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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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7 | 포르투갈,마카오를 거점 |
1553년(명나라 가정(嘉靖) 31년), 포르투갈은 현지 관리에게 「짐이 젖어서 육지에서 말리고 싶다」는 구실로 뇌물을 주고 마카오 체류를 인정받았고, 4년 뒤부터는 뇌물을 매년 건네면서 본격적으로 마카오에 눌러앉게 되었다. 1572년부터는 명나라 조정도 매년 500냥의 지대(地代)를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거주권을 인정하였다. 그런데 그 계기는, 포르투갈이 현지 관리에게 뇌물을 주는 자리에 우연히 조정에서 온 관리가 있었으므로, 부정(不正)이 발각되는 것을 두려워한 광둥 성의 관리가 받은 500냥을 부득이 국고에 납입했기 때문인 듯하다. 해적 정벌을 원조한 공적으로 포르투갈인에게 마카오 거주권을 주었다는 설(說)은 18세기에 포르투갈인이 창작한 이야기이다.[2] 처음 정착할 당시 포르투갈인이 도교 사원인 마쭈거(媽祖閣, 아마 사원) 근처에 살았는데, 현지인에게 그곳의 지명을 물으니 현지인은 사원의 이름을 묻는 것으로 착각하여 "마쭈거"라고 알려주었는데, 이를 잘못 알아들어 마카오라고 부른 것이 현재 이름이 되었다.
* 날짜 : 1557 | |
1567/08 | 선조 재위 |
선조(宣祖, 1552년 11월 26일 (음력 11월 11일) ~ 1608년 3월 16일 (음력 2월 1일)는 조선의 제14대 임금(재위 1567년~1608년)이다.
* 날짜 : 1567/08 ~ 1608/03 | |
1570 | 이성량, 요동총병 되다 |
조선족 출신 중국 명(明)의 장수로서 요동총병(遼東総兵)으로 랴오둥[遼東]에서 몽고와 여진족(女眞族)의 방위를 총괄하였다. 이여송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 날짜 : 1570 | |
1571 | 명, 알탄 칸과 평화조약 |
1570년 손자인 바간나기가 명에 투항한 것을 계기로 명나라는 1571년 평화조약을 맺었다. 명에 의해 순의왕에 봉해져서 거성을 귀화성이라 부르고 명과 교역했다. 말과 비단 등이 무역의 대상으로, 이후 이로 인해 투메드는 경제적으로 크게 신장된다.
* 날짜 : 1571 | |
1571 | 스페인,필리핀 정복 |
필리핀의 역사에서 스페인 식민지 시대는 스페인이 필리핀을 정복한 1571년부터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이 미국으로 이양된 1898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 날짜 : 1571 | |
1572 | 명, 만력제 재위 |
만력제(萬曆帝, 1563년 9월 4일 ~ 1620년 8월 18일)는 명나라의 제13대 황제이다. 휘는 익균(翊鈞), 묘호는 신종(神宗). 융경제의 3남이다. 1572년부터 1620년까지 48년간 재위하였다. 그의 치세는 역대 명나라 황제들의 통치 기간 중 가장 길며, 명나라가 건국된 지 200년쯤 지나고 왕조가 서서히 몰락해가는 시기였다.
* 날짜 : 1572 ~ 1620/08/18 | |
1572 | 장거정 재상이 되다 |
장거정 (張居正, 1525년 ~ 1582년) 은 중국 명나라의 정치가이다. 1572년 신종 때 재상이 되어 몽고와의 화평에 성공하였다. 또한 전국적인 호구 조사 및 검지를 실시하여 지주를 누르고, 농민 부담의 균형을 꾀하였다. 명나라 제일의 정치가로 손꼽힌다.
* 날짜 : 1572 | |
1573 | 일본, 무로마치 시대 끝 |
천하포무를 외치며 새로운 질서 형성을 향하는 노부나가와 종래의 쇼군, 막부 중심의 질서의 재건을 향하는 요시아키는 적대하여 1573년에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당하고 막부 조직은 노부나가가 만든 정치기구에 해체, 흡수당했다. 이후에도 요시아키는 세이이타이쇼군에서 해임당하지 않은 정통성을 가지고 각지를 전전하며 다이묘를 회유하여 노부나가 토벌 활동을 벌였으나, 노부나가에 의한 새로운 질서 형성의 기세 앞에서는 무력하여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여 요시아키의 교토 추방 시점으로 무로마치 막부 및 무로마치 시대는 끝을 맞게 된다.
* 날짜 : 1573 | |
1574 | 명, 건주위 토벌 |
누르하치의 외조부로 알려진 왕고는 1574년, 부족의 병력을 이끌고 랴오양과 선양을 공격했다. 明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자신에게 교역을 금지시킨 데 따른 반감을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하지만 3000여명에 불과했던 왕고의 병력은 6만명에 이르는 明의 진압군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왕고는 겨우 탈출해 해서 여진의 하다부(哈達部)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하다부는 왕고를 포박하여 明軍 사령관 이성량(李成梁)에게 넘겼고, 왕고는 다시 베이징으로 압송돼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 날짜 : 1574 | |
1575 | 동서 분당 |
동서 분당(東西分黨)은 조선 선조 8년(1575)에 사림(士林)이 동서(東西)로 분열한 사건이다.
* 날짜 : 1575 | |
1580/11 | 명, 토지 재조사 |
장거정은 토지를 재조사하여, 황실의 내외척이나 지주들이 숨겨놓은 토지를 밝혀냈으며, 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나라의 재정 수입을 늘렸다.
* 날짜 : 1580/11 | |
1581 | 명,일조편법 전국 실시 |
일조편법(一條鞭法)이란 명나라 후기부터 청나라 초기에 실시되었던 세금 제도이다.
* 날짜 : 1581 | |
1582 | 장거정 사망 |
장거정 (張居正, 1525년 ~ 1582년) 은 중국 명나라의 정치가이다. 1572년 신종 때 재상이 되어 몽고와의 화평에 성공하였다. 또한 전국적인 호구 조사 및 검지를 실시하여 지주를 누르고, 농민 부담의 균형을 꾀하였다. 명나라 제일의 정치가로 손꼽힌다.
* 날짜 : 1582 | |
1582 | 몽골 타타르 알탄 칸 사망 |
몽골 타타르족의 추장. 명나라의 북쪽 국경을 자주 침입하였고 명나라와 화의하여 통상허락을 받았다. 라마교를 몽골에 보급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 날짜 : 1582 | |
1582/06/21 | 오다 노부나가 사망 |
역사상 일본의 정치적 중심지인 교토와 그 일대를 장악한 뒤 서부 일본으로 정복 활동을 확장하던 1582년 6월 진군 도중에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 머물던 그는 측근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기습을 받아 어이없이 사망하였다. 혼노지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아케치 미쓰히데가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이유에 대해 수백 년간 많은 설이 제기되어 왔다.
* 날짜 : 1582/06/21 | |
1583 | 누루하치 조부와 부친 피살 |
아타이는 항복을 거부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고, 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이윽고 明軍은 성안에서 대학살을 자행했는데, 교창가 부자도 그 와중에 적으로 오인되어 피살되었다.
* 날짜 : 1583 | |
1583/01 | 이탕개의 난 |
임진왜란 직전인 1583년(선조 16년) 1월에서 8월까지 최대 3만여 명 규모의 여진족이 함경도 북부를 침입, 삼포왜란과 함께 조선 전기의 가장 큰 전란으로 기록됨.
