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왕조(Xia dynasty, 대략 기원전 2070 – 1600년)는 논란이 있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이다. 하 왕조의 근거는 죽서기년, 서경(書經), 사기(史記) 등의 기록과 하 왕조의 유적지로 추정되는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 이리두 문화, 허난성 옌스시) 유적과의 연관성에 대한 고고학적 성과이다. 하 당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헌자료는 없다. 물론 아직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학자들도 많다.
하나라의 연대는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에 의해 기원전 2070년경에서 기원전 1600년까지로 추정한다. 하상주단대공정은 중국 고대 하(夏), 상(商), 주(周) 시대의 연표(年表)를 정리하기 위한 연대학(年代學) 연구 사업으로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진행되었다. 1996년 5월 16일에 시작되어 역사학, 고고학, 천문학,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200여명의 학자들이 참여하였고, 2000년 11월 10일, 하(夏), 상(商), 주(周) 삼대(三代)의 연대(年代)를 확정(確定)해 공표(公表)하였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2000
중국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기원전 1세기에 펴낸 『사기』에서 기원전 841년 이전의 연대에 대해서는 알 방법이 없음을 천명한 바 있다. 하상주단대공정에서도 중국의 최초 왕조들인 하나라와 상나라 전기, 즉 기원전 1300년 이전의 연대는 정확한 파악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 대략적 틀만을 설정하고 있을 뿐이다.
하에 대한 기록은 훨씬 더 후대의 것이다. 하의 뒤를 이은 상 시대에 관한 기록으로는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이라는 최고 등급의 자료가 있다. 그런데 은허의 갑골문 중에 하 왕조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다.
상(商) 왕조가 실재했었다는 것은 증명이 되었지만, 하 왕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하나라의 실재성을 확실히 보장하는 고고학상의 발견이 없고 전설상의 왕조로 여겼지만 사기史記 등의 중국의 많은 고대 사서에 등장하고, 얼리터우 문화를 하나라의 유산이라고 여겨 실존했다고 보기도 한다. 탄소 14연대 측정법에 의해 허난성 옌스 시 얼리터우 촌의 얼리터우 유적이나 허난성 신미 시의 신자이 유적 등에 흔적이 있는 얼리터우 문화가 하나라의 연대와 거의 일치한다.
기원전 2000년대 초반은 신석기 문화인 룽산 문화(龍山文化)의 말기에 해당되는데, 기후 변화로 추측되는 원인으로 인구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급격히 감소했으며, 룽산 문화 중심지의 대부분은 버려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청동기 문화인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의 중심지로 볼 수 있는 허난성河南省의 이뤄 분지로 인구와 사회적 복잡성이 급격히 증가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이전의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통합되고 정치적으로 집권화된 새로운 사회, 즉 국가의 출현을 의미한다. (외부 선진 문명의 전래 가능성은?)
※ 4200년전 기후변화 사건 : http://yellow.kr/blog/?p=716
얼리터우 유적의 상층(上層)에서는 궁전(宮殿)의 터를 포함해 고대 도시(都市)의 유적(遺蹟)이 발굴되어 초기 왕조국가(王朝國家)의 성립을 보여준다. 이는 중국에서 가장 오랜 궁전(宮殿) 건축 유적이며 하(夏) 왕조나 상(商) 왕조 초기(初期)의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얼리터우 문화는 중국의 청동기 문화와 고대 국가의 형성 과정을 탐구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하(夏)의 존재와 문화를 밝히는 데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사마천의 『사기(史記)』「하본기(夏本記)」에 의하면, 하왕조(夏王朝)의 시조 우왕(禹王)은 기원전 2070년 왕조를 개국하여, 황허강[黃河]의 홍수를 다스리는 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그 공으로 순(舜)이 죽은 뒤, 제후의 추대를 받아 천자가 되었다. 우는 제위를 민간의 현자에게 양여하려고 하였으나, 제후는 우의 아들 계(啓)를 추대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선양제(禪讓制)가 없어지고 상속제(相續制)에 의한 최초의 왕조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 4000년 전 중국 대홍수 유적 찾았다! : http://www.dongascience.com/news.php?idx=13335
고대 문명의 이해
– 브라이언 페이건, 크리스토퍼 스카레 / 이청규 역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5.03.16
중국 초기 역사를 당대에 기록한 자료는 서기전 2세기에 시작된 한의 시대 이전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대부분 비단, 대나무 또는 나무와 같이 부패하기 쉬운 재료에 기록되었던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이다. 또 다른 하나는 중국의 첫 번째 황제 진시황제가 재상 이사(李斯)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출신 지역인 진(秦)과 관련된 것을 제외한 모든 역사적 문서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의 시대(BC 206 ~ AD 220)를 연구하는 중국인 학자가 중국 역사의 주요 사건을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추적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자료가 전해진다. 그들이 연구하는 틀은 서기전 256년에 진시황제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하(夏), 상(商) 그리고 주(周) 세 개의 연속된 주요 왕조를 토대로 한다.
