산업 위주로 급격한 전환이 이루어졌으며, 노동력의 부족과 대토지 소유자의 증가로 대규모 플랜테이션 경작이 행해지게 되었다. 한편 해적선이나 각국의 무장선에 의한 손해도 적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스페인 본국과의 교역량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미 1596년 드레이크에 의해 놈브레 데 디오스가 점령 · 파괴당했던 경험도 있었지만 해적선에 의한 피해는 더욱 늘어 30% 정도의 막대한 손실과 함께 밀수 증가를 야기시켰고 경제적 위기상황을 가중시켰던 것이다.

 


<관련 그림>

 

2

17세기 북반구 여름 한랭기온 변화 / William S. Atwell, Ibid (2001), p.82

 

3

400년 동안의 태양 흑점 관측. ‘마운더 극소기 Maunder Minimum’ 기간(1675~1715)에 흑점 활동이 거의 없었다.

 

 

4

화산폭발이 북반구의 여름 기후와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그림. 그림 아래의 VEI(Volcanic Explosivity Index)는 화산폭발의 규모를 나타낸다. / K. R. Briffa, Ibid (1998), p.451

 

5

<1201년부터 1960년까지 서유럽의 곡물가 변화 추이>

장기적으로 상승하는 경향을 보이는 빵 가격을 두고 경제사학자들은 ‘가격혁명’이라 불렀다. 그런데 가격상승의 배경은 화폐의 가치절하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늘어난 빵의 수요였다. 인구는 곡식 생산량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다.

 

 

 

6

– 헨드릭 아베르캄프의 겨울 풍경 / 1608년 작으로 네덜란드의 겨울 풍경이다. 운하가 꽁꽁 얼어서 배가 다니지 못한다.

 

7

얼어붙은 템즈강 (1677년)

 

1

– 기원전 2500년부터 기온 변화 (출처 : http://www.longrangeweather.com/)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 백과 : General Crisis

위키 백과 : Little Ice Age

위키 백과 : Maunder Minimum

네이버 지식백과(문화원형백과) : 데이타뱅크-대기근

조선후기 한국농업의 특징과 기후생태학적 배경 (김재호 / 비교민속학 제41집, 2010년 4월)

블로그 : 조선의 소빙기와 대기근 그리고 한반도의 거시적 인구규모 추계 : 자맹론의 덫에 갇힌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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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위기 – 소빙하기(소빙기)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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