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숭례문 (남대문) – 국보 제1호

※ 황성열의 세계 – 문화재 : http://yellow.kr/nt.jsp
※ 국보 제1호 / 서울 숭례문 (서울 崇禮門) / 1962년 12월 20일 지정 / 서울 중구  세종대로 40
조선시대 작품이다.

문화재청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 화재로 누각 2층 지붕이 붕괴되고 1층 지붕도 일부 소실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며, 5년 2개월에 걸친 복원공사 끝에 2013년 5월 4일 준공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ㅇ 숭례문 방화 화재(2008.2.10)
–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崇禮門放火事件)은 2008년 2월 10일 ~ 2월 11일 숭례문 건물이 방화로 타 무너진 사건이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오전 0시 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5분쯤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훼손되었다.

 

한양도성
– 한양도성 (출처 : http://love.seoul.go.kr/)

 

한양도성의 동서남북 주요 4대문은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문 이름에 담아 놓았다.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인(仁)’, 서쪽 돈의문(敦義門)은 ‘의(義)’, 남쪽 숭례문(崇禮門)은 ‘례(禮)’다. 그리고 북쪽 숙정문(肅靖門, 전 숙청문)은 ‘지’를 상징한다. 다만, 당시 백성이 지혜로워지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어려워진다며 ‘지(智)’자 대신에 ‘청(淸)’자를 넣었다고 한다.

 

국보 제1호인 숭례문에 대한 논란이 있다. 논란을 크게 3가지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1) 국보 제1호의 상징성에 적합한가의 문제
(2) 남대문인가 숭례문인가 이름에 대한 문제
(3) 2008년 화재로 인한 국보 취소

자세히 알아보자.

(1) 국보 제1호의 상징성

여기서 꼭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다. 국보나 보물이나 1호라고 하니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훌륭한 문화재이고 2호, 3호, 4호는 그다음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국보와 보물은 해당 순번에 따라 그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해당 순번은 그저 ‘편의상’ 붙인 것일 뿐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해당 국보와 보물에 이렇게 번호를 붙인 사람은 누굴까? 다름 아닌 일제다. 일제는 1933년 ‘조선 보물 · 고적 · 명승 · 천연기념물 보존령’이라는 법령에 따라 조선의 문화재를 조사해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등으로 나누어 지정 문화재로 정했다. 이때 일제가 지정한 보물 1호가 바로 숭례문이다. 그럼 숭례문은 원래 국보가 아니라 보물이었던 걸까? 여기엔 아픈 사연이 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을 자국의 식민지로 인식했기 때문에 일본의 국보가 곧 조선의 국보라며 국보라는 명칭을 부여하지 않았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문화재를 국보라고 부를 수 없는 설움을 톡톡히 겪어야 했다.