“이(伊, 하 왕조의 건국공신)가 도산(塗山)에서 영주들을 책봉할 때, 옥과 비단을 가져온 국가가 1만 개였다. (상 왕조의) 성탕(成湯)이 통치권을 물려받았을 때, 3천 개 이상의 국가가 남아 있었다. (주 왕조의) 무왕(武王)이 군대를 살펴볼 때, 1,800개의 국가가 있었다(장광직, 1986).” 이를 통하여 역사학자 고조우(顧祖禹)는 17세기에 쓴 저술에서, 한 왕조가 다른 왕조를 대체하면서 왕실 권력이 강화되는 것으로, 초기 중국의 역사 과정을 요약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이 단계적으로 단일한 지배가문 아래 통일되었다는 것이다.
……
전통적인 중국의 역사 이야기는 어렴풋한 신화상의 지배자- 공통의 조상 복희伏羲, 곡식의 최초 재배자 신농神農, 불의 발명자 축융(祝融)-에서 시작한다. 신화상에서 동등한 다섯 명의 황제는 세 왕조 중 첫 번째인 하에서 진정한 의미의 중국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등장한다. 세 왕조의 순서에서 하가 상에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하 왕조가 통치하였는지는 아직 의문으로 남아 있다. 후대에 기록된 천문 관측 자료를 보면, 하 왕조의 네 번째 왕인 중강(仲康)의 재위기간에 발생하였다는 일식을 통하여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미국 역사학자 처우홍샹(周鴻翔)과 천문학자 케빈 팡(Kevin Pang)은 만약 이 관측이 정확하다면 문제가 되는 일식은 서기전 1876년에 일어났다고 계산하였다. 역사기록상의 하와 관련된 장소의 명칭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그 위치는 황허의 중류에 있는 지금의 허난(河南) 지역이라고 한다.
허난은 룽산 문화 지역의 중심에 있으며, 따라서 첫 번째 국가가 나타나기에 논리적으로 완벽한 장소이다.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문화적 발전과 관련하여, 1957년 얼리터우(二里頭) 유적이 발견되면서 이 지역의 중요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얼리터우 지역은 중국 청동기시대의 상당히 이른 시기에 속하는 주요 중심지이다.