* 날짜 : 1583/01 ~ 1583/08 | |
1583/05 | 누르하치 군사를 일으킴 |
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가 장차 동북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대격변의 첫걸음을 내디딘 해는 1583년이었다. 이 해부터 시작해 1626년 사망할 때까지 누르하치의 일생은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전쟁은 처음에는 여진의 여러 부족을 아우르는 단계에서 출발해 나중에는 직접 명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 날짜 : 1583/05 | |
1587/04 | 히데요시, 규슈 평정 |
덴쇼 15년(1587년) 히데요시 스스로 20만 대군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규슈를 공략한다. 이에 시마즈 군은 압도되어 시마즈 가문은 항복했다(규슈 정벌). 이렇게 하여 서일본 전역은 히데요시 세력하에 놓이게 된다.
* 날짜 : 1587/04 | |
1587/07/24 | 일본, 선교사 추방령 |
일본내 거주하는 선교사 40명과 수사 73명에게 출극명령내림. 나가사키의 교회령을 몰수하여 중앙의 직할령으로 변경시킨뒤, 각 곳의 교회를 파괴.
* 날짜 : 1587/07/24 | |
1589 | 누루하치,건주여진 통일 |
1589년, 누르하치는 마침내 건주여진 부족 전체를 통일했다.
* 날짜 : 1589 | |
1589/10 | 기축옥사 |
조선 선조 때인 1589년에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의 인물들이 모반의 혐의로 박해를 받은 사건.
* 날짜 : 1589/10 | |
1590 |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통일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0년 오다와라ㆍ오우슈를 제압하고 일본 전 지역을 통일하였다. 당시 국내의 힘을 하나로 모으려는 데서 중국 명과의 전투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조선을 침략하였다(임진왜란).
* 날짜 : 1590 | |
1591 | 누루하치, 압록강로 확보 |
누르하치는 만력 19년(1591)에 압록강로(鴨綠江路)를 손에 넣었다. 영토를 넓힘으로 해서 백성을 늘림과 동시에 조선과도 교역의 길을 튼 것이다.
* 날짜 : 1591 | |
1591 | 일본,스페인 총독부 위협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기 전에, 먼저 무력으로 류큐 국왕을 위협해서 일본에 칭신납공(稱臣納貢)하게 함과 동시에,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1588년, 1591년, 1593년 등 3차에 걸쳐 사자를 보내어 위협하였다.
* 날짜 : 1591 | |
1591/06 | 명, 일본의 침략의도 인지 |
류큐의 왕은 히데요시의 계획을 처음 알았을 때 바로 명에 그 사실을 알렸다. 또한 중국과 조선의 사료에 의하면, 1591년 6월과 7월에 일본에 잡혀 있던 한 중국인 무역상은 용케도 자기 아랫 사람을 몰래 중국에 보내 10만의 일본군이 다음해 정월에 출발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저장(浙江)에 일본이 침입할 것이라는 첩보를 전하였다. 1591년 이 소식을 듣자마자 만력제는 병부에 해안의 경비를 강화하라고 명하였다.
* 날짜 : 1591/06 | |
1591/11 | 이성량 파면 |
이성량은 랴오둥[遼東]의 방위를 책임지며 이 지역의 안정에 기여했지만 점차 교만해지면서 군비(軍費)를 유용(流用)하는 등의 전횡(專橫)을 저질렀다. 그는 이 지역의 교역과 상권에 개입해 막대한 부(富)를 쌓았으며 매우 사치스럽게 생활했다. 명(明) 조정(朝廷)은 1591년(萬曆 19년) 이성량을 요동총병의 직위에서 파면했지만, 그는 영원백(寧遠伯)이라는 작위(爵位)을 지니고 랴오둥[遼東] 지역에서 계속해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 날짜 : 1591/11 | |
1592/02 | 명, 보바이 반란 |
1592년 2월, 간쑤성(甘肅省) 닝샤(寧夏)에서 몽고출신의 장군 보바이(발배)가 오르도스의 몽고세력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요동의 최강부대를 멀리서 동원하여 가까스로 진압할 수 있었으며 이때 활약했던 장군이 이여송이었다.
* 날짜 : 1592/02 ~ 1592/11 | |
1592/04/13 | 임진왜란 |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부터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을 말한다. 통상적으로 왜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삼포왜란과 같은 이른바 ‘일본인들의 소요’가 아니라 ‘국가 간의 전쟁’이므로 이러한 명칭은 옳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 날짜 : 1592/04/13 ~ 1598 | |
1592/05/03 | 한양 함락 |
조정에서는 도원수 김명원에게 도성을 수비하라고 시켰으나 결국 1592년 5월 3일(음력), 도성은 손쉽게 함락되었다.
* 날짜 : 1592/05/03 | |
1592/06/13 | 평양 함락 |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함경도로, 각각 한반도 북부까지 진격하였다. 7월 21일(음력 6월 13일)에 평양이 함락되었다. 다급해진 선조는 의주로 피신했다.
* 날짜 : 1592/06/13 | |
1592/09 | 누르하치, 조선에 원병 파견 제의 |
선조실록을 보면, 윤두수(尹斗壽)가 누르하치의 군대가 들어오는 순간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明의 국력이 약하기 때문에 심유경이 누르하치를 끌어들여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획책한다고 비판하고,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했다.
* 날짜 : 1592/09 | |
1592/12 | 명, 이여송 조선 파병 |
1차 원병에 실패한 명나라는 화전양론의 의논끝에 파병으로 기울어져, 간쑤성(甘肅省) 영하(寧下)에서 반란을 평정하고 복귀한 이여송(李如松)을 다시 동정제독(東征提督)으로 삼아 2차 원병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 해 12월에 이여송은 4만 3000여의 군사를 거느리고 부총병 양원(楊元)을 좌협대장(左協大將), 부총병 이여백(李如栢 : 이여송의 아우)을 중협대장(中協大將),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왔다.
* 날짜 : 1592/12 | |
1593/04 | 한양 수복 |
명나라는 심유경을 한양의 일본군 본진에 다시 보내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고 일본군도 보급 문제로 말미암은 전황 불리, 명군의 진주, 악역(惡疫)이 유행한 탓에 화의에 응하여 1593년(선조 26년) 음력 4월에 전군을 남하시켜 서생포에서 웅천(雄川 : 지금의 창원)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 진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 날짜 : 1593/04 | |
1593/06 | 누르하치, 해서연합군을 물리치다 |
1593년(만력 21년) 누르하치가 이끄는 만주군은 해서여진을 중심으로 한 아홉 부족 연합군과 격돌하여 완승을 거뒀다. 이때부터 여진의 여러 부족이 누르하치를 따르게 되고, 명나라는 누르하치에게 엄호장군이라는 관직을 하사했다. 또한 이성량은 2년 전에 부패로 인해 탄핵되어 경질당했다. 이 시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에 대응하느라 명나라가 정신이 없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명나라의 관심을 덜 끌 수 있었다.
* 날짜 : 1593/06 | |
1595/07 | 누르하치, 조선과 교섭 재개 요청 |
임진왜란 이후 3년 가까이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누르하치는 1595년 여름에 조선과의 직접 교섭을 추진함으로써 명의 금법(禁法)을 무시하려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 날짜 : 1595/07 | |
1596 | 명, 광세의 해 |
명(明)나라 신종(神宗) 때 세정(稅政)의 문란으로 야기된 사회적 혼란.
* 날짜 : 1596 | |
1597 | 정유재란 |
임진왜란 중 화의교섭의 결렬로 1597년(선조 30)에 일어난 재차의 왜란.