※ 조선총독부 고시 보물 목록

제1호  경성 남대문

제2호  경성 동대문

제3호  경성 보신각종

제4호  원각사지 다층석탑

제5호  원각사비

제6호  중초사 당간지주

제7호  중초사 3층석탑

제8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

문제는 일제가 1호, 2호를 남대문과 동대문을 지정한 의도가 문제인데, 지역별 편의상 일련 번호를 매긴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철거 위기에 놓였다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승전기념물이라 해서 살아남은 사실 등을 감안하면 순수하지 않은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적 1호’로 지정된 ‘경주 포석정’도 그런 의도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해방이 되면서 비로소 우리 문화재를 국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일제가 지정한 보물 목록은 그대로 이어져 1955년 정부는 일제가 지정한 보물 중 북한에 있는 걸 제외한 나머지를 국보로 바꾸고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면서 국보를 다시 국보와 보물로 나누었다.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과정에서 일제가 정한 보물 1호인 숭례문을 그대로 국보 1호로 해야 하느냐, 국보 1호를 재지정해야 한다는 거센 논란이 일었다. 국보 1호 재지정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국보 1호 후보로 석굴암, 훈민정음, 팔만대장경 등을 내세우며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이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번호는 가치 순이 아니며 국보 1호를 재지정하면 엄청난 혼란이 발생할 거란 이유였다.
국민 여론 조사에 붙여진 이 논란은 결국 국보 1호를 그대로 두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2005년 감사원이 문화재청에 국보1호 교체를 권고했을 때도 문화재위원회가 반대해 교체를 하지 못했다. 당시 유홍준 문화재 청장은 국보1호 변경에 찬성했다. 그렇지만 문화재위원회에서는 “국보 제1호의 번호는 문화재의 가치순서가 아닌 단순한 관리번호”이며, “문화재의 가치에 우열을 매긴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점” 그리고 “교체 시에는 국내외의 각종 문헌자료를 수정해야 하는 등 혼란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당시 문화재위원장을 맡았던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국보 1호는 문화유산의 중요성이 아니라, 서울.경기 지역부터 차례대로 지정해온 원칙(관례)에 따라 된 것”이라며 “국보 1호를 교체할 경우 초래할 사회적 혼란도 고려해 당시 지위 유지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2) 남대문인가? 숭례문인가?

숭례문은 그동안 ‘남대문’으로 불리다가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명칭을 ‘숭례문’으로 바꾸었다. 본래의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그런데 항간에는 남대문이 일제가 붙인 호칭이기 때문에 바꿨다는 잘못된 상식이 널리 유포되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제는 1933년 ‘조선 보물 · 고적 · 명승 · 천연기념물 보존령’을 공포하고 조선의 문화재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이듬해 숭례문은 ‘남대문’이라는 이름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때문에 마치 일제가 숭례문을 남대문이라 격하해 부르기 시작했고, 따라서 남대문이란 이름이 일제의 잔재인 것처럼 오해하게 된 것이다.
남대문이라는 명칭은 일제의 잔재가 아니다. 처음 지어질 당시부터 흔히 사용되던 명칭이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남대문이란 명칭이 수없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태조실록』에서부터 남대문이란 명칭이 등장하고 있다. 『태조실록』에는 “숭례문은 속칭 남대문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아예 숭례문 대신 남대문으로 쓰고 있는 곳도 있다. 따라서 남대문이라는 명칭이 일제의 잔재라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북경성의 전문이 정식명칭이라할 수 있는 정양문으로 불리지 않고 공식적인 버스 노선도나 지하철역 이름에서조차 전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3) 2008년 화재로 인한 국보 지정해제 논란

숭례문은 2008년의 화재로 88% 이상 소실됐다. 그래서 국보 해제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으나 문화재청은 국보 1호 유지를 결정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당시 문화재위원회에서 2층은 불에 탔지만 1층은 상당부분이 원형대로 남아있고 성벽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므로 화재가 났다고 해서 국보지위를 유지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2008년 화재시 2층 누각 일부분만 화재로 소실되었고, 1층 누각 및 성문육축 등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문화재위원회 심의결과  국보지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의결되어 현재까지 국보 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습니다. 이는 서울 숭례문의 국보지정이 누각건물의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뿐만 아니라 성벽, 성문 등의 문화재적 가치를 포함하여 함께 지정되었으므로, 2층 누각 일부가 화재로 소실된 경우라도 전체적인 문화재적 가치는 변함이 없다는 취지입니다.

그러나 당시 많은 문화재 전문가들 또한 누각이 대부분 불타버렸기 때문에 조선시대 건축물로서의 가치는 이미 잃어버렸다는 의견이 있었다.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새로 지은 건물은 문화재로서 가치가 매우 낮다.”고 말하였으며, 서정호 교수(공주대 문화재보존과학과) 역시 “석축이 남아있긴 하지만 숭례문의 핵심은 누각”이라며 “복원에 사용할 수 있는 부재가 거의 없어 보인다.”라고 말했다.
건축사가이자 대목수인 신영훈 선생도 ‘숭례문 복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복원(復元·復原)’이란 당치도 않은 말이다. 원래 우리말도 아니고 일본말일 뿐더러, 어떻게 우리가 조선 초에 만들었던 그 건물을 원형대로 되돌릴 수 있겠는가? 새로 숭례문을 짓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은 ‘중건(重建)’이라 표현해야 한다. 그렇게 다시 짓는다고 해도 그것은 21세기의 건물이다. 국보 1호 지정도 해제해야 한다. 일부 부서진 걸 수리했던 1960년대의 ‘중수’와는 상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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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중앙부에 홍예문(虹蜺門)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女墻)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夾門)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外周) 바닥에는 판석(板石)을 깔았다.