여기에서 이해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편년과 용어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얼리터우 시기의 유적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측증 결과는 서기전 2000년 직전에서 서기전 1750년경까지이다. 이는 서기전 1000년기 상나라 말기에 이르는 중국 청동기시대의 첫 단계에 해당한다. 고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얼리터우 시기는 얼리강(二里岡) 시기를 거쳐 안양 시기로 이어진다. 어떤 저술가는 상을 머리글자로 하여 세 시기를 합쳐, 얼리터우는 상 전기, 얼리강은 상 중기 그리고 안양은 상 후기로 표현한다. 이것이 편리한 고고학적 분류이기는 하나, 얼리터우는 어렴풋한 하 왕조의 수도일 가능성이 있어 역사적으로 맞지 않는다. 다음 시기는 서기전 18세기경 하를 멸망시킨 보다 유명한 상 왕조이다. 그러나 청동제기의 장식 같은 문화 양식의 관점에서는 하와 상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이라는 이름은 역사적 왕조와 고고학적 문화 모두에 사용될 수 있는데, 얼리터우 시기의 청동기는 이미 양식적 측면에서 상의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와 상 왕조는 단일한 상 문화의 두 부분일 뿐이며, 서기전 2000년에 시작하여 서기전 1027년 주 왕조에 의해 상이 멸망하면서 끝난다. 그러므로 하와 상 왕조 간의 역사적 구별은 미루어 두고, 서기전 2000~1027년 기간을 고고학적 단일 시기, 즉 상으로 본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 이언 모리스 / 최파일 역 / 글항아리 / 2013.05.27
한 공동체가 다른 경쟁상대를 모두 제치고, 공동체 지배자들의 무력에 의지해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고 신민으로부터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국가로 변모한 이런 순간을 동양에서의 우루크의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한 공동체는 기원전 1900년과 기원전 1700년 사이에 주민 2만 5000명이 거주하는 진정한 도시로 폭발적으로 성장한 얼리터우였다. 많은 중국의 고고학자는 얼리터우가 성군 우왕이 건립했다는 하나라의 수도라고 믿는다. 그러나 비중국계 고고학자들은 하나라에 대한 문헌상의 언급이 얼리터우가 버려지고 1000년이 지난 뒤에야 등장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전체적으로 중국 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라가 – 우왕과 더불어 – 허구일 가능성을 주장한다. 이런 비판가들은 중국 학자들이 좋게 말해서는 신화를 쉽게 믿어버린다고, 나쁘게 말해서는 중국 문명의 기원을 최대한 멀리까지 잡음으로써 현대 중국의 국가 정체성을 강화하고 중국 정부의 프로파간다 역활을 한다고 비판한다. 으레 그렇듯이 이런 논쟁은 꼴사나워진다.
이 논쟁은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는 문제들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나로 말하자면, 우왕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 민간전승이라 하더라도 하나라가 실제로 존재했고 얼리터우가 그 수도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 부분에서 살펴보겠지만 우리가 후대 중국 역사가들의 이야기가 정확한지 확인할 때마다 그들이 이름들을 제법 정확하게 전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우왕과 하나라에 관한 기록들이 없는 이야기를 완전히 지어낸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
이 대단한 제기들은 얼리터우에서만 발견되었다. 국왕은 이승과 초자연적 세계의 중개자라는 주장으로부터 왕권이 유래했다는 장광즈의 주장이 맞는다면 청동 제기들은 아마도 얼리터우의 권력에서 청동검만큼 중요했을 것이다. 얼리터우의 국왕은 가장 소리가 큰 확성기를 갖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곽의 군주들은 신령들이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사람과 협력하는 편이 일리 있다고 결론 내렸을지도 모른다.
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 심재훈 / 푸른역사 / 2016.08.09
역사상 존재한 한 정치체나 나라의 존재 여부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신빙성 있는 문헌 증거로 입증되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 둘째, 고고학적으로 입증되는 실체일 텐데, 최소한 그 중심지로 추정될 만한 성곽이나 묘지 등의 존재가 적절한 편년(編年)과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
중국 최초의 왕조로 알려진 전설상의 하夏나라와 그 유적지로 추정되는 기원전 얼리터우二里頭 유적과의 연관성은 그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사기史記』 같은 전래문헌은 얼리터우가 있는 바로 그 지역에 하나라의 도읍이 있었음을 전한다. 더욱이 1970년대 이래 축적된 얼리터우의 고고학 성과 덕분에 청동기문화에 토대를 둔 상당히 거대한 그 도시 유적을 하의 중심지로 보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이처럼 문헌과 고고학적 증거를 구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얼리터우’의 등식이 인정되기까지 상당한 세월이 걸렸고 아직 이를 선뜻 인정하지 않는 중국학자들도 많다.
……
그러나 일단 요 임금은 중국 전설상 시조 중의 하나로 중국 학계에서도 그 실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중국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기원전 1세기에 펴낸 『사기』에서 기원전 841년 이전의 연대에 대해서는 알 방법이 없음을 천명한 바 있다. 최근 중국에서 사마천이 포기했던 고대의 연대 체계를 세우려고 추진한 대형 학술 프로젝트인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에서도 요의 시대는 논의의 대상에조차 포함되지 않고 있다.
더욱이 이 프로젝트에서 중국의 최초 왕조들인 하나라와 상나라 전기, 즉 기원전 1300년 이전의 연대는 정확한 파악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 대략적 틀만을 설정하고 있을 뿐이다.