* 날짜 : 1597 | |
1597/07 | 명, 양응룡 반란 |
임진왜란이 채 끝나지 않은 1597년(만력 25년) 7월 보저우(播州)의 소수민족 추장인 양응룡(楊應龍)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진압에도 2년이란 세월과 대군이 동원되었다.
* 날짜 : 1597/07 ~ 1600 | |
1598 | 누르하치, 원병 파견 제의 |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1598년 초에 누르하치는 2만 명의 군사를 보내 조선을 돕겠다는 의사를 다시 요동아문에 전해왔다.
* 날짜 : 1598 | |
1598/08/18 |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
게이초 3년(1598년) 음력 8월 18일 고다이로 필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보호역을 맡은 마에다 도시이에에 후사를 부탁하고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다. 사인은 위암, 독살등 여러 설이 있다. 향년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 날짜 : 1598/08/18 | |
1599 | 명, 임청민변 |
임진왜란 직후에 남북간 물자이동의 거대 집산지인 산동山東 임청臨淸에서 민변民變이 발발하였다. 임청민변은 稅監 馬堂의 강압적 약탈적 징세에 직접적 원인이 있었다.
* 날짜 : 1599 | |
1599 | 해서여진 하다부 항복 |
1599년 누르하치는 자신을 적대하던 해서여진 하다부를 멸망시켰다. 직후 히데요시 군이 철군하자, 명나라는 누르하치에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해서여진의 예허 부족을 지지함으로써 누르하치의 대항마로 삼으려 했다.
* 날짜 : 1599 | |
1599 | 누르하치, 만주문자 창제를 명함 |
누르하치, 만주문자 창제를 명함.
* 날짜 : 1599 | |
1600 | 17세기 위기 - 소빙하기 절정 |
1970년대부터 유럽사를 둘러싼 ’17세기 위기론’에서 소빙기 문제를 적극 도입하면서 이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제 소빙기 연구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역사인문학에서도 상당히 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 날짜 : 1600 | |
1600 | 영국,동인도회사 설립 |
영국, 동인도회사 설립.
* 날짜 : 1600 | |
1600/09/15 | 세키가하라 전투 |
전투의 본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그 권좌를 두고 벌어진 도쿠가와 이에야스파와 이시다 미쓰나리파의 다툼이었고, 일본 전국의 다이묘가 두 세력으로 나뉘어 싸운 결과 도쿠가와 측이 승리했다. 대규모 전투였음에도 단 하루 만에 승패가 결정되어 군사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지만, 전투로 이어지는 과정과 전후 처리 과정과 연관된 정치적 의미는 매우 크다.
* 날짜 : 1600/09/15 | |
1601 | 이성량 다시 요동총병 |
1601년(萬曆 29년), 이성량은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심일관(沈一貫)의 건의에 따라 다시 요동총병(遼東総兵)으로 기용되었다.
* 날짜 : 1601 | |
1602/03/20 | 네덜란드,동인도회사 설립 |
동인도 회사(東印度會社, Dutch East India Company)는 네덜란드에서 인도, 동남아시아 지역으로의 경제적 진출을 위해 1602년에 세운 회사이다. 조선을 방문한 서양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헨드리크 하멜은 동인도 회사에 고용되어 일한 선원이었다.
* 날짜 : 1602/03/20 | |
1603 | 누르하치, 허투아라로 이동 |
누르하치가 군사를 일으킨 후 건주여진을 통합하면서 거점으로 삼았던 퍼아라지역을 떠나 허투아라 지역으로의 이주를 실행.
* 날짜 : 1603 | |
1603/03/24 | 에도 막부 개막 |
에도 막부(일본어: 江戶幕府) 또는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는 일본사에서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에 이어 일본사에서 세 번째로 나타난 최후의 막부이다. 1603년 3월 24일(게이초(慶長) 8년 음력 2월 12일)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征夷大将軍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고 막부를 창설하였을 때부터 시작되어, 1867년 11월 9일 (게이오(慶應) 3년 음력 10월 14일)에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大政奉還)이라는 이름으로 정권을 천황에게 넘기게 된 것으로 막을 내렸다.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들이 일본을 지배한 이 264년간의 시기를 에도 시대 또는 도쿠가와 시대라 한다.
* 날짜 : 1603/03/24 | |
1604 | 몽골 링단 칸 즉위 |
1604년 북원의 칸에 즉위하여 차하르를 정비하고 다른 몽골 부족들과 연합하여 명에 원정하는 등 그의 재위 초기에 차하르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 날짜 : 1604 | |
1607 | 해서여진 후이파부 멸망 |
해서여진 후이파부 멸망.
* 날짜 : 1607 | |
1608 | 이성량 파면 |
해서여진(海西女眞)까지 통일한 누르하치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자, 1606년 6보(六堡)를 포기하고 그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이 일로 조정에 책임을 추궁당해 1608년에 다시 파면되었다. 그리고 1615년(萬曆 43년)에 베이징[北京]에서 죽었다.
* 날짜 : 1608 | |
1608/02/02 | 광해군 재위 |
광해군(光海君, 1575년 6월 4일 (음력 4월 26일) ~ 1641년 8월 7일 (음력 7월 1일)[1])은 조선의 제15대 임금이다.
* 날짜 : 1608/02/02 ~ 1623/04/11 | |
1608/05 | 대동법, 경기도 실시 |
영의정 이원익이 1608년(광해군 즉위년) 음력 5월에 중앙에 선혜청(宣惠廳), 경기도에 경기청을 두고 방납의 폐해가 가장 큰 경기도부터 시작하였다.
* 날짜 : 1608/05 | |
1609 | 네덜란드, 일본에 무역사무소 |
네덜란드, 일본에 무역사무소 개설.
* 날짜 : 1609 | |
1609 | 기유약조, 일본과 국교 재개 |
기유약조(己酉約條)는 1609년(광해군 1) 일본과 맺은 전문 13조의 송사조약(送使條約)이다. 조약 내용은 주로 쓰시마 도주의 세견선의 왕래 조건에 관한 것이다.
* 날짜 : 1609 | |
1609 | 사쓰마 번,류큐 침공 |
1609년 일본 전국시대가 끝나고 지역정권인 사쓰마 번이 침공해왔다. 당시 류큐의 수도 수리성의 정문에는 적이 접근해오면 좌우양면에서 화살을 발사할 수 있도록 곡선으로 성벽을 만들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저항을 하지 못하고 패배, 아마미 제도를 빼앗기고, 일본의 조공국이 된다. 하지만 이후 류큐는 다시 청과 일본에 이중조공을 하면서 다시 중계무역으로 번성을 되찾는다.
* 날짜 : 1609 | |
1613 | 허준《동의보감》 |
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아 1596년(선조 29년)부터 정작(鄭碏), 이명원(李命源), 양예수(楊禮壽), 김응탁(金應鐸), 정예남(鄭禮男) 등 여러 명과 함께 집필하기 시작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문에 집필이 중단되었지만, 정유재란이 끝나자 허준 혼자 집필을 계속하여 1610년(광해군 2년)에 완성했고, 1613년(광해군 5년) 내의원에서 훈련도감의 개주갑인자로 간행하였었다. 15년간 230여종의 책을 참고하여[1] 총 25권으로 정리되었다.
* 날짜 : 1613 | |
1613 | 계축옥사 |
이로 인해 김제남은 사사(賜死)되었고 그의 세 아들 역시 처형당했으며, 영창대군은 폐서인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흠(申欽)·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비롯한 서인과 남인 세력이 대부분 몰락하고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계축년(癸丑年, 1613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축옥사라고 한다.
* 날짜 : 1613 | |
1613 | 해서여진 우라부 멸망 |
해서여진 우라부 멸망.
