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게시판

위만조선 ‘왕검성’ 요동반도설 제시한 정인성 영남대 교수

작성자
hsy6685
작성일
2018-03-12 22:10
조회
7217

"본격적인 고조선 연구 위한 문제제기"…고고학계 문헌사학계 토론 필요하다


“고고학적 견지에서 ‘왕검성 대동강북안설’은 지금으로서는 폐기해야 마땅하다.” “위만조선 왕검성은 오히려 요동반도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군현이 설치되면서 대동강 유역권으로 옮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위만조선과 왕검성은 (요동반도의) 성곽네크워크의 조사연구를 통해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낼 것으로 기대한다.”-정인성 영남대 교수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두고 역사학계가 정설로 받아들여왔던 ‘왕검성 대동강북안설’에 다시 새로운 반론이 제기됐다. 왕검성은 평양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고조선 종말까지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학설이다. 발신지는 문헌사학계가 아니라 고고학계였다. 지난달 11월 3일부터 이틀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제41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에서 정인성 영남대 교수가 제출한 학설이다. 정 교수는 도쿄대에서 일제강점기 평양 출토 낙랑 유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영남대박물관 관장을 겸하고 있다.

“강점기 일본인 연구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해방 후에도 연구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왕검성 후보지는 대동강 북안의 ‘평양성터’였다. 그런데 따져보면 그 근거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오로지 『史記』 朝鮮列傳의 기록에 의지하는데 한의 침략군이 왕검성을 공격하는 방향에서 나온 추정이었다. 아래의 기사가 그것이다.

좌장군이 패수 상군을 격파하고 전진하여 성 아래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도 또한 합세하여 성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끝내 성을 굳게 지키므로 몇 달이 되어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左將軍破浿水上軍乃前至城下囲其西北. 樓船亦往會居城南. 右渠遂堅守城數月未能下.)

수군이 남쪽에서 공격하고 좌장군이 성의 서북쪽을 포위할 수 있는 지형이라는 기술이 중요하다. 여기에 위만조선의 강역과 낙랑군, 조선현의 소재지가 동일하다는 이해가 더해졌다. 그 설명의 원류를 따라가면 北魏時代 역도원이 쓴 『水經注』에 이른다. 후대의 기록인 수경주임에도 연구자들은 평양을 낙랑군으로 인정하고 낙랑군 조선현을 왕검성과 등치시켰다. 이를 근거삼고 발굴성과를 더하여 일제강점기에 공고해진 <樂浪郡平壤說>에 더하여 <衛滿朝鮮(왕검성) 平壤說>마저 굳어졌다.

문제는 평양성에서 낙랑군 이전으로 소급되는 유구나 유물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평양성과 그 주변이 위만조선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도시로 점유되었던 까닭이라고 한다. 즉 평양성이 정식 발굴되면 그 아래에서 위만조선대의 유물이 쏟아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래로 평양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고고학적인 조사가 있었다. 이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사례가 없었는데 이번에 체계적으로 살핀 결과 고구려 이전으로 소급되는 자료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평양성 외에 대동강 북안에서 발견된 그 어떠한 성곽자료에서도 위만조선 병행기의 고고자료가 발견된 바 없다.

이러한 고고학적 상황을 의식하여 위만조선과 왕검성의 후보지를 대동강 남안에서 찾는 분위기도 있다. ‘낙랑토성’이 그것인데 아쉽게도 연대를 알 수 있는 화폐자료와 청동거울 등은 모두 낙랑군 병행기에 한정된다. 대동강 남안이라면 믿어 의심치 않었던 『사기』 조선전의 기록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문헌사료와 고고자료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불일치는 위만조선과 낙랑군을 동일한 지점이라 보는 전제를 바꾸지 않는 이상 해결할 수 없다.

한편, 문헌사료에서 드러나는 위만조선은 재지 조선인에 더해 연과 제 등지에서 이주한 주민들의 복합체이다. 그러나 대동강유역에서는 연과 제를 암시하는 고고학적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파형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 전개되는 고조선 특유의 청동기문화에 연국과 제국에서 이입된 문화요소가 어우러져 독특한 지역문화를 형성한 곳은 요동반도에서 구해지기 때문에 발상을 전환하여 위만조선과 왕검성의 후보지는 요동반도에서 구한다면 고고학적인 견지에서는 보다 정합성이 인정된다.”

......

 

※ 출처 :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0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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