……
그러나 일부 고고학적 문화 요소의 유사성을 토대로 특정 집단을 규정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하나의 고고학 문화를 여러 종족이 공유한 경우가 허다할뿐더러 같은 종족이라도 다른 양식의 문화를 발전시킨 사례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중국 고대국가의 형성
– Li Liu, Xingcan Chen / 심재훈 역 / 학연문화사 / 2006.02.04
신석기 후기 룽산龍山문화가 얼리터우 문화로 발전했을 때 취락형태와 물질문화에서 다음의 몇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다.
……
(2) 지역 정치구조가 다수의 상쟁하는 소규모 정치체가 병존하던 양식에서 하나의 거대 중심지가 광범위한 지역의 소규모 중심지와 촌락들을 지배하는 양식으로 바뀌었다.
……
(4) 하남용산河南龍山 문화에 최소한 6개 유형이 존재할 정도로 다양하던 도기의 유형이 얼리터우 문화에서는 얼리터우와 동샤펑 두 종류로 분류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균일해졌다. 이는 정치적 일체화와 관련된 수공업 생산의 전문화와 표준화를 암시한다.
(5) 신석기시대에 높은 사회신분을 상징하던 옥기나 백도(白陶)같은 섬세한 도기 이외에 주로 무기나 예기로 사용된 청동기가 최초로 신분 상징이 되었다. 대체로 얼리터우 지역에 기반을 둔 청동기 생산은 군사나 제사에서의 이용 같이 국가의 사무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던 것 같다.
(6) 사치품의 장거리 교역이 새로운 수준으로 발전
……
(7) 가장 중요한 변화로, 얼리터우 유적지 자체가 고도로 계층 분화된 도시 중심지로 발전했다. 이러한 발전은 무덤에 반영된 뚜렷한 빈부격차와 거대한 종묘/궁전구의 건설, 청동기나 골기, 질그릇 제조를 포함한 다양한 전문화된 수공업에 조상하던 인구의 집중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
얼리터우 시기에 최초로 전체 사회체계에 걸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변화는 이전의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통합되고 정치적으로 집권화된 새로운 사회, 즉 국가의 출현을 의미한다.
이 연구에서의 국가는 전문적 통치 계급과 평민 계급의 최소한 두 층으로 이루어진 사회로 정의할 수 있다. 통치 계급은 집권화된 의사결정 과정을 장악했는데 전문화된 조직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이러한 결정을 실행했다. 나아가 국가 수준의 사회조직은 보통 3등급이나 그 이상 수준의 행정 구조를 암시하는 4등급 혹은 그 이상으로 계급 분화된 지역 취락을 발전시킨다.
……
얼리터우 시대의 가장 눈에 띄는 특성은 주변 지역들로 얼리터우문화의 급속한 팽창과 정치적 중심부의 사회 체계 내에서 계층화의 확산이었다.
……
얼리터우 시기 동안 최고 중심지에서 일어난 정치적 중앙집권화의 근거로 다음의 몇 가지 특징을 들 수 있다 : 도시 인구의 급격한 증가, 궁전구의 건축, 계층화된 매장의 제도화, 다양한 수공업 생산품의 발전, 청동예기의 제조에 국가가 통제하는 전문성의 출현.
얼리터우가 Ⅲ기에 1만8천에서 3만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인구를 구비한 중심 도시로 발전했을 때, 도시의 주민들은 대체로 건축 공사와 수공업에 종사했을 것이다. 얼리터우 주변 이뤄 지역 곳곳의 농민들이 이들의 생계를 지원했을 것이다.
……
얼리터우문화는 최소한 Ⅱ기와 Ⅲ기의 중심부 발전에 관한 한 2장에서 정의된 국가 수준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는 중국의 최초의 정치적 실재이다.
첫 번째 기준인 뚜렷한 사회 계층화는 매장의 차이뿐만 아니라 얼리터우에서 나타나는 부장품이 풍부한 귀족 무덤과 부장품이 없이 재구덩이에 매장된 유골, 궁전구의 인간 희생제물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두 번째 기준, 즉 중앙집권화와 전문화가 이루어진 정부 역시 몇몇 다른 유형의 항토식 건축 토대 십 수처를 포함한 얼리터우 중심부 궁전구의 발전을 통해 입증된다. 궁전구의 거대한 규모와 유적지 중앙에의 위치는 고도의 정치적 제사적 지배의 일단을 보여준다. 궁전 건축들의 다양한 규모와 형태는 정부 행정과 관련된 다양한 통제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세 번째 기준인 4등급의 분화된 취락 구조 역시 앞에서 언급한 이뤄 지역의 조사 결과로 확인되었다.