* 날짜 : 1613 | |
1615/05/07 | 오사카 전투 |
오사카 전투 혹은 오사카의 역(일본어: 大坂 おおざかの役 えき)은 1614년 ~ 1615년에 에도 막부(江戶幕府)가 도요토미 가문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전투이다. 이 전투는 오사카 겨울 전투(大坂冬の陣)와 오사카 여름 전투(大坂夏の陣)로 나뉘어 벌어진 것으로 일반적으로 오사카의 진(大坂 おおざかの陣 じん)이라 불리는 경우가 많다. 다른 말로 오사카의 난(大坂の乱)이라 불리기도 한다.
* 날짜 : 1615/05/07 | |
1616 | 중국 산동의 대기근 |
1615년과 그 이듬해 중국 화북의 광범위한 지역에는 가뭄과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극심한 기근이 들었다. 피해가 가장 심했던 곳은 산동이었다.
* 날짜 : 1616 | |
1616 | 누루하치, 후금 건국 |
여진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1616년 후금을 건국하였다. 후금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허투아라로 도성을 옮기고, 여진문자 제정, 팔기제도 제정 등 여진 부흥의 발판을 닦았다.
* 날짜 : 1616 | |
1618/04/13 | 누루하치, 명에 선전포고 |
1618년(천명 3년) 누르하치는 "일곱가지 큰 원한"(七大恨)이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 문서에는 명나라가 예허에 가담하여 만주를 공격한 것, 조부와 부친이 명나라에 죽은 것 등이 적혀 있다.
* 날짜 : 1618/04/13 | |
1618/04/15 | 누루하치, 푸순 점령 |
1618년 4월15일 푸순성(撫順城)을 포위한 누르하치는 성주 이영방(李永芳)에게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이영방이 망설이자 後金軍은 공격을 시작했고, 상대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은 이영방은 항복했다. 푸순성을 접수한 누르하치는 성안에 있던 한인(漢人) 상인들을 풀어 주었다. 그들에게 '七大恨'이 적힌 문서를 들려주고, 고향으로 돌아가 내용을 알리라고 했다. 자신의 거병이 정당하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 날짜 : 1618/04/15 | |
1618/04/21 | 명, 장승음 전사 |
4월21일 광녕총병(廣寧總兵) 장승음(張承蔭)이 푸순성을 구원하려고 달려왔다. 만주 주민들을 세거지에서 쫓아내고 수확을 금지시켰던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병력은 1만명에 불과했고, 6만명까지 불어난 후금군에 참패해 전사하고 말았다. '명실록(明實錄)'은 '장승음이 힘이 다하여 죽었다.(力屈死之)'라고 적었다.
* 날짜 : 1618/04/21 | |
1618/10 | 조선군 명에 파병 |
1618년(광해군 10)에 들어 명나라의 원병 요구는 더욱 강경했고 사대은의를 내세우는 조정 대신들의 여론 또한 억누르기만 할 수도 없어 마침내 원병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도원수를 강홍립, 부원수를 김경서로 임명하고 포수 3500명을 중심으로 1만3000명 가량의 군사를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 날짜 : 1618/10 | |
1619 | 네덜란드,자카르타 건설 |
16세기경부터 무역항으로서 발달. 포르투갈인에게는 자카르타라라고 알려졌다. 네덜란드의 진출 후, 1619년 구시(舊市) 남쪽에 새 도시가 건설되어 바타비아라고 개명했다.
* 날짜 : 1619 | |
1619/03/02 | 사르후 전투 |
사르후 전투(薩爾滸之戰)는 1619년 명나라에 쳐들어오는 후금에 대항하기 위해 명나라, 조선, 여진족까지 참전한 대전투로 이 전투에서 명나라가 크게 패해 명나라가 쇠퇴했고 후금은 만주 지역을 차지했으며, 군대를 파병한 강홍립의 조선군 부대는 전체 투항하여 광해군의 중립 정책을 보여주었다.
* 날짜 : 1619/03/02 | |
1619/03/04 | 조선군, 후금에 투항 |
1618년(광해군 10)에 들어 명나라의 원병 요구는 더욱 강경했고 사대은의를 내세우는 조정 대신들의 여론 또한 억누르기만 할 수도 없어 마침내 원병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도원수를 강홍립, 부원수를 김경서로 임명하고 포수 3500명을 중심으로 1만3000명 가량의 군사를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군에게 패한 뒤 강홍립 부대는 후금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적당히 싸우는 체하다가 투항하고 말았다. 또 1619년 3월 4일 투항한 다음날에는 후금군과 화의를 맺었고 또 그 다음날에는 누르하치를 만나 조선의 뜻을 전했다.
* 날짜 : 1619/03/04 | |
1619/08 | 해서여진 예허부 멸망 |
해서여진 예허부 멸망.
* 날짜 : 1619/08 | |
1620/08/18 | 명, 태창제 재위 |
태창제(泰昌帝, 1582년 8월 28일 ~ 1620년 9월 26일)는 중국 명나라의 14대 황제(재위 : 1620년). 이름은 주상락(朱常洛)이고, 묘호는 광종(光宗). 만력제의 장자이다. 1620년 9월 26일 홍려시관 이가작이 만든 선단 2알을 연거푸 복용하고 갑자기 급사하였다.
* 날짜 : 1620/08/18 ~ 1620/09/26 | |
1620/09/26 | 명, 천계제 재위 |
천계제(天啓帝, 1605년 12월 23일 ~ 1627년 9월 30일)는 중국 명나라의 15대 황제(재위:1620년 ~ 1627년). 이름은 주유교(朱由校)이고, 묘호는 희종(熹宗). 태창제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선시 왕씨(王氏, ? ~ 1619년) 소생이다. 재위 이후에는 환관 위충현에게 정치를 모두 넘겼고, 위충현은 전횡을 일삼아 뇌물이 끊이지 않고 간신들이 국정을 농단하였다.
* 날짜 : 1620/09/26 ~ 1627/09/30 | |
1621/03 | 후금,심양과 요양 점령 |
후금(後金)은 1621년 3월 심양(瀋陽)과 요양을 점령하였다. 명(明)의 요동도사(遼東都事) 모문룡(毛文龍)은 요양이 함락되자 남은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변(鴨綠江邊)의 진강(津江)을 점령했다. 모문룡(毛文龍)은 요동 전체를 수복하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후금(後金)이 대병력을 투입하자 한달을 버티지 못하였다. 광해군(光海君) 13년인 1621년 7월, 모문룡(毛文龍)은 진강(津江)을 탈출하여 조선의 미곶에 상륙했다. 모문룡이 조선 영토에 들어온 것은 후금(後金)을 크게 자극하였다. 명나라 난민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그들은 모문룡의 사주를 받아 일어난 일이었다.
* 날짜 : 1621/03 | |
1622 | 후금,광녕 점령 |
1621년에는 요양(遼陽)이,1622년에는 광녕(廣寧)이 넘어갔다. 정치, 군사적 거점이자 전략적 요충이었던 요양과 광녕이 함락됨으로써 명은 사실상 요하(遼河) 이동의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 날짜 : 1622 | |
1622/11 | 모문룡, 가도로 들어감 |
광해군(光海君) 14년인 1622년 11월, 모문룡(毛文龍)은 광해군(光海君)의 권유(勸誘)대로 평안도 철산 앞바다에 있는 섬인 가도(暇島)로 들어갔다. 가도(暇島)는 고려(高麗)가 몽고 침략을 받았을 때 서북면병마영이 설치된 곳이었다. 조선은 이곳을 목마장(牧馬場)으로 운영해왔다. 명나라 패잔병들과 난민(亂民) 등 1만여 명이 가도에 몰려들었다. 모문룡은 여기에 진(鎭)을 치고 동강진(東江鎭)이라 하였으며, 명과 조선으로부터 식량, 병기 등을 공급받고 계속하여 후금(後金)을 교란하였다. 모문룡의 후방 교란으로 후금의 요서(遼西) 진출은 큰 제약을 받았다. 모문룡의 가도 주둔은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 날짜 : 1622/11 | |
1623 | 위충현, 동창의 장관이 됨 |
중국 명(明) 말기의 환관(宦官)으로 희종(熹宗)의 총애를 받아 비밀경찰인 동창(東廠)의 수장(首長)이 되었고, 동림파(東林派) 관료를 탄압하며 정치를 농단(壟斷)하여 명(明)의 멸망을 촉진하였다.