조선시대에는 매일 밤 인정(10시 무렵)에 문을 닫았다가 다음 날 아침 파루(4시 무렵)에 문을 열었는데, 이때 문루에 종을 달아 그 시간을 알렸다. 장마나 가뭄이 심할 때는 임금이 몸소 기청제와 기우제를 지내는 등 숭례문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거행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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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축 위에 세워진 중층 누각은 장식이 간결하고 내부 구조가 견실하여 조선 초기의 건축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는 좌우 성곽이 철거되었으며, 한국전쟁 때 피해를 입어 1961년부터 1963년 사이에 해체보수를 하였다. 2008년 2월 10일 방화 사건으로 크게 훼손되어 2013년 4월까지 복구하였으며, 이때 좌우 성곽도 함께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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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8월의 모습과 아래의 비슷한 위치의 2004년 8월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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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위치와 비슷한 곳에서 2004년 8월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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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축기단 윗면에는 전돌로 쌓은 여장(女墻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돌리고 동서 양쪽에 협문을 한 개씩 두어 계단을 통하여 오르내릴 수 있게 하였으며, 문의 앞뒤 여장 밑에는 석루조(石漏槽)를 4개씩 설치하였다. 기단의 양측에는 원래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 길을 내기 위하여 헐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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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현판의 경우 남쪽에 있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불로 다스리기 위해 다른 문과 다르게 세로로 쓰도록 했다. 숭(崇)자는 불꽃이 위로 타오르는 듯한 모양이고, 례(禮)자는 오행으로 화(火)이며 방위로는 남쪽을 가리킨다. 가로로 하면 불이 잘 타지 않기에 세로로 세워 불이 잘 타도록 비보(裨補)를 쓴 것이다.

숭례문 현판 글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오랜 논쟁거리다. 태종의 큰아들로 한때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썼다는 설이 유력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양녕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척했다. 지금 남대문의 숭례문 석자는 그가 쓴 글씨”라고 했다. 한편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숭례문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했다. 정난종(1433~1489)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서예에 뛰어나 비석이나 종에 글을 새겼다. 추사 김정희는 ‘완당 전집’에서 “지금 숭례문 편액은 신장의 글씨”라고 적었다. 신장(1382~1433)은 대제학을 지냈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장중하면서도 단아한 서체로 이름을 날린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썼다는 설도 있으나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 1929년 9월호는 “안평대군의 글씨는 오해요, 중종 때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고 기록했다.

옛 기록의 서술이 엇갈리는 것은 태조 7년(1398년) 준공된 숭례문이 크고 작은 화재로 손상되면서 세종 30년(1448년) 개축과 성종 10년(1479년) 중수를 거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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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때의 모습

 


– 다시보는 숭례문 600년 역사 (문화재청)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문화재청 : 서울 숭례문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서울 숭례문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서울 숭례문
위키 백과 : 숭례문
네이버 지식백과 : 숭례문은 처음부터 국보 1호였다?
한국사 콘서트 (백유선 / 두리미디어)
보통남녀 교양인문학 (김숙영 / 플럼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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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4  [Why뉴스] “복원된 ‘숭례문’ 국보 1호 맞나?” … 교체논란
2008-02-17  “숭례문에 담긴 지혜 안다면, 복원 함부로 얘기 말아야”

서울 숭례문 (남대문) – 국보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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