중화문명 독본
– 류둥 / 구린 역 / 토담미디어 / 2014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은 하조 초기부터 채광하고 동기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고학의 발견에 따르면 얼리터우문화는 이미 청동기 시대에 들어선 것으로 확정 지을 수 있다. 그 유지는 허난 옌스현 서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1959년 이래 삼십여년 간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미 두 곳의 대형 궁전 유지, 대면적의 거주지, 요지(기물을 굽기 위한 가마 유적), 주동 유지 및 각종 묘지를 발굴해내어 대량의 도기, 청동기, 옥석기 등 유물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현재 학술계에서는 이 문화에 대한 인식에 아직도 의견이 불일치하다. 일부 사람들은 이 문화가 바로 하조문화라고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조기는 하조 문화였지만 후에 나타난 대형 궁전 유지는 상나라의 수도인 서박의 유적지이므로 상문화라고 주장한다. 유지에서 발굴한 숯 표본은 탄소14측정에 따르면 그 년도는 약 BC 1900년부터 BC 1500년 사이이다.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 진순신 / 전선영 역 / 살림 / 2011.07.29
세습 왕조인 ‘하(夏)의 시조는 우(禹)다.
『사기』의 「하본기」에 따르면, 우에게 세습 왕조를 세울 의사는 없었다고 한다. 자신을 보좌해준 익(益)이라는 사람에게 천하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우가 죽고 삼년상이 끝나자, 익은 제위를 우의 아들인 계(啓)에게 양보하고 기산(箕山)에서 은거했다고 되어 있다. 계는 현인(賢人)이었기에 천하의 인망을 얻었다고 한다.
뜻밖의 행운이 찾아오듯 세습을 한 것이 아니라 계 자신이 현명하고, 유능했기에 실력으로 제위에 오른 형국이다.
우는 성자이기 때문에 대동(大同)의 세계를 소강(小康)의 세계로 만든 장본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도 선양의 전통을 지킨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하의 우’라는 호칭은 없었다. 계는 하의 계, 혹은 하후(夏后)라 불렀지만 우는 제우(帝禹) 또는 대우(大禹)라고 불렸을 뿐이다. 우가 하 왕조와 연관 지어진 것은 전국 시대 이후의 일이다. 의고파 사가 중에는, 우는 하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
우는 요 · 순과 함께 유가의 성왕이다. 동시에 근대의 사가들에 의해서 이 세 성왕은 실재하지 않았던 환상의 성왕이라고 단정하기도 한다. 일본의 역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 庫吉, 1865~1942)는, 세 성왕의 전설은 삼재(三才) 사상이 가미된 것이라는 사실을 논증하고, 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삼재 사상이란 천 · 지 · 인 삼항(三項)을 세우고, 모든 것을 각각의 속성에 따라서 그 세 개 중 어딘가에 대입시키려는 사상이다. ‘재(才)’는 ‘작용’을 의미한다.
……
틀림없이 세 왕은 천 · 지 · 인, 삼재에 부합된다. 삼재 사상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허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설은 한학자인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 1854~1922) 등이 반론을 제기하여, 1910년 전후에 학계에서 활발하게 논쟁되었다. 시라토리 박사의 중국고대사 비판은 세 왕을 부정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하와 은의 역사라고 오늘날까지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은 모두 만들어진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을 실제 역사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은의 역사를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은 왕조의 실재를 의심하는 것이 당시에는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은 시대의 유적에서 복편(卜片)이 출토되어 자주 발굴을 하게 되었는데, 1932년에서 1934년 사이에 행해졌던 발굴에서는 은의 궁묘(宮廟)와 능묘(陵墓)도 발견되었다. 대량으로 출토된 갑골문자에 의해서 그것이 기록으로 전해진 것 – 예를 들어서 사마천의 『사기』의 「은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갑골문자에 대해서 하야시 다이스케는 당장 달려들어 연구를 시작했으나,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그다지 강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로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은 왕조가 실재했었다는 점은 증명이 되었지만, 하 왕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왕도(王都)나 왕릉으로 보이는 것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뒷받침해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실재를 증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하 왕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증명할 수가 없다.