* 날짜 : 1623 | |
1623/04/11 | 인조반정 |
인조반정(仁祖反正)은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 날짜 : 1623/04/11 | |
1623/04/11 | 인조 재위 |
인조(仁祖, 1595년 12월 17일 (음력 11월 17일) ~ 1649년 6월 17일 (음력 5월 8일), 재위 기간: 1623년 ~ 1649년)는 조선의 제16대 임금이다.
* 날짜 : 1623/04/11 ~ 1649 | |
1624 | 타이완,네덜란드 시대 |
1624년 펑후 제도를 점거하던 네덜란드 상인과 명나라 군대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펑후 제도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타이완 섬의 서남부(현재의 타이난 시 일대)에 상업지구를 건립하는 데에 합의하였다. 네덜란드의 타이완 섬 통치는 1662년 정성공(鄭成功)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38년간 이어졌다.
* 날짜 : 1624 | |
1624 | 이괄의 난 |
이괄의 난(李适—亂)은 1624년(인조 2년)에 일어난 반란이다.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를 당하자 난을 일으켜 한양까지 함락시켰다. 조선대의 내부 반란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을 도성으로부터 피난시킨 전무후무한 난이기도 하다. 이후 길마재 전투에서 패배하여 진압되었다.
* 날짜 : 1624 | |
1625/03 | 후금, 심양을 수도로 |
사르후 전투의 패배로 명나라는 국력을 크게 상실했으며, 2년 후에 누르하치는 8기군을 거느리고 심양과 요양(遼陽)을 점령했다. 1625년 3월, 누르하치는 후금의 도성을 심양으로 옮기고 심양을 ‘성경(盛京)’으로 고쳤다. 이때부터 후금은 명나라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 날짜 : 1625/03 | |
1626/01/14 | 영원성 전투 |
영원성 전투(寧遠之戰) 1626년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명나라가 원숭환의 지휘로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 전투로 인해 명나라 군대는 연속된 패배에서 일시적으로 소생하게 된다.
* 날짜 : 1626/01/14 | |
1626/09/30 | 누르하치 사망 |
1626년(천명 11년), 연전연승하던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산해관을 함락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그 앞에 있는 영원성(현재의 흥행성 현성)에서 장군 원숭환이 포르투갈에서 건너온 홍이포를 대량으로 거취하고 만주군을 맞이했다. 홍이포의 위력에 만주군은 패배하고, 퇴각했다. (영원성 전투) 이 과정에서 누르하치도 부상을 당해, 그해 몽골에 원정을 나가던 중 상태가 호전되지 못하자 사망하였고 뒤를 아들인 홍타이지가 이었다.
* 날짜 : 1626/09/30 | |
1626/09/30 | 淸태종,홍타이지 재위 |
숭덕제(崇德帝, 1592년 11월 28일 ~ 1643년 9월 21일)는 청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1626년 ~ 1643년)이다. 휘는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부황인 천명제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을 이어받아 연호를 천총(天聰)이라 하다가 1636년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바꾸고 연호 역시 숭덕(崇德)으로 바꾸었다.
* 날짜 : 1626/09/30 ~ 1643/09/21 | |
1627 | 정묘호란 |
1627년(인조 5) 만주에 본거를 둔 후금(後金: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싸움이다. 후금은 명을 침공하기에 앞서 조선을 정복하여 후환을 없애려는 의도로 아민을 대장으로 하여 3만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하여 왔고, 조선은 후금에 형제국의 예를 갖추기로 하고 5개 조항에 합의하여 화의하였다.
* 날짜 : 1627 | |
1628 | 산시 대기근 |
1628년 산시 지방에 대기근이 들고 굶주린 농민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자성이 반란에 참가한다.
* 날짜 : 1628 | |
1628 | 명, 역참 개혁 |
1628년(崇禎 원년) 이후 연이어 발생한 심각한 가뭄과 수해로 농민들의 반란이 빈발하였다. 농민들은 부호(富豪)들의 식량을 탈취하고 관리들과 충돌하면서 폭동(暴動)을 일으켰으며, 점차 명(明) 왕조에 반기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명(明) 조정(朝廷)은 재정난(財政難)을 타개하기 위해 전국의 역참(驛站)을 폐지하였는데, 갑자기 생계(生計)를 잃은 역졸(驛卒)들과 식량을 지급받지 못한 군인들이 농민반란에 가담하여 그 규모가 더욱 커졌다.
* 날짜 : 1628 | |
1628 | 왕가윤 농민반란 |
산시[陕西] 곡현(谷縣) 출신으로, 명(明, 1368~1644) 말기에 나타난 농민반란의 초기 지도자이다. 그는 고영상(高迎祥, ?~1636), 장헌충(張献忠, 1606~1646), 이자성(李自成, 1606~1645) 등의 농민 반란 세력을 결집하여 명(明)의 붕괴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 날짜 : 1628 | |
1628 | 명, 숭정제 재위 |
숭정제(崇禎帝, 1611년 2월 6일 ~ 1644년 4월 25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16대 황제(재위 : 1628년 ~ 1644년). 묘호는 의종(毅宗). 시호는 순천수도경검관문양무체인치효장렬민황제(順天受道敬儉寬文襄武體仁致孝莊烈愍皇帝)이며, 이름은 주유검(朱由檢)이다. 천계제의 동생으로써 후사가 없는 천계제의 뒤를 이어 명나라 제16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1644년, 이자성군은 북경을 포위하여, 3월 19일에 북경은 함락되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숭정제는 위급을 알리는 종을 울렸지만, 신하들이 모두 도망가서, 환관 왕승은(王承恩)만 혼자 있었다고 한다. 1644년 3월 29일 숭정제는 아들들을 자금성으로부터 탈출시키고, 처첩과 딸들을 살해하고, 자금성의 북쪽에 있는 경산(景山)으로 가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였다.
* 날짜 : 1628 ~ 1644/04/25 | |
1628 | 위충현 자살 |
1627년에 천계제가 죽고, 동생인 숭정제가 1628년 즉위하면서 탄핵을 당해 봉양으로 좌천되어 가는 도중에 체포 소식을 듣고 부성(阜城)에서 이조흠과 함께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시신은 찢겨지고, 목은 효수되었고, 또한 그의 일족도 처형되었다.
* 날짜 : 1628 | |
1629/10 | 홍타이지, 북경 공략 |
1629년 10월2일, 홍타이지는 몽골의 코르친(科爾沁) 부족을 길잡이로 앞세워 북경 공략에 나섰다. 홍타이지는 원숭환이 굳게 지키고 있던 영원성과 산해관을 우회하여, 영평(永平) 관할의 용정관(龍井關)과 준화(遵化) 관할의 대안구(大安口), 희봉구(喜峰口)를 통해 직접 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산해관에서 영원성으로 이어지는 주공로(主攻路) 방어에 집중하고 있던 명군은 허를 찔리고 말았다. 일찍부터 혼인 정책 등을 통해 몽골 부족을 회유하여, 산해관 동북의 장성 외곽을 돌파하려 했던 후금의 시도가 성공했던 것이다.
* 날짜 : 1629/10 | |
1630/09/22 | 명, 원숭환 처형 |
뛰어난 전략으로 요동과 요서(현재 요녕성 남부)에서 후금군에 승리해 삼국 시대의 이름난 군사인 제갈량에 비견되면서 찬사를 받았다. 군사에 대해서도 배려 깊은 인물이었지만, 명 왕조 내부의 알력 다툼으로 처형됐다.
* 날짜 : 1630/09/22 | |
1631 | 명,이자성의 난 |
숭정 17년(1644년) 4월 25일(음력 3월 19일), 이자성이 베이징(北京)을 점령하자,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신무문으로 나와 경산 동쪽 비탈 홰나무(槐树) 밑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당시 33세였다. 그의 죽음과 동시에 명나라는 사실상 멸망했다.
* 날짜 : 1631 ~ 1645 | |
1631/10 | 조대수, 후금에 투항 |
명이 조대수를 시켜 대릉하성을 쌓은 목적은 명확했다. 산해관의 방어를 확고히 하면서, 후금에 빼앗긴 요서(遼西)와 요동을 수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후금군은 성의 방어 시설이 채 완공되기도 전에 들이닥쳤다. 조대수는 분투했지만 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집요한 포위 끝에 대릉하성을 무너뜨린 후금의 자신감은 더욱 커졌다. 명의 수세(守勢)와 낙조(落照)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고 말았다.
* 날짜 : 1631/10 | |
1632/04 | 홍타이지, 몽골동맹과 링단 칸에 원정 |
1632년 후금과 몽골 연맹이 링단 칸에 대해 원정하였다. 링단은 차하르의 백성들 10만명을 데리고 청해로 피신하여 재기를 노린다.
* 날짜 : 1632/04 | |
1633 | 공유덕, 후금에 투항 |
후금이 명을 압박하면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 또한 살얼음판을 걷고 있던 1633년 무렵, 세 나라의 관계를 뿌리째 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반란을 일으켜 등주(登州)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 등이 후금으로 귀순해 버린 것이다. 공유덕 등은 후금으로 가면서 185척의 선박과 수만의 병력을 대동했다. 뿐만 아니라 배 위에는 홍이포(紅夷砲)까지 싣고 있었다. 후금은 그토록 열망했던 함선과 수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후금은 이제 바다까지 장악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 날짜 : 1633 | |
1634 | 몽골 링단 칸 사망 |
1634년 티베트 겔룩파로 원정을 떠나던 도중 천연두로 죽고 그의 아들 에제이 칸이 돌아왔다. 그리고 몽골은 결국 청나라에 병합되었다.
* 날짜 : 1634 | |
1635 | 후금,내몽골 평정 |
홍타이지(청 태종)는 1635년 내몽골 지역까지 평정한 뒤 ‘주션’이라는 명칭을 금하고 ‘만주’로 개칭했다.
* 날짜 : 1635 | |
1635 | 몽골족 팔기군 |
1635년, 몽골족 팔기군(八旗軍)을 편성하여 중국 본토를 정복하고 신생 제국을 통치하려는 사업에 동업자로 참여시켰다.
* 날짜 : 1635 | |
1635/10/13 | 여진족에서 만주족로 개칭 |
음력 10월 13일은 만주족 최대 명절인 '반진제(頒金節)'다. 청나라 태종 황타이지(黃太極)가 1635년 '여진족'에서 '만주족'으로 개명, 만주족이 탄생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 날짜 : 1635/10/13 | |
1636/04/11 | 홍타이지, 청 황제 즉위 |
후금의 홍타이지 황제가 되고 국호를 청으로 고침.
* 날짜 : 1636/04/11 | |
1636/11/25 | 홍타이지, 조선 정벌을 하늘에 고하다 |
1636년 11월25일 홍타이지는 신료들을 이끌고 원구(圜丘)에서 제사를 지냈다. 황천(皇天)과 후토(后土)를 향해 자신이 朝鮮 정벌에 나서게 된 까닭을 고하는 자리였다.
* 날짜 : 1636/11/25 | |
1636/12 | 아지게, 명 토벌 |
조선 침공과 함께 명나라 토벌전도 전개되었다. 이 숭덕 원년의 명나라 토벌전은 태종의 동생인 아지게가 지휘했다. 이 부대는 독석구(獨石口)에서 거용관으로 들어가, 북경으로 진격하여 보정(保定)에 도달했다. 12성을 떨어뜨렸으며 56번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사람과 가축이 18만이라고 알려져 있다. 치고 빠지는 전술로 역시 명나라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동시에 사람들을 납치했다.
* 날짜 : 1636/12 | |
1636/12 | 병자호란 |
명(明)을 무너뜨린 후금은 나라이름을 청(淸)으로 바꾸고, 1636년 후금이 보낸 국서를 거절하는 등 그 동안 눈에 거슬리던 조선을 침략하였다. 12만 청군이 쳐들어와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청군에게 포위되고, 왕족들의 피난지 강화도마저 함락되어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 날짜 : 1636/12 ~ 1637/01/30 | |
1636/12/10 | 淸軍, 압록강을 건너다 |
淸軍이 1636년 12월10일 鴨錄江을 건넜다. 이렇다 할 저항이 없었다.
* 날짜 : 1636/12/10 | |
1636/12/14 | 인조, 남한산성으로 |
인조, 남한산성으로
* 날짜 : 1636/12/14 | |
1636/12/16 | 淸軍, 남한산성 포위 |
12월16일 淸軍은 산성을 포위했고, 일부는 판교(板橋)까지 나아가 삼남 지역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차단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 날짜 : 1636/12/16 | |
1637 | 명, 농민반란 토벌 |
1637년(崇禎 10년) 양사창(楊嗣昌)은 10만의 병력으로 대규모 토벌에 나서 장헌충과 나여재의 항복을 받고, 이자성의 반군을 궤멸시키는 등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당시 이자성은 겨우 10여 명의 부하와 함께 상락산(商洛山)으로 숨어들어야 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1638년 청(淸)의 대규모 공격이 다시 시작되면서 명군(明軍)이 철수하여 이자성 등의 농민 반란군 세력은 위기를 벗어났다.
* 날짜 : 1637 | |
1637/01/02 | 쌍령 전투에서 대패 |
쌍령전투(雙嶺戰鬪)는 병자호란이 진행되던 중 1637년 1월 2일에 쌍령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청군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청군에게 참패하였으며, 이는 결국 남한산성에서 항전하고 있었던 인조가 청나라에게 항복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 민족역사 3대 패전 (칠천량해전,쌍령전투,현리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 날짜 : 1637/01/02 | |
1637/01/22 | 강화도가 함락되다 |
1월 22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피난했던 강화도를 청군이 함락했다는 소식은 1월 25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이 일로 조선군은 항전 의지가 꺾였다.
* 날짜 : 1637/01/22 | |
1637/01/30 | 삼전도의 굴욕 |
정축하성(丁丑下城)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가 농성 59일만에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 1637년(정축년) 2월 24일(음력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행한 것을 말한다. 흔히,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표현된다.
* 날짜 : 1637/01/30 | |
1637/04/09 | 가도 함락 |
朝ㆍ淸연합군이 椵島에서 明軍을 격파.