……
앙소의 채도는 물고기 등의 무늬를 그릇의 표면에 많이 그려 넣었지만 용산의 흑도를 제작한 사람들은 표면의 장식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안정되고 아름다운 모양을 만드는 데에만 전념했다. 여러 가지 모양이 있으며, 앙소에서는 그다지 볼 수 없었던 세 발 달린 ‘정(鼎)’을 많이 볼 수 있다.
……
…… ‘하허(夏墟)’로 보이는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하 왕조가 실재했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증명을 할 수가 없다.
하는 여러 번에 걸쳐서 수도를 옮겼다. 만약 하허가 발견된다면 역시 낙양 근처가 될 것이다. 하 왕조의 마지막 왕인 걸(傑)은 낙양을 서울로 삼고 있었다. 시조인 우는 숭산(嵩山) 부근을 본거지로 삼고 있었으니, 하남성 등봉현(登封縣)도 후보지 중 하나다. 우의 아들인 계는 제후들을 균대(均臺)로 불러 모아 커다란 잔치를 열었는데, 그것은 등봉현의 동남쪽에 있는 우현(禹縣)에 해당한다. 계는 하남 땅을 버리고 황하의 북쪽 , 분수(汾水) 유역의 대하(大夏)로 옮겼다. 산서성 안읍현(安邑縣)에서 하현(夏縣)에 걸친 지역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일 뿐, 하 왕조의 존재조차 의심을 받고 있을 정도이니 분명한 것은 물론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하허’가 발견될 가능성은 상당히 높지 않을까?
낙양에서 정주(鄭州)에 걸친, 이른바 중원의 정중앙 부근에 위치한 은대 유적의 아래층에서 발견되는 문화층을 하나라 때의 것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낙달묘(洛達廟)와 언사이리두(偃師二里頭)의 유적 등이다. 궁전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대저택의 흔적으로 보이는 것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도 있다. 빈부의 차가 더욱 커진 듯하다. 조그만 청동공구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76년, 고고공작대(考古工作隊)가 산서성 하현 동하풍(東下馮)이라는 곳에서 고대 성보(城堡)의 유적을 발견했다. 방사성탄소 측정치는 3635년(±11년)이다.
『사기』는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의거하여, 하는 우에서 걸까지 472년 동안이었다고 했다.
우를 제외하면 16제(帝) 13대다. 시기는 기원전 21세기에서 기원전 16세기에 걸쳐서이니, 앞에서 이야기한 동하풍의 성보가 그 기간에 들어간다. 동하풍에서는 소량이지만 청동기와 함께 돌로 된 거푸집도 출토되었다.
하허에 한 걸음 더 다가선 것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
지금부터 4천 년이나 전인, 문자가 아직 없었던 시대의 일이다. 우리는 얼마 되지 않는 자료, 그것도 정확도를 보장할 수 없는 자료를 근거로 추측을 해볼 수밖에 없다. 하에 대한 기록은 훨씬 더 후대의 것이다. 하의 뒤를 이은 은 시대에 관한 기록으로는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이라는 최고 등급의 자료가 있다. 은허의 갑골문 중에 하 왕조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다는 점이 약간 마음에 걸린다.
<관련 그림>
– 얼리터우 문화 지역의 위치
– 얼리터우 궁전
– 얼리터우 궁전 복원도
– 얼리터우 청동 작(爵, jue). 작(jue)은 고대 중국 청동기의 한 기형으로 술을 데워서 따르는 기구이다.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네이버 지식백과(중국사) : 하 왕조의 건국과 멸망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하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얼리터우 문화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죽서기년
네이버 지식백과(실크로드 사전) : 문명이동론
네이버 지식백과(실크로드 사전) : 중국문명 서방기원설
위키백과 : 하나라
위키백과 : 얼리터우 문화
https://en.wikipedia.org/wiki/Longshan_culture
https://en.wikipedia.org/wiki/4.2_kiloyear_event