* 날짜 : 1637/04/09 | |
1637/12/11 | 시마바라의 난 |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亂)은 1637년 일본 규슈 북부의 시마바라에서 기독교를 믿는 (기리시단) 농민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항쟁이다.
* 날짜 : 1637/12/11 ~ 1638/04/12 | |
1638 | 청태종, 명 토벌 |
숭덕 3년(1638)의 명나라 토벌전은 태종이 친정하여 산해관으로 향했으며, 태종의 동생인 도르곤이 밀운현(密雲縣)에서부터 침입했다. 산동까지 진격하여 제남(濟南)에서 명나라의 황족인 덕왕(德王) 주유추(朱由樞)를 사로잡아 왔다. 이 침공 작전에서 얻은 청나라의 수확은 돌파한 성이 50, 항복을 받은 성이 8, 포로 46만여 명, 은 100여만 냥이었다.
* 날짜 : 1638 | |
1639 | 명,농민반란 재개 |
1639년 중국 전역이 다시 가뭄 등의 재해에 휩싸이자 위축되었던 농민 반란군의 활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장헌충(張獻忠)이 곡성(谷城, 지금의 湖北 襄樊)에서 다시 봉기하였고, 이자성도 허난[河南]으로 나아가면서 굶주린 농민들과 반란세력들을 흡수하며 세력을 확대하였다.
* 날짜 : 1639 | |
1639 | 일본,쇄국령 |
17~19세기 일본 열도를 지배한 도쿠가와 막부(德川 幕府)는 전국시대와 임진왜란, 여러 차례의 내전 이후 간신히 찾아온 안정을 지키기 위해, 사회 질서를 흔들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려 했다.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해 일정 수 이상으로 태어난 아기를 죽이는 마비키(間引き) 풍습이나, 일본의 남녀 모두를 사찰에 등록시킴으로써 기독교도를 색출해내려 한 정책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기독교를 포교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네덜란드와만 경제적 관계를 맺는 한편, 유럽 국가들의 기독교 포교가 진행 중인 동남아시아에서 자국민을 철수시키고 자국 내의 기독교도들을 학살·추방했다.
* 날짜 : 1639 | |
1640 | 몽골 오이라트 법전 |
칼카(漠北몽골)와 오이라트(漠西몽골) 왕공 회맹으로 몽골-오이라트 법전이 비준됨. 청을 견제.
* 날짜 : 1640 | |
1640 | 중국 대기근 |
대기근의 절정은 1640년에서 1642년이었다. 3년 동안의 대기근은 역대의 어떤 기근보다 극심했다. 화북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가뭄, 메뚜기의 습격, 전염병이 양자강 이남의 광대한 남부지역까지 확대되면서 대기근은 전 중국적인 상황이 되었다.
* 날짜 : 1640 ~ 1642/12 | |
1641 | 이자성, 낙양 점령 |
이자성의 농민군은 1641년 뤄양[洛陽]을 점령해서 복왕(福王)을 죽이고 그 재산을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유적(流賊)의 성격을 벗어나 거점을 확보하고 주요 도성(都城)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 날짜 : 1641 | |
1641 | 조선군, 청에 파병 |
조선은 1500명의 조총군단을 청나라에 파병했고 금주성 전투 선두부대에 투입되었다가 부대 이동으로 송산, 행산 전투에 참가한다.
* 날짜 : 1641 | |
1641 | 청, 송산전투에서 대승 |
명군의 대패로 끝났으며 송산성뿐만 아니라 산해관 밖 네 성 모두가 청나라의 수중에 떨어졌다. 남은 것은 알몸이 되어 버린 산해관성뿐이었다.
* 날짜 : 1641 | |
1642 | 한족 팔기군 |
1642년, 요하 주변에 거주하는 한족을 동원해 한군(漢軍)팔기군 편성을 완료했다.
* 날짜 : 1642 | |
1642 | 일본,간에이 대기근 |
간에이 대기근(寛永の大飢饉)은 에도 시대 초기의 1640년부터 1643년에 걸쳐 일어난 기근이다. 에도 초기에는 게이초에서 겐나 연간에도 종종 흉작으로 기근이 발생했었지만, 그 중에서도 최대의 기근이었다. 시마바라의 난과 함께 에도 막부의 농정 전환에도 영향을 미쳤다.
* 날짜 : 1642 | |
1643/10/08 | 청, 순치제 재위 |
1643년(숭덕 8년), 아버지인 홍타이지가 돌연사를 한 이후 의정왕대신회의에서 뜻하지 않게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오른 후 숙부인 예친왕 도르곤과 종숙 지르하란이 섭정으로서 국사를 도맡아 이듬해인 1644년(순치 원년)에는 중원으로 들어가 멸망한 명나라의 뒤를 이어 새로운 통일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 날짜 : 1643/10/08 ~ 1661/02/05 | |
1644 | 이자성, 시안에서 황제 즉위 |
1644년에는 시안[西安]을 함락시킨 뒤, 그 곳에서 국호(國號)를 ‘대순(大順)’, 연호를 ‘영창(永昌)’으로 하고 황제로 즉위했다. 그리고 3월 베이징[北京]을 향해 북벌(北伐)을 시작하여, 4월 25일(崇禎 17년 3월 19일) 베이징[北京]을 점령해 명(明)을 멸망시켰다.
* 날짜 : 1644 | |
1644/03/19 | 이자성, 북경 점령 |
1644년 3월 18일 이자성은 약 100만 명의 농민반란군을 이끌고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北京)을 점령했다.
* 날짜 : 1644/03/19 | |
1644/03/19 | 명 멸망 |
4월 25일(崇禎 17년 3월 19일) 자금성(紫禁城)이 함락되자, 숭정제는 처첩(妻妾)과 딸을 죽이고 자신도 징산[景山]에서 자살하였다. 이로써 명(明)은 277년 만에 멸망하였다.
* 날짜 : 1644/03/19 | |
1644/04/05 | 오삼계, 청에 투항 |
1644년 4월 5일 산해관(山海關)에서 청나라군의 침공을 방어하던 명나라 장군 오삼계(吳三桂, 1612~1678)는 청나라에 투항해 왔고, 오삼계의 50만 명나라군과 청나라의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 1612~1650)의 8기군이 연합함으로써 이자성의 군대는 산해관 정벌에 실패했다.
* 날짜 : 1644/04/05 | |
1644/04/23 | 이자성, 산해관 정벌 실패 |
1644년 4월 5일 산해관(山海關)에서 청나라군의 침공을 방어하던 명나라 장군 오삼계(吳三桂, 1612~1678)는 청나라에 투항해 왔고, 오삼계의 50만 명나라군과 청나라의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 1612~1650)의 8기군이 연합함으로써 이자성의 군대는 산해관 정벌에 실패했다.
* 날짜 : 1644/04/23 | |
1644/05/01 | 청, 북경 무혈입성 |
1644년 5월 청나라는 북경에 무혈입성하여 명나라를 정복하고 대청제국(大淸帝國)을 수립하게 되었다.
* 날짜 : 1644/05/01 | |
1645 | 이자성 사망 |
이자성은 청군(淸軍)의 공격으로 시안[西安]마저 포기하고 퉁관[潼關], 샹양[襄陽] 등지로 퇴각을 거듭하다가 1645년 후베이[湖北]의 퉁산[通山] 인근의 구궁산(九宮山)에서 죽었다.
* 날짜 : 1645 | |
1645/05/15 | 청, 남경 함락 |
청, 남경 함락.
* 날짜 : 1645/05/15 | |
1645 | 마운더 극소기 |
1645년부터 1715년까지 흑점수가 확연하게 결핍된 시기를 말한다.
* 날짜 : 1645 ~ 1715 | |
1646 | 장헌충 사망 |
장헌충(張献忠)도 1646년 숙친왕(肅親王) 하오거[豪格, 1609~1648]가 이끄는 청군(清軍)과 쓰촨[四川] 지역에서 격렬히 맞서 싸웠지만, 결국 패배하여 봉황산(鳳凰山)에서 전사하였다.
* 날짜 : 1646 | |
1646/07 | 텡기스 반란 |
막남몽골 수니트부의 텡기스가 일으킨 반란 사건. 7월에 이르러 칼카 투시예트 칸이 2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텡기스를 지원함으로써 양측의 전투는 대규모로 확대되었지만, 결국 청군이 승리함으로써 칼카의 의도는 좌절되고, 이후 청-칼카 관계는 이 사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 날짜 : 1646/07 | |
1648 | 정지룡, 청에 투항 |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이듬해 난징이 함락되자 정지룡 가족은 푸저우에서 명의 황손인 당왕 주율건을 융무제로 옹립하고 복명 운동을 전개했다. 이와 함께 1647년에는 에도 막부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정지룡은 복명 운동을 포기하고 청나라와 내통하여 푸저우는 결국 청나라에 의해 함락되고, 융무제는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하지만 정성공은 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청에 저항하는 길을 택하였고, 1648년에 다시 에도 막부에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 날짜 : 1648 | |
1649 | 효종 재위 |
1649년 5월 부왕 인조가 죽자 즉위, 척신들과 서인 반정 공신들을 견제하면서 서인 산림 세력을 등용, 김집, 김상헌, 안방준 등과 그들의 문인들을 적극 발탁하였다. 이후 북벌론을 계획하였으며 김육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을 시행하였으나 재위 10년만에 과로로 의원의 진료를 받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 날짜 : 1649 ~ 1659 | |
1650 | 정성공, 남중국해 장악 |
1649년 아니면 1650년에, 정성공은 샤먼 항을 수륙양면으로 침략하여 점령했다. 이곳을 기반으로 이용하여 반란군들은 1년 안에 푸젠성에서 청나라 군대를 몰아냈다. 당분간 그의 권력기반은 확고했다. 정성공은 아버지의 활동무대를 다시 되찾았다. 그의 해적선단이 이 지역을 지배했고, 그의 무역 정크 선들은 멀리 일본까지 항해했다. 청나라 해군은 남중국해를 포기하면서, 10년 동안 정성공은 양쯔 강에서 메콩 강 델타까지 연안수역을 완전히 지배했다.
* 날짜 : 1650 ~ 1659 | |
1650/12/31 | 도르곤 사망 |
청년 시절부터 이복형 홍타이지를 따라 여러 전쟁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그 공으로 친왕에 책봉되었고 팔기군 중 정백기와 양백기를 관장하였다. 1643년(숭덕 8년) 홍타이지가 급사하자 조카이자 홍타이지의 장자 숙친왕 후거와 황위를 놓고 경쟁을 벌였으나 결국 어린 조카인 순치제를 대신 옥좌에 올리고 자신은 섭정왕이 되어 죽을 때까지 국사를 결정하고 대권을 행사하였다.
* 날짜 : 1650/12/31 | |
1652 | 청,송화강에서 러시아와 충돌 |
러시아는 근대식으로 바뀐 군대로 계속 청나라의 동북쪽을 침략하였고 일부는 북만주에 주둔하여 심지어는 근처에 살던 부족을 보드카로 유혹하여 그 부족의 거의 모든 장정들을 죽이고 아녀자들을 겁탈하기도 하였다. 강희제는 이에 분노하여 러시아에게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러시아는 그에게 선물을 보내고 통상 자유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가 계속 송화강까지 세력을 넓히려 하자, 강희제는 강경책을 써서 러시아의 국경 요새인 아르바진을 공격하였다.
* 날짜 : 1652 | |
1654 | 나선정벌(1) |
제1차 정벌 때인 1654년(효종 5년) 변급(邊岌)이 호통(好通)에서 러시아군을 무찔렀다.
* 날짜 : 1654 | |
1658 | 나선정벌(2) |
신류가 인솔한 것으로 알려진 1658년 원정에 대해서는, 파병에 응했다는 것 외에는 《조선왕조실록》 상에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 날짜 : 1658 | |
1659 | 정성공, 남경 공략 실패 |
당왕이 죽은 뒤 계왕(桂王:永明王) 영력제(永曆帝)로부터 위원후(威遠侯), 이어 장국공(漳國公)에 봉해졌다. 청(淸)나라는 그의 아버지를 통하여 회유하였으나 그는 이를 물리쳤다. 그후 영력제로부터 연평군왕(延平郡王), 이어 조왕(潮王)에 봉해졌다. 1658∼1659년 17만 5천 명의 병사와 대선단을 이끌고 양쯔 강을 거슬러 난징을 공략하는 일대결전을 벌였으나 청군에게 패하여 아모이로 철수하였다.
* 날짜 : 1659 | |
1659 | 오삼계, 윈난성 점령 |
오삼계는 1657년 평서대장군이 되어 명나라 계왕(桂王:永曆帝)을 추격하여 1659년 윈난성[雲南城]을 점령하였다. 1662년 미얀마에서 계왕을 붙잡아 평서친왕(平西親王)에 진봉(進封)되었다.
* 날짜 : 1659 | |
1659 | 현종 재위 |
현종(顯宗, 1641년 3월 14일 (음력 2월 4일) ~ 1674년 9월 17일 (음력 8월 18일), 재위: 1659년 ~ 1674년)은 조선의 제18대 임금이다.
* 날짜 : 1659 ~ 1674 | |
1659 | 기해예송 |
기해예송은 1659년 효종이 죽자 계모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을 중자에 따라 기년복(1년)으로 할 것인가 장남의 예로서 3년복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으로 시작되었다.
* 날짜 : 1659 | |
1661/02/17 | 청, 강희제 즉위 |
중국 역대 황조 중 마지막 태평성대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일으켜 아들인 옹정제(雍正帝), 손자인 건륭제(乾隆帝)까지 태평성대가 지속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자 명군, 즉 천고일제(千古一帝, 천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황제) 또는 연호를 따서 강희대제(康熙大帝)로 칭송받으며 아직도 많은 중국인에게 크게 존경받는다.
* 날짜 : 1661/02/17 | |
1662 | 남명 멸망 |
남명(南明)은 명나라가 공식적으로 멸망한 1644년 이후에 존속된 정권을 따로 일컫는 말로, 일명 남명정권이라고도 한다.
* 날짜 : 1662 | |
1662/02/01 | 정성공,타이완 정복 |
정성공은 청나라 군대와 9개월간의 싸움 끝에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던 타이완으로 쫓기게 되었다. 1661년 정성공은 타이완 섬을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을 공격하여 1662년 2월 1일 네덜란드 세력의 항복을 받아냈다. 네덜란드인들로부터 타이완 섬에서의 철수와 타이완 섬의 모든 권리 이양을 약속받은 정성공은 타이완 섬 역사상 최초로 한족 정권을 수립하였다.
* 날짜 : 1662/02/01 | |
1662/06/23 | 정성공 사망 |
타이완 점령 후 정성공은 원주민인 가오산 족(고산족)과의 융화 정책을 실시하며 내정을 정비하다가, 1662년 6월 23일 3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죽었다. 청나라는 타이완 정씨 왕국을 멸망시킨 후에도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정성공 일가의 충절을 인정, 정성공에게 시호를 내리는 등 예우하였다.
* 날짜 : 1662/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